자정, 차준호는 손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거울을 마주했을 때 얼굴은 여전히 낯설었다. 루프 10회차. 손가락은 여섯 개였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지워졌으니까. 자정마다 깨어나고, 자정마다 뭔가가 없어졌다. 손가락, 기억,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 아파트 거실은 침묵했다. 경찰이 나간 지 몇 시간. 아니, 루프마다 다르니까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 차준호는 받았다.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었습니다."
음성 변조기를 거친 목소리였다. 차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 처음엔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부분이 조작되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서연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음성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날 밤 손에 피를 들고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피는 서연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경찰의 혈액 검사 결과를 봤으니까."
차준호의 손이 떨렸다. 맞다. B형 혈액. 그리고 불명의 화학 물질. 서연은 O형이었다. 차준호는 AB형이었다. 그럼 이 피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왜 자신의 손에 있었는가.
"경찰에 자수하세요. 당신은 무죄입니다."
통화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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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심문실.
이준혁 반장의 얼굴은 피곤했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그는 같은 표정을 했다. 차준호를 바라보는 눈은 의심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준호가 먼저 말했다.
이준혁은 웃음을 흘렸다. "기억이 조작된다고? 그게 무슨..."
"혈액 검사 결과를 다시 보세요. 내 손의 피는 서연의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의 피인가? 그리고 왜 내 손에 있었는가? 내 기억에는 있습니다. 서연이 죽는 장면이. 하지만 그 기억이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준혁은 책상을 내려찍었다. "당신은 증인들의 기억을 조작했습니다. CCTV 영상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제 능력 때문입니다."
차준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손은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능력?"
"특정 인물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24시간 동안.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제 기억 1시간씩이 지워집니다. 루프 10회차인 지금, 저는 10시간의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 10시간 동안 뭐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준혁은 침묵했다. 심문실의 불빛이 차준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낡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그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게 진짜라면... 당신도 조작의 피해자라는 뜻입니다."
"네."
"그럼 누가 당신의 기억을 조작했습니까?"
차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그 답은 더 멀어졌다.
이준혁은 심문실을 나갔다. 30분 뒤, 그는 돌아왔다.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혈액 재검사를 했습니다. 당신의 손에 묻은 피는 제3자의 것입니다. 서연 아무개도 아니고, 당신도 아닙니다. 우리는 DNA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했습니다. 일치합니다."
"누구?"
"박준성. 서연의 전 남자친구입니다. 그는 서연에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서연이 사귀면서 그는 서연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를 흘렸고, 그 피가 당신의 아파트에 뿌려졌습니다."
차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서연은?"
"살아있습니다. 지금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박준성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숨겼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아파트에서 혈액이 발견되자, 경찰에 신고했고, 우리가 보호하게 된 것입니다."
차준호는 일어섰다. 자신의 다리가 움직였는지 확인해야 했다. 움직였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주먹을 쥘 때 아파왔다.
"내가... 살인자가 아니었단 건가?"
"당신은 무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이준혁의 목소리는 낮았다.
"당신이 조작한 기억들이 박준성을 더 깊은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당신의 거짓 증거가 없었다면, 그는 더 가벼운 죄로 처벌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서연 감금, 폭력, 그리고 혐의 조작까지 더해져 중죄로 기소됩니다."
"제 능력 때문에?"
"당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 때문입니다."
심문실의 불빛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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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계단.
심문실을 나온 지 10분 만에 이준혁이 따라왔다. 계단 중간에서 차준호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혈액 재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준혁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주변에 누구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서연의 피가 아닙니다. 당신의 피도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 아파트에 뿌려진 혈액량은 생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혈액을 그곳에 뿌렸습니다."
차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기억 조작 능력이 실제라면, 당신 자신도 조작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그날 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준혁의 손이 차준호의 팔에서 떨어졌다. 계단의 손잡이를 잡았다.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CCTV를 다시 봤습니다. 당신이 증인들을 방문한 기록. 당신이 박민지의 기억을 조작한 기록. 최준환의 기억을 조작한 기록. 모두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파트에서 나가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날 밤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당신은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차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 밖에는 혈흔이 있습니다. 복도의 벽에 튀겨진 혈흔. 당신의 현관에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들어오는 방향입니다."
이준혁은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우리는 그 혈액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박준성. 서연의 전 남자친구입니다. 그는 그날 밤 당신 아파트 근처에서 서연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싸웠습니다. 서연이 현재의 남자친구인 당신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차준호는 계단에 앉았다.
"박준성은 서연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연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박준성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서연을 찾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아니,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준혁이 계단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차준호 위에 떨어졌다.
"우리는 서연을 찾았습니다. 당신 아파트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의 모텔에서. 경찰의 보호 요청으로 그곳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녀는 살아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날 밤의 서연은 죽지 않았습니다."
차준호의 손이 떨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떨렸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도 거짓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날 밤 서연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서연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의 손에 묻은 그 피는 당신이 흘린 것도, 서연이 흘린 것도 아닙니다. 박준성이 흘린 것입니다."
이준혁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 말을 할 때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은 범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그 증거가 박준성의 죄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입니다. 당신의 거짓이 진실을 만들었습니다."
계단은 조용했다.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 루프 10회차에서 사라진 것들의 흔적인가. 아니면 자신이 조작한 기억들의 무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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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희는 경찰서 복도에서 차준호를 막았다. 그녀의 표정은 불편했고,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단 두 단어였지만, 그 안에는 루프 10회차 동안 쌓인 의심과 추적의 무게가 들어있었다.
"저는 당신이 범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증거가 없어도. 직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직관이 아니라, 편견이었습니다. 당신은 피해자였고, 저는 당신을 범인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차준호는 그녀를 바라봤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당신의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증인들을 찾아다니고, 기억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범인의 행동이 아닙니다. 범인은 증거를 없애려 합니다. 증거를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형사님 때문은 아닙니다. 제 기억이 조작되었으니까."
신은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진정한 후회로 가득했다.
"그래도 미안합니다."
그녀는 돌아섰다. 복도는 다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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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지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준호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테이블에서. 하지만 이번에는 루프가 아니었다.
"저는 당신이 살인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차준호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당신이 제 기억을 조작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신이 제 머릿속에 들어와서 뭔가를 지우고, 뭔가를 더하는 느낌.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차준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도 피해자였어요. 당신의 기억도 조작되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깨닫기 위해 저의 기억을 조작했어요. 당신이 저를 조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확인한 거예요. 자신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박민지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한 모금.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미안합니다."
차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 말은 박민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박민지는 카페를 나갔다. 문을 나갈 때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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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환은 밤 11시에 전화를 걸었다.
"당신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루프가 끝났는데도.
"루프 중에는 매번 당신이 제 기억을 조작했어요. 그리고 매번 저는 당신이 무엇을 조작했는지 알 수 없었어요. 제 기억이 제 거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그게 지옥이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죄라니까... 더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당신이 저를 이용하려고 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도 누군가에게 당했던 거예요. 당신의 기억도 조작되었어요."
차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저는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더 이상. 제 기억을 믿을 수 없거든."
통화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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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주차장.
밤 11시 45분.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여섯 개의 손가락. 루프 10회차에서 누적된 변화들. 루프가 끝나도 그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 속에는 공백이 있었다. 10시간의 공백. 루프 10회차 동안 자신이 한 일들. 자신이 본 것들. 그 모든 것이 지워졌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1시간씩. 10회 루프에서 10시간.
그 공백에는 무엇이 숨어있을까. 루프를 시작한 그 밤,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있던 이유. 그리고 그 피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든 것이 그 10시간 안에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을 켜 거울 기능을 열었다. 여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아닌 누군가의 얼굴. 루프 중에 자신이 변형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 얼굴이었는데 자신이 조작한 기억 속에서만 다르게 보였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진실은 뭐지?"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 02-XXXX-XXXX. 서울 번호였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준호는 받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로 남겨졌다. 음성 변조기를 거친 목소리였다.
"당신은 아직도 모릅니다. 당신이 지운 기억이 뭔지. 당신이 조작한 것이 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가 끊겼다.
차준호는 다시 재생했다. 음성 메시지의 끝부분.
"...당신 옆에 누가 있는지 모릅니다."
음성이 끝났다. 정적만 남았다.
차준호는 뒤를 돌아봤다. 경찰서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밤 11시 50분. 아무도 없었다. 자신만 남아있었다. 여섯 개의 손가락과 낯선 얼굴을 가진 자신만.
휴대폰에 새로운 문자가 들어왔다. 같은 번호에서.
[당신의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세요. 루프가 시작되기 전. 당신이 서연을 만나기 전. 그 기억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자신에게 심어준 거짓입니까?]
차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떨렸다.
자신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시간의 공백 속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나. 루프 중에 자신이 조작한 기억들 사이에 묻혀있었나.
또 다른 문자가 들어왔다.
[루프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시작됩니다. 박준성은 죽지 않았습니다.]
차준호의 숨이 멎었다. 박준성. 서연의 전 남자친구. 그가 죽지 않았다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주차장의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밤 11시 55분. 자정까지 5분 남았다.
루프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느낌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차준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1시 56분.
4분 남았다.
경찰서 입구의 유리문이 열렸다. 신은희가 나왔다. 그녀는 차준호를 보고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바라볼 뿐이었다.
"형사님."
차준호가 말했다.
"당신은 저를 믿습니까?"
신은희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 사이로 차준호의 얼굴이 보였다. 주차장의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은 변하고 있었다. 피부가 창백해지고, 눈 주변이 움푹 들어가고, 입가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루프 중에 누적된 변화들이 이제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루프가 끝났을 때 되돌아와야 할 것들이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은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 얼굴이... 왜 변하지 않는 거죠?"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 루프가 끝났는데도 새끼손가락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프의 규칙이 깨졌다. 루프 메커니즘의 어떤 것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루프가 끝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손가락도, 얼굴도. 하지만..."
차준호는 거울처럼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신은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 사건...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자정이 되었다.
차준호의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