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진실의 조각

자정을 열 분 앞두고,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혈흔은 없었다. 깨끗한 손가락들. 어제 루프에서는 새끼손가락까지 다섯 개였는데, 오늘은 약지가 반쯤 투명해 보였다. 손가락 끝을 맞댔을 때 피부가 아닌 공기를 만났다.

경찰서를 나온 지 세 시간.

신은희 형사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표정. 루프, 기억 조작, 손가락이 사라진다는 말을 할 때마다 신은희의 입가는 더 굳어졌다. 하지만 이준혁은 달랐다. 그 반장은 자신을 믿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공포였을 수도 있다.

차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최준환에게 전화를 걸 생각은 했지만, 번호를 누르진 못했다. 루프 6회차에서 최준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너는 정말 그날 밤 뭘 했어?" 그 질문의 뒤에는 진짜 궁금증이 아니라 공포가 있었다. 최준환은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의 머리 안에서 누군가가 뭔가를 바꾸는 감각. 그것은 살인보다 더 깊은 공포였을 것이다.

박민지는 경찰서로 보호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신은희가 그렇게 말했다. 자살 시도, 정신과 검사, 경찰 보호. 박민지의 이름이 뉴스에 나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차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욕실의 형광등을 켰다. 흰 불빛이 얼굴을 비추었다. 어제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광대뼈가 더 높아 보였고, 눈썹의 위치가 약간 달랐다. 루프마다 자신의 얼굴이 조금씩 변했다. 신은희가 지적한 대로, 경찰의 DB와도 맞지 않았다.

"넌 살인자인가?"

거울 속의 입이 움직였다. 자신이 입술을 움직인 것 같은데, 거울 속 남자의 입술은 약간 뒤늦게 따라왔다. 다시 움직여봤다. "살인자인가?" 이번에는 거울 속 남자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차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뗐다. 심장이 빨라졌다. 손이 떨렸다. 욕실을 나왔다. 침대에 앉았다. 호흡을 고르려고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최준환"이라고 떠 있었다. 차준호는 전화를 받았다.

"차준호?"

최준환의 목소리는 더 망가져 있었다. 루프 6회차보다도 더. 마치 며칠을 깨어있던 사람처럼 쉬었고, 떨렸다.

"응."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본 거 기억나? 너는 정말 그날 밤 뭘 했어, 라고."

"기억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줄 수 있어?"

다시 침묵.

최준환의 숨이 들렸다. 가쁜 숨. "난 너한테서 정말 멀어지고 싶어. 정말 제발. 더 이상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나한테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미쳐 버릴 것 같아."

"최준환, 난 너한테—"

"너는 정말 그날 밤 서연이를 봤어? 정말 봤어?"

"봤다. 내가—"

"거짓말이야."

차준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거짓말이야. 내가 알아. 너는 그걸 모르지만, 난 알아. 네 기억 속에서 본 거야. 넌 서연이를 본 게 아니야. 넌... 넌..."

"뭐?"

최준환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을 쉬는 소리만 들렸다.

"난 몰라. 그냥 넌 뭔가 다른 걸 본 거야. 그리고 그걸 서연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거야."

전화가 끊겼다.

차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최준환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서연을 본 것이 아니라는 말. 그렇다면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파트 창밖을 봤다. 강남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라이온스 마크 건물 앞의 골목길은 어두웠다. CCTV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세 대가 검은색으로 덮여 있었다. 신호 간섭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부순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차준호는 준비 없이 집을 나갔다. 밖은 밤 10시 50분이었다. 자정까지 열 분 남았다.

골목길을 내려갔다. CCTV 아래를 지났다. 신호 간섭 받는 구간이었을 것이다. 이 구간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때였다.

남자의 그림자가 건물 모서리에서 나타났다.

차준호는 멈췄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는 십 미터 정도. 불빛이 제대로 닿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누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렸다. 빠르게 건물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차준호는 뒤를 따랐다.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미 모서리를 돌아갔다. 차준호도 따라 돌았다. 하지만 거기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높은 벽. 그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CCTV 사각지대. 휴대폰의 손전등을 켰다. 골목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도, 피도, 아무것도.

차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발신인: 알 수 없는 번호

"당신이 찾는 것은 이 골목에 없다. 하지만 나는 있다. 나는 항상 있었다."

차준호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당신은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단지 자신이 살인자라고 믿기로 결정했을 뿐이다. 그것이 당신의 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죄를 당신이 뒤집어썼는가?"

다음 메시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네 휴대폰에만 저장되고, 발신 기지국은 세 군데에서 동시에 송신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지막 메시지.

"다음 루프에서 우리가 만날 것이다. 넌 이미 내 기억 속에 있다."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배터리가 0%였다. 분명히 아까는 71%였는데.

차준호는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의 호흡 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멀리서 아파트의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

손목을 들어 봤다. 손가락이 또 줄어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중지가 반투명해져 있었다. 남은 손가락은 넷이었다.

자정까지 이제 3분 남았다.

그때 차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뭘 모르고 있는지.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증거들이 누군가의 진짜 범행을 덮고 있다는 것을.

자정이 왔다. 세상이 검어졌다.

---

강남서 경찰서의 심문실. 신은희는 테이블 위의 파일을 펼쳤다. 차준호가 제시한 증인 진술서들. 박민지, 최준환, 303호 주민. 각각이 말하는 사건의 윤곽이 달랐다.

"당신은 이들 각각에게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기억을 심었습니다."

신은희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기억 조작이라는 게 정말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조작된 기억들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역으로 당신의 혐의만 높이고 있어요."

차준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테이블 위의 파일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박민지의 진술. "그 남자가 저를 봤을 때, 제 기억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최준환의 진술. "그는 여러 번 왔어요. 매번 같은 질문을 했는데, 매번 다른 대답을 원했어요." 303호 주민의 진술. "저는 그를 본 적 없습니다. 경찰이 그렇게 말해도, 저는 본 적 없어요."

신은희가 다시 말했다.

"이 세 사람의 증언은 모순됩니다. 한 사람은 당신을 봤다고 하고, 한 사람은 여러 번 봤다고 하고, 한 사람은 본 적 없다고 해요. 만약 당신의 기억 조작 능력이 정말 있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차준호가 입을 열었다.

"난... 박민지를 만났을 때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

신은희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들이 있다는 뜻이군요."

"네."

"그런 행동들이 몇 번 있었습니까?"

차준호는 손가락을 세려고 들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세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중지가 반투명해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신은희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당신의 기억도 조작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차준호는 손을 내렸다. 신은희의 질문이 그를 흔들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날 밤의 기억. 정말 당신의 기억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당신의 기억 속에 심은 거 아닐까요?"

심문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신은희는 시계를 봤다. 밤 11시 30분.

"당신은 48시간 안에 풀려나야 합니다. 법이 그렇게 정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이 계속 증인들을 괴롭히고 증거를 조작하려 한다면, 새로운 혐의가 추가될 겁니다. 증인 협박, 위증 유도, 증거 조작죄."

차준호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신은희의 질문이 그를 흔들었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고 있다는 생각.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피해온 공포였다.

신은희는 파일을 정리했다. "당신이 서연을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차준호의 눈이 들렸다.

"그렇다면 누가 죽였을까요? 그리고 왜 당신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거죠?"

차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신은희의 질문이 그를 행동으로 몰아갔다. 그는 파일 속의 증언들을 다시 읽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종이를 집을 수 없었다.

"보이시나요? 당신은 지금 증거를 만들려고 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의 버전으로 조작하려고."

신은희가 파일을 집어 들었다. 차준호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당신이 자신을 조작한 기억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의 차이를 인식하고 계신가요?"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조작한 기억이 있는가?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억을 조작했는가? 아니면 자신이 조작된 기억 속에서 행동하고 있는 건가?

"박민지 씨를 만나 보세요."

신은희가 말했다.

"뭐?"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행동들. 박민지 씨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정말 뭘 했는지."

차준호는 신은희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동정이 없었다. 대신 있는 것은 차가운 확신이었다.

"우리가 박민지 씨를 찾아가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신은희는 심문실 문을 열었다. 이준혁 반장이 서 있었다. 그는 차준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밤 11시 57분. 차준호는 경찰과 함께 박민지의 거주지로 향했다. 신은희와 이준혁이 그를 양옆에서 호위했다.

아파트 단지. 박민지가 사는 건물. 경찰이 이미 그곳을 감시하고 있었다. 신은희는 차준호를 박민지의 방 앞으로 데려갔다.

"당신이 그녀에게 뭘 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신은희가 문을 열었다. 박민지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차준호를 보자 몸이 경직되었다.

"당신... 왜 왔어요?"

박민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차준호는 한 발 다가갔다. 박민지는 뒤로 물러났다.

"제 기억이... 자꾸 바뀌어요. 당신을 보면 제 머리가 깨어지는 것 같아요. 마치 제 기억이 두 개인 것처럼."

"뭐가... 두 개?"

"한 기억에서는 당신이 저를 만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기억에서는... 당신이 저한테 뭔가를 했어요."

차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박민지에게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민지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신은희가 박민지를 바라봤다.

"당신이 이 남자를 만났을 때 뭐가 달라졌어요?"

박민지는 눈물을 흘렸다.

"제 기억 속에서... 제 기억이 깨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누군가 제 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꺼내가는 것처럼. 그 남자가 저를 봤을 때... 그 순간부터 제 기억이 이상해졌어요."

차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박민지의 기억을 조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억이었는지는 모른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그것이 없었다.

"당신은 박민지 씨의 기억 속에서 뭔가를 지웠어요."

신은희가 차준호에게 말했다.

"그 과정에서 당신 자신의 기억도 함께 지워졌어요. 당신이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겁니다."

신은희는 박민지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두 개의 기억 중에서, 그 남자가 당신에게 뭔가를 했던 기억은 어떤 내용이었어요?"

박민지는 한참 동안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두 개의 기억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제가... 제가 서연이를 봤어요. 그 남자가 저한테 서연이는 죽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서연이는 다른 곳에 있다고. 그리고 저는... 저는 그 말을 믿었어요."

차준호의 몸이 굳었다.

"그 남자가 저한테 뭔가를 보여줬어요. 하지만 지금은 기억이 안 나요. 마치 제 기억에서 그 부분이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신은희는 차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은 박민지 씨에게 거짓 기억을 심었어요. 서연이가 살아 있다는 기억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 자신의 기억도 조작되었어요."

차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

경찰서로 돌아가는 길. 차준호는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신은희는 운전을 했고, 이준혁은 옆에 앉아 있었다.

"최준환 씨도 만나 봐야겠네요."

신은희가 말했다.

"그리고 303호 주민도."

차준호는 창밖을 봤다. 강남의 야경이 지나갔다. CCTV가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느낌.

"당신이 증인들을 만날 때마다 뭔가 일어나요. 당신이 그들의 기억을 조작할 때마다, 당신의 기억도 함께 조작돼요. 그것이 루프의 메커니즘인 것 같습니다."

신은희가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당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을까요? 누가 당신을 이 루프에 가두고 있을까요?"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또 줄어들어 있었다. 중지가 반투명해져 있었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건 뭐죠?"

이준혁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신은희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의 손가락이 사라질 때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돼요. 열쇠를 못 돌린다면? 휴대폰을 못 잡는다면? 증인을 못 만난다면?"

차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것은 무작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경찰서 도착. 차준호는 다시 심문실로 들어갔다. 신은희는 새로운 파일을 펼쳤다.

"최준환 씨의 진술을 다시 봐 보세요."

파일에는 최준환의 목소리 녹음이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왔어요. 매번 같은 질문을 했는데, 매번 다른 대답을 원했어요."

"당신이 최준환 씨를 여러 번 만났어요. 그리고 매번 다른 기억을 심으려고 했어요. 왜죠?"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은 진실을 찾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은 거짓을 만들고 있었어요. 당신이 만든 거짓들이 증인들의 기억을 조작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신의 기억도 함께 조작됐어요."

신은희가 차준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신이 정말 궁금한 건 뭐죠? 당신이 서연을 죽였는지 여부? 아니면 누가 당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는지?"

차준호는 입을 열었다.

"둘 다... 아니면... 누가 나를 이 루프에 가두고 있는지."

신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중요한 질문이에요. 누가 당신을 이 루프에 가두고 있는지. 그리고 왜."

---

밤 11시 57분. 차준호는 경찰서를 나왔다. 신은희는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증거가 없었으니까.

거리는 조용했다. 강남역 주변의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다. CCTV가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쌓였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느낌.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남은 손가락은 넷이었다. 엄지, 검지, 약지, 새끼손가락. 중지는 반투명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루프의 일부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낸 환각인가?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 박민지.

"네?"

목소리가 떨렸다. 박민지의 목소리는 더 떨렸다.

"당신이 저한테 뭘 했어요? 제 기억이 이상해요. 당신을 보면 제 머리가 아파요. 마치 제 기억이 깨어지는 것 같아요."

"박민지, 난 너한테..."

"경찰이 저를 보호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저를 또 찾아올까봐 두렵다고 했더니, 그들은 제가 안전하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안전할 수 있어요? 당신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데."

차준호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박민지는 계속 말했다.

"제 기억 속에 당신이 있는데, 그게 진짜 기억인지 가짜 기억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심은 거 같은데, 당신이 뭘 심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전화가 끊겼다.

차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손이 다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깨달음 때문이었다.

자신이 박민지에게 기억을 조작한 게 맞나? 루프 4회차에서 박민지를 만났을 때 자신이 뭔가를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루프 5회차에서는 박민지를 다시 만났고, 그녀는 자신을 봤다고 했다. 루프 6회차에서는 박민지가 자살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박민지에게 뭘 한 거지? 자신의 기억 속에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지워지는 와중에, 자신은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러면 누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는 건가?

---

아파트 계단. 차준호는 한 계단씩 올라갔다.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손가락이 아팠다. 중지가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15층에 도착했다. 자신의 아파트 문 앞. 도어락을 열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옆 문이 열렸다. 303호. 그 여자가 나왔다.

"당신."

여자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차준호는 멈췄다.

"경찰이 저한테 물었어요. 당신을 봤냐고. 저는 본 적 없다고 했어요. 근데 알아요? 제 기억이 자꾸 바뀌어요. 마치 누군가 제 머리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전 아무것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해요? 경찰? 아니면 당신 말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

여자는 문을 닫았다. 차준호는 자신의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불을 켰다. 거실은 낯설었다. 언제 이런 가구를 들여놨지? 소파의 색깔은? 벽의 색깔은? 자신은 이 집에 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은 여기 산다. 서연과 함께 산다.

서연은 어디에 있지?

차준호는 침실로 갔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베개에는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세어봤다. 엄지, 검지, 약지, 새끼손가락. 중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손가락이 네 개 남았다.

자정까지 이제 2분 남았다.

그때 거울이 보였다. 침실 벽의 전신거울. 차준호는 그 앞에 섰다.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또 달라져 있었다. 루프가 반복될수록 자신의 얼굴은 변했다. 코의 높이가 다르고, 눈의 간격이 다르고, 입의 크기가 다르다.

거울 속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준호가 입을 열기 전에. 거울 속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넌 누구냐?"

차준호의 입이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거울 속 남자는 다른 말을 했다.

"난 너고, 넌 나야."

---

밤 11시 59분. 거울 속 남자가 손을 들었다. 차준호의 손이 아닌, 거울 속 남자의 손이 먼저 들렸다.

거울 속 남자의 눈이 변했다. 차준호의 눈과 다른 색깔로. 거울 속 남자의 입이 비틀렸다. 차준호의 입과 다른 모양으로.

차준호는 손을 내렸다. 거울 속 남자는 손을 들었다.

차준호가 침대에 앉았다. 거울 속 남자는 서 있었다.

차준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나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제 우리가 만날 차례야."

자정이 왔다. 세상이 검어졌다.

---

루프 7회차. 자정. 차준호는 깨어났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또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왼쪽 눈이 부어 있었다. 맞은 자국이 있었다.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는 100%였다. 루프가 초기화되면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은 이 루프에 갇혀 있는지. 왜 자신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는지. 왜 자신은 서연을 죽였다고 확신하는지.

확신하는가?

차준호는 생각해봤다. 자신이 정말 확신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자신을 확신하도록 만든 건가?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 최준환.

"안 돼. 제발."

최준환의 목소리는 울먹였다.

"뭐가 안 되는데?"

"당신이 저를 또 찾아올 거 아니에요. 제발 좀 저를 혼자 두세요. 제 기억 속에 당신이 있는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요. 제 머리가 망가지고 있어요."

"최준환, 난 너한테..."

"당신이 그날 밤 뭘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 저를 찾지 마세요."

전화가 끊겼다.

차준호는 휴대폰을 내렸다. 자신의 손가락을 세어봤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있었다. 루프가 초기화되면서 손가락도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루프가 초기화될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은 돌아오는데, 왜 자신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준호는 아파트를 나갔다. 이번에는 증인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기억을 찾으러 갔다.

그날 밤의 기억. 자신이 서연을 죽인 밤. 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했다.

강남역 근처 카페. 차준호는 앉았다. 자신의 기억을 정렬하려고 했다.

그날 밤 자정.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파트에 있었다. 서연은? 침대에 있었다. 아니다. 거실에 있었다. 아니다. 그곳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밤 오전 1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서연이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가? 자신이 죽였다. 어떻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밤 오전 2시. 경찰이 왔다. 자신을 체포했다. 맞다. 그것은 기억난다. 경찰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런데 왜 경찰이 왔는가? 누군가 신고했는가? 누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뭔가 빠진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 손을 집어넣고 무엇인가를 꺼낸 것 같았다.

차준호는 카페를 나갔다. 밖의 날씨는 흐렸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그 골목길을 지났다. 그곳에서 남자를 봤던 골목길. CCTV가 손상된 골목길.

하지만 이번 루프에서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차준호는 아파트에 올라갔다. 15층. 자신의 문. 열었다.

집 안은 어둠이 가득했다. 불을 켰다. 거실은 낯설었다. 침실로 갔다. 침대도 낯설었다. 거울을 봤다. 얼굴도 낯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 차준호는 거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서 있었다. 낯선 여자. 아니다. 어딘가 익숙한 여자.

"당신은?"

"전 서연이에요."

차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당신이 날 죽였다고 생각했나요?"

여자는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뭘 했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확신했어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누가 당신의 기억을 조작했을까요?"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이 찾는 사람은 저가 아니에요. 당신이 찾는 사람은 당신 자신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찾지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조작된 거니까요."

서연은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칼이 있었다.

"이제 우리의 기억이 만날 차례예요."

칼이 차준호의 팔을 그었다. 피가 흘렀다. 자신의 피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피인가?

차준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제 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자정이 왔다. 세상이 검어졌다.

루프 7회차가 끝났다. 루프 8회차가 시작되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차준호의 눈이 떠졌을 때, 그 앞에는 검은 천이 있었다. 아니다. 어둠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

누군가의 옷.

누군가의 몸.

차준호는 깨어났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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