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손가락을 센다

왼손 엄지부터 시작해 하나, 둘, 셋, 넷. 오른손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아홉 개.

어제는 여덟 개였다. 그 전날은 여섯 개였나? 일곱 개였나?

침대 옆 노트를 집어 든다. 페이지가 뒤척거린다. 자신의 필적과 전혀 다른 글씨들이 가득하다. '당신은 누구야.' '기억하지 마.' '돌아가.' 누가 썼는지 모르는 글씨들이 자신의 노트를 채워간다. 아니면 자신이 쓴 걸까. 자신이 잊은 채로.

오후 2시 15분. 아파트 15층 거실. 창밖으로 강남의 회색 빌딩들이 중첩되어 보인다. 햇빛이 각도를 잘못 잡아 눈을 자극한다.

손에 피가 없다.

아침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없다. 혹은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 차준호는 손톱 사이를 들여다본다. 피 자국? 아니다. 그냥 때다. 손 씻은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른다.

메모를 펼친다. 자신의 필적으로 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들.

'루프 1회차: 자정에 깨어남. 손에 피. 경찰 심문. 48시간 후 풀려남.'

'루프 2회차: 손에 피 사라짐. 신은희 형사 전화. 혈액형 다름. 최준환 기억 조작 시도. CCTV 적발. 누적 기억 손실 7시간.'

'루프 3회차: 박민지와 이웃 주민 기억 조작. 신은희 "당신이 두 명처럼 보인다." 누적 기억 손실 13시간.'

'루프 4회차: 박민지 다시 만남. "당신을 본 적 없다." 누적 기억 손실 19시간.'

'루프 5회차: 혈액량 부족. 시신 미발견. 서연 그림자 목격. 누적 기억 손실 23시간.'

그 다음은 비어 있다. 펜을 집어 든다. 손이 떨린다. 무엇을 써야 할까.

'루프 6회차: 기억이 ...'

글이 흐린다. 눈물? 아니다. 그냥 손이 떨리는 것 뿐이다.

'기억이 없다.'

침대에 누운다. 천장을 본다. 어제 "당신은 누구야?"라고 쓰여 있던 글씨는 이제 지워져 있다. 손이 지웠나. 타인의 손이 지웠나. 혹은 처음부터 없었나.

휴대폰이 울린다. 신은희 형사다.

"준호. 지금 경찰서 와."

목소리가 차갑다. 이전보다 더 차갑다.

---

강남서 분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42분이었다. 신은희는 조사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에 이준혁 반장이 서 있었다.

"앉아."

차준호는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사진들이 펼쳐져 있었다. CCTV 캡처본이다. 자신이 박민지를 찾아가는 모습. 자신이 최준환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 자신이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 주민과 대면하는 모습.

"이게 뭐지?"

신은희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넌 이 여자들을 왜 계속 찾아다녀?"

이준혁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박민지. 최준환. 이혜정. 이웃 주민들. 넌 이 사람들을 계속 만난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루프라는 단어를 썼다. 경찰이 루프를 알고 있나? 아니다. 단순히 반복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을 만난 후 넌 뭘 하는데?"

차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을 조작했다는 건 알지만,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노트에 적혀 있을 텐데 읽을 수 없다. 자신의 필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해."

신은희가 탁자를 친다. 커피가 흔들린다.

"그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뭐가 이상하다고?"

"기억이... 이상하다고."

이준혁과 신은희가 눈을 맞춘다. 그들 사이에서 뭔가 오간다. 차준호는 그것을 읽을 수 없다.

"박민지가 말했어. 넌 그날 그녀를 만났고 뭔가 말했어. 그 다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고 했어. 최준환도 마찬가지고. 이혜정도. 모두 넌 만난 후 이상해졌어."

"그건..."

"그건 뭐?"

차준호의 목이 말라온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잔을 집을 수 없다.

"서연 살인 사건의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 증인들의 기억을 조종하는 거지. 이건 위증 교사죄와 동시에 특수협박죄에 해당해."

"아니... 입니다."

"그럼 설명해봐. 왜 자꾸만 그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거야?"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본다. 손가락이 아홉 개다. 맞나? 몇 개인지 다시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맞다. 아홉 개다.

어제는 여덟 개였던 것 같은데.

"준호."

이준혁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이것이 더 위험하다. 차준호는 안다. 경찰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덫이다.

"솔직하게 말해. 넌 뭘 했어?"

손가락을 다시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손.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기억을 조작했습니다."

이준혁의 눈빛이 변한다. 신은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원하던 대답이다.

"어떻게?"

"그냥... 만나서 말했습니다."

"말했다고? 뭐라고?"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다.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루프 5회차에서는 최준환에게 뭘 말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루프 6회차에서는 그것도 사라졌다. 누적 기억 손실이 23시간이었나. 지금은 몇 시간인가.

"말을 해!"

신은희가 다시 탁자를 친다.

"그 여자들이 뭘 봤다고 생각해? 그날 밤에?"

그날 밤. 차준호는 그날 밤을 생각해본다.

자정. 손에 피. 서연의 비명. 아니다. 서연의 목소리. 아니다. 서연이... 뭘 했지?

"서연이... 죽었습니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혈액량은?"

"부족합니다."

"그럼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아니... 제가 죽였습니다."

"그럼 그 여자들은? 박민지는? 그 밤 넌 박민지를 만났어?"

차준호는 생각한다. 만났나?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루프 2회차에서는 박민지를 만났나. 루프 3회차에서도. 루프 4회차에서도. 루프 5회차에서는?

기억이 없다.

"모르겠습니다."

"뭐가 모른다고?"

"그날 밤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준혁이 신은희를 본다. 신은희가 이준혁을 본다. 그들의 눈빛이 다시 교차한다. 이번엔 의심이다.

신은희가 파일을 펼친다. CCTV 영상. 박민지의 카페 출입 기록. 최준환의 아파트 출입 기록. 그리고...

"이것도 봐."

신은희가 가리킨 것은 병원 기록이다.

박민지의 진단서.

'급성 해리성 정체감 장애 의심. 기억 혼란 증상. 환각 증상. 자해 충동.'

"박민지가 자살 시도를 했어. 병원에 입원 중이야. 그리고 최준환은 행방불명 상태야."

차준호의 심장이 멈춘다.

"넌 그들한테 뭘 한 거야?"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이 뭘 했는지 모르니까.

"박민지는 너를 만난 후 '당신을 봤는데 정말 피가 묻어 있었나요?'라고 물었대. 최준환은 '당신이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고 했어. 이웃 주민은 '당신을 본 적 없다고 했는데 경찰이 당신을 범인이라고 했다'고 증언했어."

신은희가 파일을 넘긴다.

"이 사람들의 증언이 모두 다르고, 모순되고 있어. 왜?"

차준호가 물었다.

"뭐가요?"

"넌 뭘 한 거야?"

차준호의 입이 떨린다.

"저는... 그들의 기억을 조작했습니다."

침묵.

이준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뭐라고?"

"기억을 조작했어요. 그들이 저를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은희가 이준혁을 본다.

"증거 조작이군."

"이건 증거 조작이 아니야. 이건..."

이준혁이 일어난다.

"이건 뭔가 다른 거야."

차준호가 물었다.

"왜요?"

이준혁이 테이블 위에 사진을 놓는다. CCTV 영상 캡처본. 차준호가 박민지와 만나는 장면.

"이 영상이야. 너와 박민지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에 노이즈가 생겨. 마치 뭔가가 신호를 방해하는 것처럼. 그리고 너와 최준환이 만나는 영상도 마찬가지야. 신호 간섭. 주파수 교란."

차준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지. 알아. 근데 사실 일어나고 있어. 그래서 우린 너를 추적할 수 없어. 너는 항상 CCTV 사각지대에 있고, 증인들을 만난 순간은 항상 신호가 끊겨. 그리고 그 증인들은 모두 이상한 증상을 보여."

신은희가 덧붙인다.

"차준호, 너 혹시 약을 먹고 있니? 정신과 약물이나 신경 안정제?"

"아니요."

"그럼 이건 뭐야?"

신은희가 보여주는 것은 차준호의 혈액 검사 결과다.

'미지의 화학 물질 검출. 신경 독성 의심. 출처 불명.'

차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저는..."

"넌 뭔가 노출되어 있어. 약물이든, 독극물이든, 아니면 다른 뭔가든. 그리고 그것이 너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이준혁이 다시 앉는다.

"준호, 솔직하게 말해 줄래. 넌 서연이를 정말 죽였어?"

차준호가 대답한다.

"네."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네."

"그 피가 서연이의 피였어?"

차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신은희가 물었다.

"혈액형이 다르잖아. 넌 O형이고, 서연이는 AB형이야. 그런데 손에 묻은 피는 B형이었어."

차준호가 말했다.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넌 뭐라고?"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기억이 사라져요. 매번 다른 것들이 지워져요."

이준혁과 신은희가 서로 본다.

"루프?"

차준호가 설명했다.

"자정마다 반복되는 거예요. 같은 48시간이 계속 반복돼요. 그리고 매번 저의 기억이 지워져요."

신은희가 일어난다.

"미쳤나."

"아니야. 이건 정신병이 아니야."

이준혁이 차준호의 손을 본다.

"손가락이 몇 개야?"

차준호가 손을 펼친다.

"다섯 개입니다."

"어제는?"

"여섯 개였어요."

"그제는?"

"일곱 개였어요."

이준혁이 신은희를 본다.

"이건 환각이 아니야. 실제로 신체가 변하고 있어."

"CCTV에도 안 나와?"

"CCTV에는 손가락이 여덟 개로 나와. 계속 다르게."

신은희가 일어난다.

"이건... 이건 우리 수준을 넘어섰어."

차준호가 물었다.

"저를 기소할 거예요?"

"기소할 증거가 없어. 너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고, 증인들의 증언도 모순되고, CCTV 영상도 이상해. 그리고 피해자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어."

신은희가 덧붙인다.

"다만 넌 증거 조작 혐의로 조사받을 거야. 증인들의 기억을 조작했다는 혐의."

"증거가 있어요?"

"박민지의 진단서. 최준환의 행방불명. 그리고 CCTV의 신호 간섭. 이것들이 모두 너를 지목하고 있어."

이준혁이 말했다.

"넌 가도 돼. 하지만 도시를 떠나지 마. 우린 계속 추적할 거야."

차준호가 일어난다.

"루프가 초기화될 때 모든 게 처음부터 시작되는데요. 당신들도 기억을 잃을 거예요."

"뭐?"

"자정이 되면 이 대화는 없었던 일이 돼요. 당신들도 처음 상태로 돌아가요. 다만 저만 누적된 기억 손실을 갖고 돌아가요."

신은희가 물었다.

"넌 정말 미쳤나?"

"아니요. 저는 정상입니다. 다만 기억이 사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

차준호는 경찰서를 나간다.

거리는 조용하다. 오후 4시 52분.

자정까지 7시간 8분.

강남역 방향으로 걷다가 거울을 본다. 편의점 유리창이 반사되어 있다.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어제와 다르다. 턱선이 흐릿해지고, 눈 모양이 자꾸 흔들린다.

차준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피부가 느껴진다. 실재한다. 하지만 이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확신이 없다.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낸다. 사진을 본다. 그것도 자신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턱선이 다르고, 눈이 다르다.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읽는다. 차준호. 맞다. 자신의 이름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사람은 자신이 아니다.

핸드폰을 꺼낸다. 갤러리를 연다. 과거 사진들. 1년 전. 2년 전. 3년 전. 모두 다른 얼굴이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사진처럼.

카페에 들어간다. 강남역 근처 어딘가. 자신이 루프마다 들어오는 카페인 것 같다. 아니면 처음 들어오는 건가.

커피를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창가 자리에 앉는다. 휴대폰을 꺼낸다. 뉴스를 검색한다.

'서연 양 실종 50일차. 시신 여전히 미발견.'

언제 죽었는데 50일이 됐다고? 아니다. 이건 루프 바깥의 시간이다. 루프는 48시간마다 반복된다. 루프 안의 시간과 루프 바밖의 시간이 다르다.

'경찰, 차준호를 용의자로 지목. 증거 부족으로 풀려남.'

커피가 나온다. 차준호는 마신다. 맛이 없다. 아니다. 맛을 느낄 수 없다.

'서연 양의 직장 동료들, "최근 서연 양이 불안해했다"고 증언.'

차준호는 손을 본다. 손가락이 여섯 개다. 일곱 개에서 여섯 개가 되었다. 기억이 또 지워졌나.

오후 5시 47분. 자정까지 6시간 13분.

차준호는 아파트로 돌아간다. 15층. 거실. 침대.

천장을 본다.

"당신은 누구야?"

글씨가 다시 나타나 있다. 자신이 썼나? 타인이 썼나?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개다.

자신의 손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이다.

오후 11시 58분.

차준호는 눈을 감는다.

자정이 되면 어디서 깨어날까. 손에 피가 있을까. 서연이 죽어 있을까.

자정.

차준호의 눈이 뜬다.

손을 본다.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다.

어제는 여섯 개였는데.

손에는 피가 없다.

침대 옆 노트에는 새로운 글씨가 적혀 있다.

자신의 필적이 아니다.

'루프 7회차: 당신은 누구야?'

엄지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가락 끝이 투명해지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이준혁 반장이다.

"준호. 큰일이 났어. 경찰서 와."

목소리가 긴박하다.

차준호가 물었다.

"뭐가요?"

"박민지가 자살 시도를 했어. 병원에 입원 중이야. 그리고 최준환도 행방불명 상태야. 넌 그들한테 뭘 한 거야?"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이 뭘 했는지 모르니까. 그들의 기억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누적된 기억 손실. 루프 7회차에서 이미 6시간이 지워졌다. 그 전 루프에서는 7시간. 그 전은 5시간.

총 누적 기억 손실: 18시간.

하루 반이다.

하루 반의 자신이 사라졌다.

"경찰서 와. 지금."

통화가 끊긴다.

차준호는 옷을 입는다. 어제 입던 옷인가, 처음 입는 옷인가. 검은색 후드티. 회색 청바지. 검은 운동화.

아파트를 나간다.

엘리베이터. 1층. 로비. 강남서 경찰서까지는 5분 거리다.

길을 걷다가 거울을 본다. 편의점 유리창이 반사되어 있다.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어제와 다르다. 턱선이 더 흐릿해지고, 눈 모양이 더 자꾸 흔들린다. 이게 자신의 얼굴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인가.

차준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피부가 느껴진다. 실재한다. 하지만 이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확신이 없다.

강남서 경찰서 현관에 도착한다.

오전 1시 47분.

자정이 지난 지 1시간 47분.

루프가 시작된 지 1시간 47분.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을까.

차준호는 경찰서 문을 밀고 들어간다.

신은희 형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 옆에는 이준혁 반장이 서 있다.

이준혁의 얼굴은 심각하다.

"앉아."

차준호는 심문실 의자에 앉는다.

신은희가 파일을 펼친다. CCTV 영상. 박민지의 카페 출입 기록. 최준환의 아파트 출입 기록.

"이것도 봐."

신은희가 가리킨 것은 병원 기록이다.

박민지의 진단서.

'급성 해리성 정체감 장애 의심. 기억 혼란 증상. 환각 증상. 자해 충동.'

"박민지가 말했어. 넌 그녀한테 뭘 했냐고."

차준호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뭐?"

"기억이 안 나요."

이준혁이 테이블을 친다.

"넌 뭔가 이상해. 박민지를 만난 후 그녀가 이상한 증상을 보였고, 최준환을 만난 후 그가 행방불명이 됐어. 그리고 이웃 주민 303호는 경찰에 신고했어. 넌 그녀를 만나 뭔가 했다고. 기억을 조작했다고."

"저는..."

"기억을 조작한 거 맞지?"

이준혁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신은희가 손을 들어 제지한다.

"진정해. 준호, 우리는 이해하려고 해. 너도 힘들 거라는 거 알아. 서연이가 죽었고,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고, 그 과정에서 너는 무언가를 시도했어. 맞지?"

차준호는 말하지 않는다.

"박민지는 너를 만난 후 '당신을 봤는데 정말 피가 묻어 있었나요?'라고 물었대. 최준환은 '당신이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고 했어. 이웃 주민은 '당신을 본 적 없다고 했는데 경찰이 당신을 범인이라고 했다'고 증언했어."

신은희가 파일을 넘긴다.

"이 사람들의 증언이 모두 다르고, 모순되고 있어. 왜?"

차준호가 물었다.

"뭐가요?"

"넌 뭘 한 거야?"

차준호의 입이 떨린다.

"저는... 그들의 기억을 조작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이준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뭐라고?"

"기억을 조작했어요. 그들이 저를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은희가 이준혁을 본다.

"증거 조작이군."

"아니다. 이건 증거 조작이 아니야. 이건..."

이준혁이 일어난다.

"이건 뭔가 다른 거야. 일반적인 증거 조작이 아니야."

차준호가 물었다.

"왜요?"

이준혁이 차준호를 내려다본다.

"박민지의 진단서에 따르면 그녀는 실제로 기억 혼란을 겪고 있어. 심리적 암시나 협박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야. 그리고 최준환은 완전히 행방불명이 됐어. 아파트에 흔적이 없어. 마치... 사라진 것처럼."

차준호의 손이 떨린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준혁이 테이블 위에 사진을 놓는다.

CCTV 영상 캡처본.

차준호가 박민지와 만나는 장면.

"이 영상이야. 너와 박민지가 만나는 순간, 카메라에 노이즈가 생겨. 마치 뭔가가 신호를 방해하는 것처럼. 그리고 너와 최준환이 만나는 영상도 마찬가지야. 신호 간섭. 주파수 교란."

차준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지. 알아. 근데 사실 일어나고 있어. 그래서 우린 너를 추적할 수 없어. 너는 항상 CCTV 사각지대에 있고, 증인들을 만난 순간은 항상 신호가 끊겨. 그리고 그 증인들은 모두 이상한 증상을 보여."

신은희가 덧붙인다.

"차준호, 너 혹시 약을 먹고 있니? 정신과 약물이나 신경 안정제?"

"아니요."

"그럼 이건 뭐야?"

신은희가 보여주는 것은 차준호의 혈액 검사 결과다.

'미지의 화학 물질 검출. 신경 독성 의심. 출처 불명.'

차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저는..."

"넌 뭔가 노출되어 있어. 약물이든, 독극물이든, 아니면 다른 뭔가든. 그리고 그것이 너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근데 그게 너한테서 나온 건지, 아니면 외부에서 들어온 건지 모르겠어."

이준혁이 다시 앉는다.

"준호, 솔직하게 말해 줄래. 넌 서연이를 정말 죽였어?"

차준호가 대답한다.

"네."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네."

"그 피가 서연이의 피였어?"

차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신은희가 물었다.

"혈액형이 다르잖아. 넌 O형이고, 서연이는 AB형이야. 그런데 손에 묻은 피는 B형이었어."

차준호가 말했다.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넌 뭐라고?"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기억이 사라져요. 매번 다른 것들이 지워져요. 그래서 제가 정말로 뭘 했는지, 뭘 봤는지 확실하지 않아요."

이준혁과 신은희가 서로 본다.

"루프?"

차준호가 설명했다.

"자정마다 반복되는 거예요. 같은 48시간이 계속 반복돼요. 그리고 매번 저의 기억이 지워져요."

신은희가 일어난다.

"이건... 이건 우리 수준을 넘어섰어."

차준호가 물었다.

"저를 기소할 거예요?"

"기소할 증거가 없어. 너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고, 증인들의 증언도 모순되고, CCTV 영상도 이상해. 그리고 피해자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어."

신은희가 덧붙인다.

"다만 넌 증거 조작 혐의로 조사받을 거야. 증인들의 기억을 조작했다는 혐의."

"증거가 있어요?"

"박민지의 진단서. 최준환의 행방불명. 그리고 CCTV의 신호 간섭. 이것들이 모두 너를 지목하고 있어."

이준혁이 말했다.

"넌 가도 돼. 하지만 도시를 떠나지 마. 우린 계속 추적할 거야."

차준호가 일어난다.

"루프가 초기화될 때 모든 게 처음부터 시작되는데요. 당신들도 기억을 잃을 거예요."

"뭐?"

"자정이 되면 이 대화는 없었던 일이 돼요. 당신들도 처음 상태로 돌아가요. 다만 저만 누적된 기억 손실을 갖고 돌아가요."

신은희가 물었다.

"넌 정말 미쳤나?"

"아니요. 저는 정상입니다. 다만 기억이 사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

차준호는 경찰서를 나간다.

거리는 조용하다. 오전 3시 12분.

자정까지 8시간 48분.

강남역 방향으로 걷는다.

손을 본다.

다섯 개의 손가락.

어제는 여섯 개였다. 그 전은 일곱 개였다. 그 전은 여덟 개였다.

손가락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 손가락 끝이 투명해지고 있다. 엄지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차준호는 거울을 본다. 편의점 유리창이 반사되어 있다.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어제와 다르다. 턱선이 흐릿해지고 있고, 눈 모양이 자꾸 흔들린다. 이게 자신의 얼굴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인가.

차준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피부가 느껴진다. 실재한다. 하지만 이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확신이 없다.

오전 4시 47분.

자정까지 7시간 13분.

차준호는 아파트로 돌아간다.

침대에 누운다.

천장을 본다.

"당신은 누구야?"

글씨가 다시 적혀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옆에 새로운 글씨가 있다.

"당신은 죽었어."

차준호의 눈이 떨린다.

자신이 죽었단 말인가.

그럼 이건 뭔가.

자신이 죽은 후의 세상인가.

루프 속의 지옥인가.

아니면 자신이 이미 죽었고, 이건 누군가가 만든 환각인가.

차준호는 손을 본다.

다섯 개.

그리고 손을 내려다본다.

손 아래에는 피가 있다.

침대 시트에.

대량의 피.

차준호의 피인가. 서연의 피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피인가.

오전 11시 58분.

자정까지 12분.

차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난다.

손을 본다.

다섯 개에서 네 개가 되었다.

이미 또 다른 기억이 지워졌다.

그 기억이 뭐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기억일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게 뭔지 알 수 없으니까.

오전 11시 59분.

자정까지 1분.

차준호는 눈을 감는다.

다음 루프에서 무엇이 남아 있을까.

손가락은 더 사라질 것이다.

기억도 더 사라질 것이다.

자신도 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자정.

차준호의 눈이 뜬다.

손을 본다.

네 개.

어제보다 하나 적다.

침대 옆 노트에는 새로운 글씨가 있다.

'루프 8회차: 당신은 죽었어.'

휴대폰이 울린다.

이준혁이다.

"준호, 뭔가 이상한데. 어제 우리가 만났어? 넌 기억해?"

차준호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래. 넌 기억을 못 한다고 했지. 근데 우린 했어.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게 있어."

"뭐죠?"

"최준환이 발견됐어. 그런데..."

이준혁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 놈이 죽어 있었어. 그리고 그 옆에 너를 본 증인들의 진술서가 있었어. 모두 다른 증언이었어. 마치... 여러 명의 너를 본 것처럼."

차준호가 물었다.

"저는..."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준혁이 말했다.

"CCTV에는 너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최준환을 만나러 갔었어. 그 사람도 너와 똑같이 생겼어."

차준호의 손이 떨린다.

네 개의 손가락.

"넌 혼자가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어. 넌 뭘 하고 있는 거야?"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니까.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니까.

루프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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