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기억의 균열

자정 정각,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손가락을 센다. 엄지, 검지, 중지. 왼쪽 손가락이 네 개다. 어제는 다섯 개였다. 약지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차준호는 손가락을 다시 센다. 이번엔 다섯 개다. 아니다. 여섯 개다. 손가락이 떨린다.

욕실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얼굴이 전과 다르다.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한 손가락 두께다. 입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이게 자신의 얼굴인가? 손가락으로 광대뼈를 눌러본다. 피부가 늘어난다. 탄력이 없다. 나이를 먹었다. 얼마나 많이?

침대 옆 메모장을 펼친다. 페이지마다 글씨로 가득하다. 자신이 쓴 글도 있고, 쓰지 않은 글도 있다. 필체가 다르다. 같은 페이지에 손글씨가 세 가지 이상 섞여 있다. 맨 아래 페이지에는 한 문장이 크게 적혀 있다.

"넌 누구야?"

글씨가 울렁거린다.

차준호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손가락 여섯 개. 손가락 다섯 개. 손가락 네 개. 정확한 개수를 세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울을 다시 본다. 광대뼈가 변했다. 아까보다 더 튀어나왔다. 아니다. 안 변했다. 변했는데 안 변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자꾸만 변하는 건가.

손가락을 다시 센다. 열 개다. 왼손 다섯 개, 오른손 다섯 개. 정상이다. 정상인가?

---

오전 8시 47분, 경찰서 강남서 분소 신은희 형사의 책상 위에 차준호의 사진이 놓여 있다. 3번의 루프를 거친 사진이다. 얼굴이 매번 다르다. 첫 번째는 젊고 날카로운 인상. 두 번째는 소년처럼 창백한 인상. 세 번째는 늙고 공허한 인상. 신은희는 사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건 같은 사람이 아니야."

이준혁 반장이 옆에 선다.

"같은 사람이다. 우린 그를 24시간마다 본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루프? 반장, 그런 건 없어. 우린 법을 다루는 거지, 판타지를 다루는 게 아니야."

이준혁은 신은희를 바라본다. 그의 눈이 진지하다.

"박민지 양이 신고했다. 차준호가 자신에게 뭔가를 묻고 있다고.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고."

신은희는 신고서를 집어든다. 읽다가 멈춘다.

"'손에 피가 있었나요? 확실해요?'라고 몇 번이나 물었다고?"

"네 번. 같은 시간에."

"그건 이상하다."

신은희는 신고서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켠다. 아파트 CCTV 영상이 재생된다. 차준호가 편의점에 들어간다. 박민지가 그를 본다. 차준호가 손을 움직인다. 박민지의 눈이 흐려진다. 28초간 박민지는 멍하니 서 있다.

"기억 조작이다," 신은희가 말한다. "우리가 이걸 증명할 수 없지만, 이건 기억 조작이야."

이준혁은 웃는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절망의 웃음이다.

"그렇다면 우린 뭘 할 수 있어?"

---

차준호는 편의점 앞에 선다. 손에 메모장을 들고 있다. 메모장의 페이지는 이미 반쯤 채워져 있다. 이전 루프의 기록이다. 그는 읽는다.

- 박민지 (편의점 직원): 피가 오른손에 묻어 있었다고 증언 예상 - 최준환 (친구): 피가 왼손에 묻어 있었다고 증언 예상 - 이웃 주민 1502호 (이미숙?):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 예상

물음표가 많다. 확실한 게 없다. 손가락이 떨린다.

차준호는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박민지가 카운터 뒤에 선다. 그녀의 눈이 차준호를 본다. 그 눈에는 공포가 있다.

"어... 손님?"

"박민지 씨."

"네?"

"그날 밤 내 손에 피가 어디에 묻어 있었어?"

박민지는 한 발 물러난다.

"손... 손가락?"

"왼쪽? 오른쪽?"

"저... 저 뭐라고 말씀했어?"

차준호의 얼굴이 경직된다.

"내가 묻는 거야. 손에 피가 어디에 있었어?"

박민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킨다.

"팔... 팔뚝?"

이건 아니다. 이건 차준호가 조작한 기억이 아니다. 박민지가 말하는 것은 차준호가 만든 증거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봐. 정확히. 어디에?"

"손님, 저... 저 경찰한테 신고했어요. 당신이 저한테 이상하게 자꾸..."

차준호는 편의점을 나간다. 박민지의 목소리는 뒤에서 멀어진다.

"손님! 손님!"

---

차준호는 최준환에게 전화를 건다. 벨이 다섯 번 울린다. 육 번. 칠 번. 최준환은 받지 않는다.

문자를 보낸다.

"그날 밤 내 손 어디에 피가 있었어?"

답장이 온다. 10초 후.

"뭐 하는 거야?"

"손. 어디에. 피."

30초의 침묵. 그 다음.

"왼손 손가락."

차준호는 손을 본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다섯 개? 여섯 개? 정확하지 않다. 그는 최준환에게 다시 문자를 보낸다.

"확실해?"

최준환은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대신 그 대신 전화가 온다. 이준혁 반장이다.

"차준호? 나 이준혁이야. 너 지금 어디야?"

차준호는 전화를 끊는다.

---

오후 2시 15분, 차준호는 아파트 복도에 선다. 1502호 앞. 문을 두드린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두드린다. 초인종을 누른다. 반응이 없다.

차준호는 메모장을 다시 본다. "이웃 주민 1502호 (이미숙?)". 괄호 안의 물음표가 자신을 조롱한다. 왜 물음표를 썼지? 이미숙의 이름이 확실하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이미숙이 아닌가? 누구지?

문이 열린다. 옆 1501호다. 할머니가 나온다.

"뭐 하세요?"

"1502호... 사람이..."

"공실이지. 3개월 전에 나갔어."

"뭐?"

"1502호, 공실이라고. 누구 사세요?"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메모장을 다시 본다. 같은 페이지에 여러 글씨가 섞여 있다.

"이미숙 증언 예상: 피 냄새를 맡았다. 오전 5시쯤."

이 글씨가 누가 쓴 거지? 자신이 쓴 건가? 자신이 쓴 거라면, 왜 공실에 사는 사람의 증언을 예상했지?

"내가 이 이름을 왜 썼지?"

중얼거림이 나온다. 할머니가 이상한 듯 본다.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준호는 계단을 내려간다. 손가락을 센다. 왼손부터. 하나, 둘, 셋, 넷. 오른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아홉 개다. 손가락이 아홉 개인 사람이 있나?

---

오후 3시 30분, 신은희 형사의 전화가 온다. 차준호의 핸드폰으로.

"차준호, 나 신은희야. 당신 지금 어디야?"

차준호는 아파트 로비에 서 있다. 거울 앞에 서 있다. 광대뼈를 만져본다. 튀어나왔다. 그런데 아까보다는 안 튀어나왔다. 아니다. 튀어나왔다. 자신의 얼굴이 뭔가 계속 변한다.

"경찰서로 와야겠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뭐요?"

"박민지 양이 당신을 신고했어. 당신이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접근했다고. 당신이 뭔가 하고 있는 건 분명해. 뭘 하고 있는 거야?"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경찰서로 와. 지금."

통화가 끝난다. 차준호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얼굴이 자신을 응시한다.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인가?

---

오후 4시 12분, 경찰서 조사실.

이준혁 반장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신은희 형사는 서 있다. 차준호는 의자에 앉아 있다. 손이 떨린다.

"차준호, 박민지 양을 몇 번이나 찾아갔어?"

"..."

"답해."

"한 번."

"거짓이지. CCTV에 넌 다섯 번 들어갔어. 다섯 번."

"..."

이준혁이 테이블을 친다. 탁.

"넌 뭔가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데? 증거를 만들고 있는 거 아니야? 우리가 너를 기소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만들려고?"

차준호는 입을 다문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신은희가 앞으로 나온다. 테이블 위에 폴더를 놓는다. 그 안에는 사진들이 있다. 차준호의 사진.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사진인데, 얼굴이 매번 다르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

"넌 루프에 갇혀 있어. 매 루프마다 너는 변해. 얼굴도 변하고, 손도 변하고, 기억도 변해. 그런데 넌 계속 같은 짓을 반복해. 증거를 만들려고."

신은희가 말을 멈춘다. 그리고 웃는다.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연민의 웃음이다.

"우리가 너한테 뭘 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본다. 손가락이 떨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상이다. 정상인가?

"가."

신은희가 말한다.

"뭐?"

"가. 나가. 우린 아직 너를 기소할 증거가 없어. 하지만 있을 거야. 결국엔."

차준호는 일어난다.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가 무거워 보인다. 그는 문을 향해 간다. 이준혁은 그를 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다.

"차준호."

차준호가 돌아본다.

"그날 밤 넌 정말 뭘 했어?"

"..."

"대답해봐. 넌 정말 서연을 죽였어?"

차준호는 거울을 본다. 조사실 벽에는 거울이 없지만, 그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얼굴이 자신을 응시한다. 그 얼굴이 자신인가?

차준호는 경찰서를 나간다.

---

오후 5시 47분, 차준호는 아파트에 돌아온다. 침대에 누운다. 천장을 본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제 천장에 적혀 있던 글씨 "당신은 누구야?"는 사라져 있다. 누가 지웠지?

손가락을 센다. 왼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열 개다. 정상이다.

그런데 왜 손이 떨리지?

메모장을 다시 펼친다. 페이지마다 글씨로 가득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필체로.

"너는 뭘 기억하고 있어?"

차준호는 이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 자신이 뭘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서연의 얼굴. 그 밤 비명. 손에 묻은 피. 경찰서의 심문. 박민지의 얼굴. 최준환의 목소리. 이준혁의 질문.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조작한 기억인가?

손가락을 다시 센다. 열 개다. 아홉 개다. 여덟 개다. 정확하지 않다.

자정이 다가온다. 시계가 11시 59분을 가리킨다.

차준호는 눈을 감는다.

자정이 온다.

침대에서 눈을 뜬다.

손에는 피가 있다.

손가락은 몇 개인가?

# 기억의 균열

자정, 손에 피가 묻어 있다.

왼손부터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개. 정상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떨린다. 왜 떨리지?

욕실로 간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자신인지 확신할 수 없다. 눈이 다르다. 어제 본 눈과 다르다. 아니면 자신이 계속 변하고 있는 건가? 메모장을 펼친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자신이 쓰지 않은 글씨가 있다. "너는 뭘 기억하고 있어?" 손글씨체가 자신의 것과 다르다. 더 크고, 더 날카로다.

시간이 자정 15분을 가리킨다.

차준호는 침대 아래 숨겨둔 노트를 꺼낸다. 전 루프에서 정리한 증인들의 증언이 적혀 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가며 읽는다. 기억이 흐릿하다. 마치 물 속에서 글자를 읽는 것 같다.

박민지 (편의점 직원): "손가락이 아파 보였어요. 왼손이."

최준환 (친구): "그날 밤 넌 피투성이였어. 얼굴도, 옷도."

이웃 주민 (3층 303호): "울음소리가 들렸어. 여자 목소리."

세 가지 증언인데, 뭔가 이상하다. 차준호는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그날 밤은 어땠지?

기억이 없다.

정확히는 기억이 여럿이다. 동시에 여러 개의 다른 기억이 겹쳐 있다. 자신이 왼손으로 칼을 들었던 것 같은데, 오른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서연이 비명을 질렀던 것 같은데, 침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파트가 조용했던 것 같은데, 시끄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기억 조작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의 기억 1시간씩이 사라진다고 했다. 지금까지 몇 시간이 사라졌지? 7시간? 8시간? 세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센 것처럼 세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기억도 그렇다.

오후 1시 30분, 편의점.

차준호는 박민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차준호를 본다. 표정이 이상하다. 불안하다. 마치 누군가를 보는 것처럼, 두렵게.

"안녕하세요."

차준호가 말한다.

"어... 안녕하세요."

박민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차준호는 이 떨림이 자신의 기억 조작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른다.

"어제 뵀던 분 같은데요."

"그렇나."

"어제... 당신이 날 찾아왔어요?"

차준호는 박민지를 본다. 그녀의 눈이 움직인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본다. 손가락이 몇 개인가? 다섯 개다. 왼손에 다섯 개. 정상이다.

"기억이 안 나."

"CCTV에 다섯 번이나 찍혔대요. 경찰이 와서 물었어요. 당신이 계속 날 찾아왔냐고."

차준호의 몸이 경직된다. 다섯 번? 그는 편의점에 한 번 왔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시간이 섞인다. 어제, 그제, 그 전날이 모두 같은 자정에서 시작되는데, 하루의 사건들이 섞여 있다.

"당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어요. 분명히."

"그래?"

"네. 그런데 지금은 없네요."

차준호는 손을 본다. 손가락이 몇 개인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정상이다. 피는 없다. 언제 씻었지? 기억이 없다.

박민지가 문을 향해 간다. 가려고 한다. 차준호는 그녀의 팔을 잡는다. 손가락으로.

"잠깐."

"뭐... 뭐예요?"

"기억을 확인해주려고."

차준호의 손가락이 박민지의 팔을 꼬아 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어두워진다. 마치 누군가가 불을 껐다가 다시 켜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밝아진다.

박민지는 여전히 차준호의 팔 앞에 서 있다.

"그날 밤 당신은 뭘 봤어?"

"저... 뭘 봤어?"

박민지의 기억이 조작되었다. 새로운 기억이 그녀의 의식 속에 심어졌다. 그런데 차준호는 정확히 뭘 심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뭘 조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이 봤던 그날 밤, 정확히 뭘 봤는지 말해줄래?"

박민지가 눈을 깜빡인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보였어?"

"뭐?"

"당신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어?"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이 그날 밤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조작한 기억 속에서 자신은 무엇이었는가? 검은 옷? 흰 셔츠? 아니면 다른 것?

"당신이... 왼손이었나, 오른손이었나?"

"뭐?"

"피. 피가 어느 손에 묻어 있었어?"

박민지는 눈을 감는다. 조작된 기억과 현실이 섞여 있다. 그녀는 차준호의 얼굴을 본다.

"왼손... 아니 오른손..."

"뭐가 맞아?"

"모르겠어요."

박민지가 울음을 터뜨린다. 조용한 울음이다. 눈물만 흘린다. 차준호는 그녀를 본다. 그리고 이상한 생각을 한다. 자신이 만든 이 거짓 기억이 박민지의 진짜 기억을 덮어버렸는가? 아니면 이미 덮여 있던 다른 무언가를 더 덮어버린 건가?

"가야 해."

차준호가 편의점을 나간다.

오후 3시 22분, 차준호는 아파트 3층 303호 앞에 선다. 이웃 주민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열린다. 중년 여성이 나타난다. 그녀는 차준호를 본다.

"네?"

"그날 밤 울음소리를 들으셨다고 했는데."

"누세요?"

"경찰 조사에 협조해주신 분이라고."

여성의 얼굴이 경직된다.

"저 사람... 당신이..."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서."

차준호의 손가락이 여성의 팔을 향한다. 그런데 손이 떨린다. 손가락이 정상인가? 셀 시간이 없다.

손가락이 팔을 꼬아 돈다.

어둠. 밝음.

여성은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날 밤 울음소리가 어땠어요?"

"어... 여자 목소리였어요. 비명이."

"누가 비명을 질렀어요?"

여성이 눈을 깜빡인다.

"당신... 당신이?"

"뭐?"

"음... 아니, 여자가. 여자 목소리였어."

"어디서?"

"15층. 당신 층에서."

차준호는 여성을 본다. 그녀의 조작된 기억에서, 차준호는 무엇인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목격자인가?

"정확히 뭘 들었어요?"

여성이 입술을 깨문다.

"비명... 그리고 물음. 아니, 물음이 맞나? 뭔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 묵직한 소리."

"뭐가 떨어졌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무거운 게 떨어진 것 같았어."

차준호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것은 자신이 조작한 기억인가? 아니면 여성의 원래 기억인가? 자신이 뭘 조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차준호가 돌아선다.

"잠깐."

여성이 말한다.

"당신... 진짜 당신이 맞아요?"

"뭐?"

"어제 경찰이 와서 물었어요. 그날 밤 당신을 봤냐고. 그런데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 목소리만 들었어. 그런데 경찰은 당신이 범인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기억했어요. 당신이 뭔가 했다고. 하지만 진짜 뭘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차준호는 여성을 본다. 그녀의 눈에는 확신이 없다. 조작된 기억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다. 자신이 만든 거짓이 그녀의 진짜 기억을 왜곡했다.

오후 4시 12분, 경찰서 조사실.

이준혁 반장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신은희 형사는 서 있다. 차준호는 의자에 앉아 있다. 손이 떨린다.

"박민지 양이 신고했어. 당신이 계속 자기를 찾아간다고."

"..."

"CCTV 기록에 당신은 편의점에 다섯 번 방문했어. 매번 박민지 양과 접촉했어. 뭐하는 거야?"

차준호는 입을 다문다. 뭐하는 거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증거를 만들고 있다? 거짓 증거? 아니면 진짜 증거?

"그리고 3층 303호 주민도 경찰에 전화했어. 당신이 자기 기억을 조작하려고 한다고."

"기억 조작?"

신은희가 웃는다. 그것은 조롱이다.

"당신이 뭔가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사람들은 당신한테 접근당하면 이상한 기분을 느껴. 마치 누군가가 자기 머릿속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것처럼."

이준혁이 테이블을 친다. 탁.

"넌 뭔가 계획하고 있는 것 같은데? 증거를 만들고 있는 거 아니야?"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손가락이 떨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개다. 정상인가?

"내가 물어본 거 대답해. 넌 뭘 하고 있어?"

"..."

신은희가 앞으로 나온다. 테이블 위에 폴더를 놓는다. 사진들이 있다. 차준호의 사진. CCTV에서 촬영된 사진들인데, 얼굴이 매번 다르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

"루프 1차: 이 얼굴. 루프 2차: 이 얼굴. 루프 3차: 이 얼굴. 루프 4차: 이 얼굴. 계속 변해."

차준호는 사진을 본다. 정말 얼굴이 다르다. 첫 번째 사진의 자신은 더 젊어 보인다. 마지막 사진의 자신은 더 지쳐 보인다.

"그리고 이거 봐."

신은희가 다른 폴더를 놓는다. 이번에는 증인들의 증언 기록이다.

박민지의 증언 (1차): "그 사람 손가락이 아파 보였어요. 왼손이."

박민지의 증언 (2차): "그 사람 손가락이 아파 보였어요. 오른손이."

박민지의 증언 (3차):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박민지의 증언 (4차): "그 사람이 정말 피투성이였나요? 기억이 이상해요."

"같은 증인인데 매번 다른 증언해. 왜 그럴까?"

"..."

"아, 혹시 이 증인이 거짓말하는 건가? 아니면 당신이 뭔가 하는 건가?"

이준혁이 일어선다. 차준호를 내려본다.

"넌 뭔가를 만들고 있어. 증거를. 거짓 증거. 우린 알아. 넌 우리가 너를 기소할 만큼 증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증거를 만들려고 하는 거야. 증인들을 협박하거나, 돈을 주거나, 뭔가를 해서 증언을 바꾸려고."

"제가 그런 건..."

"닥쳐."

이준혁이 손을 든다.

"우리가 너를 기소할 증거가 없다면, 우린 다른 죄로 기소해. 증거 조작죄. 증인 협박죄. 증언 변조죄. 넌 뭔가 하고 있어. 우린 그걸 알아."

신은희가 앞으로 나온다. 테이블 위에 또 다른 폴더를 놓는다. 이번에는 사진이 아니라 종이다. 메모장 이미지다.

"이건 뭐야?"

차준호는 메모장을 본다. 자신의 노트다. 자신이 쓴 글이다. 증인들의 증언이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자신이 쓰지 않은 글씨가 있다.

"너는 뭘 기억하고 있어?"

"이건 제가 쓴 게 아니라..."

"뭐?"

"제가 쓰지 않은 글씨예요."

신은희가 웃는다.

"너 자신도 뭘 썼는지 모르는 거네?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

"우리가 너한테 뭘 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차준호는 대답하지 못한다. 손가락이 떨린다. 몇 개인가?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런데 왜 떨리지? 손가락이 떨린다는 건 뭔가 빠졌다는 뜻 아닌가?

"가."

신은희가 말한다.

"뭐?"

"나가. 아직 우린 너를 기소할 증거가 없어. 하지만 있을 거야. 결국엔."

차준호는 일어난다. 다리가 무거워 보인다. 정말 자신의 다리인가?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문을 향해 간다.

"차준호."

이준혁이 말한다.

차준호가 돌아본다.

"그날 밤 넌 정말 뭘 했어?"

"..."

"대답해봐. 넌 정말 서연을 죽였어?"

차준호는 거울을 본다. 조사실 벽에는 거울이 없지만, 그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얼굴이 자신을 응시한다. 그 얼굴이 자신인가?

손가락을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개다. 정상이다.

그런데 정상이란 뭐지?

"제... 모르겠어요."

차준호가 대답한다.

"뭐?"

"제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준혁과 신은희는 서로 눈을 맞춘다. 그들의 표정에는 승리감이 있다. 마치 자신들이 맞다고 증명된 것처럼.

차준호는 경찰서를 나간다.

오후 5시 47분, 차준호는 아파트에 돌아온다. 침대에 누운다. 천장을 본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제 천장에 적혀 있던 글씨 "당신은 누구야?"는 사라져 있다. 누가 지웠지?

손가락을 센다. 왼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손: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열 개다. 정상이다.

그런데 왜 손이 떨리지?

메모장을 다시 펼친다. 페이지마다 글씨로 가득하다. 마지막 페이지에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필체로.

"너는 뭘 기억하고 있어?"

차준호는 이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 자신이 뭘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서연의 얼굴. 그 밤 비명. 손에 묻은 피. 경찰서의 심문. 박민지의 얼굴. 최준환의 목소리. 이준혁의 질문. 신은희의 웃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기억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조작한 기억인가?

손가락을 다시 센다. 열 개다. 아홉 개다. 여덟 개다. 정확하지 않다.

자정이 다가온다. 시계가 11시 59분을 가리킨다.

차준호는 눈을 감는다.

자정이 온다.

침대에서 눈을 뜬다.

손에는 피가 있다.

손가락은 몇 개인가?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그 순간, 차준호는 뭔가를 깨닫는다. 손가락을 세는 행위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왜 자신은 계속 손가락을 세는가? 왜 손가락의 개수가 계속 변한다고 생각하는가?

손가락은 항상 열 개다.

그런데 자신의 기억은 계속 줄어든다.

그리고 그 차이가 뭔가를 의미한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