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되자 손에 묻은 피가 사라졌다.
차준호는 욕실 거울 앞에서 손가락을 펼쳤다 오그렸다를 반복했다. 피 자국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어제는 분명히 있었다. 손톱 사이까지 묻어 있던 그 피가.
핸드폰을 집었다. 신은희 형사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 혈액형 재검사 결과. 손에 묻은 피는 서연이 아닙니다. 8시부터 9시 사이 당신의 행동을 증명할 증거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차준호는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다. 같은 내용이 계속 나타났다. 혈액형이 다르다는 메시지. 그런데 자신의 손에는 피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을 말하는 건가. 경찰이 발견한 피는 서연의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은 처음부터 피를 닦아낸 건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 건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 맞나 싶었다. 눈썹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눈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최준환이었다.
"어? 넌 뭐 해?"
차준호는 대답 없이 듣고 있었다.
"차준호? 들려?"
"응."
"너 지금 괜찮아? 어제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차준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2시 13분. 왜 최준환이 이 시간에 전화를 했을까. 루프다. 다시 시작된 거다.
"최준환."
"뭐?"
"그날 밤. 너 뭐 봤어?"
전화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차준호는 손가락을 꼬았다. 손가락 관절이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상했다. 손가락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세어보니 한쪽에만 6개가 있었다. 다시 세었다. 5개였다. 처음부터 5개였다.
"차준호. 뭘... 뭘 물어보는 거야?"
최준환의 목소리가 떨렸다. 차준호는 손가락 꼬기를 더 강하게 했다.
"그날 밤 내가 전화했잖아. 넌 뭘 들었어?"
"전화? 너 뭐가 이상해."
기억 조작이 시작되었다. 차준호는 느낄 수 있었다. 최준환의 뇌 속에서 뭔가 흐릿한 것이 또렷해지는 감각. 마치 안경을 쓰는 것처럼. 신경세포들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미세한 진동. 그 과정 속에서 차준호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거짓이 진실로 변모하는 순간, 누군가의 기억이 자신의 손 안에서 재구성되는 감각. 죄책감과 희열이 뒤섞인 그 감정.
"그래. 내가 전화했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어. 그리고 넌...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지. 내가 뭘 한 건지 물었지."
"응? 나? 나 뭐라고..."
"그리고 넌 말했어. '준호, 넌 뭘 한 거야. 왜 이러는 거야'라고."
전화 저쪽에서 최준환의 호흡이 빨라졌다.
"맞아. 맞다. 나... 난 그런 말을 했어."
"그리고 그 다음날 경찰이 왔어. 넌 내가 뭘 했는지 경찰한테 말했지."
"응. 응... 말했어."
차준호는 손가락을 풀었다. 기억 조작이 완료되었다. 24시간 동안 최준환은 이 거짓된 기억을 진실로 믿을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기억해. 내가 언제 전화했는지, 뭐라고 했는지."
"차준호, 넌 정말..."
차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최준환은 증인이 되었다.
침대로 돌아왔다. 손가락을 다시 펼쳤다. 엄지부터 새끼까지. 1, 2, 3, 4, 5. 맞다. 5개다. 그런데 왜 아까는 6개처럼 보였을까.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신은희였다.
"차준호. 당신 지금 어디 있어?"
"집에. 왜?"
"CCTV에 당신이 편의점에서 박민지에게 접근하는 모습이 찍혔어요. 오전 1시 47분. 당신은 그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꼬았습니다."
차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프가 초기화되지 않았나. 박민지의 기억도, 최준환의 기억도 모두 증거로 남아 있다. 조작된 기억이 현실의 증거가 되어 자신을 옭아맸다.
"그건... 그건..."
"당신이 해야 할 말은 묵비권 행사하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다시 조사받으러 나오세요."
신은희는 전화를 끊었다.
차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3시 47분. 1시간 34분이 지나갔다. 그런데 자신은 그 사이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신은희와 통화 이후로 뭘 했는지 전혀 모른다.
침대 옆 책상에 노트가 있었다. 글씨를 읽어봤다.
─ 3시간. 기억이 3시간 없어졌다. 능력을 썼을 때마다 1시간씩. 누적 3시간.
글씨가 흔들렸다. 손이 떨리면서 쓴 글씨처럼. 하지만 이건 자신의 글씨가 아니었다. 필체가 낯설었다.
노트를 계속 넘겨봤다.
─ 박민지. 편의점 직원. 첫 번째 조작. 오전 1시 47분 촬영. CCTV 증거 남음. ─ 최준환. 친구. 두 번째 조작. 통화 기록 추적됨. ─ 서연. 죽음. 확실한가? ─ 손의 피. 혈액형 다름. 누구의 피인가?
마지막 줄이 자신의 필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씨였다. 누군가 자신의 노트에 글을 적어 놓은 것이다.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입을 벌렸다.
"뭘 하고 있어?"
차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의 얼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사진처럼.
"그날 밤이 정말 있었어?"
거울 속의 입이 또 움직였다. 하지만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침대로 돌아갔다. 천장을 봤다. 천장에 뭔가 그려져 있었다.
─ 당신은 뭘 했어?
차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글씨가 보였다.
오전 4시가 되자 손의 피가 다시 나타났다.
손가락 사이에, 손톱 밑에, 손목 근처에. 아까와는 다른 패턴이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손에 피를 묻힌 것처럼.
차준호는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물이 붉게 변했다. 손을 씻는 와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자신이 박민지의 기억을 조작했다. 편의점에서 만났고, 손가락을 꼬았고... 그런데 CCTV에 그 장면이 찍혀 있다면, 조작이 아니라 실제 행동이었다는 뜻인가.
손을 씻다 말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신과 다르게 생겼다. 코가 더 크고, 눈이 더 작고, 입이 더 넓었다. 그리고 왼쪽 관자놀이에 길게 패인 흉터가 있었다.
"뭘 봐?"
거울 속의 얼굴이 입을 벌렸다.
"당신은 뭘 한 거야?"
차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거울 속의 얼굴은 계속 자신을 봤다.
핸드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차준호. 맞지?"
목소리가 낮고 차갑했다. 남자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누세요?"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는 뭘 하고 있어?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들의 기억을 바꾸고?"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지금 누군가의 진짜 범행을 덮고 있어. 너의 거짓 증거가. 알아?"
그 말이 차준호의 뇌를 관통했다. 누군가의 진짜 범행. 자신이 무언가를 덮고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자신은 무엇을 덮고 있는가. 자신이 한 일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 일인가.
"서연은 뭐 했어? 그날 밤 서연은 정말 죽었어?"
차준호는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넌 기억을 잃고 있어. 루프가 반복될 때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이용하고 있어."
전화가 끊겼다.
차준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 목소리가 누구였나. 그리고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인가. 자신이 정말로 누군가의 범행을 덮고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왜.
자정이 되자 모든 게 초기화되었다.
차준호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손을 확인했다. 피가 있었다. 손톱 사이에, 손목 근처에. 그런데 아까와는 다른 패턴이었다.
침대 옆 책상의 노트를 다시 봤다. 글씨가 또 늘어나 있었다.
─ 4시간. 기억이 4시간 없어졌다. 누적 7시간. ─ 최준환이 경찰에 신고했나? 아니면 신은희가 조작한 건가? ─ 그 전화. 누가 전화했어? 무슨 말이었어? ─ 서연이 정말 죽었나? ─ 거울 속 얼굴. 흉터가 있었다. 왼쪽 관자놀이. 내 얼굴이 아니다.
마지막 줄이 자신의 글씨가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노트에 글을 적어 놓은 것이다.
차준호는 노트를 집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을 다시 세었다. 1, 2, 3, 4, 5. 맞다. 5개다. 그런데 왜 계속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아까 분명히 6개였는데. 아니다. 처음부터 5개였나. 기억이 불명확했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 맞나 싶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얼굴 뒤로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의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다. 왼쪽 관자놀이에는 길게 패인 흉터가 있었다. 그 흉터가 자신에게도 있었나.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봤다. 흉터가 없었다. 그렇다면 거울 속의 뒤에 있는 그 얼굴은 누구인가.
차준호는 빠르게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울을 다시 보니 여전히 두 개의 얼굴이 보였다.
침대로 돌아갔다. 손의 피를 다시 확인했다. 피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의 피는 흐릿해졌고, 손톱 밑의 피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피의 패턴이 계속 변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신은희였다.
"차준호. 당신 지금 어디 있어?"
"집에..."
"혈액형 재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당신 손의 피는 혈연 관계 있는 제3자의 것입니다."
혈연 관계. 그 말이 차준호의 뇌를 스쳤다. 혈연이 있는 제3자. 그렇다면 누구인가.
"그리고 또 하나. CCTV 분석 결과에서 당신이 박민지를 만났을 때 손가락 개수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은희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정지 화면으로 확인했어요. 명확히 6개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현재 신체 정보상 손가락은 5개예요.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세요."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5개였다. 분명히 5개였다. 그런데 CCTV에는 6개가 찍혔다. 그렇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이 변했다는 뜻인가.
"차준호?"
신은희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들렸을 때 그 목소리는 신은희의 것이 아니었다. 더 낮고, 더 차갑고, 더 익숙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뭘 한 거야? 진짜로."
차준호는 전화기를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그 목소리는 거울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전화로 걸려온 미지의 남자 목소리와도 같았다.
손을 다시 봤다. 손가락이 6개였다. 분명히 6개였다. 그 다음 순간 다시 5개였다. 손가락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마치 호흡하듯이.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준호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천장에 적힌 글씨가 또 변해 있었다.
─ 당신은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