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자정, 침대에서 눈을 뜬 차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색. 손톱 사이사이까지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니 꽤 오래전 일인 듯했다.

이 손으로 서연을 죽였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지 48시간이 남았다. 그 동안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법이 풀어줬다는 것이 무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증거가 부족했을 뿐이다.

차준호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의 얼굴은 낯설었다.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세한 경련이 있었다. 이건 자신이 아니었다.

물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완전히 깨끗해질 때까지 문질렀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톱 아래, 손목까지. 거울에 비친 자신은 점점 더 낯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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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은 오전 7시쯤 도착했다. 박민지가 카운터 뒤에서 진열대를 정렬하고 있었다. 검은색 조끼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차준호를 보고 인사했다. 평범한 손님을 보는 눈이었다.

"아, 어제 왔던..."

박민지가 말을 흐렸다. 뭔가 막혔다. 차준호가 어제 왔다는 건 기억하는데, 그 다음이 안 나왔다.

차준호가 다가갔다.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그날 밤. 내가 여기 왔지?"

박민지의 표정이 굳었다.

"어... 네?"

"정확히 기억해봐. 그날 밤 11시 반쯤. 나를 봤잖아."

차준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방식은 정확했다. 특정 지점, 신경총이 모여 있는 곳. 박민지의 눈이 흐려졌다. 동공이 확장되고 초점이 사라졌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맞다... 봤어요..."

"내가 어떻게 보였어?"

"손에... 손에 피가..."

박민지의 목소리가 기계적이었다. 차준호는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박민지의 뇌에 새겨 넣은 기억. 그것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때의 감각. 법이 풀어준 자신을 다시 가두기 위한 첫 번째 도구.

그 감각은 중독성 있었다. 자신이 타인의 기억을 조종한다는 확신. 그녀가 자신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는 확실함. 하지만 그 쾌감 뒤에는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이건 범죄다. 이건 살인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 나쁠지도 모른다. 적어도 살인은 한 번이지만, 이건 계속된다.

"정확하게 말해. 내가 뭘 했는지."

"싸웠어요. 그 여자와. 당신이... 정당방위를..."

차준호는 그녀의 손목을 놨다. 박민지는 천천히 정신을 돌아왔다. 눈이 초점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이미 조작되었다. 24시간 동안 이 거짓이 진실이 될 것이다.

"고마워."

차준호는 편의점을 나갔다. 다음은 최준환이었다. 최준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기억도 조작해야 했다. 세 명만 더 조작하면 증거의 연결고리가 완성된다. 그러면 경찰은 자신을 범인으로 확정할 것이고, 그 증거들이 모순되기 시작하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차준호는 휴대폰을 꺼냈다. 최준환의 번호를 찾았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시간이 뒤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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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었다.

시계가 정확히 00:00을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었다.

손의 피의 양이 달랐다. 어제보다 적었다. 손가락 끝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차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아침 8시부터 9시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편의점에 갔다. 박민지를 만났다. 그 다음이... 없었다.

공포가 등에 타고 올라왔다. 손을 다시 펼쳤다. 피의 양을 확인했다. 양이 줄어든 게 맞았다. 하지만 시간은 돌아왔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신은희 형사

"여보세요."

신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명확했다.

"차준호, 편의점 CCTV 확인했어요. 당신이 직원 박민지와 접촉하는 장면 있네요. 그 후 직원의 진술이... 뭔가 이상해요. 처음엔 당신이 피를 묻히고 있었다고 했다가, 다시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난대요. 기억이 계속 바뀌어요. 당신, 뭘 한 거죠?"

차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박민지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경찰이 본 CCTV는 뭔가?

"아, 그리고 하나 더. 당신 아파트에서 발견된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생각보다 적네요. 사람이 죽기엔... 너무 적어요. 그런데 당신 손에는 이렇게 많은 피가 묻어 있었죠."

신은희가 말을 이었다.

"혈액형도 다르고요. 아파트에서 발견된 혈액과 당신 손에 묻은 피의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아요."

차준호의 호흡이 멈췄다.

"뭐... 뭐라고?"

"혈액형이 달라요. 우리가 당신을 의심했던 건 당신 손의 피예요. 그런데 그 피가 아파트의 피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증거 조작죄로 추가 조사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경찰서 와요."

전화가 끊겼다.

차준호는 손을 다시 봤다. 검붉고, 끈기 있고, 손가락 사이에 말라붙은 상태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이 피가 서연의 피였다. 하지만 신은희의 말에 따르면 혈액형이 다르다고 했다.

혈액형이 다르다는 게 무슨 소리지?

신은희가 어떻게 이미 혈액형 검사 결과를 가지고 있을까? 루프가 초기화되었는데? 자신이 박민지를 조작한 것도 이번 루프에서 처음이었는데?

차준호는 침대 옆 거울을 봤다.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8시부터 9시까지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한 시간 동안 자신이 뭘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끔찍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1시간 전의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박민지와의 대화는 없었다. 루프가 초기화되었으니까. 하지만 경찰의 CCTV에는 자신이 박민지와 접촉하는 장면이 남아 있다고 했다.

증거는 남는다. 조작된 기억은 초기화되지만, 증거는 남는다.

차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피의 양을 다시 세어봤다. 손가락 끝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닦은 것처럼. 아니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닦은 것처럼.

자신이 한 시간 동안 뭘 했는지 모른다.

그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시간을 도려낸 것 같았다. 신체적 고통은 없었지만, 정신적 공포는 실제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경험.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 그것은 죽음보다 끔찍했다.

차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손을 씻어야 했다. 피를 닦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증거가 사라진다. 신은희에게 다시 잡혀가면 손가락 사이에 남은 피를 검사할 것이다.

거울 앞에 섰다. 손을 물에 적셨다. 비누를 거품 내려고 하다가 멈췄다.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봤다. 그 눈이 자신의 눈이 맞나? 낯선, 두려운, 확신 없는 눈.

손을 씻지 않기로 했다. 피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증거를 보존하기로 했다. 아니면 그 증거를 없애기로 했다. 결정할 수 없었다. 8시부터 9시 사이의 기억 때문에 결정할 수 없었다.

침대로 돌아갔다. 시계를 봤다. 00:15였다. 루프 안의 시간은 이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48시간 동안 자신은 박민지를 만나고, 최준환을 만나고, 누군가 다른 증인을 만날 것이다. 매번 기억을 조작할 것이다. 매번 자신의 기억이 1시간씩 지워질 것이다.

다섯 번의 루프면 5시간이 지워진다.

열 번의 루프면 10시간이 지워진다.

자신이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할 수 있을까? 하루에 24시간이 있는데, 자신은 얼마나 많은 기억을 조작할 수 있을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자: 최준환

차준호는 받지 않았다. 최준환이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친구 역시 루프 반복 속에서 기억을 조작당할 인물이었다. 차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음 루프에서 자신이 최준환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조작할 것이다.

최준환은 자신을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의 기억을 조작해 자신의 공범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차준호는 손을 다시 펼쳤다. 피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피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피가 증거였다. 그 증거가 자신을 범인으로 만들 것이다.

아니면 그 증거가 자신을 무고함으로 만들 것이다.

차준호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다음 만남까지, 다음 조작까지, 다음 기억 소실까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차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휴대폰을 켰다. 신은희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통화 기록에는 몇 분 전 수신 기록만 있었다. 발신 기록은 없었다. 루프가 초기화되었으니까.

하지만 신은희가 말한 것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CCTV는 이미 촬영되었을 것이다. 혈액형 검사 결과도 이미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희는 자신이 박민지를 만나기 전부터 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면 신은희가 말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자신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허세였을까?

차준호는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의 피를 확인했다. 그 피가 자신의 피인지, 서연의 피인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8시부터 9시 사이의 기억이 없다는 것.

그 시간에 자신이 뭘 했는지 몰라도, 그 시간은 분명히 자신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워졌다는 것은 자신이 그 시간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자신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도려냈다.

그 확신이 차준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이 타인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면, 누군가도 자신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유일한 능력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차준호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봤다. 시계의 초침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루프 안에서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사라진 기억이 알려줄 것이다.

차준호는 손을 다시 펼쳤다. 피의 양이 또 줄어들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계속 닦고 있는 것처럼. 혹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닦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8시부터 9시 사이에 자신이 한 일이 뭘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차준호는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었다. 문을 열었다.

아파트 복도가 어두웠다. 밤 12시 30분.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차준호는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지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발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8시부터 9시 사이에 한 행동을 반복하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남자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차준호 자신처럼. 그 남자는 차준호를 보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공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차준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차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그 남자가 자신을 아는 것처럼, 차준호도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기억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 기억도 도려낸 것처럼.

차준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어딘가 낯익은 듯하면서도 완전히 낯선. 그의 눈빛, 그의 표정, 그의 목소리 톤. 모두가 자신과 같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차준호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댔다.

"나도...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1시간이 통째로 없어. 8시부터 9시까지."

차준호의 피가 얼었다.

같은 시간대. 같은 기억 소실.

"당신도?"

"뭐가 일어나는 거야? 당신이 뭘 한 거야?"

남자가 차준호를 노려봤다. 그 눈빛 속에는 공포만큼이나 분노가 가득했다.

"나를 만났어. 8시에. 그리고..."

남자가 말을 흐렸다.

"그리고 뭐?"

"기억이 안 나. 뭘 했는지 몰라."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차준호는 손을 뻗어 문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 순간, 차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8시부터 9시 사이에 만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기억 소실을 겪고 있다는 것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차준호는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야 했다. 아니, 처음 만나야 했다. 기억이 없으니까.

계단을 내려가며 차준호는 생각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그 남자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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