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에 묻은 피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간. 차준호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인 피를 본다.
서연의 비명이 아파트 15층 거실에 울려 퍼졌을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서연!"
손을 씻지 않았다. 씻을 수 없었다. 경찰이 올 때까지 이 피를 간직해야 했다. 이것만이 진실이었다.
경찰 출동은 빨랐다. 이웃 주민의 신고. 비상등을 켠 경찰차. 강남서 분소의 형사들. 그중 가장 먼저 차준호의 손을 본 사람은 신은희 형사였다.
"손을 보여주세요."
신은희의 목소리는 차갑고 절제되어 있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 차준호는 손을 펼쳤다.
"서연은?"
차준호가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렸다.
"아직 찾고 있습니다."
신은희는 손가락으로 혈흔을 가리켰다. 그 순간 동료인 이준혁 반장이 거실 한쪽 모서리에서 손을 들어올렸다.
"형사님, 여기도 있습니다."
아파트 곳곳에 흩어진 피. 거실 벽면. 부엌 타일. 침실 문틀. 마치 격렬한 투쟁의 흔적을 남기듯.
48시간. 그것이 법이 정한 시간이었다. 증거 없이 용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 최대 시간. 경찰청 지하 심문실에서 차준호는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다.
"서연을 어디에 숨겼습니까?"
차준호는 대답했다. 자신이 한 일을 모두 말했다. 그 밤의 모든 것을. 하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다. 아니, 증명할 수 없었다.
"시신이 없습니다."
신은희는 심문실의 테이블 건너편에서 말했다. 표정이 없었다.
"혈흔은 있지만 대량이 아니고, CCTV는 손상되었으며,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내 손에 피가 있습니다."
차준호가 말했다. 손을 펼쳤다. 이미 닦여 있었지만, 손톱 사이에는 여전히 적갈색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혈액형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희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의문이 없었다. 단지 법적 절차만 있을 뿐.
차준호는 그 순간 깨달았다. 경찰이 자신을 풀어줄 것이라는 것을.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무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찰서 계단. 48시간 후. 차준호는 철제 난간을 잡고 한 계단씩 내려갔다.
"증거 부족으로 기소 불가능합니다."
신은희의 말이 위에서 들렸다. 그녀는 내려오지 않았다.
"법이 정한 것입니다. 당신은 자유입니다."
자유. 그 단어가 박혔다. 저주처럼.
"법이 나를 무죄라고 했지만, 나는 유죄다."
차준호가 중얼거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그 말은 반복되었다.
경찰서 밖. 강남의 밤 하늘이 차준호를 맞이했다. 가로등 아래 그림자들. 골목길을 지나는 택시들. 편의점의 형광등.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 차준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손톱 사이의 피를 다시 본다.
증거.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증거 없이는 진실도 없고, 죄도 없고, 벌도 없다. 차준호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골목을 돌아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벽 1시. 편의점 카운터 뒤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박민지. 차준호는 그녀의 이름을 모르지만, 그녀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 밤, 자신이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카운터에서 물건을 정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준호를 봤다. 손에 피를 묻은 채로.
"뭘 찾으세요?"
박민지가 묻자,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박민지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당신... 혹시..."
그 순간, 차준호의 손가락이 꼬였다. 손톱을 반대쪽 손톱으로 할퀴는 행동.
세상이 흔들렸다.
박민지의 의식이 투명하게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날 밤의 편의점. 카운터에 선 자신. 그리고 들어오는 남자.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자신을 향했다.
차준호의 목소리가 박민지의 뇌 속에서 울렸다. 명령이 아니라 속삭임. 기억을 덮어씌우는 속삭임.
"당신이 본 건 정당방위다. 그 여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 당신이 본 건 그것뿐이다."
박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운터를 움켜잡은 손가락이 까져 피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뇌 속에서만 불이 타고 있었다.
원래의 기억이 저항했다. 손에 피를 묻은 남자의 모습. 그의 떨리는 손. 그의 공포. 하지만 차준호는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기억의 결을 거슬러 새로운 이야기를 새겨 넣었다.
박민지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당신이...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기계적인 목소리. 조작된 기억을 읊조리는 목소리. 차준호는 손을 놨다.
박민지는 카운터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당신... 누구세요?"
박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작된 기억과 원래의 기억이 뒤엉켜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오후 6시까지 이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까지 조작된 기억이 우위를 점할 것이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복구될 것이다. 원래의 기억만 남고, 능력 사용의 흔적만 남을 것이다.
차준호는 편의점을 나왔다. 골목길을 걸으며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피. 여전히 손톱 사이에 남아 있는 그것.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증거가 될 것이다. 거짓된 증거. 조작된 진실. 차준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목에서 나왔다.
법이 자신을 풀어줬다. 하지만 차준호는 자신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증거를 만들 것이었다. 한 명씩. 한 기억씩. 24시간마다. 자신의 죄를 증명할 때까지.
차준호는 휴대폰을 켰다. 최준환의 이름을 검색했다. 친구. 그도 그날 밤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차준호는 잠시 멈췄다. 손에 묻은 피를 다시 봤다. 그 피가 정말 서연의 피인지, 아니면 자신의 피인지. 혹은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피인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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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47분. 강남 거리.
경찰차가 라이온스 마크 아파트 앞에 멈췄다. 신은희와 이준혁이 내렸다. 뒤를 따라 중년 남성 경찰도 내렸다.
신은희는 아파트 입구를 바라봤다. 손에는 수색영장이 들려 있었다. 48시간 후 증거 부족으로 용의자를 풀어줬지만, 여전히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법적 근거가 아니라 직관이었다. 형사로서의 직관. 신은희는 그것을 믿었다.
"한 번 더 봅시다."
신은희가 말했다.
"시신이 없는데 뭘 찾겠습니까?"
이준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래서 더 봐야 합니다. 시신이 없다는 게 답입니다."
신은희는 계단을 올랐다. 이준혁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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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편의점.
차준호는 라면을 집어 들었다. 카운터에 가져갔다. 박민지는 그를 봤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혼란이 남아 있었다. 기억의 충돌. 조작된 것과 원래의 것이 섞여 있는 상태.
"어... 안녕하세요."
박민지가 인사했다. 목소리는 어색했다.
"라면 데워줄 수 있어?"
차준호가 물었다.
박민지는 라면을 받아 들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기억 조작의 부작용이었다. 오후 6시까지는 조작된 기억이 우위를 점하지만, 원래의 기억이 밑에서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여기서 먹을 거예요?"
박민지가 물었다.
"그래."
차준호는 카운터에 앉았다. 박민지가 라면을 담아 냈다. 여전히 그를 보고 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 혹시 여기 자주 오세요?"
박민지가 겨우 물었다.
"처음 왔어."
차준호가 거짓말했다.
박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무언가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의문. 그리고 그 의문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차준호는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기계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민지를 관찰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래 조작된 기억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것이 경찰의 심문에서 어떻게 드러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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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 라이온스 마크 아파트.
신은희와 이준혁은 15층 거실을 다시 훑고 있었다. 혈흔의 위치. CCTV 각도. 창문의 상태. 모든 것을 다시 확인했다.
"여기 봅시다."
신은희가 침실 벽을 가리켰다. 혈흔이 있었던 곳. 하지만 양은 너무 적었다. 사람이 죽기에는.
"혹시 시신을 옮겼을 수도 있습니다."
이준혁이 말했다.
"그렇다면 흔적이 남습니다. 바닥에. 문턱에. 엘리베이터에."
신은희는 침실을 나갔다.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CCTV 카메라가 천장에 달려 있었다. 손상된 카메라. 차준호가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카메라가 손상된 시간이 언제인지 확인했습니까?"
신은희가 물었다.
"그날 밤 11시 30분쯤입니다. 정확한 시간은 아직..."
"그 시간에 차준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파트 안에 있었습니다. 혹은 밖에 있었을 수도..."
신은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내부는 깨끗했다. 혈흔도 없었다. 만약 시신을 옮겼다면 여기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혹시 다른 출입구가 있습니까?"
신은희가 물었다.
"비상계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CCTV가..."
"손상되었나?"
"네."
신은희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철제 문을 열었다. 계단이 보였다. 여기도 깨끗했다.
"차준호는 시신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신은희가 말했다.
"그렇다면 서연은?"
이준혁이 물었다.
신은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아파트 곳곳을 훑고 있었다. 뭔가 놓친 게 있다. 명백한 증거.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차준호의 증인 접촉 패턴.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그가 어디를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신은희는 CCTV 영상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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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편의점 근처 카페.
차준호는 창문을 통해 아파트를 바라봤다. 경찰차가 여전히 앞에 있었다. 신은희와 이준혁은 아파트 안에 있었다. 그들이 뭘 찾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없을 것이다. 차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켰다. 뉴스 앱을 열었다. 아직 서연 사건은 헤드라인에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
차준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꼬집고 싶었다.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하고 싶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너무 빨리 움직이면 패턴이 보일 것이다. 경찰은 똑똑했다. 특히 신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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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7분. 라이온스 마크 아파트 앞.
차준호는 15층 창문을 봤다. 불이 꺼져 있었다. 경찰이 수색했던 그 집.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손톱을 반대쪽 손톱으로 할퀴는 행동.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작할 기억이 없었다. 단지 습관이었다. 중독처럼.
손에 묻은 피를 다시 본다. 손톱 사이에 묻은 그것. 그것이 정말 누구의 피인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혈액형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처음 루프인지, 아니면 반복되는 루프인지도 불명확했다.
그렇다면 이 피는 누구의 것인가?
차준호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피의 맛을 본다. 철분의 맛.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자정이 다가왔다.
차준호의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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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아파트 15층.
차준호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손톱 사이에 묻은 그것.
그는 손을 봤다. 옆을 봤다. 서연이 누워 있어야 할 자리.
아무도 없었다.
침대 옆 시계는 00:00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프가 시작되었다.
차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피. 여전히 그것.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혹은 울음을 터뜨렸다. 구분할 수 없었다.
새로운 루프가 시작되었다. 차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누가 증인이 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기억을 조작해야 하는지.
하지만 한 가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손에 묻은 피가 정말 누구의 피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중요한지.
차준호는 일어났다.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얼굴은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눈은 낯설었다.
손을 씻으려다 멈췄다.
손톱 사이의 피를 다시 본다. 그것을 닦아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자신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것처럼.
차준호는 손톱 사이의 피를 입에 물었다. 다시 한 번. 철분의 맛. 하지만 여전히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의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손가락이 저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손을 할퀴는 것처럼. 하지만 거울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준호는 거울을 봤다. 자신의 눈. 그 눈 속에서 또 다른 눈이 보였다. 겹쳐진 눈. 마치 두 개의 다른 사람이 한 몸에 들어 있는 것처럼.
"누구야?"
차준호가 물었다.
거울 속의 입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차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욕실을 나갔다.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웠다.
손에 묻은 피를 다시 본다.
이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루프에서도 같은 질문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루프에서도.
그리고 그 다음 루프에서도.
차준호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났다. 자신의 피. 철분의 맛. 이전에 본 피와 같은 맛.
그렇다면 손톱 사이의 피도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서연의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것인가?
차준호는 눈을 감았다. 루프 3화가 시작되려 했다.
하지만 자정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는 손에 묻은 피를 본다.
그리고 묻는다.
이것이 정말 누구의 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