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7분. D-68시간 47분.
강남구청 던전 입구 앞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준호가 출입 금지 테이프를 헤치고 나오는 순간, 앞에서 검의 끝이 지면을 그었다.
"멈춰."
강민준이었다. 검은 운동복 차림의 그는 준호를 보자마자 한 손으로 검을 내려놨다. 아니, 내린 게 아니었다. 그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강민준의 눈이 흔들렸다. 동공이 흐릿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중인 것처럼.
"너... 방금 뭐 했어?"
"던전 클리어했는데."
"아니야. 나한테. 너 뭐 했어?"
강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침을 삼켰다.
전화 통화. 강민준을 만나기 전 전화로 그의 정보를 스캔했을 때, 상태창에 접근했을 때의 그 순간. 그 순간 무언가 전달되었다. 마치 두 개의 뇌가 순간 연결된 것처럼. 준호는 강민준의 염동력 A급과 검술 B급을 자신의 상태창에 복제했다. 1시간 30분이 떨어져 나갔다. 현재 남은 수명: 53시간 30분.
"아무것도 안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이 뭘 하는 건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 머리가..."
강민준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의 손이 떨려서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금속음이 울렸다.
"내 생각들이 섞였어. 누가 내 기억에 들어온 거야. 누가..."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공포가 있었다. 그리고 뭔가 더.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표정. 자신을 찾는 듯한.
"넌 누구야?"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진정한 질문이었다.
준호는 답하지 못했다. 강민준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서울숲. 아침 8시. 우리 같이 던전 들어가자."
"왜?"
"넌 뭔지 알아야 해. 넌 뭐냐고."
강민준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준호는 한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준호의 상태창】 ───────────── 이름: 이준호 나이: 18세 남은 수명: 53시간 30분
[능력 목록] - 염동력 A급 (강민준으로부터 복제) - 검술 B급 (강민준으로부터 복제) - 화염 마법 C급 (최창호로부터 복제) - 치유 마법 D급 (박지은으로부터 복제) - 기초 무술 E급 (???로부터 복제)
클리어 던전: 9/24 ─────────────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능력 목록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남의 것이었다. 모두 빌려온 힘이었다.
그럼 자신은?
휴대폰이 울렸다. 고아원 아이들의 영상통화 요청이었다. 화면에는 혜진 언니의 얼굴이 떠 있었다. 뒤로는 열두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야. 우리 살 수 있어?"
가장 어린 아이인 민준이가 물었다. 준호의 입이 떨렸다.
"응. 살 수 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이 밝아졌다. 혜진 언니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우리 믿고 있어."
통화가 끝났다. 준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밤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24개 던전 중 9개를 클리어했다. 남은 던전 15개. 남은 수명 53시간 30분. 하루에 필요한 클리어 시간: 3시간 34분.
불가능하지 않았다. 수학적으로는.
하지만 강민준의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넌 누구야?"
준호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밀어냈다. 시간이 없었다. 서울숲 던전까지는 지하철로 15분.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 58분이었다. 던전 입구 앞에서 정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호.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정수진이 그를 자세히 봤다. 준호는 시선을 돌렸다.
"던전 들어가자."
"잠깐, 내..."
"시간이 없어."
준호가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정수진이 뒤를 따랐다. 던전의 벽면이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야생동물 형태의 몬스터들이 으르렁거리며 나타났다. 곰 같은 형태의 몬스터가 먼저 달려왔다.
준호의 손이 움직였다. 강민준에게서 복제한 검술 B급이 발동됐다. 하지만 그의 몸은 낯설었다. 남의 근육 기억이 자신의 신경계에 스며들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팔을 쓰는 것처럼. 칼이 없었지만 그의 손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몬스터의 목이 잘렸다. 경험치 +12.
다른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달려왔다. 준호는 이번엔 염동력을 썼다. 그 순간, 강민준의 정신 패턴이 자신 안에서 맴돌았다. 마치 다른 의식이 자신의 뇌를 통과하는 것처럼. 공중에서 몬스터들의 몸이 구부러졌다. 척추가 꺾이는 소리. 경험치 +8, +10, +7.
정수진이 뒤에서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아군 버프.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넌 뭔가 달라졌어."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 준호는 최창호의 화염 마법을 썼다. 불이 터졌다. 벽면까지 타올랐다. 그리고 그 벽 위에, 불이 비춘 곳에, 그것이 보였다.
기호.
하나의 기호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정수진이 준 사진 속의 그 기호와 정확히 같은 것. 원 안에 화살표가 네 개. 화살표는 모두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저... 저게..."
정수진이 말했다.
"그거 어디서 봤어?"
"번지점프 사진에."
준호가 중얼거렸다. 김태오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게 계획된 거야.' 던전의 배치, 플레이어들의 움직임, 이 기호의 위치. 모든 것이.
더 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 준호는 기계적으로 처치했다. 염동력, 검술, 화염. 모든 능력을 섞어가며. 30분 안에 25마리를 격파했다.
던전의 끝이 보였다. 출구 앞에 거대한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다. 호랑이 형태. 클로우가 반짝였다.
준호가 손을 들었다. 염동력으로 몬스터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줄 알았다. 누군가 자신 앞에 나타날 줄.
출구 쪽에서 검이 날아왔다.
강민준이었다.
그는 검으로 몬스터를 베고 있었다. 검술 S급이 아니었다. 검술 B급이었다. 자신이 복제한 것과 같은 수준의 검술.
"이제부터는 함께 싸우자."
강민준이 말했다. 그의 눈이 여전히 흐렸지만, 결연했다.
"넌 뭐냐고 물었잖아. 알아내려면 함께해야 돼."
준호와 강민준이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몬스터의 양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몬스터가 울부짖었다. 준호는 염동력을 모았다. 강민준은 검을 모았다. 동시에 발동.
몬스터가 산산조각 났다.
【던전 클리어】 난이도: B급 소요 시간: 42분 클리어 던전: 10/24 미션 진행률: 41.7%
준호의 상태창에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강민준이 준호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넌 정말 뭐야?"
강민준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두 명의 준호가 있었다. 하나는 타인의 능력으로 가득 찬 준호. 또 하나는?
준호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정수진이 출구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두 사람을 봤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그의 눈, 그의 움직임, 그의 모든 것을 봤다.
"넌 정말 준호야?"
그녀가 물었다. 그것은 강민준의 질문과 달랐다. 그것은 확인이 아니라 절규였다.
"응."
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답변이었다.
강민준이 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내일. 남산 탑 던전. S급. 함께 들어가자."
"왜?"
"네가 뭔지 알아낼 때까지."
강민준이 떠났다. 정수진과 준호만 남았다. 밤 12시 32분. D-67시간 28분.
남은 수명: 53시간 30분. 남은 던전: 14개. 필요 시간: 3시간 50분.
수학은 여전히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깨지고 있었다. 준호의 내부에서. 강민준의 질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넌 누구야?"
준호는 그 질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준호가 받았다.
"안녕하세요. 관찰자입니다."
차갑고 무감정한 목소리. 준호의 혈액이 얼어붙었다.
"당신이 복제한 능력들을 봤습니다.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뭘 말하는..."
"남산 탑 던전에서 당신의 진정한 능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능력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살아야 하는가."
통화가 끝났다. 정수진이 준호를 바라봤다.
"누가 전화한 거야?"
"모르겠어."
거짓말이었다. 준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정수진이 준호의 손을 잡았다.
"상태창을 다시 열어 봐."
준호가 상태창을 활성화했다.
【이준호의 상태창】 ───────────── [능력] 1. 염동력 A급 (강민준으로부터 복제) 2. 검술 B급 (강민준으로부터 복제) 3. 화염 마법 C급 (최창호로부터 복제) 4. 치유 마법 D급 (박지은으로부터 복제) 5. 기초 무술 E급 (???로부터 복제) 6. [빈 슬롯 3개]
[남은 수명] 52시간 18분 43초
[클리어 던전] 10/24
─────────────
준호는 상태창을 내려다봤다. 5개의 능력이 가득 차 있었다. 모두 타인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은 어디에 있는가?
빈 슬롯 3개.
준호의 눈이 그곳에 머물렀다. 마치 그 빈 공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관찰자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 자신이 가진 진정한 능력.
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빈 슬롯을 터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그곳이 진공처럼.
"넌 뭔가 달라졌어. 진짜."
정수진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준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창백해졌는지 깨달았다.
"강민준이 말했어. 내일 남산 탑 던전에서 만나자고."
"S급? 지금 너 상태로?"
"응."
준호의 목소리가 가늘었다.
"그리고 관찰자가... 내 진정한 능력을 쓰라고 했어."
정수진의 눈이 커졌다.
"관찰자? 누가?"
"모르겠어. 전화로. 하지만 이미 끊겨 있었어."
준호는 정수진에게 전화 내용을 모두 전했다. 정수진은 그 말을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너한테 다른 능력이 있다는 건데?"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왜 못 쓰는 거야?"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강민준의 기억. 염동력을 쓸 때 느껴진 그 낯선 감각. 자신 안에 흘러드는 다른 의식.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준호가 중얼거렸다.
"뭘?"
"모르겠어. 근데 강민준이 나한테 들어온 거 있잖아. 그 기억들. 그게 단순히 능력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정수진이 뭔가를 꺼냈다. 사진이었다. 낡은 사진. 번지점프 장소에서 찍은 것 같았다. 하늘, 도시, 그리고 배경의 한쪽 구석에 기호가 보였다.
"이 기호. 너도 봤잖아. 던전 벽에."
"응."
준호가 사진을 들었다. 기호는 마치 수학 기호처럼 보였지만, 준호가 본 것과는 약간 달랐다. 던전 벽에 새겨진 기호는 더 복잡했다. 마치 진화한 형태처럼.
"이건 우연이 아니야. 이건 처음부터 너를 위해 있던 거야."
정수진이 준호의 눈을 봤다.
"이 기호가 보이는 날부터 게임이 시작됐어. 그리고 이 기호가 있는 곳에서 상태창을 얻은 사람은..."
정수진이 숨을 쉬었다.
"넌 선택된 거야. 진짜로."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그럼 내가 왜..."
"모르겠어. 근데 하나 확실한 건..."
정수진이 사진을 다시 들었다. 기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준호를 봤다.
"넌 혼자가 아니라는 거야."
정수진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내일 남산 탑 던전. 내가 함께할게."
"S급 던전이야. 너 치유 마법만으로는..."
"상관없어."
정수진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자신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된 거라면..."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왜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정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는 대답이 없었다.
밤 1시 15분. D-66시간 45분.
준호는 정수진과 함께 거리를 걸었다. 다음 던전은 남산 탑 던전. S급. 최고 난이도. 그리고 강민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넌 누구야?"
강민준의 질문이 계속 울렸다.
준호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관찰자의 목소리도 계속 울렸다.
"당신은 왜 살아야 하는가."
준호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오직 계속 걸었을 뿐이다. 정수진의 손을 잡고. 남산을 향해.
72시간 중 68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준호는 느껴졌다.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의 정체가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