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남은 수명 70시간. 클리어해야 할 던전 24개. 구해야 할 아이들 12명.

5개 던전을 클리어한 후, 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거리에 선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스마트폰의 계산기 앱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시간당 2개의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가능한 계산. 불가능하다. 절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한다.

준호는 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상태창을 열었다. 강민준의 염동력 능력이 여전히 그의 상태창에 머물러 있었다. 사용할 때마다 선명해지는 그 능력. 매번 능력을 쓸 때마다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함께 밀려들었지만, 힘은 진정 강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공원의 돌멩이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염동력의 정확도는 이미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다. 느껴진 게 아니라, 그게 정말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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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0, 오전 8시 30분. 도봉산 자락 E급 던전.**

초보자용 던전.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1시간 안에 클리어한다. 하지만 준호는 필요 없었다. 강민준의 염동력으로 던전 내부의 모든 몬스터를 일순간에 제압했다. 24분.

클리어 증명이 상태창에 기록되었다.

그 순간, 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민준의 목소리. 아니, 목소리만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나뭇가지를 꺾을 때의 그 쾌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정신력으로 지배할 때의 그 전율. 준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민준의 기억 속에서—

준호가 손을 꽉 주먹지었다. 통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의 손이다. 자신의 손이다.

중얼거리며 도봉산 던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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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15분. 북한산 자락 B급 던전.**

던전의 몬스터는 대부분 야수 형태였다. 곰, 늑대, 표범. 하지만 준호에게는 상관없었다. 던전 입구에서 우연히 만난 마법사 플레이어. 그 여성 플레이어의 상태창을 스캔하는 데 3초가 걸렸다. 화염 마법 A급.

복제.

수명이 1시간 깎였다. 남은 수명: 69시간.

던전 내부는 준호의 손 안에서 불지옥이 되었다. 몬스터들이 타올랐다. 비명도 울음도 없었다. 그저 재만 남았다. 31분.

그리고 또 다시, 기억이 밀려들었다.

여성 마법사의 기억. 그녀가 처음 화염 마법을 터뜨렸을 때의 기억. 손가락을 펼쳤을 때의 그 설렘. 마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의 감각. 준호의 몸이 반응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가... 이러는 거야?"

준호가 손을 부여잡았다. 손가락들이 경련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손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강민준의 염동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복제된 것이고, 여성 마법사의 화염은 자신의 손과 정신으로만 구현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자신이 한 것이다.

준호가 손을 폈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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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남산 자락 C급 던전.**

세 번째 던전. 이번 플레이어는 무술가였다. 상태창을 스캔했다. 격투술 B급. 복제. 수명 1시간 감소. 남은 수명: 68시간.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은 준호의 주먹에 쓰러졌다. 격투술의 정확도는 마법보다 더 직관적이었다. 주먹이 날아갈 때마다 자신의 신체가 그것을 따라갔다. 26분.

클리어 직후, 준호는 벽에 등을 기댔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 무술가의 기억이 자신 안에서 너무 생생했다. 수십 년간의 격투 경험. 매일같이 가해진 타격과 상처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뎌낸 끝에 얻은 근육의 기억. 준호는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팔이 무거웠다. 그 무술가의 피로감이 자신의 팔에 남아있었다. 팔의 무게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았다.

"이건... 내 팔이 맞나?"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반응이 0.2초 늦었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여러 개로 보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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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45분. 강남구 던전. B급.**

네 번째 던전. 플레이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국 던전 입구 근처에서 만난 초능력자. 시간 지연 능력 A급. 복제. 수명 1시간 감소. 남은 수명: 67시간.

이번엔 달랐다. 시간 지연 능력은 다른 능력들과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변형이었다. 준호가 능력을 사용하는 순간, 세상이 늘어났다. 시간이 진흙처럼 흘렀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졌다. 하지만 동시에 초능력자의 기억이 쏟아졌다. 세상이 느려 보이는 경험에 대한 적응 과정. 수십 번의 실패. 번번이 산산조각 나는 시간 감각. 그리고 마침내 적응해낸 기억.

준호의 손이 떨렸다. 그 기억들이 너무 선명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인 것처럼.

18분.

던전을 빠져나온 후, 준호는 벤치에 앉았다. 세상이 여전히 느려 보였다. 시간이 정상 속도로 돌아오는 데 7분이 걸렸다. 그 동안 준호의 음성이 변조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초능력자의 목소리로 들렸다. 중얼거리는 말도 초능력자의 발음으로 흘러나왔다.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신경이 마비되는 것처럼 입술에 감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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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30분. 성북구 던전. C급.**

다섯 번째 던전. 준호는 더 이상 플레이어를 찾지 않았다. 던전 입구에서 만난 약한 능력의 일반인 플레이어. 상태창을 스캔했다. 단순 강화 능력 F급. 복제. 수명 1시간 감소. 남은 수명: 66시간.

던전 클리어는 빨랐다. 12분.

하지만 복제 직후, 준호의 신체에 이상이 생겼다. 신경이 저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신경 자체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 손가락끝부터 시작된 마비가 팔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약한 능력의 기억—수십 년간 방치되고 학대받은 신체의 기억—이 준호의 몸을 침식했다.

준호는 던전을 빠져나왔을 때, 해는 이미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 동안 5개의 던전을 클리어했다. 남은 던전은 19개. 남은 시간은 66시간.

비율로 따지면 여전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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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50분. 고아원 앞.**

준호는 고아원으로 향했다. 정수진을 만나야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고아원 건물 앞에서 정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두 명의 아이들이 그 뒤에 서 있었다. 가장 어린 아이는 여섯 살, 가장 큰 아이는 열여섯 살. 모두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

정수진이 달려왔다. 하지만 준호가 손을 들어올렸을 때, 정수진은 멈췄다. 준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뭐... 뭐야?"

"내가... 뭐가 된 건지..."

준호가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의 손이기도, 여성 마법사의 손이기도, 무술가의 손이기도, 초능력자의 손이기도, 약한 능력자의 손이기도 했다. 동시에 모두처럼, 아무도 아닌 것처럼.

"우리 함께 나가자. 이 도시를 떠나자."

정수진이 준호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준호가 손을 뒤로 빼냈다.

"아직 못 해. 아직 더 해야 할 게 있어."

"뭐를 더 해야 돼? 준호, 제발..."

준호는 정수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원래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복제가 아닌, 자신의 고유한 능력. 그것이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찾아야 했다.

준호는 한강 둔치로 향했다. 손가락을 펼쳤다. 염동력을 발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경련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화염 마법을 시도했다. 손가락이 불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불이 나오지 않았다. 격투술을 시도했다. 주먹이 무거워졌지만, 힘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 지연을 시도했다. 세상이 흔들렸지만, 시간이 느려지지 않았다.

모든 복제 능력이 자신의 신체에서 거부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이 모든 능력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원래 능력을 사용하려고 할 때마다 이 거부감이 나타났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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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45분. 강남역 카페.**

김태오가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아메리카노 두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준호가 앉자 김태오가 입을 열었다.

"하루에 5개 던전. 빨랐네."

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넌 뭐야?"

"넌 상태창 복제 능력이 있지. 나한테 보여줄래?"

"안 된다."

김태오가 아메리카노를 들었다. 검은 액체가 잔 안에서 출렁였다. "난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반대야. 난 너한테 필요해. 그리고 넌 나한테 필요해."

"왜?"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

김태오의 눈이 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거기엔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강민준의 광기나 박준혁의 냉정함이 아니라, 절실함이 있었다.

준호가 팔을 걷어 올렸다. 상태창을 김태오에게 노출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복제.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쏟아졌다.

던전들의 배치도. 하지만 단순한 배치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그림의 일부였다. 각 던전이 특정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치들이 연결되면 무언가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형태 위에는 특정 플레이어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박준혁, 강민준, 그리고... 준호 자신. 그리고 마지막 위치에는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정수진. 그리고 열두 명의 아이들. 모두 고아원 출신이었다.

수명이 1시간 깎였다. 남은 수명: 65시간.

준호가 버럭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이게 뭐야?"

김태오가 천천히 아메리카노를 내려놨다. "재부팅은 자연발생이 아니야. 누군가의 계획이야."

"누가?"

"그건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이 배치도를 보면... 특정 플레이어들이 관찰자가 되도록 유도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넌..."

김태오가 준호를 바라봤다. "넌 계획 밖의 변수야. 그리고 이 배치도에는 고아원이 표시되어 있어. 열두 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구해야 한다면, 넌 이 도시의 모든 던전을 클리어해야 할 거야."

준호의 손이 떨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테이블 위의 커피잔이 흔들렸다. 자신이 한 모든 선택이 사실은 누군가의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자신이 복제한 모든 능력이, 자신이 클리어한 모든 던전이, 심지어 정수진과 아이들까지도 누군가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

준호는 염동력을 발동시키려 했다. 테이블을 들어올리려 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염동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함께 진실을 찾자. 넌 이 도시의 모든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준호는 김태오의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진흙처럼 흐르는 것처럼. 초능력자의 기억이 준호의 의식을 침식하고 있었다. 준호는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누구의 손인가?

"나도 고아원 출신이야."

김태오가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김태오의 얼굴이 흐릿했다. 강민준의 얼굴도 겹쳐 보였다. 여성 마법사의 얼굴도. 무술가의 얼굴도. 시간 초능력자의 얼굴도. 모두가 한 사람처럼 보였다.

준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화면에 '정수진'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준호가 전화를 받았다.

"준호, 넌 괜찮아?"

정수진의 목소리였다. 따뜻했다. 익숙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정수진이 알 리 없는 정보를 말하고 있었다.

"...도봉산 던전에서 뭘 봤어? 거기 뭐가 있는 거야?"

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수진이 알 리 없는 정보다. 자신이 클리어한 던전의 내부 구조. 자신이 본 몬스터들의 배치. 자신이 느낀 기억의 편린들.

"넌... 누구야?"

"준호, 제발 더 빨리 움직여. 시간이 없어. 아이들이... 아이들이 위험해."

전화가 끊겼다.

준호는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정수진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정수진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정수진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지?"

김태오가 말했다. "이 게임은 이미 시작됐어. 그리고 넌 그 게임의 중심에 있어."

준호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거리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들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 불빛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알림이었다. 송신자: 강민준.

【 우리 만날까? 난 너한테 관심이 있어. 】

준호의 화면이 반짝였다. 그 순간, 상태창이 자동으로 열렸다.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어 있었다.

【 4번째 복제 봉인 - 활성화됨 】 【 복제 횟수 초과 페널티 - 발동 중 】 【 남은 수명: 65시간 → 64시간 30분 (가속 감소 시작) 】

준호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수명이 가속도로 깎여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능력을 복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가진 다섯 개의 능력.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남은 던전은 19개. 남은 시간은 64시간 30분.

준호는 한강 둔치에 앉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주먹지었다 반복했다.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강민준의 손처럼, 여성 마법사의 손처럼, 무술가의 손처럼, 초능력자의 손처럼, 약한 능력자의 손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모두처럼, 아무도 아닌 것처럼.

손가락을 멈췄다. 강민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뭇가지를 꺾는 쾌감. 여성 마법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펼칠 때의 설렘. 무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먹이 날아갈 때의 전율. 초능력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이 느려질 때의 공포. 약한 능력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신체가 무너져 내릴 때의 절망.

그리고 그 모든 기억 속에서, 준호는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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