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 대가
협곡을 빠져나온 지 사흘째였다.
한설은 정파의 눈을 피해 산 안쪽 버려진 창고에 몸을 숨겼다. 지붕은 반쯤 내려앉았고, 벽의 흙이 계절마다 벗겨져 내렸다. 여름 햇빛이 틈새로 들어오는 그곳에서 그는 냉월을 꺼냈다.
검은 어둠 속에서도 은백색으로 빛났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한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손가락으로 검의 등을 어루만졌다. 금속의 차가움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검을 들어라.*
영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음협곡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하지만 더욱 또렷한 음성이었다. 한설의 뇌수 깊숙한 곳에 직접 박혀드는 듯한 감각.
한설은 검을 집어들었다.
팔이 가벼웠다. 검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의 팔 자체가 검이 되어버린 것처럼. 영혼이 그의 손을 이끌었다. 한설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인지, 영혼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검이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첫 검격. 창고의 먼지가 소용돌이 쳤다. 한설의 몸 속에서 무언가가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찬바람이 뱃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내공이 흐르는 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 번째 검격. 통증이 아니었다. 공허였다. 마치 자신이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는 듯한 감각.
세 번째 검격.
"——!"
한설이 검을 떨어뜨렸다. 무릎을 꿇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제대로 박동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심장은 뛰고 있었다.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마치 방금 막 살아난 것처럼.
창고의 벽에 기대앉았다. 손이 떨렸다.
*검을 휘두르면 생명력이 소진된다. 이것이 냉월의 진정한 힘이자 저주다.*
영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한설이 검을 집어들었다.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그는 움직였다. 이번에는 천천히. 한 동작, 한 동작씩. 검이 공기를 가르는 매 순간마다 그의 숨이 얕아지고, 눈이 흐려졌다.
다섯 번의 검격 후, 한설은 창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천장의 금이 간 나무 골조가 보였다. 햇빛이 그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움직이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 보였다.
사흘이 흘렀다.
한설은 매일 창고에 들어가 냉월을 휘둘렀다. 매번 조금씩 더 오래, 조금씩 더 많은 횟수를. 처음에는 세 번에 쓰러졌다. 사흘 후에는 열다섯 번을 할 수 있었다. 몸이 적응했다. 아니, 몸이 무너졌다.
거울을 들었을 때, 한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이 침침했다. 관자놀이 주변의 살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볼이 내려앉았다. 입술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사흘 전 천음협곡에서 나온 한설과 지금의 한설은 다른 인간이었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영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설은 거울을 내려놨다.
——
저녁때, 발걸음이 들렸다.
한설은 창고의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냉월의 손잡이 위에 있었다. 누군가 창고의 문을 밀어젖혔다.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찾았다."
서운의 목소리였다.
사파의 현인(賢人)이라 불리는 그는 창고 안의 어둠을 한 번에 꿰뚫었다. 그의 눈이 한설을 발견했을 때, 서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
서운이 한 걸음 들어섰다. 햇빛 속에서 그의 얼굴이 명확해졌다. 눈이 커졌다. 그가 본 것은 사흘 전의 한설이 아니었다. 그는 한설을 두 번 보고 있었다. 한 번은 지금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은 기억 속의 모습으로.
"그게 뭐냐?"
서운이 냉월을 가리켰다.
한설은 일어섰다. 천천히. 몸이 뻣뻣했다. 관절이 삐걱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서운이 다가왔다. 한설과 서운 사이는 삼 걸음. 서운의 눈이 냉월을 집중했다. 검의 표면에 반사된 햇빛이 서운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순간, 서운의 표정이 바뀌었다.
두려움이었다.
"이게……." 서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천음협곡에서?"
한설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운이 한설의 얼굴을 다시 봤다. 창백한 피부, 침침한 눈, 내려앉은 볼. 사흘 만에 변한 모습 전부를 읽었다. 서운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는 한설을 흔들고 싶었고, 소리치고 싶었고,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냉월은 축복이 아니라 시험이다."
서운의 목소리가 낮았다. "무림에서 가장 오래된 금기(禁忌) 중 하나야. 천 년 전에 사라진 마검. 사람들은 그게 파괴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깊은 곳에서 누군가는 그걸 알고 있어. 정파의 원로들이."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한설이 냉월을 들었다. 검은 여전히 은백색으로 빛났다. 햇빛을 받아도, 어둠 속에서도 같은 빛을 냈다.
"생명력을 대가로 절대 불가능한 기법을 얻는다. 그게 냉월의 본질입니다."
서운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다면 넌 죽는 거야. 천천히. 검을 휘둘 때마다."
"그렇습니다."
"그럼 왜?"
한설이 서운을 바라봤다. 침침한 눈 속에 무언가가 타고 있었다. 분노도, 광기도 아닌, 더 깊은 무언가. 결연함이었다.
"사파라는 이유로 천대받는 게 싫습니다. 정파의 기득권 아래서 고개 숙이고 살아가는 게 싫습니다. 냉월이 없었다면 저는 영원히 이 자리에 있었을 겁니다. 정파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서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주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무림의 정상에 서고 싶으신 거죠. 사파 출신이라는 낙인을 벗으려고."
서운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한설이 계속했다. "저는 이 길을 갑니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앞으로만 나아가겠습니다."
"그럼 죽어."
서운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냉월을 휘둘수록 넌 죽어가. 그리고 죽을 때까지 넌 정파에게 인정받지 못할 거야. 사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는 죽음 앞에서도 낙인이 벗겨지지 않아."
한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운이 돌아섰다. 창고의 문 앞에서 멈췄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서운의 눈이 다시 한설을 향했다.
"그래도……."
서운의 목소리가 낮았다. "네가 이 길을 간다면, 나는 너를 막지 않겠다."
한설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기억해라. 넌 혼자가 아니다."
서운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안타까움이 함께 드러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무림 내에서의 연줄, 정파의 움직임 감시, 필요할 때의 도움. 모두 해주겠다. 넌 혼자가 아니야."
한설의 눈이 흔들렸다. 서운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많이 구원했는지 몰랐다. 냉월의 저주 속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그 말 한 마디가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
한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서운이 그렇게 말하고 창고를 나갔다. 햇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 어둠은 전과 달랐다. 그 속에 누군가의 응원이 남아 있었다.
*——그 자는 옳다.*
영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넌 이미 선택했다. 돌아갈 길은 없다.*
한설은 서운의 약속을 가슴에 품었다. 다음 화로의 연결. 명월과 서운의 도움이 2부 전체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한설을 다시 일어서게 했다.
——
밤이 깊었다.
한설은 정파의 본부 입구에 섰다. 거대한 석문 양옆에 석수(石獸)가 서 있었다. 천 년을 지킨 석수들의 눈이 한설을 응시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파 본부에 드나드는 자들은 한설을 봤을 때 미간을 찌푸렸다. 사파 출신의 청년이 정파 본부에 오다니. 하지만 아무도 막지 않았다. 한설의 눈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원로 회의실로 가는 길을 누군가 막았다.
강산이었다.
정파의 현 무림맹주는 한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한설이라 하지? 사파의 이단아."
"존경합니다, 맹주님."
한설이 절을 했다. 정중하게. 완벽하게.
"냉월을 손에 넣었다고 들었다."
강산의 목소리가 낮았다. "금지된 유물을 도용한 죄. 정파의 기밀을 침해한 죄. 사파와 정파의 중립을 어긴 죄. 얼마나 많은 죄가 필요한가?"
"제가 아는 건 오직 하나입니다."
한설이 고개를 들었다. 침침한 눈이 강산을 마주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무림의 정상에 서겠다는 것뿐입니다."
강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순간, 강산의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두려움. 아주 짧지만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냉월의 기운을 느꼈다. 한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검기(劍氣).
"그렇다면……."
강산이 손가락을 튕겼다.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원로들이 나왔다. 여덟 명. 정파 무림의 최고 권력자들. 흰 수염을 기른 노인들. 그들의 얼굴은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경계. 의심. 그리고 분노.
"무림맹주 선거전에 출마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겠다."
강산이 선언했다. "정파의 규칙에 따라."
한설은 무릎을 꿇었다. 창고에서 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침침한 눈. 창백한 피부. 내려앉은 볼. 죽어가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위에 타오르는 것—결연함.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영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그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길 위에서 넌 반드시 무림맹주가 되어야 한다. 아니면 죽어야 한다. 둘 중 하나만이 남겨진 선택이다.*
한설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정파의 규칙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주 선거전에 출마하겠습니다."
"대담하군."
원로 중 가장 나이 많은 백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주름으로 깊게 팬 해도(海圖) 같았다. "사파 출신이 무림의 최고 자리를 노린다? 무림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다."
"역사를 바꾸는 것도 한 인간의 결단입니다."
한설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거라."
백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 앞에서 넌 정파의 제자들과 겨루어야 한다. 냉월 없이."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한설의 심장이 철렁내려앉았다.
"냉월 없이?"
"그렇다. 금지된 유물을 사용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판단해야 한다."
강산이 말했다. "정파의 정통 무공으로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면, 넌 선거전에 나설 자격이 없다."
한설이 일어섰다. 냉월을 등 뒤에 매고 있었다. 손이 검의 자루에 닿으려 했다. 하지만 멈췄다. 규칙이었다. 정파의 규칙.
"누구와 겨우겠습니까?"
"임호."
강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못 박이었다.
회의실의 한쪽에서 남자가 나왔다. 호렬도법의 창시자. 임호. 그의 몸은 산처럼 거대했고, 그의 눈은 호랑이처럼 격렬했다. 정파에서 가장 공격적인 무공을 구사하는 검객.
"오래됐군, 사파 개 한 마리."
임호의 목소리는 돌을 부수는 망치 같았다. "이번엔 죽어라. 정파의 규칙에 따라."
한설의 몸이 움직였다. 냉월을 내려놨다. 정파의 규칙. 냉월 없이. 정파의 정통 무공으로만.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파의 정통 무공. 사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정파의 문파에서는 사파 제자를 받지 않으며, 사파 출신이 정파의 무술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도 '도적질'이라 낙인찍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한설의 가슴이 철렁했다. 정파의 무공을 배우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정파 최강자를 상대할 것인가. 냉월 없이 손가락만으로. 손가락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넌 무엇도 배우지 않았다. 하지만 넌 본 것이 있다.*
영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서운의 연화검법. 정파 제자들의 검술. 천음협곡에서 마주친 유골들이 남긴 검의 자국들. 넌 모두 봤다. 그리고 넌 모두를 흡수했다. 네 몸으로 모두를 재현해라.*
한설이 손가락을 튕겼다. 회의실의 넓은 공간이 검기(劍氣)로 울렸다. 냉월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에는 회의실의 기둥을 부수고도 남을 힘이 모여 있었다. 정파의 무공들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한 결과. 배우지 못했지만, 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결과.
임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정한 웃음이었다. "좋다. 드디어 재미있는 상대가 나타났군."
두 남자가 마주섰다. 회의실의 중앙에서. 원로들이 둥글게 둘러섰다.
임호가 먼저 움직였다. 호렬도법의 기본형. 그의 도(刀)가 공기를 갈라냈다. 소리가 났다. 뼈를 부수는 소리처럼.
한설이 몸을 굴렸다. 연화검법의 흐름. 서운에게서 배운 움직임. 도를 피했다. 임호의 도가 기둥을 스쳤다. 석재가 부서져 떨어졌다.
"움직임이 낡았군!"
임호가 다시 휘둘렀다. 도의 속도가 빨라졌다. 검기가 흩어졌다. 회의실의 벽이 갈라졌다.
한설이 반격했다. 냉월을 사용하지 않은 손으로. 정파의 청운검법을 흉내 낸 검격. 정확했다. 완벽했다. 하지만 임호의 도에 밀렸다.
*——그게 아니다.*
영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검은 무엇인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니고, 냉월도 아닌. 그저 '검'이다. 그 검을 휘둘러라.*
한설의 눈이 변했다. 침침한 눈이 아니라,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눈. 그의 몸이 변했다. 정파의 검도 아니고, 사파의 검도 아니었다. 그저 천 년 전부터 존재해 온, 근원적인 검의 흐름.
임호의 도가 날아왔다. 한설의 손가락이 도를 맞았다.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도를 막았다.
임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가능하다."
한설의 손가락이 도를 감싸 안았다. 손가락이 굽혔다. 강철로 만든 도가 휘어졌다. 한설의 손가락에서 뜨거운 통증이 흘러나왔다. 도와의 마찰 속에서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굽혔다.
도가 부러졌다. 강철 무기가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임호가 물러섰다. 한설이 나아갔다. 손가락이 임호의 목에 닿았다. 냉월 없이. 오직 손가락으로. 손가락의 끝에 모인 검기가 임호의 피부를 자르고 있었다.
"멈춰."
강산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설이 멈췄다. 손가락이 임호의 목에서 떠났다. 임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깨어난 동물처럼.
"충분하다."
백현이 말했다. "넌 정파의 규칙을 통과했다."
원로들이 둥글게 모여 수근거렸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사파 출신이 정파의 최강자 중 한 명을 손가락으로 제압했다. 냉월 없이.
강산의 눈이 좁아졌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설의 움직임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났다. 냉월 없이도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면, 냉월을 손에 들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임호의 도가 부러졌다. 정파 최강자의 무기가.
"그렇다면 선거전에 출마할 자격을 준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한설이 절을 했다. 정중하게. 완벽하게.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임호의 도와 부딪히며 생긴 상처. 아니면 냉월의 저주가 이미 자신의 몸 전체에 퍼져 있다는 증거.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투명함이 손등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냉월의 저주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한설이 회의실을 나갔다. 석수들의 눈이 그를 따라갔다. 살아 있는 눈처럼.
——
밤이 더욱 깊었다.
한설은 정파 본부를 떠난 후, 협곡으로 향했다. 천음협곡. 냉월을 얻은 그곳으로. 협곡의 정적 속에서만 영혼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협곡 깊숙한 곳. 폐허 속. 한설은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떨어졌다. 돌 위에.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작은 소리를 냈다. 그 피는 임호의 도와 부딪힌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상처는 이미 아물고 있었다. 냉월의 영혼이 한설의 몸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시간은 더 이상 한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한설이 냉월을 집었다. 검을 들자마자 손가락의 상처에서 피가 더 빨리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냉월이 자신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는 것처럼.
그는 검을 휘둘렀다. 협곡에 울리는 검음. 천음협곡. 천음. 천 년의 음.
한 번의 검격마다 협곡의 폐허들이 하나둘 부서져 내렸다. 돌들이 부숴졌다. 천 년 전 대전쟁의 흔적들이 사라졌다. 유골들이 흩어졌다.
그리고 한설의 손에서도 피가 계속 떨어졌다.
각 검격마다 한 방울씩.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피가 공기 중에서 붉은 호를 그렸다. 다음 검격에서는 손등에서 피가 맺혔다. 냉월의 검기가 자신의 살을 태우고 있었다. 피 냄새가 협곡을 가득 채웠다. 쇠내음. 죽음의 냄새.
마지막 검격. 손가락이 떨렸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한설은 검을 내려놨다. 손을 펼쳤다.
손가락은 이미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냉월의 저주가 아니라, 한설이 선택적으로 생명력을 소진한 흔적. 영혼의 목소리가 명확히 구분해 주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대가다. 넌 절대 불가능한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불하고 있다.*
협곡 안에는 고요함만 남아 있었다. 한설의 숨소리. 피가 떨어지는 소리. 그것뿐이었다.
*——넌 더 강해져야 한다.*
영혼이 말했다.
*——정파의 규칙을 통과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선거전에는 더 강한 자들이 있다. 유진. 명월. 그리고 강산 자신.*
——
새벽이 찾아올 무렵, 한설은 협곡을 나왔다. 그의 얼굴은 더욱 창백했다. 눈은 더욱 침침했다. 하지만 손에 들린 냉월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정파 본부의 석수들이 그를 본다면, 이미 죽은 자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회의실에서 본 원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을 두려워했다. 냉월의 힘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한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다. 한설과 정파의 싸움. 사파와 정파의 싸움. 그리고 냉월과 한설의 싸움.
며칠 후, 정파 본부에서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사파 이단아 한설, 무림맹주 선거전 출마 후보자로 선정.'
그 순간, 정파와 사파 전역에서 충격파가 일었다. 무림 역사상 처음이었다. 정파 소속이 아닌 자가 무림맹주 선거전에 출마하다니.
강산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의 옆에 임호가 서 있었다. 임호의 도는 여전히 부러져 있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맹주님?"
임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강산이 침묵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협곡의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계속 울리고 있는 검음. 천음. 천 년의 음.
강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정파 무림맹주로서의 지위. 그것을 위협하는 한 명의 청년. 임호가 손가락 하나로 제압되었다. 도가 부러졌다. 냉월 없이도 이 정도라면, 냉월을 쥔 한설은 자신마저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저 자를 제거하기로 하자."
강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차갑고 결연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다. 이미 선거 후보자로 공인되었으니까."
"그렇다면?"
"비공식적으로. 암살자를 보낸다. 협곡에서. 그리고 함정을 준비한다. 선거전 도중 그를 제거할 기회를 만든다."
강산이 돌아섰다. 그의 눈에는 차가운 결연함이 있었다. "선거전이 끝나기 전에, 저 자는 죽어야 한다. 냉월과 함께."
강산은 그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알고 있었다. 공식 후보자를 비공식적으로 제거한다는 것은 정파 내부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것이 드러나면 강산의 지위도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냉월의 위협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한설이 무림맹주가 된다면, 정파는 끝이었다.
강산의 손가락이 탁자를 쳤다. 그의 명령은 즉각 전달되었다. 암살자들이 협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협곡에서는 여전히 검음이 울리고 있었다. 한설의 몸은 계속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오직 검의 언어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협곡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조용했다. 하지만 한설은 이미 그들을 느끼고 있었다. 냉월의 영혼이 감지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