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의 대가
새벽 4시, 여수 조선소의 침실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서희영의 숨이 끊긴 지 2시간이 지났다. 의료 담당자들은 이미 떠났고, 시신 옆에는 이준석만 남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맥박이 없다는 것을 안지 1시간 반이 지난 뒤에도 손을 놓지 못했다.
침상 끝자락에 놓인 기술서는 여전히 열린 채였다. 마지막 페이지엔 의료 섹션이 있었고, 그곳에 적힌 글씨들은 대부분 희미해져 있었다. 손상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홍길동도 이렇게 죽었다. 고열. 의사도 원인을 모르는 고열.
서희영도 어제 새벽부터 열이 났다고 했다. 의료 담당자들이 왔을 때 이미 의식이 없었다. 오늘 해가 뜰 무렵 숨이 끊겼다. 간단했다. 너무 간단했다.
이준석은 일어나 기술서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페이지를 넘기며 그가 서희영에게 가르쳤던 항해술 부분을 찾았다. 천문 관측, 위도 계산, 해류 예측. 그 섹션의 글씨들이 희미해져 있었다. 완전히 손상된 것은 아니지만, 한 달 전보다 훨씬 진했다.
여백에 적힌 글귀가 떠올랐다. "기술을 완전히 전수받은 자는 반드시 죽는다." 처음엔 저주라고 생각했다. 미신이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홍길동의 죽음, 그리고 지금 서희영의 죽음 앞에서 그것은 더 이상 미신이 아니었다. 기술서의 저주는 물리적 현상이었다. 기술을 배운 자의 신체에 반응하고, 그들을 죽였다.
침상 위의 시신을 바라봤다. 서희영의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로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입가의 경직된 주름, 이마에 맺힌 식은 땀의 자국. 죽음의 그 순간에도 그녀는 고통스러워했다. 마지막에 남긴 말은 "이 일이 계속되려면 누군가는..."이었다. 그 말은 미완성이었고, 그 미완성이 이준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준석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아직도 따뜻했다.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손목은 차갑고 경직되어 있었다. 생명이 완전히 빠져나간 것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그녀를 죽였다. 기술을 완전히 가르쳐서. 그 사실이 가슴을 짓누르고, 목을 조였다. 이준석은 침상 옆 의자에 쓰러졌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분노만 남았다. 자신을 향한 분노,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자신을 향한 분노.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준석은 다시 일어났다. 서희영의 시신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준석은 이제 명확히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술서를 책상으로 옮겼다. 촛불을 가까이 댔다. 손상 정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첫 페이지부터 시작했다. 1609년 철갑선 설계도 섹션은 아직 선명했다. 하지만 페이지 끝부분에 물에 젖은 자국이 있었다. 지난달엔 없던 흔적이었다.
다음 페이지. 화약 무기 제작법. 이 부분도 글씨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특히 화약 배합 비율을 나타내는 숫자들이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준석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가며 한 글자씩 확인했다. 5:3:2. 흐릿하지만 여전히 읽힐 수 있었다.
몇 장을 더 넘겼다. 항해술, 조선 기술, 금속 가공법. 모두 손상되고 있었다. 손상의 정도를 추정하려면 패턴이 필요했다. 이준석은 각 페이지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어 손상 정도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 완전함 ◐: 30% 손상 ●: 70% 손상 ■: 완전 소실
작업은 새벽 5시에 시작되어 8시까지 계속됐다. 전체 312페이지 중 이미 8페이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지난 3개월간 평균 손상 페이지는 월 2.7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달은 4장이 손상되었다. 손상 속도가 가속되고 있었다.
이준석은 종이에 계산을 적기 시작했다. 손이 떨렸다. 계산할 때마다 서희영의 시신이 떠올랐다.
월 평균 3장 손상 기준: 312 ÷ 3 = 104개월 ≈ 8년 8개월 월 평균 4장 손상 기준: 312 ÷ 4 = 78개월 ≈ 6년 6개월 월 평균 5장 손상 기준: 312 ÷ 5 = 62.4개월 ≈ 5년 2개월
손가락이 멈췄다. 5년. 최악의 경우 5년이면 기술서가 완전히 소실된다는 뜻이었다.
5년 동안 철갑선을 완성해야 한다. 5년 동안 조선을 지켜야 한다. 5년 동안 누구도 죽지 않아야 한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였다.
여백에 적힌 "30년"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처음 책을 구했을 때 첫 페이지의 그 숫자. 혹시 다른 뜻이었나?
이준석은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여백에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누군가 쓴 글씨를 누군가 지웠다. 손상이 아닌 의도적 소거였다.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30년"이라는 숫자뿐이었다.
현재 연도가 1614년. 책을 구한 것이 1599년이었다. 벌써 15년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최대 15년. 최악의 경우 5년.
이준석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서희영의 시신은 이미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기술자를 배치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을 것이었다. 남은 작업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술을 완전히 전수받은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기술을 부분적으로만 전수받은 자는? 이준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홍길동은 철갑선 건조의 80%를 알고 있었다. 서희영은 항해술의 70%를 알고 있었다. 둘 다 죽었다.
그렇다면 기술을 30%만 알고 있는 자는? 50%만 알고 있는 자는? 저주는 기술 완성의 수준에 따라 작동하는 것 같았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빨리 죽었다.
이준석은 일어났다. 책상 위에 놓인 기술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철갑선 완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들을 나열했다.
1. 철판 가공 및 용접: 목공 기술자 (현재: 임석) 2. 동력 장치 및 추진 시스템: 기계 기술자 (현재: 미배치) 3. 항해술 및 해도 제작: 천문학자 (현재: 공석 — 서희영 사망) 4. 화약 무기 제작: 화약 기술자 (현재: 박준수) 5. 선체 설계 및 감리: 건축 기술자 (현재: 정유철)
각 부분을 완전히 알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누구도 전체 기술을 가지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도 기술 완성의 80% 이상을 알면 안 된다.
이준석은 각 기술자에게 가르칠 내용을 새로운 종이에 정리했다.
임석: 철판 가공의 기본 원리만. 용접 방법의 일부만. 전체 공법의 40%. 박준수: 화약 배합의 3가지 비율만. 화약 무기 제작의 25%. 정유철: 선체 설계의 틀만. 세부 사항은 절대 금지. 전체 공법의 35%. 미배치 기술자: 동력 장치의 이론만. 실제 제작은 자신만 가능. 전체 공법의 30%.
누구도 50%를 넘지 않는다. 그래야 저주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철갑선은 완성될 수 없었다. 각 부분이 조화되려면 전체적 이해가 필요했다. 그 조화의 모든 것이 이준석의 머릿속에만 있어야 했다. 남은 15년 동안.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죽지 않고, 다른 누구도 죽지 않고, 철갑선을 완성하고, 조선을 지켜야 한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가능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상자에 넣었다. 경주 안강의 폐사찰. 그곳에 새로운 보관실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공간.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밤중에 출발하기로 했다. 여수를 떠나 한양을 거쳐 경주로. 왕의 소환이 있을 수 있지만, 그전에 기술서를 안전한 곳에 옮겨야 했다.
준비는 3시간이 걸렸다. 기술서, 필기 도구, 옷 몇 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민준호가 나타난 것은 여수를 떠나기 1시간 전이었다.
"서희영이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민준호는 조선소의 뒷문을 통해 들어왔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더 창백해 보였다.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그렇다."
이준석은 짐을 꾸리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민준호의 칼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이항복의 명령이라면, 민준호는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원인을 아십니까?"
"모른다."
"홍길동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고열. 의료 담당자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민준호는 침실을 바라봤다. 서희영이 누워있던 침상이 여전히 보였다. 침상 옆 바닥에는 그녀가 토한 흙빛 액체가 남아있었다. 그의 칼이 흔들렸다.
"기술서의 저주입니다."
이준석이 말했다.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
"기술을 완전히 배운 자는 죽습니다. 그것이 기술서의 규칙입니다."
민준호는 침묵했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 생각하고 있었다. 칼을 들었다가 내렸다. 다시 들었다.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아버지의 명령과 눈앞의 죽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기술서를 원하는 이유가..."
"당신의 아버지는 기술서가 저주 받은 것임을 모릅니다. 아니면 알면서 무시하고 있거나."
"아버지는... 기술이 조선의 신분 질서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기술서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신분 질서를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이 죽는 것도 괜찮습니까?"
이준석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민준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이 악순환을 향한 것이었다.
민준호의 손이 떨렸다. 칼의 끝이 바닥을 향했다가 다시 들렸다. 그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다. 칼을 쥔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침상 위의 시신을 바라봤다. 서희영이 누워있던 그곳. 그곳에서 방금 전까지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이 자신의 아버지가 원한 기술 때문에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칼로 이준석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죽은 것은 서희영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신이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일에 협력하지 않겠습니다."
민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신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칼을 들었다 내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칼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희영의 시신 때문에.
"그렇습니까?"
"서희영이가 죽었습니다. 홍길동도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모르고 계신데, 저는 알았습니다."
민준호의 눈이 침상으로 향했다. 서희영이 누워있던 그곳. 그곳에서 방금 전까지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니까. 칼도 들었고."
그의 손이 칼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 과정에서 칼이 흔들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죽음의 도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민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공포의 눈물이기도 했고, 결의의 눈물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서희영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결의.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침상을 바라봤다. 서희영의 시신이 있던 곳. 그곳에는 아직도 죽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저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민준호는 칼을 내려놨다. 바닥에 떨어진 칼이 쇠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그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결정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알렸다.
이준석은 그를 바라봤다. 민준호의 얼굴에는 진정한 갈등이 있었다. 아버지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마침내 선택한 그 순간. 그 선택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양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십시오. 기술서는 이미 소각했다고, 이준석은 도망쳤다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나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버지를 의심하게 하되, 확신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준석은 짐을 들었다.
"그리고 기술서의 저주에 대해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그것을 알게 되면, 그는 기술서 자체를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미래는 완전히 끝납니다."
"기술서가 정말 30년 안에 완전히 손상될 것입니까?"
"예. 남은 시간은 최대 15년입니다."
"그렇다면 기술서가 사라진 후에는?"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기술서가 완전히 손상되면, 남은 것은 자신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도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었다.
"당신은 한양으로 돌아가 살아남으십시오. 저는 여기서 기술을 완성하겠습니다."
"혼자서?"
"혼자서입니다."
민준호는 조선소를 한 번 더 둘러봤다. 침상, 기술서가 놓여있던 책상, 철갑선의 목재 모형. 모두 죽음의 흔적이 묻어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중심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원했던 기술서가 죽음을 불러왔다. 그 사실이 민준호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저는 기술서 자신의 편에 서겠습니다."
민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결정이 내려진 것이었다.
"기술서가 남겨준 것들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아버지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고. 오직 기술서만."
이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민준호가 떠난 후 2시간이 지나 이준석은 조선소를 빠져나왔다. 밤의 어둠 속에서 여수 항구의 불빛이 점점 멀어졌다.
한양에 도착한 것은 사흘 후였다.
광해군의 소환은 이미 와있었다. 궁궐의 비밀 통로를 통해 왕을 만났다. 침전의 창틀은 닫혀있었고, 촛불 몇 개만 켜져있었다.
"홍길동과 서희영이가 죽었다고 들었다."
광해군은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원인이 무엇인가?"
"알 수 없습니다. 의료 담당자들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의료 담당자들이 파악하지 못한 원인을 그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준석은 침묵했다.
광해군이 돌아섰다. 왕의 눈에는 의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기술서의 저주인가?"
"그렇습니다."
"저주? 나라를 이끌 신하가 저주를 말하는가?"
"예."
"증거가 있는가?"
"없습니다."
광해군은 다시 창을 향해 돌아섰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창밖의 야경이 흔들렸다. 바람이 창틀을 울리고 있었다.
"너는 기술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겠다는 뜻인가?"
"예."
"그렇다면 철갑선은 언제 완성되는가?"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완성하겠습니다."
광해군의 손이 멈췄다. 창틀 위에 놓여있던 손가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기술서는 약 15년 후 완전히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저도 죽을 것입니다."
광해군이 이준석을 바라봤다. 왕의 얼굴은 창백했다.
"나는 왕이다. 나라의 왕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죽음의 규칙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죽음의 규칙이 기술을 배운 자들을 죽이는 것인가?"
"예."
광해군은 창가에 기대어 섰다. 창틀을 통해 한양의 밤거리가 보였다. 한양의 수만 가구 중 몇 가구의 불이 아직도 켜져있었다. 왕은 그 불들을 바라봤다. 각각의 불 뒤에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들을 지키려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나는 그 죽음의 규칙을 바꿀 수 없다."
왕이 말했다.
"예."
"그리고 나는 그 규칙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규칙이 다른 신하들의 목숨을 지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광해군은 오랜 침묵에 잠겼다. 창밖의 불빛들이 흔들렸다. 왕은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왕권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규칙 앞에서, 왕도 결국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왕의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왕 스스로 깨달아야 할 문제였다. 광해군은 오랜 침묵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기술서는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
"안전한 곳에."
"나에게 보이지 않는 곳인가?"
"예."
광해군은 다시 창을 바라봤다. 밤거리의 불빛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좋다. 그렇게 하라. 하지만 기억하거라. 나는 왕이다. 나는 그 기술이 조선을 지키는 데 사용되기를 원한다. 만약 그 기술이 다른 곳에 사용된다면..."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장합니다."
광해군은 이준석을 바라봤다. 왕의 눈에는 이제 의심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신임도 완전하지 않았다. 조건부 신임이었다. 그것이 왕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통제 불가능한 규칙 앞에서,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신임과 감시의 줄타기뿐이었다.
"가거라."
이준석은 절을 했다. 침전을 나가며 왕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이항복에게는 보이지 마라. 그 자는 여전히 기술서를 원하고 있다."
경주 안강에 도착한 것은 일주일 후였다.
폐사찰은 임진왜란 후 방치되어 있었다. 불상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벽에는 칼자국이 남아있었다. 한 때 승려들이 있던 방들은 이제 거미집으로 가득했다.
이준석은 가장 안쪽의 방을 선택했다. 돌로 된 벽, 접근이 어려운 위치, 단 하나의 출입구. 완벽했다.
벽을 파내기 시작했다. 돌을 하나씩 빼내고, 흙을 파내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3일이 걸렸다.
만들어진 공간은 1미터 깊이의 굴이었다. 거기에 기술서를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그리고 돌로 다시 덮었다. 외부에서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준석은 그 자리에 오래된 불경을 쌓았다. 누군가 이곳을 파고 싶어도 불경을 치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 시간이 중요했다.
기술서는 이제 자신의 손에만 있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곳. 아무도 알 수 없는 곳.
남은 15년 동안, 자신만이 그것을 관리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15년이 지나면, 기술서는 사라질 것이었다. 손상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될 것이었다. 그때 자신도 죽을 것이었다.
이준석은 폐사찰의 문을 나갔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경주의 밤거리 불빛이 멀리서 보였다.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광해군의 신임을 유지해야 했다. 그리고 각 기술자에게 제한된 기술만 가르쳐야 했다.
15년. 충분한 시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15년이 지났다. 남은 것은 정말로 15년뿐이었다.
한양으로 가는 길 위에서 이준석은 중얼거렸다.
"내가 남은 15년 동안 조선을 지켜야 한다. 내가 혼자서."
그 목소리는 결의처럼 들리기도 했고, 절망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양의 우의정 이항복의 저택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민준호가 돌아온 것은 보름 후였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술서는?"
"소각되었습니다."
이항복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멈췄다. 아들의 눈을 마주했다.
"정말인가?"
"예."
"이준석은?"
"도망쳤습니다. 여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항복은 침묵했다. 손가락이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리듬이었다. 하지만 그 리듬은 불규칙했다.
"아들."
"예, 아버지."
"기술을 배운 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민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홍길동도 죽었고, 서희영도 죽었다. 모두 고열로."
"... 예."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이항복이 일어섰다. 창으로 향했다. 한양의 밤거리가 보였다.
"이준석의 기술서는 저주받은 것이다. 기술을 배운 자들을 죽이는 저주."
"아버지?"
"그렇다면 그 기술서는 단순한 기술서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을 지키는 동시에 조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항복이 돌아섰다. 아버지의 눈에는 새로운 결정이 있었다.
"우리는 광해군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
"아버지?"
"이준석이 기술서를 소각했다고 했지만,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만약 기술서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이항복은 민준호를 바라봤다. 아들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으려고 했다.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를 읽으려고 했다.
"아들, 너는 정말 여수에서 기술서를 보지 못했는가?"
민준호는 아버지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 속에는 의심이 있었다. 자신의 거짓을 꿰뚫으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민준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 아버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항복은 다시 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창밖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면을 보고 있었다. 아들의 거짓을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이항복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준석의 기술은 저주받은 것이고, 그 저주는 기술을 배운 자뿐만 아니라, 기술을 원하는 자도 죽일 수 있다. 왕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항복은 관리들을 불렀다.
"광해군 폐하께 알현을 청청하거라. 우리는 이준석의 기술 독점과 기술서의 위험성에 대해 고변할 것이다."
관리들이 나간 후 이항복은 다시 창을 바라봤다. 밤거리의 불빛들이 떨렸다. 그 불빛 어딘가에 이준석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 어딘가에 기술서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그 기술서가.
민준호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광해군에게 고변하는 것. 그것은 이준석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배신했기 때문에.
한양의 궁궐에서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광해군의 침전에서 왕은 여전히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15년이면 충분한가?"
왕은 중얼거렸다.
"15년이면 정말 충분한가?"
그 질문에 답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 자신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밤 거리 어딘가에서 이항복의 관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광해군에게 알현을 청청하기 위해. 그리고 그 알현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었다.
왕은 창을 닫았다. 밤거리의 불빛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침전의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