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여수 관사의 방은 어둡고 축축했다. 남쪽 창으로 해풍이 들어왔고, 문풍지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한양에서 온 밀사의 긴급 지시가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준석은 밀봉된 서신을 뜯으며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광해군의 명령이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이항복의 고변을 받고도 왕은 이준석을 공개적으로 버리지 않았다. 대신 조건부 신임을 내렸다. 그 조건은 성공이었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펼쳤다. 지난 달엔 5장, 이번 달엔 7장. 손상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종이의 손상 부분을 더듬었다. 시간이 없었다.
"기술서가 더 빨리 사라지고 있군요."
서희영이 옆에 앉았다. 남장한 그녀의 얼굴에는 지난 3년간 비밀 조선소에서 일한 흔적이 묻어 있었다. 손톱 밑의 검은 때, 얼굴의 화상 흔적, 왼쪽 눈썹의 흠집.
"한양에서의 추격이 영향을 미친 건가."
이준석이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습니다. 기술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손상됩니다.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서희영이 기술서의 첫 페이지를 폈다. 여백에 희미하게 남은 글씨가 있었다. 지워진 흔적 위에 '30년'이라는 숫자만 또렷했다.
"30년이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입니다. 아니면 기술서가 남은 시간입니다."
서희영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이준석은 그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기술서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던 그의 손이 멈췄다. 서희영의 말이 계속됐다.
"저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신분에서도, 가족에서도. 하지만 기술이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술이 여자도 쓸 수 있다면, 우린 더 이상 천한 신분이 아닐 거 아닌가요?"
이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술서의 무거운 페이지들이 손 위에서 계속 떨렸다.
"대인께서 침묵하신다는 건... 모르신다는 뜻이군요."
"아니다."
"그럼 알면서도 말씀 안 하시는 건가요?"
이준석은 기술서를 내려놨다. 손을 펴서 서희영을 마주했지만,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기술은 기술일 뿐입니다. 그것이 신분을 바꿀 수는 없어요. 세상이 바뀌어야 신분도 바뀝니다."
"그럼 세상을 바꾸는 게 기술이 아닌가요?"
서희영이 일어났다. 방을 나가기 전에 한 마디를 더했다.
"혹시 기술서가 그것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입니다."
그녀가 나간 후, 이준석은 혼자 기술서를 들었다. 페이지마다 손상된 부분이 더 늘어나 있었다. 서희영의 질문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기술은 기술일 뿐이라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이제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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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도시락섬의 비밀 조선소는 밤 11시에 가장 활발했다. 횃불의 불빛 아래서 목재 장인들이 철갑선의 선체를 깎아내렸다. 용접 기술자들은 쇠를 달궜고, 용광로의 열기는 밤 공기를 뒤틀었다.
홍길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천민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3년 전부터 이 조선소에서 일했다. 처음엔 목재 가공만 맡았지만, 이제는 철갑선 건조의 핵심을 맡고 있었다. 그의 손은 도구를 쥐고 있을 때만 자유로웠다.
"홍장인."
이준석이 조선소에 들어섰다. 손에는 기술서를 들고 있었다.
홍길동은 망치를 내려놨다. 그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눈만 유독 밝았다.
"대인. 이 시간에."
"내일이 아니라 오늘밤 선체를 물에 띄우기로 했다."
이준석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한 달을 앞당기신다는 건가요?"
"광해군께서 지시하셨다. 더욱 신중하게 진행하되, 빨리 결과를 보라고."
홍길동이 망치를 다시 들었다.
"밤새 일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인."
그가 멈췄다.
"네?"
"저도 가르쳐 주실 건가요? 이제부터."
이준석은 기술서를 들어올렸다.
"그래야 한다. 기술서가 손상되고 있다. 30년이 남았다. 그 안에 모든 것을 전해야 한다."
"기술서가 남은 시간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홍길동 옆에 앉았다.
"이 부분을 봐라. 철갑선의 용접 지점이다. 일반 목재선과 다르게 수압을 견디기 위해 이중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홍길동의 눈이 기술서의 도면으로 쏠렸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500년 전의 것이었고, 글씨는 현대 한글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조합이라는 것을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이게 정말 가능한가요?"
"가능하다. 이미 반은 완성됐다."
"반이 아니라 거의 다 된 거 아닌가요?"
홍길동이 웃었다. 그것은 희망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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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용선호의 선체는 도크 위에서 마지막 손질을 받고 있었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들고 선체 옆에 섰다. 철갑선의 외형은 일반 선박과 달랐다. 각진 측면, 포 마운트를 위한 총안, 수상선 아래의 철판. 모든 것이 설계도 그대로였다.
"내일 아침이면 물에 떨어뜨린다."
서희영이 옆에 섰다. 그녀는 밤새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배수량, 부력, 선체의 강도. 모든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
"기술서의 계산이 맞습니다. 이 배는 뜰 겁니다."
"뜨는 것뿐이 아니다. 움직여야 한다."
이준석이 기술서의 다음 섹션을 폈다. 동력 장치. 목재와 쇠로 만든 엔진의 설계도였다.
"엔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되지 않아도 된다. 노를 저어서라도 띄워야 한다. 광해군께서 기다리신다."
서희영은 그 말을 이해했다. 왕의 신임은 시간을 먹고산다. 결과를 보여줄 때까지 모든 것은 급해야 했다.
새벽 5시.
도크 주변에는 이준석이 신임하는 사람들만 모였다. 홍길동, 서희영, 용접 기술자 3명, 목재 장인 2명. 그리고 여수 현감과 비밀 거래를 한 이준석의 부관 이종호.
"노를 떼어라."
이준석의 명령이 떨어졌다.
용선호를 받치고 있던 목재 기둥들이 하나둘 제거되었다. 선체의 무게가 도크의 레일 위에 실렸다. 쇠바퀴가 굴렀고, 선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 위로 나아가는 순간, 용선호의 철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떨어진다."
홍길동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물 표면과 선체의 접촉. 물이 철판 위로 밀려올랐다. 그리고 멈췄다. 선체는 물 위에 떠 있었다. 철갑선 용선호는 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준석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 조선은 바뀔 것이다."
그것은 기도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기술서를 든 손이 떨렸다. 그 손은 희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500년 전의 기술이 현실이 되는 순간, 조선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철판이 반사하는 햇빛처럼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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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홍길동은 조선소의 한 모서리에 누워 있었다. 그의 몸에서 열이 흘러나왔다.
"대인."
서희영이 이준석을 찾았다.
"홍장인이 고열을 앓고 있습니다."
이준석이 홍길동을 확인했을 때, 그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은 흐렸다.
"언제부터?"
"진수식이 끝난 후부터입니다. 3시간 전입니다."
이준석은 홍길동의 이마에 손을 댔다.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상처나 외상은 없었다.
"약을 구해 오자. 여수 약재상에서."
"대인."
서희영이 이준석의 팔을 잡았다.
"기술서입니다. 기술을 전수받은 자는 반드시..."
"그럴 리 없다."
이준석이 끊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신이 없었다.
기술서를 펼쳤다. 의학 섹션. 그 안에는 감염병, 전염병, 그리고 원인 불명의 고열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그 기록은 불완전했다. 페이지의 절반이 이미 손상되어 있었다. 손상된 부분에는 치료법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읽을 수 없었다.
이준석의 손이 떨렸다.
"약초를 구해 오자. 우리가 아는 모든 약초를."
그가 홍길동을 다시 봤을 때, 그 남자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고열은 계속 올랐다.
"대인."
홍길동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도움을 청하는 손이 아니었다. 기술서를 향한 손이었다.
"기술서... 가르쳐 주세요. 더 빨리. 시간이..."
"시간이 남았다. 남았다고."
이준석이 거짓말을 했다.
기술서의 페이지들이 손에서 떨렸다. 서희영은 그것을 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 침전에 담긴 진실이 무엇인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밤은 더 깊어졌고, 홍길동의 호흡은 더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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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기술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손가락이 종이를 헤쳤을 때마다 미세한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손상된 부분들. 글씨가 희미해진 섹션들. 의학 항목의 절반은 이미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홍길동의 몸이 떨렸다. 고열이 아닌 오한이었다.
"물을 데워라."
이준석이 명령했다. 서희영이 움직였고, 이종호도 따라 움직였다. 누군가는 약초를 구해 와야 했다. 누군가는 홍길동을 살펴봐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홍길동의 몸이 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대인."
홍길동이 손을 뻗었다.
"제 신분을... 이 기술로... 바꿀 수 있겠죠?"
이준석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홍길동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장인의 손이었다. 굳은살로 가득했고, 물과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철갑선 용선호를 만든 손이었다.
"바뀔 것이다. 반드시."
거짓말이었다. 이준석은 자신의 거짓말을 느꼈다. 기술서의 저주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거짓말.
밤이 깊어졌다. 이준석은 홍길동 곁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열의 강도는 높아졌다. 새벽 1시, 홍길동의 눈빛은 더욱 흐려졌다. 호흡은 얕아졌다.
이종호가 약을 끓였다. 감초, 황련, 석곡. 여수의 약재상이 밤중에 구해 준 것들이었다. 이준석은 약을 홍길동의 입에 가져다 댔다.
"삼켜라."
하지만 홍길동은 삼킬 수 없었다. 약은 입 모서리로 흘러내렸다.
새벽 2시.
홍길동의 호흡이 더 가빠졌다. 몸의 경련도 심해졌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펼쳤다. 의학 섹션을 다시 봤다. 어제는 읽을 수 있던 문장들이 이제는 희미했다. 손상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기술서의 여백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진수식 완료: 새벽 5시. 고열 발병: 새벽 8시. 의학 섹션 손상 가속화: 새벽 2시.
패턴이 명확했다. 기술 전수가 시작된 순간 기술서의 손상이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홍길동이 기술을 배운 순간부터 의학 섹션이 빠르게 소실되고 있었다. 치료법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술서는 자신의 저주를 숨기고 있었다.
새벽 3시.
홍길동의 호흡이 멈추었다 다시 시작되었다. 그 반복이 계속되었다.
"대인."
서희영이 이준석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아직이다."
이준석이 홍길동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이미 식어 가고 있는 손을.
새벽 4시.
홍길동의 눈이 감겼다. 하지만 호흡은 여전히 있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새벽 5시.
호흡이 멈췄다.
이준석은 홍길동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대인."
서희영이 뒤에서 이준석을 봤다. 그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공포와 슬픔이 섞여 있었다. 아니면 그 둘 다가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기술을 전수받은 자는..."
"알았다."
이준석이 끊었다.
그는 홍길동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미 식어 가고 있는 손을. 그 손을 놓지 않으면 홍길동이 다시 돌아올 것처럼. 기술서의 저주를 어긋나게 할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선소의 다른 쪽에서 도구들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목재 장인들이 나왔고, 용접 기술자들도 나왔다. 그들은 홍길동을 봤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묻어라."
이준석이 말했다.
"여수 근처 산 깊숙한 곳에.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대인, 관청에 신고를..."
"신고하지 말라."
이준석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것은 기술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것으로 변한 목소리였다.
"아무도 알면 안 된다. 홍길동이 죽었다는 것을. 단지... 어디론가 떠났다고만 알려라. 남쪽으로. 또 다른 일을 위해."
"대인, 그럴 수 없습니다."
이종호가 반대했다.
"조선소의 중요한 기술자가 갑자기 사라지면 의심을 받을 것입니다. 광해군께서 이미..."
"광해군께서는 무엇이든 받아들이실 것이다."
이준석이 말했다.
"왕은 결과만 원한다. 기술과 배. 그뿐이다. 그 과정에서 누가 죽든 살든 관심이 없다."
그가 기술서를 펼쳤다. 홍길동을 만진 손으로. 여전히 따뜻한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을 때 또 다른 부분이 손상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어제는 읽을 수 있던 문장이 이제는 희미했다.
"30년."
이준석이 중얼거렸다.
"기술서의 여백에 있던 그 숫자. 30년이다. 기술서가 완전히 소실되는 시간. 그리고 기술을 전수받은 자가 반드시 죽는 시간도."
기술서를 다시 읽었다. 처음부터. 기술 전수의 메커니즘을 찾기 위해. 그것이 저주인지, 아니면 기술서 자체의 본질인지 확인하기 위해.
기술서의 초입에 있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이제야 그 의미가 명확해졌다. '기술은 한 사람에게만 완전히 전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도 전수받은 자도 모두 사라진다.'
이준석은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따라 읽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설계였다. 기술서 자체의 본질이었다. 기술을 여럿에게 나누어 주면 기술서가 손상되고, 전수받은 자들이 죽는다.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기술을 알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기술서의 저주였다.
서희영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준석이 그녀를 봤다. 남장을 한 여인의 얼굴. 그 위에는 공포와 결의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기술서가 완전히 소실되기 전에, 모든 기술을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기술을 배운 사람은 죽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
이준석이 대답했다. 자신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 죽음을 초래했는지 이제야 깨달으며.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기술을 완전히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각자 한 부분씩만. 철갑선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한 부분씩만. 그리고 그 부분들을 조합하는 방법은 나만 알 것이다. 나만이 모든 기술을 알 것이다. 그래야 기술서의 저주를 한 사람에게만 집중시킬 수 있다."
"대인."
서희영이 한 발 물러섰다.
"그건 기술을 독점하는 것입니다."
"맞다."
이준석이 기술서를 가슴에 안았다.
"기술을 독점할 것이다. 나 혼자만. 조선을 지키기 위해. 다시는 임진왜란 같은 치욕을 받지 않기 위해."
그는 기술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손가락이 종이를 헤칠 때마다 손상된 부분이 더 눈에 띄었다. 기술서는 빠르게 소실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홍길동을 죽게 했다는 증거였다.
이준석은 눈을 감았다. 홍길동의 얼굴이 떠올랐다. 철갑선을 만들며 보였던 그 밝은 눈빛. 신분이 바뀔 거라고 믿었던 그 희망. 그것을 자신이 빼앗았다.
그는 기술서를 더 세게 안았다. 마치 그것이 홍길동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기술서는 차갑기만 했다.
"저는?"
서희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당신은 나를 도울 것이다. 기술을 부분적으로 배우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을."
"그렇게 되면 저도 죽을 것 아닙니까?"
이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술서를 들고 있는 손이 더 세게 떨렸다. 그 대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서희영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었다. 기술서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한, 기술을 배운 모든 자는 죽을 것이었다.
"저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신분에서도, 가족에서도."
서희영이 말했다.
"하지만 기술이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술이 여자도 쓸 수 있다면, 우린 더 이상 천한 신분이 아닐 거 아닌가요? 그게 당신의 약속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이준석이 말했다.
"기술서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면 당신은 저를 버린다는 건가요?"
서희영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홍길동처럼?"
이준석은 서희영을 마주봤다. 그 눈빛에 담긴 절망과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아니다. 나는 기술을 독점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누가 죽든 상관없다. 하지만 너는 죽기 전에 기술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너의 죽음이 조선을 지킬 것이다. 그것이 나의 약속이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저주였다. 하지만 이준석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홍길동의 죽음 위에 조선의 미래를 세워야 했다. 그리고 서희영의 죽음도 그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조선소 밖에서 발굽 소리가 났다. 말을 탄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닫았다.
"민준호다."
이종호가 중얼거렸다.
"광해군의 밀정이 왔습니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가슴에 안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기술자가 아닌, 기술의 독점자가 된 자의 얼굴로.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석 대인이 계신가?"
이준석은 조선소를 나갔다. 아침 햇빛이 여수 해역을 밝히고 있었다. 용선호는 여전히 물 위에 떠 있었다. 철판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동시에 저주였다.
민준호는 말에서 내렸다. 그의 눈은 조선소를 재빠르게 훑었다.
"광해군께서 결과를 보고 싶으시다고 했습니다."
"이미 보셨을 것이다. 용선호가 떠 있다."
"하지만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광해군께서는 당신뿐만 아니라 기술을 전수받은 자들도 보고 싶으시다고."
민준호의 말에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광해군은 기술자들을 통해 기술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준석의 독점을 견제하려는 왕의 움직임이었다.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호의 눈이 이준석의 손에 들린 기술서로 향했다.
"그것이?"
"기술서다."
"보여주십시오."
"보여줄 수 없다."
이준석이 말했다.
"이것은 조선의 것이다. 왕의 것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민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이준석을 바라봤을 때, 이준석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광해군께서 변심하실 수도 있습니다."
민준호가 말했다.
"당신의 충성심이 의심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더 세게 안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광해군의 신임은 조건부였고, 그 조건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성공 이후의 신임도 보장되지 않았다. 왕은 기술을 독점하는 신하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선은 바뀔 것이다."
이준석이 말했다.
"그것이 내 충성이다."
민준호는 이준석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한양으로 전해질 것이었다.
이준석은 조선소로 돌아갔다. 홍길동의 시신은 이미 치워지고 있었다. 서희영은 한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준석을 따라갔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이준석은 기술서를 펼쳤다. 또 다른 페이지가 손상되어 있었다. 어제는 읽을 수 있던 문장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손상의 속도는 계속 빨라지고 있었다.
"30년."
그가 중얼거렸다.
"30년 안에 모든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 후에는 기술서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질 것이다."
그는 기술서를 들고 조선소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용선호의 철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이 희망인지 저주인지,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였다. 그 다음 배였다. 그리고 그 다음이었다.
조선은 바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죽든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