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파의 그림자
손가락이 팔걸이를 부러뜨릴 듯 움켜쥔다. 광해군의 손이었다. 동궁 회의실의 겨울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가운데, 우의정 이항복의 상소문이 떨어졌다. 좌의정 유영경이 입을 열었다.
"신분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기술은 곧 왕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광해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창밖을 노려본다. 서인과 동인의 당파 싸움이 다시 불붙었다. 임진왜란 이후 겨우 회복하기 시작한 국가를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 싸움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왕은 그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광해군이 말했다. 목소리는 단호했으나,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신료들의 압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다른 떨림이 있었다. 기술이 정말 도구인가 하는 의문. 그것이 신분을 파괴한다면, 그것이 왕권까지 흔들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절망.
"도구라면 더욱 위험합니다."
유영경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누가 그것을 쥐느냐에 따라 칼이 될 수도, 쟁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광해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결정의 부재였다. 아니,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왕의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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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창고의 지하. 이준석이 기술서의 손상 페이지를 세고 있었다. 지난 달 대비 5장이 더 손상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10년을 준비한 기술 축적이 시간과의 경쟁이 되어 있었다.
"또 손상되었나?"
서희영이 옆에서 물었다. 남장한 몸으로 기술서의 내용을 필사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던 그녀였다. 이미 3년을 이 일에 바쳤다. 손가락의 먹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5장. 지난달보다 1장 더."
"가속화하고 있군요."
서희영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대신 결연함이 있었다. 그녀는 기술서의 다음 페이지를 들어 햇빛에 비춰보았다.
"이것은 철갑선의 접합 방식입니다. 목재의 결을 따라 우각형으로 맞춰야 한다고 했는데, 이 부분이 손상되면 전체 구조가 무너집니다. 배의 내구성이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뜻이에요."
이준석이 페이지를 빼앗아 들었다. 손상된 부분을 확인했다. 서희영의 말이 맞았다. 접합 방식의 핵심 부분이 희미해져 거의 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곳에서만 건조할 수 없다."
이준석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여수에서 재현하기로 했지만, 이 속도라면 다른 기술도 손상될 것이다. 한 곳에서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준석의 눈빛이 변했다.
"여수, 경주, 한양 근처 산림. 세 곳 모두에서 동시에 건조를 시작한다. 한 곳에서라도 완성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력도, 자금도..."
"이미 준비했다. 한양은 이미 위험하다.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지난주 골목에서 만난 검객의 얼굴이 떠올랐다. 양반의 옷, 젊은 나이, 그러나 검술에 능한 자의 움직임.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객은 처음이 아닐 것이었다.
"누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기술서의 존재를 안다. 조정 안에 우리를 찾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서희영이 필사를 멈추고 기술서를 내려놨다. 그녀의 눈 안에 뭔가가 타올랐다.
"그렇다면 여수는 언제 출발합니까?"
"다음 달. 홍길동과 대포 기술자 3명을 먼저 보낸다. 넌..."
"저도 갑니다."
서희영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이준석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계속했다.
"저는 천민도 아니고 양반도 아닙니다. 이 옷 속에서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천문학을 읽을 수 있고, 기술서를 해독할 수 있습니다. 신분이 없어도 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 해 동안 차려 입은 남장 속에서, 그녀의 진짜 목소리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기술이 신분을 파괴할 수 있다면, 우린 더 이상 천한 신분이 아닐 거 아닌가요?"
이준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기술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 자체의 변화를 묻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신분 질서의 파괴인지 아니면 기술의 실현인지. 그 둘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내일 떠나라."
이준석이 말했다.
"여수에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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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서인 저택. 이항복의 서재 앞 복도에서 민준호는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왔다. 손에 든 것은 이준석의 행동 기록이었다.
이항복이 문을 열며 나왔다.
"무엇인가?"
"아버지, 저 자는 정말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민준호의 질문에 이항복의 눈이 좁혀졌다. 아버지는 손에 들린 기록을 뺏아 읽기 시작했다.
"지난주 노량진 골목. 천민 장인과 양반 관료가 함께 어떤 기구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봤을 때..."
"때가 무엇인가?"
"저 자는 정말 신분을 파괴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항복이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 안에는 실망이 있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 권력의 서열도 무너진다. 그러면 왕의 권위는? 그리고 우리의 지위는?"
이항복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민준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계속했다.
"우리는 그를 추적한다. 그의 기술 거점을 모두 찾아낸다. 그리고 왕께 고발한다. 왕이 스스로 그를 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항복은 기록을 다시 아들에게 돌려주었다.
"너는 계속 추적하라. 그리고..."
"네?"
"그 기술서를 가져오라. 어떤 방법으로든."
민준호가 기록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아버지의 지시는 명확했지만, 노량진 골목에서 본 이준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모습은 권력을 탐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쫓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버지, 혹시..."
민준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가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요?"
이항복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자는 왕의 권위를 위협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민준호는 침묵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정말 왕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을 이용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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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회의실. 광해군이 유영경과 이항복 사이에 앉아 있었다. 당파의 싸움은 여전했다. 그 와중에 유영경이 입을 열었다.
"기술도 결국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하면 기술은 독이 됩니다."
광해군이 고개를 들었다. 유영경의 눈이 왕을 향했다. 그것은 이준석을 겨냥한 말이 아니었다. 왕을 향한 경고였다. 왕도 도덕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 왕도 기술을 악용할 수 있다는 경고.
"그렇다면 신분 질서를 지키는 것이 도덕인가?"
이항복이 반박했다.
"신분 질서는 하늘이 정한 것입니다."
유영경이 말했다.
"하늘이 정했다고? 그렇다면 기술도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닌가? 기술도 결국 사람이 쓰는 것이오. 그 사람이 도덕적이지 못하면 기술은 독이 되는 법입니다."
이항복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술이 신분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것이 왕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천민이 신분을 뛰어넘는 기술을 습득하고, 그것으로 양반을 압도한다면, 조선의 근본은 흔들릴 것입니다."
유영경이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모두를 뚫고 나갔다.
"폐하께서는 신분 질서를 지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은 무너집니다."
광해군은 두 신료 사이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한쪽은 기술의 미래를 말하고, 다른 한쪽은 질서의 현재를 말했다. 왕은 둘 다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둘은 양립할 수 없었다.
유영경이 회의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절대적인 신념이 있었다.
이항복은 그 뒷모습을 따라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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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해역의 작은 섬. 이준석은 처음으로 실제 배를 타고 나왔다. 홍길동과 함께다.
"여기가 두 번째 조선소가 될 곳입니다."
이준석이 섬을 가리켰다. 절벽 아래 숨겨진 해안 동굴. 여기라면 한양에서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배가 해안에 가까워졌을 때 일이 났다.
밤의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의 자객 3명이 물속에서 올라왔다. 밧줄을 배에 던져 올라타려 한다. 홍길동이 먼저 반응했다. 손에 들린 목재 망치로 자객의 팔을 내려쳤다. 비명과 함께 자객이 떨어진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이미 배 위에 있었다.
이준석의 뒤에서 검이 날아온다. 그는 몸을 날려 피한다. 배 위는 순식간에 격투장이 된다. 홍길동이 또 한 명의 자객을 맞서 싸운다.
세 번째 자객이 이준석을 몰아붙였다. 검술에 능한 이 자객의 움직임은 체계적이었다. 훈련된 자의 움직임이었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자의 움직임.
이준석은 도망쳤다. 배의 선창까지.
자객이 따라온다. 이준석은 선창의 목재 기둥을 움켜쥔다. 자객의 검이 날아온다. 이준석은 기둥 뒤로 몸을 날린다. 검이 목재에 박혔다.
그 순간이었다.
이준석의 손이 자객의 목을 움켜쥔다. 검을 뺄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자객을 배 옆으로 몰아붙인다.
"누가 보냈는가?"
자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을 뱉을 뿐.
이준석의 손이 더 세게 움켜진다. 자객의 몸이 난간을 넘는다. 바다로 떨어진다.
이준석은 손을 내려놓고 숨을 쉰다. 하지만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내 손이 사람을 죽였다.*
그 생각이 뇌를 관통했다. 자객의 얼굴이 떨어지는 순간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그 눈빛. 그 절망. 그것이 정말 자신이 한 일인가.
이준석은 난간에 기대앉았다. 손을 들어 보았다.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기술서를 들었을 때는 미래를 그렸다. 철갑선을 상상했다. 조선의 해전을 그렸다. 그런데 이 손이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아무 의심 없이.
*기술이 이런 것인가. 이런 손을 만드는 것인가.*
그 깨달음은 차갑고 무거웠다. 자신이 추구하던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 기술은 사람을 죽이고, 신분을 파괴하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과정에서 이미 피에 손을 적신 자라는 것. 이것이 기술의 대가였다.
홍길동이 다른 한 명의 자객을 배에서 내쫓고 돌아왔다. 팔에서 피가 흘렀다.
"상처가?"
"괜찮습니다. 저 자들은?"
"모른다."
이준석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술서의 위치를 알고,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 안에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력은 이미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배는 여수 해안을 향해 나아갔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이준석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더 이상 미래를 그리는 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을 만드는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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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도착은 닷새 뒤였다.
목재 상인의 거점으로 위장한 창고는 산과 바다 사이의 계곡에 숨겨져 있었다. 외부에서는 단순한 염전 운영소로 보였다. 홍길동이 이미 현지의 신뢰할 만한 기술자 다섯 명을 섭외해 놓았다. 모두 천민 출신이었다. 신분이 낮을수록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이준석은 창고 내부를 돌아다니며 시설을 확인했다. 높은 천장, 넓은 작업 공간, 물품 운반을 위한 수로. 모두 철갑선 건조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곳에서 1년 안에 골격을 완성할 수 있을까?"
홍길동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짚었다.
"목재는 충분합니다. 인력도.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대인, 기술서의 손상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준석은 주머니에서 기술서를 꺼냈다. 페이지를 펼쳐본다. 지난 열흘 사이 또 두 장이 손상되었다. 글씨가 희미해지고, 일부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30년."
이준석이 중얼거렸다.
"뭡니까?"
"기술서의 첫 페이지 여백에 적혀 있던 숫자다. 아마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이 30년 안에 모든 기술을 실현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뜻일 터였다. 30년. 그것은 너무 짧았다. 기술서가 손상되는 속도를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한 곳에서만 건조해야 합니다."
홍길동이 말했다.
"아니다. 세 곳 모두에서 동시에 진행한다."
이준석이 기술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경주로 연락하라. 폐사찰 네트워크에 목재 재고가 있다. 우리는 여수, 경주, 그리고 한양 근처 산림에서 동시에 건조를 시작한다. 기술서가 손상되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 곳에서 완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 곳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한 곳에서라도 완성되어야 한다."
"대인, 그럴 수 없습니다. 기술서가 손상되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준석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누군가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 이미 자객까지 보냈다. 조정 안에 우리를 죽이려는 세력이 있다. 그들이 기술서를 빼앗으려 할 때마다 손상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래서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30년은 우리가 가진 전부다. 아니, 30년도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홍길동이 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자신이 죽음의 시간표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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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이미 봄이었다.
조정의 회의실에서 이항복과 유영경이 대면하고 있었다. 우의정과 좌의정. 서인의 수장과 동인의 수장. 이들 사이의 싸움은 조선 정치의 중심축이었다.
"임금께서 신분을 가리지 않는 기술 집단을 용인하신다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유영경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폐하께서는 국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항복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침착했으나, 눈빛은 예리했다.
"국력 강화? 신분 질서의 파괴를 국력 강화라 부르는가?"
유영경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술이 신분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신분은 하늘이 정한 것이니까요."
"하늘이 정했다고? 그렇다면 기술도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닌가? 기술이 신분을 파괴해야 조선이 산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신분 질서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왕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민이 신분을 뛰어넘는 기술을 습득하고, 그것으로 양반을 압도한다면, 조선의 근본은 흔들릴 것입니다."
유영경이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모두를 뚫고 나갔다.
"우의정께서는 신분 질서를 파괴하려는 자를 보호하시는 건가요?"
이항복이 일어섰다.
"폐하께서는 이미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신료들의 상소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받지 않으셨습니다."
유영경이 회의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절대적인 신념이 있었다. 신분 질서를 지키는 것이 곧 왕권을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은 왕을 압박할 것이었다.
이항복은 그 뒷모습을 따라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유영경은 왕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항복은 그 압박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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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이준석은 서희영을 만났다.
노량진 창고의 지하. 이제 그곳은 완전히 비워졌다. 모든 도구와 설계도는 여수와 경주로 옮겨졌다. 남은 것은 벽에 그려진 철갑선의 윤곽뿐이었다. 서희영은 그 윤곽 앞에 서 있었다.
"도망쳤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한양에서는."
이준석이 대답했다.
"기술서가 손상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한 달에 몇 장씩."
"알고 있다."
"30년이라고 하던데요."
이준석이 서희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말했는가?"
"기술서의 첫 페이지를 본 사람이 있었어요. 여백에 적혀 있던 거죠. 30년.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우리의 시간이라는 뜻일까요?"
서희영이 벽에 그려진 철갑선의 돛을 손가락으로 따라간다.
"30년이면 우리 모두 늙어있겠네요. 혹은..."
그녀는 말을 멈췄다. 혹은 죽어있겠다는 말을.
"기술이 신분을 파괴할 수 있다면, 우린 더 이상 천한 신분이 아닐 거 아닌가요?"
이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기술이 신분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일인가, 아니면 부수적인 결과인가. 그리고 기술을 위해 자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미 사람을 죽였으니,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준석이 묻었다.
"신분을 벗기 위해서요."
서희영이 돌아봤다.
"그게 전부인가?"
"아니에요. 기술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가 멈췄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서희영의 눈빛이 뭔가를 태웠다. 이준석은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의 결심을 본다. 동시에 자신이 이 여자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도 본다. 희망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여수로 와라. 내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너다."
"언제요?"
"내일."
서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벽에 그려진 철갑선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 선은 미완성이었다. 하지만 그 미완성의 선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신분의 파괴, 기술의 실현, 그리고 자신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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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한양. 광해군의 침전.
이항복과 민준호가 알현했다. 민준호는 아버지의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눈빛은 불안정했다.
"폐하, 중대한 고변이 있습니다."
이항복의 목소리는 공식적이었다. 광해군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왕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무엇인가?"
"조정의 한 관료가 비밀 조선소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천민과 양반을 함께 모아 기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술 연구?"
"철갑선 건조입니다. 미래에서 온 기술서를 바탕으로 말입니다."
광해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이준석을 만났을 때의 약속을 생각했다. 비밀 지원. 왕의 명으로 비밀 지원.
"그 관료의 이름은?"
"관료 이준석입니다. 현재 여수 해역으로 도망쳤습니다."
광해군의 손이 팔걸이를 움켜쥔다. 손가락이 부러질 듯 움켜진다. 이 손이 이준석에게 기술서를 건넸던 손이었다. 이 손이 그를 보호하라고 명한 손이었다. 이 손이 이제 그를 죽이라고 명하려 한다.
왕은 침상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나아갔다. 한강이 보였다. 봄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 그 강 어디선가 철갑선이 건조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지원한 철갑선이.
"파악하라. 그리고..."
왕은 말을 멈췄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내린 지시가 이제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는 것을. 권력의 논리가 기술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을. 신료들의 상소가 왕의 손을 묶으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왕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광해군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준석에게 준 기술서의 첫 장이었다. 그 여백에는 "3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왕은 그 글씨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미래에서 남긴 이 숫자는 무엇인가. 시간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아니면 자신의 무능함을 기록한 것인가.
"폐하?"
이항복이 기다렸다.
왕은 기술서를 다시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것이 왕의 손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 손이 신분 질서를 지키려 하고, 동시에 기술의 미래를 꿈꾸려 한다. 이 손이 이준석을 밀어내고, 동시에 그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왕의 모순이었다. 구조적 비극이었다.
"그를 체포하거라."
왕의 대답은 공허했다. 창 너머로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 위에서 철갑선이 건조되고 있었고,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조선은 결코 같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왕은 그것을 막아야 했다. 신료들의 상소를 받아야 했다. 기득권층의 압박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민준호."
광해군이 민준호를 바라봤다.
"그 자를 찾을 때까지 여수, 경주, 모든 해안 거점을 수색하라. 기술서를 빼앗아오거라."
"예, 폐하."
민준호가 절을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저 자는 정말 나라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위한 것인가?*
그 질문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이준석의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 옳은가. 그 둘을 동시에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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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침전에 침묵만 남았다.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취약했다. 신료들의 상소 하나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준석의 기술도, 그 기술로 지을 철갑선도 모두 권력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했다.
광해군은 침상에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기술서의 첫 장이 들려 있었다. "30년"이라는 글씨를 다시 들여다봤다. 누군가가 미래에서 남긴 이 숫자. 그것이 시간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왕은 그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 신료들의 압박 속에서, 권력의 논리 속에서.
"나는 왕이지만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광해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넌 그걸 아는가, 이준석?"
창 밖 한강 위로 봄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위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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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로 가는 길. 민준호는 말을 타고 있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
검을 허리에 찼다. 왕의 명령대로라면 이준석을 체포해야 한다. 하지만 민준호의 손은 검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노량진 골목에서 본 그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권력을 탐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쫓기는 자. 자신처럼 의문을 품는 자.
말의 고삐를 잡으며 민준호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왕을 위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 왕을 위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을 이용하는 것인가. 그 질문은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왕의 명령을 따르면서 정말 나라를 위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이준석을 찾아가는가.
민준호의 손이 검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검의 손잡이를 흔들었다. 그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이준석을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이준석의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가.
여수로 가는 길은 길었다. 그 길 위에서 민준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 답은 여수에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서 이준석을 만날 때, 자신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의 아들인지, 아니면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