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량진의 비밀
노량진 창고의 뒷골목을 나선 지 불과 삼십 보. 이준석은 담장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추적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검은 옷의 세 남자는 이미 창고 입구로 향해 있었다. 횃불이 없었다면 그들의 손에 들린 쇠갈고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창고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파내려는 도구였다. 이준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가 이곳을 알았단 말인가. 광해군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강가에 도달했을 때 뒤를 따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준석은 갈대를 헤치며 물 가까이로 내려갔다. 겨울 한강은 차가웠다. 물이 무릎까지 찼을 때 이준석은 뒤돌아 갈대숲을 보았다. 횃불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추적자들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손이 이준석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쪽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준석이 돌아보니 남장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은 숯으로 검게 칠해져 있었고, 눈빛만 또렷했다.
"당신은 누구—"
"뒤따르는 자들이 누구든, 이 책을 원하는 자들입니다. 말은 나중입니다."
여인은 이준석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물 속으로 깊이 내려가며, 강 밑의 암반 사이로 이끌었다. 이준석은 저항할 수 없었다. 여인의 움직임에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만으로도 충분했다. 추적자들의 횃불이 강변에 도달할 즈음, 둘은 이미 강물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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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 암반 사이의 좁은 틈새를 빠져나간 이준석과 여인은 노량진의 버려진 창고 지하로 들어갔다. 돌계단을 내려가며 여인이 횃불을 밝혔다.
지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의 손이 닿아 있었다.
목재 더미들이 체계적으로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대포 주조틀의 틀이 부분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돌 위에는 설계도의 스케치가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숯으로 그린 것들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들. 누군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흔적이었다.
"당신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군요."
이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삼 년 전부터입니다."
여인이 횃불을 높이 들었다. 지하 공간의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한쪽 벽면에는 목재 가공을 위한 도구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톱, 끌, 망치. 모두 고급 도구였다. 반대쪽에는 대포 주조를 위한 모래틀과 용광로의 골격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곧 불을 피울 수 있는 상태였다.
"철갑선을 만들 수 있는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고서상에서 그 책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 자라는 것을."
여인은 남장 속 가슴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 안에는 기술서의 일부 페이지 복본이 들어 있었다.
"내 이름은 서희영입니다. 양반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여인이 숨을 쉬었다. 그 숨 속에는 오랜 시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기술 앞에서 신분은 무의미합니다."
이준석은 그 페이지들을 받아 들었다. 자신의 기술서와 다른 부분도 있었다. 누군가 다른 기술서를 본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기술서를 가진 또 다른 자들을 찾았습니까?"
"둘이 있었습니다."
서희영이 말을 멈췄다. 그 침묵 속에는 무언가 무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마치 그 기억 자체가 고통인 듯.
"모두 죽었습니다. 의문의 죽음이었습니다."
이준석이 페이지를 받은 손이 떨렸다.
"누구였습니까?"
"한 명은 경주의 광산 감독이었습니다. 광맥 개발 중 갱도 붕괴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산 기술자가 아니라 철갑선의 설계를 이해하는 자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서울의 대장장이였습니다. 화약고 폭발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그가 철갑선의 포장 기술을 연구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서희영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둘 다 기술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처럼. 그들도 나처럼 삼 년 전부터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알았습니까?"
"편지로만 만났습니다. 기술서를 나누며 기술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경주의 광산 감독은 선체의 곡선 설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대장장이는 철의 성질과 담금질 기술에 정통했습니다. 우리는 각각 다른 부분의 기술서를 가지고 있었고, 함께 하나의 완전한 설계도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서희영이 손수건의 페이지들을 펼쳤다. 각 페이지에는 다른 필적으로 주석이 달려 있었다.
"경주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선체의 곡선이 이 각도라면, 파도의 저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철판의 두께는 이 정도여야 한다.'"
서희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찾고 있다. 조심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찾던 그 자를 만나면, 이것을 모두 전하시오. 우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책은 단순한 기술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 명의 목숨이 담긴 유산이었다. 소유하는 것 자체가 위험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이미 두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당신은 삼 년을 기다렸습니까?"
"네. 당신을 찾기 위해."
서희영의 눈이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이 기술서를 혼자 품고 있었습니다. 혼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혼자 풀어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찾기 위해 이 공간을 준비했습니다. 도구들을 모으고, 설계도를 다시 그렸습니다. 혹시 당신이 나타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이준석은 지하 공간을 다시 바라봤다. 목재 더미들, 주조 도구들, 그리고 벽에 매달린 공구들. 모든 것이 누군가의 오랜 준비의 흔적이었다. 그 준비는 절망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명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도, 서희영은 계속 준비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했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서희영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그들의 죽음이 의도된 것이라면, 누군가 이 기술서를 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먼저 이것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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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창고의 지하가 이준석의 첫 번째 비밀 조선소가 되었다. 추적자들은 이틀 뒤 창고 위층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강물 아래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들을 모으는 데 보름이 걸렸다. 서희영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는 목재 가공의 최고 장인 홍길동이었다. 지하 조선소의 어두운 공간에서 이준석과 홍길동이 처음 만났을 때, 목재 장인은 설계도를 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가락으로 곡선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 속에는 경외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 중얼거림 속에는 창작자의 욕망도 있었다.
"이런 곡선을 어디서 봤습니까?"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억합니다."
이준석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실이 아니었다.
홍길동이 설계도에서 눈을 떼고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의아함에서 확신으로.
"당신은 이것을 만들어본 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설계한 자입니까?"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홍길동이 다시 설계도를 들었다. 이번에는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부를 들여다봤다. 선체의 곡선, 내부 구조, 대포 설치 위치. 그의 손가락이 각 부분을 천천히 따라갔다.
"이것은 배가 아닙니다."
홍길동이 중얼거렸다.
"이것은 예술입니다. 목재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경외감의 떨림이 아니었다. 장인이 자신의 한계를 마주했을 때의 떨림이었다.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의 떨림이었다.
"나는 이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홍길동이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더 강한 것은 열망이었다.
"비록 죽음이 따라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나는 이미 불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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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두 명을 만난 것은 밤중이었다. 서희영이 어둠 속으로 데려온 그들은 지하 조선소의 입구에 서서 떨고 있었다.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자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사형을 의미했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준석이 설계도의 일부를 펼쳐 보였다. 손상된 페이지들은 피하고, 가장 명확한 부분들만 보여줬다. 천민들의 눈이 설계도 위를 맴돌았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데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들 수 있습니다."
한 명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준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 속에는 의문보다 다른 것이 더 컸다.
"당신들은 왜 여기에 왔습니까?"
이준석이 입을 다물고 있던 천민에게 물었다.
"서희영 나인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 신분을 바꿀 수 있다고."
천민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신분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민이 이준석을 바라봤다.
"천민은 죽을 때까지 천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드는 것이 무엇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만든 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자는 죽어도 기억됩니다."
이준석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천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 상승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불멸이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통해 영원히 살아남고 싶은 욕망이었다.
다른 천민이 입을 열었다.
"저는 대포를 주조해본 적이 있습니다. 관군의 대포를 만들다가 손가락을 잃었습니다."
그는 왼손을 들었다. 검지와 중지가 없었다.
"그 대포가 누군가를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작품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군의 대포일 뿐입니다. 나는 그 대포 때문에 손가락을 잃었지만, 그 대포는 나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천민이 이준석을 바라봤다.
"여기서 만드는 것이 무엇이 되든, 그것은 나의 작품이 될 것입니까?"
"네."
이준석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비록 죽음이 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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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주가 지난 어느 날 밤, 이준석은 기술서를 펼쳐 들었다. 첫 번째 철갑선 설계도 부분. 선체의 곡선을 설명하는 다섯 페이지. 그 중 세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이준석의 손가락이 멈췄다.
페이지가 희미해져 있었다.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 손상된 것이었다. 정밀한 수학 곡선들이 마치 물에 젖은 듯 흐릿해져 있었다. 이준석의 손이 떨렸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것도 가장자리부터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준석의 손가락이 그 페이지를 따라가다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 했을 때 손가락이 종이를 찢었다. 미세한 파열음. 이준석의 손이 얼어붙었다.
종이의 가장자리가 부스러지고 있었다. 글씨는 흐릿해지고, 그림은 흐릿해지고, 선은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시간 속에서 이 페이지들을 천천히 지워내고 있는 듯했다.
이준석은 책장을 더 이상 넘기지 못했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한 짓을 보며 숨을 쉴 수 없었다.
책을 산 지 채 한 달이 안 되었는데, 이미 다섯 페이지가 손상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잃어버릴 것인가. 얼마나 더 시간이 남아 있는가.
고서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책은 주인이 많이 바뀐 책이오. 누구든 가지면 끝이 좋지 못하다더이다."
이준석은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했다. 이 책은 소유하는 것 자체가 저주였다. 시간의 저주였다. 그리고 그 저주는 이미 다른 두 명의 기술서 소유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경주의 광산 감독. 서울의 대장장이. 그들도 이 같은 손상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들도 이 같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준석의 손가락이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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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만난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경복궁의 비밀 통로. 왕은 평복을 입고 있었다. 왕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목소리와 눈빛뿐이었다. 광해군은 이준석이 가져온 설계도 스케치를 오래 들여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봤다. 그의 얼굴은 석상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왕의 첫 마디였다.
"가능합니다. 오직 시간만 있다면."
"시간은 없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는 계속 약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해상 팽창을 준비 중이고, 명나라는 쇠락하고 있습니다. 청의 건주여진은 북에서 위협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삼면이 적입니다."
광해군은 설계도에서 눈을 떼고 이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며 이준석을 훑었다.
"나는 왕이지만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합니다. 넌 그걸 아는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폐하?"
"서인과 동인이 있습니다. 저들은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변화는 저들의 지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나를 압박합니다. 상소와 언론으로. 저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나도 원할 수 없습니다."
이준석은 왕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릅니다."
광해군이 설계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그 손가락이 설계도의 선체 곡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마치 그 곡선이 자신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것은 나라의 문제입니다. 저들의 당파 싸움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습니다. 비밀리에."
"어떻게 도우실 것입니까, 폐하?"
"노량진 창고는 이미 나의 소유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거기서 일하는 자들의 신분을 조회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필요한 철과 나무는 특별 예산에서 조달하겠습니다. 공식 기록에는 남지 않도록."
광해군은 주머니에서 상감된 동전을 꺼냈다. 왕실의 표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동전의 무늬를 천천히 문질렀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것을 가지시오. 필요한 것을 요청할 때 이것을 제시하시오. 누구든 당신의 편이 될 것입니다."
이준석이 동전을 받으려 손을 뻗었을 때, 광해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기억하시오. 내가 너를 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왕의 눈빛이 변했다. 그 눈빛 속에는 미안함도, 위협도 아닌 다른 것이 있었다. 필연성. 마치 이미 정해진 일을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치의 압박이 너무 커지면, 나는 너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왕의 숙명입니다."
광해군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동전이 이준석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차가운 금속의 무게. 이준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해합니까?"
"네, 폐하."
이준석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왕은 설계도를 다시 이준석에게 건넸다. 그 손가락이 설계도 위에서 한 번 더 멈췄다. 마치 그것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그렇다면 시작하시오. 그리고 누구에게도 나와 만났다는 것을 말하지 마시오. 내가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숨기는 것입니다."
"왜 저를 도우십니까, 폐하?"
광해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치 그 질문 자체가 예상 밖이었던 듯. 왕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왕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권력자의 얼굴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왕은 비밀 통로 쪽으로 향했다. 돌아서며 한 마디를 더했다. 그 목소리는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자를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왕인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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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으로 돌아온 이준석은 기술서를 다시 들었다. 이제 그것을 펼치는 것이 두려웠다. 매번 새로운 손상을 발견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을 멈췄다.
철갑선의 선체 곡선. 그 다음 페이지. 선체의 내부 구조. 손상되지 않았다. 안도감이 들었다. 그 다음. 대포 설치 위치. 희미해지고 있었다.
기억으로 재구성해야 했다. 이준석은 돌 위에 숯으로 다시 그렸다. 그전의 스케치와 비교했다. 뭔가 다를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은 불완전했다. 사진이 아니라 흔적일 뿐이었다. 흔적은 왜곡되고, 왜곡은 누적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홍길동이 물었다. 이준석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고 있었다.
"모릅니다."
이준석의 대답은 솔직했다.
"만들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들겠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만들면 됩니다."
홍길동의 목소리는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이준석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실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홍길동은 몰랐다. 하지만 이준석은 알고 있었다. 실패는 시간의 낭비였고, 시간은 기술서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사라지면, 광해군도 사라질 것이었다.
이준석은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광해군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너를 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일까. 그리고 그 전에 기술서가 완전히 사라질까, 아니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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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를 나가며 이준석은 뒷골목을 택했다. 창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 이제 습관이 되었다. 감시당하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직감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느낌 자체가 이준석을 조심스럽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골목의 어귀에서 이준석은 멈췄다. 맞은편 담장 그림자에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이 보였다. 이준석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며 이준석의 전신을 훑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그 눈빛 속에는 미움이 없었다.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마치 그 사람이 이준석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준석은 그 눈빛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이 자신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
이준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이준석을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가 열 발 정도 남았을 때, 그 사람이 돌아섰다.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준석은 그곳을 지나가며 그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 젊은 남자였다. 옷은 양반의 것이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양반의 것이 아니었다. 검객의 움직임이었다. 발 디딤이 가볍고, 어깨의 움직임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는 훈련이 있었다.
누군가가 이준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확실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감시자는 이준석을 죽이려는 것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적하는 것. 확인하는 것. 그것이 목표인 듯했다.
그렇다면 누가. 광해군의 사람인가. 아니면 기술서를 원하는 다른 누군가인가. 아니면 노량진 창고를 습격하려던 그 추적자들인가.
이준석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광해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왕은 자신을 도울 수 있지만, 동시에 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감시는 보호인가, 아니면 감금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이준석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노량진 창고로 향하는 길. 그 길 위에서 이준석은 결단했다.
광해군의 보호 아래서도, 자신은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왕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면, 자신도 왕에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서희영, 홍길동, 천민들. 이들과 함께 기술서를 완성해야 한다. 광해군의 도움 없이도.
그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왕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내가 너를 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이준석은 이미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기술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래야만 경주의 광산 감독과 서울의 대장장이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준석은 노량진 창고의 입구에 도달했다. 강물 아래의 암반 사이. 그 좁은 틈새로 내려가며, 이준석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시간이 남아 있는가. 기술서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철갑선을 완성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를 더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이준석은 답을 몰랐다. 단지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 뒤돌아볼 수 없는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