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의 거리는 여전히 피와 재로 덮여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벌써 7년이 지났지만, 남대문 일대의 건물들은 아직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준석은 말이 끄는 수레를 피해 골목으로 들어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관료님, 여긴 위험합니다."
옆에 따라온 종이 말했다. 이준석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거짓이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7년 전 도요토미의 군대가 밀려 내려왔을 때,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이준석의 아버지는 의병을 모아 저항했다. 아버지는 죽었다. 형도 죽었다. 서울 대부분이 죽었다.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이준석은 한양의 가장 낡은 서점으로 들어갔다. 간판에는 '고서상 삼청'이라고 쓰여 있었고, 글씨는 반쯤 벗겨져 있었다. 안에는 책과 먼지 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어서 오시게."
주인은 팔십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얼굴에 흠집이 많았고, 한쪽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아마 전쟁 때문일 것이었다.
이준석은 책장을 따라 걸었다. 경국대전, 동의보감, 사마천의 사기... 모두 낡은 것들이었다. 조선이 아직도 과거의 책만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
주인이 물었다.
"기술서를 찾고 있습니다. 농업이나 목공, 혹은 항해술에 관한 책 말입니다."
노인의 눈이 움직였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뒤 손가락으로 한 모서리를 가리켰다.
"저리 한번 보시게."
이준석이 그곳으로 다가갔을 때,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표지가 낡아 글씨를 읽을 수 없었다. 가죽 바인딩은 거의 떨어져 나갔고, 책 등은 검게 변해 있었다. 마치 불에 탄 것처럼.
하지만 그 책을 펼쳤을 때, 손가락이 멈춰 버렸다.
철갑선(鐵甲船).
그 단어 아래에는 정교한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목재 대신 철판으로 덮인 배. 측면에는 대포를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포구(砲口)가 표시되어 있었다. 글씨로는 '선체 강도 계산', '용접 기술', '방수 처리'라는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준석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화약 무기에 관한 기술이었다. 현재 조선에서 쓰는 포의 10배 이상 위력을 가질 수 있는 설계도. 신관(信管)의 제작 방법. 탄약의 정확한 배합비. 모든 것이 수치와 도면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다음 페이지. 항해술이었다. 나침반의 정확한 사용법, 해도 제작 방법, 별을 이용한 위도 측정법...
이준석의 손이 떨렸다. 이건 무엇인가. 이건 정말 무엇인가.
책의 맨 앞으로 돌아갔다. 표지 안쪽에는 누군가 손으로 적어 놓은 글씨가 있었다.
'조선학 백과사전'
그 아래에는 무언가가 지워져 있었다. 연필로 쓰인 글씨가 문지르고 또 문질러져서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옆에 명확하게 적혀 있는 글씨가 있었다.
'30년'
"이 책... 얼마입니까?"
이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인이 다가왔다. 한쪽 눈으로 책을 바라봤다.
"이 책이 뭔데, 목소리가 그러신가?"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주인은 한참을 생각했다.
"이 책은 주인이 많이 바뀐 책이오. 누구든 가지면 끝이 좋지 못하다더이다. 그런데도 사시려 하신다면..."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었다. "오십 냥이면 되겠네."
오십 냥. 이준석의 월급은 십 냥이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세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책이 사람에게 끝이 좋지 못하다니."
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책, 전에 여러 사람이 가져갔어. 한 양반은 한 달 뒤에 죽었고, 한 명은 미쳐버렸고... 마지막 사람은 왜 사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 여기 다시 들어왔어. 저주받은 책인가 싶어서." 노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돈은 받겠지. 이 형편에 돈을 거절할 순 없으니까."
이준석은 침을 삼켰다. 저주받은 책.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기술 전수자의 죽음. 책에 적힌 '30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가진 자의 수명인가. 아니면 기술 완성까지의 시간인가.
그 의미를 곱씹으며 이준석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 돈을 세어 냈다. 오십 냥. 한 달 월급을 날렸다. 책을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이준석은 책을 품에 안고 나갔다. 뒤에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하시게, 젊은이. 그 책은 정말 이상한 책이오."
한강 남단으로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이준석은 종을 집으로 보내고 혼자 걸었다. 책은 계속 품에서 무거움을 드러냈다. 손으로 만져보면 정말로 있는 것이었다. 현실이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방에 들어간 이준석은 문을 꼭 잠갔다. 창문도 막았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책을 펼쳤다.
다시 철갑선의 설계도를 봤다. 이번엔 더 정확히 읽었다. 선체의 치수, 철판의 두께, 용접 방법... 모든 것이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이면 된다.
이것이면 일본의 함대를 상대할 수 있다.
이것이면 다시는 도요토미 같은 자가 쳐들어올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이준석은 중얼거렸다.
"이것이면... 일본을 침략할 수 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병을 모아 저항하다가 왜군의 화살에 맞아 죽어간 아버지. 형도 떠올랐다. 서울이 함락되는 날, 형과 함께 도망치다가 뒤에서 나타난 왜군의 칼에 베인 형.
이준석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는 없다. 다시는 절대 없다."
그는 맹세했다. 책을 펼친 채로 밤을 지샜다. 매 페이지마다 멈춰 읽었다. 철갑선의 건조법. 대포의 제작 방법. 항해술. 모든 것이 미래에서 온 지식이었다. 500년을 뛰어넘은 기술들이었다.
새벽이 물러갈 무렵, 이준석은 결심했다.
비밀 조선소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술을 누구에게도 알려주면 안 된다. 이 기술은 조선의 미래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이준석은 책을 다시 감싸 숨겼다. 그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한강 남단으로 가야 했다. 노량진 일대를 살펴봐야 했다. 첫 조선소의 위치를 정해야 했다.
거리로 나섰을 때, 이준석은 뒤를 돌아봤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세 명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사냥꾼처럼.
이준석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가 나를 따라오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준석은 걸음을 늦췄다. 자연스럽게.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의 속도를 재는 것이었다.
세 명이 모두 같은 간격을 유지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움직임이었다.
한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다다랐을 때, 이준석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놀던 곳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들의 배치를 알고 있었다.
검은 옷의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이준석의 호흡이 빨라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생각은 차가웠다. 책을 숨겼다. 품 안의 기술서는 이미 방의 벽 사이에 감춰놨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명확했다.
이준석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누구십니까?"
세 명의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을 드러냈다.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같았다. 목표를 정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이준석인가?"
목소리는 중년 남자였다. 가운데 사람이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당신들은 누구신가요?"
이준석은 침을 삼켰다.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품 안에 숨겨놓은 작은 칼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할 것 같았다. 이들의 움직임은 전문가의 것이었다.
"당신이 오늘 고서상에서 책을 샀다고 들었네."
이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빨리? 고서상에서 나온 지 채 두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책 말입니까?"
"거짓말하지 마시오.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숨겼는지만 말씀하시면, 우리가 물러나겠습니다."
가운데 사람의 손이 움직였다. 칼의 자루를 만졌다. 천천히, 위협적으로.
이준석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서인인가? 동인인가? 아니면 왕의 명을 받은 자들인가? 혹은 다른 누군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책을 지켜야 한다.
"저는 그런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정말 모릅니다."
이준석은 갑자기 옆 건물의 담장으로 뛰어올랐다. 손가락으로 벽을 밀어 몸을 던졌다. 3척 높이의 담장이었다. 떨어지면서 다리에 통증이 흘렀지만, 계속 뛰었다.
뒤에서 검은 옷의 사람들이 따라왔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준석은 한강 쪽으로 달렸다. 이곳도 자신의 영역이었다. 어려서부터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곳이었다. 강변의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며 뒤를 돌아봤다. 세 명이 모두 따라왔다. 가운데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잡아라!"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이준석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뒤따르는 두 번째 화살. 이번엔 그의 어깨를 스쳤다. 통증이 흘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들이 활을 쏜다!"
이준석은 더 빠르게 달렸다. 좁은 골목을 지나 넓은 길로 나왔다. 뒤에서 칼을 그으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음. 경고음. 죽음의 신호였다.
강에 다다랐을 때, 이준석은 뒤를 돌아봤다.
검은 옷의 사람들이 강변에 멈춰 섰다.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마치 어떤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는 듯이. 가운데 사람이 칼을 내렸다. 다른 두 명이 그를 바라봤다.
이준석은 숨을 고르며 강물을 바라봤다. 강 건너편은 경기도 지역이었다. 벼슬도 없고, 권력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준석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봄 물이 차갑게 몸을 감쌌다. 다리가 마비될 듯 따가웠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강 건너편으로 헤엄쳤다. 팔이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을 고르고 또 고르며.
강을 건너고 나서, 뒤를 돌아봤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여전히 강변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석은 젖은 옷을 짜며 일어섰다. 차가운 봄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는 춥지 않았다. 가슴 속에 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
이준석은 중얼거렸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술로 조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시는 외침을 받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굳어졌다. 두려움은 사라졌다. 대신 절박한 결의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맴돌았다. 저들은 왜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왜 그곳에서 멈췄을까.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던 걸까.
노량진 일대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이준석은 마음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어디에 조선소를 지을 것인가.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를 경계할 것인가. 어떻게 왕의 눈을 피하면서 기술을 축적할 것인가.
강변의 창고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목재 상인, 곡물 창고, 염료 저장소... 이준석은 각 건물을 살펴봤다. 접근성, 은폐 가능성, 강과의 거리. 모든 것을 계산했다.
노량진의 한 창고에 다다랐을 때, 이준석은 멈춰 섰다. 붉은 벽돌로 지은 낡은 건물이었다. 목재 상인의 창고로 위장하기에 충분했다. 내부는 어두웠고, 외부는 한강의 물 위를 향하고 있었다. 강 건너편으로의 탈출로도 확보되어 있었다.
다른 후보지들과 비교해보니, 이곳이 가장 적합했다. 관군의 순찰로부터 거리가 있으면서도 강으로의 접근이 용이했다. 무엇보다 이 일대는 상인들의 출입이 잦아 의심을 받기 어려웠다.
"여기다."
이준석은 중얼거렸다.
"여기서 시작하자. 첫 번째 철갑선을."
그 순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준석은 몸을 날렸다.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숨겼다.
"누구 있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늘지 않았다. 단호하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이준석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창고의 벽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남장을 한 여인이었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명확하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선명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서희영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한 발 다가왔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준석의 호흡이 멈췄다. 자신이 아무도 말하지 않은 계획을 이 여인이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당신이 나를 알고 있는 겁니까?"
"당신의 책을 본 사람은 당신만이 아닙니다."
서희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위협적이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고서상에서 당신을 감시했습니다."
이준석의 눈이 좁혀졌다.
"감시했다고?"
"네. 당신이 그 책을 찾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주인과 나는 예전부터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서희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당신을 따라온 저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기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이 누구라고?"
"왕의 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서희영이 답했다.
"광해군께서는 당신을 감시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가진 기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준석은 침을 삼켰다. 광해군.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왕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왜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왜 자신을 놓아줬을까.
"왕께서 왜..."
"보호하는 것입니다."
서희영이 끊어 말했다.
"아니면 감시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그 순간, 창고 밖에서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여러 마리였다.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저들이 왔습니다."
서희영이 중얼거렸다.
"지금 내려가야 합니다."
이준석과 서희영은 창고의 벽을 따라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그 순간, 창고의 문이 밖에서 쾅 하고 열렸다.
"이 창고를 포위하라!"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 왕의 명이다!"
횃불의 불빛이 창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그림자들이 창고의 입구를 막았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곳입니다."
서희영이 이준석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미 어둠 속의 길을 알고 있었다. 손을 따라 움직였다. 벽을 짚으며. 발을 조심스레 내디디며.
"빨리!"
서희영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창고의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돌계단이 나타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뒤에서는 왕의 명을 받은 자들이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횃불을 들고 어둠을 헤치며. 발걸음이 계단으로 향했다.
이준석과 서희영은 지하의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갔다. 돌계단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었다. 숨을 고르며. 발을 재빨리 옮기며.
위에서 횃불의 불빛이 계단 입구를 비추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가! 저들이 여기 있다!"
목소리가 울렸다.
지하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이준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서희영이 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봤다. 위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횃불. 점점 커지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의 무게.
이준석은 생각했다. 책을 지켰다. 하지만 무엇을 잃었는가. 더 이상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왕의 감시 아래, 미지의 여인과 함께, 지하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 이것이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30년'
책에 쓰인 그 숫자가 떠올랐다. 30년 안에 이 기술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30년 안에 죽는다는 뜻인가. 이준석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지금 무엇인지만 알았다.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자. 왕의 감시 대상. 그리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 위의 사람.
서희영이 그의 손을 다시 당겼다. 지하 깊숙한 곳으로. 어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