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오후 6시 12분.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유진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낡은 사진이 있었다.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찍은 것. 누군가의 존재가 의도적으로 지워진 그 사진.

유진은 스탠드를 켰다. 밝은 빛이 사진에 비쳐졌다. 지워진 부분을 빛에 투과시키자, 검은색 펜 자국 아래에서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물의 형태. 어깨. 목. 얼굴의 윤곽.

펜 자국 아래에서 눈이 보였다. 나현의 눈이.

유진의 숨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의 회상이 아니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물리적 증거였다. 자신이 나현을 사진에서 지웠다. 펜으로 칠해서 없애버렸다. 마치 그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진을 뒤집었다.

뒷면에 글씨가 있었다. 자신의 필체로. 손으로 쓴 글씨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극도의 불안 속에서 누군가 펜을 들었을 때의 그것처럼.

'나현에게 미안해. 그리고 영원히 미안해야 할 것 같아.'

글씨 아래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정확히 3년 전 그날이었다.

유진은 사진을 내려놨다.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사진을 바라봤다. 검은색 펜으로 칠해진 나현. 그리고 자신의 필체로 적힌 미안함의 말.

그녀는 이해했다. 자신이 단지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흔적을 지우려 했다는 것을. 사진에서, 기억에서, 자신의 삶에서 나현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는 것을. 그 절망적인 노력이 모든 것을 시작했다. 도서관의 반복을, 이 악몽을.

시계를 봤다. 오후 6시 47분이었다.

밤 11시까지 4시간 13분. 유진은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불안정했다. 감각 지연은 여전했다. 손가락이 책상에서 떨어지는 데 거의 1초가 걸렸다. 감각이 지연될수록 자신이 자신이 아니어진다는 느낌. 신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어지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이전 반복에서 도달한 지하 5층. 그 너머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 있을 것이다.

유진은 사무실을 나갔다. 도서관의 복도는 조용했다. 오후 시간 도서관은 항상 조용했다. 몇몇 이용객들이 열람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은 유진을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은 정말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유진의 투명함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열람실을 지나 지하로 향하는 문 앞에 도달했다. 문 앞에는 여전히 '11시 이후 진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그것을 어겼으니까. 이미 많은 번 어겼으니까.

문을 열었다.

지하 1층부터 시작되는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떨어졌다. 벽은 점점 더 축축해졌다. 형광등의 불빛도 희미해졌다. 유진은 손을 벽에 대며 내려갔다. 벽의 거친 질감, 오래된 습기의 냄새,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 2층. 지하 3층.

지하 4층의 문 앞에 도달했을 때, 유진은 멈췄다. 이전 반복에서 본 그 장면이 떠올랐다. 수천 권의 '나현의 죽음'이라는 책들. 책장들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던 그 공간. 그리고 나현과 자신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겹친 존재.

"더 내려가."

목소리는 지하 4층에서 들려왔다. 유진은 문을 열었다.

책장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엔 다섯 가지 책들이 섞여 있었다.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필체로 쓰인 책들. 나현의 필체. 자신의 필체. 어머니의 필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가지 필체.

유진은 책들 사이를 헤쳤다. 책장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유진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혹은 유진을 깊숙한 곳으로 인도하려는 것 같았다.

지하 5층의 금속문이 보였다. 손가락 자국이 내부의 잠금장치에 닿아 있었다. 유진은 손잡이를 잡았다. 감각 지연이 2초를 넘었다. 손가락이 금속에 닿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거의 3초가 걸렸다.

문이 열렸다.

지하 5층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형광등이 없었다. 유진은 손가락으로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이 바닥을 짚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발소리도 지연되어 들렸다. 먼저 느껴진 후 나중에 들렸다.

더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 6층으로 향하는. 유진은 내려갔다.

그리고 멈췄다.

앞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잠금장치가 없었다. 문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백색의 빛.

유진은 문을 밀었다.

방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전의 책들과는 달랐다. 이 책들은 모두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나현의 얼굴'

책장 위에, 책상 위에, 바닥에 흩어져 있는 수백 권의 '나현의 얼굴'. 모두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필체로 쓰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난해해지는 필체들. 마지막 책들의 필체는 거의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

유진은 가장 가까운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낡아 있었다. 하지만 글씨는 명확했다. 자신의 초기 필체로 쓰여 있었다. 책을 펼쳤다.

사진이 나왔다.

그것은 유진이 사무 서랍에서 본 사진과 같은 것이었다.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하지만 지워진 부분이 복원되어 있었다. 나현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였다.

나현의 얼굴. 유진은 그것을 기억했다. 아니, 그것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기억했다.

나현이 도움을 청했던 날. 나현이 자신을 찾아왔던 날. 그날 오후, 지하 서고에서. 나현이 울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이 필요했다.

"제발 도와줘. 나한테 아무도 없어. 너만 있어."

나현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절망했다.

유진은 거부했다.

"나도 바빠. 나중에 봐."

그 순간, 어머니가 나타났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나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을 본 어머니의 표정이 바뀌었다.

"유진, 저 아이한테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저 아이가 우는데? 친구를 돕는 것도 못 하냐고?"

어머니의 말이 유진을 짓눌렀다. 도움을 청한 나현, 그리고 그것을 외면한 자신.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 어머니. 창피했다. 자신이 나현을 거부했다는 것이 들통났다. 자신의 약함이, 이기심이 드러났다.

그 순간, 유진은 어머니를 밀었다.

손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밀었다. 의도적이었다. 어머니를 침묵시키고 싶었다. 그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계단으로 넘어갔다.

나현이 어머니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유진도 나현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나현은 유진의 손을 피해 몸을 날렸다.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나현. 유진이 나현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닿지 않았다. 나현의 머리가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 목이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나현의 몸이 계단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은 책을 놨다. 손이 떨렸다. 감각 지연이 4초를 넘었다.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까지 4초가 걸렸다.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또 다른 '나현의 얼굴'. 이 책의 필체는 더 난해했다. 책을 펼쳤다.

다시 사진이 나왔다. 같은 사진이지만 각도가 다르게 촬영된 것 같았다. 나현의 얼굴이 더 명확했다. 나현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눈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두려움. 절망. 그리고 유진을 향한 어떤 감정.

유진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책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 손이 책을 쥐고 있었지만,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감각이 지연되고 있었다. 신체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묘하게. 처음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점점 더 심해졌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책장들이 삐걱거렸다. 책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현의 얼굴'. 수백 권의 책들이 유진 위로 떨어졌다. 모두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필체의 책들. 유진은 책들 아래에서 몸을 웅크렸다.

흔들림이 더 심해졌다.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금이 들어갔다. 가는 금줄이 된 후 점점 넓어졌다.

유진은 깨달았다.

이제 반복을 끝낼 시간이 왔다는 것을. 더 이상 책을 읽고 기억을 회수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을.

자신이 계속 기억을 회피하면 도서관은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함께 붕괴할 것이다. 혹은 영원히 반복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책들 아래에서, 유진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 5초가 걸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흔들림이 멈추었다. 떨어지는 책들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갈라지는 벽이 멈추었다. 도서관 전체가 숨을 참은 것처럼 완전한 정적에 빠졌다.

유진은 들었다. 목소리를.

"유진."

그것은 나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세 목소리가 겹쳐 하나로 들렸다.

"이제 넌 준비가 됐어?"

유진은 손을 내렸다.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려놨다.

그 순간, 모든 책들이 사라졌다.

방이 비워졌다. 완전한 빈 공간만 남았다. 하얀 벽. 하얀 바닥. 하얀 천장. 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리고 유진의 신체가 완전히 투명해졌다.

유진은 손을 다시 들었다. 천천히.

5초의 지연 속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공중에 떠 있던 책 더미가 그녀의 손을 향해 내려왔다. 수백, 수천 권의 '나현의 얼굴'이 유진의 손 위에 쌓였다.

그리고 책장이 내려왔다.

천천히. 마치 예의를 갖춘 인사처럼. 책장은 유진의 양옆으로 내려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벽이 닫혔다. 천장이 낮아졌다. 하얀 공간이 점점 더 좁아졌다.

유진은 그 속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손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내려놨다. 완전히.

사무실이 나타났다.

책상. 의자. 컴퓨터. 낡은 파일 캐비닛. 오후 6시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유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 사진.

3년 전에 찍힌 사진.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유진이 이미 여러 번 본 사진.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워진 부분이 완전히 복원되어 있었다.

나현이 보였다.

명확하게. 완전히. 더 이상 지울 수 없도록.

나현의 얼굴. 나현의 눈. 나현의 입술.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유진과 나란히 서 있는 나현. 둘이 함께 찍은 사진. 유진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나현.

사진 뒷면을 봤다.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유진 자신의 필체로. 그런데 이 필체는 최근의 유진의 필체가 아니었다. 3년 전의 필체였다. 떨리고 불안정한, 어딘가 절박한 손으로 쓴 글씨.

'나현에게 미안해. 그리고 영원히 미안해야 할 것 같아.'

그 아래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3년 전 그날. 사건이 일어난 그 밤이 아닌, 그 다음 날.

유진의 손이 떨렸다. 사진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글씨 위를 따라가려다 멈췄다. 이미 지워진 글씨를 더 이상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원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또 다른 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속의 지워진 인물'

제목 자체가 현재형이었다. 과거형이 아니라. 아직도 지워지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지워질 수 없다는 뜻인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같은 사진이지만 다른 것이었다. 나현의 얼굴이 더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나현의 눈만 클로즈업된 사진. 그 눈은 무언가를 간청하고 있었다. 도움을. 이해를. 용서를.

유진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나현을 거부했다. 나는 나현을 지웠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현을 지우고 있다.'

같은 문장의 반복.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필체는 달랐다. 첫 페이지는 또렷했지만,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글씨가 희미해졌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거의 읽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유진이 책을 내려놨다.

감각 지연이 6초를 넘었다. 책이 책상에 닿는 소리를 듣기까지 6초가 걸렸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 6시는 여전했지만, 창밖의 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석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은 일어났다. 천천히. 움직임이 지연되는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열람실을 지나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박철수의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2층. 3층. 4층. 5층.

마지막 금속문 앞에 도달했다.

문 위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돌아오지 말 것'. 하지만 이번엔 유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문을 열었다.

방이 나타났다. 하지만 책으로 가득한 방이 아니었다. 완전히 비어 있는 방이었다. 하얀 벽. 하얀 바닥. 하얀 천장.

그리고 방의 중앙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나현의 진실'

제목이 단순했다. 이전의 책들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마지막 책이 이렇게 단순할 리 없다. 유진은 한 걸음씩 책에 가까워졌다.

손을 들었다. 5초. 손이 책에 닿았다.

책을 펼쳤다.

사진이 나왔다. 다시. 또 다시. 같은 사진 수십 장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르게 복원되어 있었다. 첫 사진에는 나현의 얼굴만 보였다. 두 번째 사진에는 나현의 어깨가 보였다. 세 번째 사진에는 나현의 몸 전체가 보였다.

마지막 사진에는 나현뿐만 아니라, 유진도 함께 보였다.

둘이 손을 잡고 있었다. 지하 입구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그 순간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현은 유진의 친구였다.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유진이 가장 아끼던 친구였다. 나현이 도움을 청했던 것은 학교에서 당하는 괴롭힘 때문이었다. 나현은 유진의 어머니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도움을 청했다.

유진은 거부했다. 창피했다. 자신의 친구가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될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는 그 장면을 봤다. 자신의 딸이 친구를 거부하는 모습을. 그리고 어머니는 유진을 질책했다.

유진은 어머니를 밀었다.

의도적이었다. 어머니를 침묵시키고 싶었다. 어머니는 계단으로 넘어갔고, 나현이 어머니를 잡으려다 함께 넘어갔고, 유진도 나현을 잡으려다 함께 넘어갔다.

어머니는 살았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살았다.

나현은 죽었다. 계단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 부자연스럽게 꺾인 목.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몸.

유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한 행동이 나현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기억을 지웠다. 체계적으로. 의도적으로. 사진까지 지웠다. 모든 흔적을.

하지만 도서관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진은 책을 내려놨다. 손이 책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까지 7초가 걸렸다.

도서관이 흔들렸다.

이번엔 이전의 흔들림과 달랐다. 이번엔 부드러운 흔들림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유진을 흔드는 것처럼.

벽이 희미해졌다. 천장이 희미해졌다. 바닥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유진의 신체도 희미해졌다.

손가락부터 시작되었다. 손가락이 반투명해졌다. 손이 투명해졌다. 팔이 투명해졌다. 책상이 손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신체가 점점 더 희미해졌다.

완전한 투명. 완전한 소실. 유진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유진은 깨달았다.

감각이 지연될수록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나현을 지우려 했던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을 회피했던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 속의 지워진 인물. 이제 복원된 나현. 그리고 나현과 함께했던 기억들. 유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 나현을 기억하는 존재. 나현을 지우지 않는 존재.

그것은 유진이 아니었다. 나현을 거부했던 자신이 아니었다. 나현의 얼굴을 펜으로 칠해 지웠던 자신이 아니었다.

밤 11시 59분.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현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안녕. 난 유진이야. 아니, 나는..."

목소리가 끊겼다. 더 이상 유진이 아닌 무언가가 그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그 이름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도서관은 완전한 어둠에 빠졌다.

밤 12시.

도서관 밖은 낮이었다. 햇빛이 내려쬐는 거리.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그 거리의 한 모퉁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유진이라고 불렸던 누군가가. 하지만 그 자리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투명한 존재. 소실된 정체성.

그 무언가는 거리를 바라봤다. 혹은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눈이 없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혹은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손이 없었다.

오직 기억만 남았다. 나현의 얼굴. 도움을 청했던 나현의 목소리. 계단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현의 몸.

그 기억을 가진 무언가가 거리에 서 있었다.

반복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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