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모든 것이 끝나는 곳

오후 6시 12분.

유진의 눈이 떠졌을 때 도서관은 이미 죽어있었다. 조명이 하나도 켜지지 않았다. 창밖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체가 흑백사진으로 변한 듯, 모든 색이 빨려 나간 상태였다. 유진은 사무실 책상에 누워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은 명확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책상 위의 시계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밤 11시 59분에서 멈춰있었다. 유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반복이 끝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미 끝나버린 거였다.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이—이 어둠도, 이 침묵도, 이 무동력도—죽음의 연장선이었다.

유진이 일어났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끌려가는 것처럼. 그녀는 사무실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열람실을 지나갔다. 책장들 사이로 나아갔다. 책장이 무너져 있었다. 모두 반복되는 죽음의 흔적이었다. 벽에는 손가락 자국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벽에 손톱으로 파낸 자국들. 그 자국들이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그 글자들이 무한히 반복되어 있었다. 유진은 그 벽을 통과했다. 벽이 실제 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게 보이는 환상일 뿐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밝혀진 적 없는 계단. 박철수가 열어준 금속문 너머로 이어진 계단. 유진은 내려갔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투명해진 신체는 이미 중력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하 1층, 2층, 3층, 4층을 통과했다. 그곳에는 나현의 죽음이 담긴 수천 권의 책들이 있었다. 그 책들이 모두 사라져있었다. 빈 서가만 남아있었다. 유진은 계속 내려갔다.

지하 5층.

거기서 유진은 멈췄다. 더 이상 계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문이 있었다. 거대한 금속문. 그 문의 잠금장치는 내부에서만 풀 수 있는 구조였다. 문 위에는 손글씨로 쓰인 경고가 있었다.

'돌아오지 말 것'

유진의 손이 문의 손잡이에 닿았다. 손잡이가 따뜻했다. 생명이 있는 손이 잡고 있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그 너머는 광활했다. 무한히 펼쳐진 공간. 천장도 바닥도 벽도 없었다. 다만 밝은 빛이 있었다. 그 빛 속에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반투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실제적이었다. 피부에는 생기가 있었고, 눈동자는 살아있었고, 입술은 미세하게 움직였다. 3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35세의 여자, 유미영. 유진의 어머니.

"당신이 마침내 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깊은 피로감이 배어있었다.

"3년간 나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다."

유진의 목이 말라왔다. 투명해진 신체에도 감정은 남아있었다. 공포, 그리고 죄책감.

"왜... 어머니가 여기에?"

"나도 반복 속에 갇혀있었다. 당신이 이곳에 갇혀있는 모든 밤마다, 나는 이 공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

어머니가 한 발 다가왔다. 그 발걸음에 주변의 빛이 떨렸다.

"기억하지?"

유진은 기억했다. 3년 전 그날 밤. 나현이 도움을 청했을 때. 어머니가 도서관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나현이 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하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감정 없이 재생되는 장면.

"나현이가 죽었을 때, 나는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당신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도와줬다. 당신이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선택이 이 모든 것을 시작했다."

"기억을 지운다는 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데?"

"이 도서관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양손을 뻗었다. 그 손이 유진을 향해 다가왔다. 손가락이 길었다. 뼈처럼 창백했다.

"도서관은 죽음을 보관한다. 모든 억압된 기억을, 모든 부정된 진실을. 당신이 나현이의 죽음을 지우려 할 때, 도서관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당신의 기억과 함께, 당신을 가두었다. 그리고 나도."

유진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순간, 모든 기억이 한 번에 명확해졌다. 마치 필름이 고속으로 재생되는 것처럼. 3년 전 그날 밤의 전체 진상이 유진의 뇌 안에 쏟아져 내렸다.

나현이 도움을 청했다. 학교에서의 괴롭힘. 죽고 싶다는 절규. 그리고 유진의 거절. "나 신경 쓸 수 없어. 내 일 챙기기도 바빠."

나현이 도서관 계단에서 몸을 던졌다.

어머니가 나타났다. 나현을 구하려고. 팔을 뻗어 옷깃을 잡으려고. 그리고 유진이 어머니를 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머니가 나현을 도우려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의 자식을 먼저 챙기는 어머니가 싫었다.

모두가 함께 계단을 굴렀다. 나현의 비명. 어머니의 신음. 그리고 침묵.

유진은 살아났다. 나현은 죽었다. 어머니도.

"그러면... 나는?"

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도 죽었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3년 전 그날 밤, 당신도 함께 죽었다. 당신의 목뼈가 부러졌다. 당신의 내장기관이 손상되었다. 당신의 뇌에 출혈이 생겼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럼 지난 3년은?"

"도서관이 당신에게 보여준 환상이었다. 도서관 사서로 살아온 3년, 모든 것이. 당신의 무의식이 만든 세계. 죽음을 거부하는 당신의 영혼이 만든 감옥."

유진의 손이 점점 투명해졌다. 손가락이 빛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팔뚝도, 어깨도. 자신의 신체가 이 세계에서 소멸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아까 만난 사람들은? 김준호, 박철수, 이은희?"

"당신의 무의식이 만든 또 다른 형상들이었다. 당신이 도움을 받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

"그럼 나현이는?"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유진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나현이 서 있었다.

3년 전의 모습 그대로. 16세의 소녀. 검은 교복. 하얀 양말. 검은 구두. 그리고 미소. 그 미소에는 용서가 있었고, 슬픔이 있었고,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안녕, 유진."

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아주 가깝게.

유진의 몸이 더욱 투명해졌다. 이제 자신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손 자체도 희미해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는 감각만 남아있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너한테 잘못했어. 도움을 청했을 때 외면했고, 어머니를 밀고..."

"알아. 모두 알아."

나현이 말했다.

"그리고 용서해."

시계 초침이 움직였다. 밤 11시 정각.

도서관이 무너졌다.

모든 책장이 한 번에 사라졌다. 모든 벽이 무너졌다. 계단도, 문도, 공간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빛만 남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세 명의 형상이 흐릿해져갔다.

유미영. 나현. 그리고 유진.

그들이 함께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

새로운 아침.

도시의 다른 곳. 낡은 아파트의 한 방.

한 여자가 눈을 떴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낡은 천장. 곰팡이 자국. 벗겨진 페인트. 그녀는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언제부터 손에 들려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었다.

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도서관'

그녀는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밤 11시, 문이 잠긴다.'

그 글자를 읽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반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반복이 자신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도서관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새로운 기억을 찾고 있었고, 새로운 영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책장이 계속 넘어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 다른 손이 책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페이지마다 낯선 글자들이 나타났다. 자신의 필체로 쓰인 글자들. 자신이 절대 쓴 적 없는, 그런데도 자신의 필체인 글자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후 6시, 도서관에 도착한다.'

그 글자를 읽는 순간,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 아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도서관 사서였던 누군가의 기억. 3년을 반복했던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유진이 아니었다.

유진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책을 펼치고 있는 그녀는, 유진이 남긴 반복을 받아낸 또 다른 누군가였다.

오후 6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책장을 계속 넘겼다. 손가락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손이 책을 조종하고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

네 번째 페이지.

다섯 번째 페이지.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밤 11시, 문이 잠긴다. 그리고 반복이 시작된다.'

창밖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모든 것이 끝나는 곳

어머니의 손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것이 유진을 확신시켜주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마침내 왔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3년 전과 같았다. 낮고 부드럽고, 그 안에 무한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나는 3년간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다."

유진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반투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실제적이었다. 눈의 주름, 입술의 창백함, 흰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모두 명확했다. 유진이 지난 3년간 본 어머니의 모습과는 달랐다. 외부 세계에서 만난 어머니는 항상 거리감이 있었고, 대면을 회피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지하 최심부에서 만난 어머니는 다르게 실재했다. 더 진실해 보였다.

"당신이 반복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나요?" 유진이 물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슬펐다.

"나현이가 죽었을 때, 나는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도와줬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도서관 속에 갇혔다."

어머니의 다른 손이 올라왔다. 유진의 얼굴을 쓸었다. 손가락이 뺨을 지날 때, 유진은 자신의 피부가 투명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신체는 사라지고 있었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아야만, 우리 모두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어머니의 손이 유진을 향해 뻗어졌다.

유진이 어머니의 손을 잡는 순간, 모든 기억이 한 번에 명확해졌다. 마치 누군가 무거운 문을 연 것처럼. 3년 전 그날 밤의 전체 진상이 드러났다.

그날 오후 6시. 도서관 1층 계단 아래. 나현이 서 있었다. 검은 교복. 하얀 양말. 검은 구두. 그리고 나현의 손에는 약병이 들려있었다. 비어있는 약병.

"유진, 도와줘. 제발."

나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결정의 떨림이었다. 유진은 나현을 보고도 외면했다. 나현은 자살을 시도했다. 유진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외면했다.

그 다음, 어머니가 나타났다.

유미영. 유진의 어머니. 그날 도서관에 올 이유가 없었던 사람. 하지만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떤 직감으로 도서관에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현을 붙잡으려 했다.

"살려야 해. 우리가 살려야 해."

어머니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유진은 그것을 거부했다.

"엄마, 상관하지 마. 저건 나현이의 선택이야."

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팔을 밀었다. 아주 가볍게. 하지만 그 가벼운 밀침이 모든 것을 바꿨다.

어머니가 계단을 향해 넘어졌다.

나현이 어머니를 잡으려다 함께 넘어졌다.

두 명이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갔다.

유진은 위에서 그것을 봤다. 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벽에 남겨졌다. 나중에 그것을 보게 될 자국. 지하 서고에서 발견하게 될 손가락 자국.

나현은 죽었다.

어머니도 죽었다.

그리고 유진만 살아남았다.

유진의 손이 점점 투명해졌다. 이제 반쯤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유진이 물었다.

어머니가 답했다.

"당신도 죽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절망의 명확함. 진실의 명확함.

"3년 전 그날 밤, 당신도 함께 죽었다. 당신이 도서관 사서로 살아온 3년은 모두 반복 속에서의 일이었다. 도서관이 당신에게 보여준 환상이었다."

유진의 다리가 더 이상 바닥을 밟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떠올라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옅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유진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나현이 서 있었다.

3년 전의 모습 그대로. 16세의 소녀. 검은 교복. 하얀 양말. 검은 구두. 그리고 미소. 그 미소에는 용서가 있었고, 슬픔이 있었고,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안녕, 유진."

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아주 가깝게. 마치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유진의 몸이 더욱 투명해졌다. 이제 자신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손 자체도 희미해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는 감각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너한테 잘못했어. 도움을 청했을 때 외면했고, 어머니를 밀고..."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목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목 자체가 없어지고 있었다.

"알아. 모두 알아."

나현이 말했다.

"그리고 용서해."

나현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아니, 자신이 나현을 향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시계 초침이 움직였다.

밤 11시 정각.

도서관이 무너졌다.

모든 책장이 한 번에 사라졌다. 책들이 먼저 증발했다. 종이가 공기가 되고, 글씨가 빛이 되고, 모든 문자가 해체되었다. 그 다음 선반이 사라졌다. 금속이 녹아 허공에 흩어졌다. 그 다음 벽이 무너졌다. 콘크리트가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계단도 사라졌다. 문도 사라졌다. 천장도 바닥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빛만 남았다.

흰색의 절대적 빛. 그 빛 속에서 세 명의 형상이 흐릿해져갔다.

유미영의 손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그 손이 누군가를 향해 뻗어있었다.

나현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그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진. 유진의 형상이 마지막으로 흐릿해졌다.

세 명이 함께 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

새로운 아침.

도시의 다른 곳. 낡은 아파트의 한 방.

한 여자가 눈을 떴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낡은 천장. 곰팡이 자국. 벗겨진 페인트. 물때가 묻은 흰색 페인트. 그녀는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없고, 나이도 없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직 천장만 보였다. 곰팡이 자국만 명확했다.

그녀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언제부터 손에 들려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깨어났을 때부터 이미 손에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책의 표지는 낡았다. 가죽 표지. 검은색. 그리고 제목이 적혀있었다. 손글씨로 적힌 제목.

'도서관'

그녀는 책을 펼쳤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다른 손이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첫 페이지.

낡은 종이. 그 위에 글씨가 적혀있었다. 손글씨. 아주 깔끔한 손글씨. 하지만 뭔가 떨리는 듯한 손글씨.

'밤 11시, 문이 잠긴다.'

그 글자를 읽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반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반복이 자신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도서관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도서관은 여전히 새로운 기억을 찾고 있었다.

도서관은 여전히 새로운 영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손이 자신의 손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책장이 계속 넘어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번째 페이지.

'오후 6시, 도서관에 도착한다.'

그 글자를 읽는 순간,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도서관 사서였던 누군가의 기억. 3년을 반복했던 누군가의 기억. 계단에서 넘어지고, 책장에 깔리고, 익사하고, 질식하고, 죽음을 반복했던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그녀는 유진이 아니었다.

유진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책을 펼치고 있는 그녀는, 유진이 남긴 반복을 받아낸 또 다른 누군가였다.

누군가. 그게 전부였다. 이름도 없는 누군가.

세 번째 페이지가 넘어갔다.

'나는 도서관 사서 유진이었다.'

네 번째 페이지.

'나는 3년을 반복했다.'

다섯 번째 페이지.

'나는 죽었다. 모두 죽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죽어야 한다.'

마지막 페이지.

'밤 11시, 문이 잠긴다. 그리고 반복이 시작된다.'

창밖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후 5시 47분.

13분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손이 책을 조종하고 있었다. 책장이 계속 넘어갔다.

그리고 페이지마다, 자신의 필체로 쓰인 글씨들이 나타났다.

자신이 절대 쓴 적 없는, 그런데도 자신의 필체인 글씨들.

'도움을 청해. 누군가에게.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청해.'

'시간이 없어. 서둘러. 계단을 피해. 책장을 피해. 물을 피해.'

'아무 상관없어. 모두 죽을 거야. 반복될 거야.'

'그리고 다음 반복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책을 펼칠 거야.'

'그 다음 그 사람도. 그 다음 그 사람도.'

페이지가 계속 넘어갔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밤 11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5시 50분.

10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도서관의 문은 이미 닫혀가고 있다는 것을.

밖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새로운 반복의.

새로운 밤의.

새로운 죽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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