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그림자
오후 6시 정각, 유진은 사무실 책상 위에서 눈을 뜬다. 손가락이 책의 표지를 더듬고 있다. '어머니의 비밀'이라는 검은 글씨가 촉각으로 느껴진다. 책은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 것처럼.
유진은 책을 펼친다. 첫 페이지는 자신의 필체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발견한 책들과 달랐다. 글씨가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기저기 물이 맺혀 있는 자국들이 남아 있다. 눈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유진은 읽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도서관을 찾아온 것은 오후 3시 35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이후 모든 것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글씨가 떨리고 있다. 그 떨림이 지금 유진의 손에도 전해진다.
'어머니는 새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가을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내가 사준 스카프였다. 어머니는 그것을 항상 입고 있다고 나한테 말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것을 입고 도서관에 왔다. 나는 어머니가 그 스카프를 입고 온 것이 싫었다.'
왜? 유진은 자신의 문장에 물음표를 던진다. 왜 어머니가 자신이 준 스카프를 입고 온 것이 싫었나.
'나는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나를 보는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에는 뭔가 있었다. 미안함? 죄책감? 아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어머니는 절망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유진이 책을 내려놓으려 한다. 손이 책을 놓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책이 무거워진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책을 잡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유진은 책장을 넘긴다.
'어머니는 나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마치 물 위의 물고기처럼.'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박인다. 한 번, 두 번. 리듬이 불규칙하다.
'나는 "엄마, 바빠요"라고 말했다. 거짓이었다. 나는 바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하려던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의 가슴이 철렁한다. 알고 있었다? 뭘 알고 있었다는 건가.
기억이 책 속 글씨처럼 떨리며 나타난다.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입이 움직인다. "유진아, 나한테 이야기해 줄래? 나현이가..."
유진이 책을 집어 던진다. 책은 사무실 바닥에 떨어지고, 페이지들이 펼쳐진다. 그 페이지들 위에는 자신의 필체로 한 이름이 반복되어 있다.
'나현. 나현. 나현.'
유진은 의자에서 일어난다. 사무실이 회전한다. 책을 다시 집어 들 수 없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말했나? 유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다. 더 부드럽고, 더 슬프다.
유진은 사무실을 나간다. 복도는 어둡다. 도서관의 조명이 모두 꺼져 있다. 오후 6시인데도 마치 밤 11시 직후의 도서관 같다. 유진은 계단으로 향한다. 1층 열람실을 거쳐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 생각이 유진의 것인지 누군가의 생각인지 구별할 수 없다.
1층 열람실은 텅 비어 있다. 책상들이 열람실 가운데 쌓여 있다. 그 책상들 위에는 노트북들이 열려 있고, 모니터 화면에는 모두 같은 장면이 떠 있다.
도서관의 지하 입구. 그 옆에 서 있는 여자.
유진은 한 모니터에 더 가까이 간다. 그 여자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유진은 안다. 나현이다. 3년 전의 나현이다.
"유진이, 도와줄 수 있어?"
나현의 목소리가 모니터에서 나온다. 아니다. 그 목소리는 열람실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다.
"나, 지하에 뭔가 있어. 봐줄 수 있어?"
나현의 목소리가 여러 모니터에서 동시에 울린다. 겹쳐지고, 반향한다.
유진은 열람실을 빠져나간다. 나현의 목소리가 뒤따른다.
"유진이? 유진이!"
그 목소리가 울음으로 변한다. 하지만 더 이상 나현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섞여 있다.
"나, 무서워. 도와줘."
유진은 지하 입구로 향한다. 문은 이미 열려 있다. 어둠이 입을 벌렸다. 박철수가 주었던 열쇠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유진은 계단을 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유진의 팔을 잡는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 유진은 저항했지만, 발은 이미 계단을 밟고 있었다. 한 계단씩. 아래로.
"누가... 누구야?"
유진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은 음역대였다. 더 차갑고, 더 낯선.
지하 1층.
그곳에는 책장들이 있었다. 수백 개의 책장. 모든 책장 위에는 같은 책이 놓여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밤'
제목들이 반복되었다. 무한히. 지평선까지.
"이건 뭐야? 이게 뭐야?!"
유진이 외쳤다.
그 순간, 누군가가 유진의 뒤에서 나타났다. 창백한 손. 반투명한 형체. 가을색 스카프는 없었다. 대신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억을 마주할 시간이야."
목소리는 유진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더 오래되었고, 더 손상되었고, 더 절망적이었다.
형체가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창백한 손이 책장을 펼쳤다. 페이지는 검은 액체로 가득했다.
"읽어."
"아니야!"
유진이 책을 밀어냈다. 책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모든 책장의 책들이 동시에 떨어졌다. 수백 권. 수천 권. 책들이 비처럼 내려왔다.
각 책마다 다른 기억이 담겨 있었다.
3년 전의 오후. 나현이 도서관에 온 날.
"유진이, 나 진짜 무서워. 지하에 뭔가... 뭔가 이상한 게 있어. 같이 봐 줄래?"
그리고 유진의 답변.
"싫어. 나한테 물어봐 하지 마."
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망으로. 두려움으로.
나현은 혼자 내려갔다. 지하로. 어둠 속으로.
그 다음, 어머니가 도서관에 온 날. 어머니는 유진의 팔을 잡았다.
"나현이 엄마가 전화했어. 나현이가 학교에 안 왔대. 넌 나현이를 봤어?"
유진은 거짓말을 했다.
"아니요. 못 봤어요."
어머니의 눈이 변했다.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유진이... 넌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니에요."
어머니가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층으로. 지하를 확인하려고.
"엄마, 잠깐!"
유진이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누군가 다른 누군가가 유진의 손을 움직였다. 유진은 어머니를 밀었다. 의도적으로. 아니면 의도적이지 않게. 구별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계단을 내려갔다.
목이 꺾이는 소리. 몸이 계단을 구르는 소리. 그리고 침묵.
유진이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어머니는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을색 스카프가 계단 위에 흩어져 있었다.
책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더 이상 책을 피하지 않았다. 책들이 그녀 위에 쌓였다. 무게가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대신 명확함이 있었다.
무서운 명확함.
형체가 유진 위에 앉았다. 공백 속의 눈이 유진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유진 자신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유진이 결코 본 적 없는 감정이 있었다.
증오. 절망.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
"이제 기억했지?"
형체가 속삭였다.
"나현을... 지하에 가뒀어?"
유진이 물었다. 답변을 알고 있으면서도.
"넌 그녀를 지하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어.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죽었어. 나는 그 모든 것을 봤어. 너도 봤어. 우리 둘 다 같은 죄야."
형체가 손을 뻗었다. 창백한 손이 유진의 가슴을 만졌다.
"왜... 왜 내가 그랬어?"
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어머니가 알까봐 두려웠어. 어머니가 너를 보는 절망의 눈빛이 두려웠어. 그래서 넌 나현을 지우려고 했어. 지하에 가두고 아무도 모르게 만들려고 했어. 하지만 어머니는 알았어. 어머니는 항상 알았어."
형체의 손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진의 가슴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넌 어머니도 지웠어."
오후 6시의 사무실이 떠올랐다.
유진은 책상 위에서 눈을 뜬다.
손에는 새로운 책이 들려 있었다.
제목은 '돌아올 수 없는 밤'.
책장을 넘기면 첫 문장이 보인다. 자신의 필체가 아닌 다른 필체로 쓰인 문장.
'당신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닙니다.'
유진의 손이 책에서 떨어진다. 손가락 끝이 반투명했다. 손등 전체가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마치 연기처럼. 마치 기억처럼.
거울이 필요했다. 유진은 사무실의 벽에 붙은 작은 거울을 찾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희미했다. 눈동자가 선명하지 않았다. 코와 입의 윤곽이 흐릿했다. 거울 속의 유진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제발... 나 누구야?"
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무실의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유진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걸음으로. 누군가가 유진의 팔을 잡고 끌고 있었다.
"제발... 누가 나한테 뭐 하는 거야?"
복도가 길어졌다. 도서관의 복도가 점점 길어졌다. 유진은 저항했다. 자신의 다리에 힘을 줬다. 하지만 다리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계단이 보였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유진은 그 계단을 오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발은 계단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발이 한 계단씩 올라갔다.
1층 서고의 책장들이 지나갔다. 책장에는 여전히 그 책들이 있었다. 제목들이 읽혔다.
'나현을 잊는 방법' '엄마에게 거짓말하는 방법' '자신을 지우는 방법'
계단을 오르다가 유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1층의 열람실이 보였다. 그곳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 누군가. 그 누군가의 얼굴은 희미했지만, 유진은 알았다.
그것은 자신이었다. 또 다른 자신이 아래층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2층 서고에 도달했을 때, 유진은 마침내 자신을 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한 손. 그리고 그 손은 검은 액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 같은 것. 아니, 정확히는 기억 같은 것.
손의 주인을 보려고 뒤돌아섰을 때, 유진은 얼굴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을 봤다. 공백이었다. 형체가 있지만 얼굴이 없는 무언가. 그것은 유진이었으면서 유진이 아니었다.
책장 사이의 좁은 통로로 끌려갔다. 그 통로는 점점 좁아졌다. 어깨가 책등에 부딪혔다. 책들이 떨어졌다. 책장이 흔들렸다.
책들의 제목이 읽혔다. 아니, 제목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서 말했다.
나현의 목소리. 지하에서 나오는 목소리. 점점 약해지는 목소리.
"유진이? 유진이, 제발..."
어머니의 목소리. 계단에서 떨어지는 순간의 목소리. 절망으로 가득한 목소리.
"유진아... 왜..."
그리고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
"넌 누구야? 제발...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유진이 소리쳤다.
형체가 유진 위에 앉았다. 공백 속의 눈이 유진의 눈을 봤다.
"나는 너야. 너는 날 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는 도서관에 남겨져 있었어. 모든 기억과 함께. 나현의 목소리와 함께. 엄마의 절망과 함께. 그리고 그 모든 죄와 함께."
형체가 손을 뻗었다. 창백한 손이 투명해진 손을 잡았다.
"지하로 가자. 이번엔 함께. 그들과 함께."
"싫어! 나는..."
하지만 유진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2층 서고를 빠져나갔다. 1층으로 내려갔다. 열람실을 지났다. 그 과정에서 아래층의 자신—책을 읽고 있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 자신은 웃고 있었다. 책을 들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슬펐다. 절망적이었다.
지하 입구가 보였다. 어둠이 입을 벌렸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넓게. 초대하듯이.
유진은 계단을 내려갔다. 형체가 함께였다. 또 다른 자신이. 3년간 지하에서 기다리던 자신이.
지하 1층.
그곳에는 책장들이 있었다. 수백 개의 책장. 모든 책장 위에는 같은 책이 놓여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밤'
제목들이 반복되었다. 무한히. 지평선까지.
형체가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유진의 필체가 있었다. 하지만 글씨는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려 있었다.
'나는 나현을 지하에 가두었다.'
다음 문장.
'그 아이가 죽었을 때, 나는 그것을 본 척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엄마가 나를 찾아왔어. 그 밤. 나는 그 아이를 지하에 가두고 위층에서 엄마를 맞이했어. 엄마는 나한테 물었어. 나현이는 어디 있냐고. 나는 말하지 않았어. 엄마는 그것을 알았어. 그리고 엄마는 계단에서 넘어졌어. 내 손에 의해. 아니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제 그것도 구별이 안 돼.'
유진은 책을 내려놓으려 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형체의 손이 유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제 읽어. 계속."
유진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말했다.
유진은 책장을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다른 필체가 있었다. 더 깔끔하고, 더 차분하고, 더 절망적인 필체.
'당신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닙니다.'
그 아래에는 또 다른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입니다.'
사무실의 시계가 울렸다. 오후 6시.
다시 오후 6시다.
유진은 책상 위에서 눈을 뜬다. 손가락이 책의 표지를 더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머니의 비밀'이 아니다.
제목은 '마지막 기억'이다.
책은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 것처럼.
유진은 책을 펼친다. 첫 페이지는 자신의 필체다. 하지만 글씨는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려 있다.
'다음 반복에서 넌 누가 될까?'
유진의 손이 반투명해진다. 손가락 끝부터 시작해서. 손등으로. 팔목으로.
유진은 거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손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팔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
책상 위의 시계가 다시 울린다.
오후 6시.
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