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도서관 5화
오후 6시 12분. 유진의 눈이 떠졌다.
책상. 사무실. 그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었고, 표지에는 자신의 필체로 "나는 여전히 유진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책을 내려놓고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말고 움직여보려 했지만, 손가락들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것 같이.
거울을 들었다. 유진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의 색이 달랐다. 파란색이 아닌 검은색이 아닌,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색이었다. 유진은 거울을 놨다. 손이 떨렸다. 진짜 떨렸다.
복도로 나갔다. 도서관은 조용했다. 오후 6시 12분이면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도서관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1층 열람실을 지나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유진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마치 유진을 보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2층 서고로 올라갔다. 책장 사이로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책장 끝에서 이은희가 나타났다. 이은희의 얼굴은 창백했다.
"당신이 반복될 때마다," 이은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요."
"왜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어?"
"막을 수 없었어요. 이곳의 규칙이..."
유진은 이은희의 팔을 잡았다. 이은희가 비명을 질렀다. 유진의 손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피부가 유리처럼 투명해지고, 그 안에 빛이 맴돌고 있었다.
"당신이 한 선택은," 이은희가 말했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옳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도, 도서관도, 아무도 당신을 막을 수 없었어요."
유진은 손을 놨다. 손가락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색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준호는?"
"사무실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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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사무실. 김준호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이 들어오자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지쳐 있었다.
"반복이 가속화되고 있다," 김준호가 말했다. 앉으라고 손짓했다. "당신이 기억할수록, 반복은 더 강해진다."
유진은 앉지 않았다. "이 도서관은 뭔가요?"
김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깊고 긴 한숨이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이곳은..." 그가 말을 멈췄다. "이곳은 기억의 수호자다."
"기억의 수호자?"
"누군가가 기억을 지워야 할 때, 그 기억은 어딘가로 가야 한다. 뇌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투영되어야 한다. 이 도서관이 그 역할을 한다." 김준호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놨다. "당신이 반복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왜 갇혀 있는지도 안다."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도와줄 수 없다. 규칙이 있거든." 김준호가 유진을 바라봤다. "도서관에 들어온 기억은 도서관 자신이 풀어야 한다. 외부에서는 개입할 수 없다. 당신도, 나도, 이 도서관의 누구도."
유진의 손이 떨렸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갇혀 있는 건가요?"
"아니다. 반복을 끝내는 방법이 있다."
"뭔데요?"
김준호가 일어났다. 창문을 통해 밖을 다시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모든 기억을 마주해야 한다.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가장 끔찍한 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면 반복이 끝나요?"
"반복은 끝난다. 하지만..."
유진이 김준호의 옆에 섰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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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45분. 유진은 지하 서고의 입구에 서 있었다. 철문 앞에서. 손은 여전히 투명했다. 빛이 손가락 안을 흐르고 있었다.
"기억을 마주하면, 반복이 끝난다," 유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사라진다."
유진은 철문을 밀었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모든 책들은 유진 자신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책장 사이로 빛이 흘러들었다. 파란 빛이었다. 투명한 손가락들처럼 파란 빛이었다.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책장을 지나갔다. 깊숙이 들어갔다. 책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누구인가". "기억의 끝". "돌아올 수 없는 곳". "어머니". "죽음". "선택". "후회".
유진은 걸음을 멈췄다. 책장 앞에서.
표지가 다른 책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유진의 필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쓰여 있었다.
제목은 "어머니의 비밀"이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책이 있었다. "나현의 진실". 이것도 다른 필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책. "서진우의 증언".
그리고 또 다른 책.
유진의 손이 떨렸다. 파란 빛이 손가락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내가 읽을수록 나는 사라진다," 유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야 한다."
유진은 "어머니의 비밀"을 집어들었다.
책장이 흔들렸다. 아니, 도서관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내려왔다. 책들이 책장에서 떨어져 나갔다. 모두 유진의 필체로 쓰여 있는 책들이었다.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검은 펜으로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 필체는... 유진의 필체였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유진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장소였다.
흰 천장. 병원의 천장. 심장 모니터가 '뚜, 뚜, 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진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손이 더 이상 투명하지 않았다. 손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병실 문이 열렸다. 경찰관이 들어왔다.
"유진 씨, 3년 전 도서관 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유진의 목이 말라왔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3년 전 도서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진은 천장을 봤다. 천장 모서리에 갈라진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벽에 부딪혀 쓰러진 자국처럼.
"기억이 안 난다고 했잖아요," 경찰관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현 씨와 당신의 어머니. 그리고 도서관."
유진이 경찰관을 봤다. 경찰관의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 흐릿한 얼굴 뒤로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른 눈이었다. 파란 눈이 아닌, 검은색도 아닌,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색의 눈이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유진이 물었다.
경찰관은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여러 개였다. 경찰관의 입에서, 병실의 모서리에서, 천장에서, 침대 아래서 여러 개의 웃음이 나왔다.
오후 6시 12분.
유진의 눈이 떠졌다.
사무실. 책상.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진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유진 자신이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파란색도 검은색도 아닌,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색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웃었다.
거울 속의 유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야."
도서관 전체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여러 개의 목소리로. 1층에서, 2층에서, 지하에서. 모두 같은 목소리였다. 모두 유진의 목소리였다.
11시가 되기까지 아직 4시간 48분이 남아 있었다.
# 본문
오후 6시 12분, 유진은 사무실의 책상 앞에서 눈을 떴다.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었다. 표지에 적힌 글씨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글자들이 페이지 위를 헤매다니는 개미처럼 흔들렸다. 유진은 책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 끝이 반투명했다. 살을 통해 창밖의 불빛이 비쳤다. 오후의 햇빛 같은 것은 아니고, 더 차갑고 파란 빛이었다.
"다시 돌아왔다."
유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의 음역대가 겹쳐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유진은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눈이 달랐다. 홍채가 흔들리고 있었다. 파란색에서 검은색으로,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김준호 도서관장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며칠을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눈 아래에는 검은 자국이 있었고, 입가는 경직되어 있었다.
"유진," 김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또 반복되었나?"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김준호를 바라봤다. 도서관장의 얼굴이 선명했다.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안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깊고 검은 죄책감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갔던 게 당신이죠?" 유진이 물었다.
김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 숨이 입에서 나왔을 때 하얀 연기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이었다. 발음되지 않은 말들이 숨 속에 섞여 있었고, 유진은 그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도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선택했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도서관에서 기억을 지우기로."
"그렇습니다," 김준호가 답했다.
"왜?"
김준호는 사무실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도시가 보였다. 오후의 도시. 사람들이 거리를 오갔다. 모두 정상적이었다. 모두 반복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모두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고 있었다.
"도서관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김준호가 말했다. "이곳은 기억의 수호자입니다. 기억이 너무 깊거나 너무 어두워서 현실에서 견딜 수 없을 때, 그 기억은 이곳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유진은 일어나 김준호 옆으로 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창문을 통해 도시를 봤다.
"당신이 반복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김준호가 계속했다. "밤 11시마다 같은 밤을 반복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책을 읽을 때마다 당신이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도."
"어떻게 알았죠?"
"이곳에서 3년을 일했습니다," 김준호가 답했다. "전에도 있었습니다. 당신처럼 반복에 갇힌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같은 패턴을 보였습니다. 책을 찾고, 읽고, 조금씩 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김준호가 말을 멈췄다.
"마지막에는?" 유진이 묻자, 김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은희 사서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도 창백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종류의 창백함이었다. 죄책감의 창백함이었다. 그녀의 눈은 유진을 마주치지 않았다.
"당신이 한 선택은 옳지 않았습니다," 이은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당신의 고통도 이해합니다."
"나현은 어떻게 되었나요?" 유진이 물었다.
이은희가 기침을 했다. 그 기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작은 혈점들이 이은희의 입가에 맺혔다.
"나현은 도서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죽었습니다," 이은희가 말했다. "계단에서. 당신이...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했습니다."
유진의 몸이 떨렸다. 손이 떨렸다. 다리가 떨렸다. 몸 전체가 마치 개구리처럼 경련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이은희가 계속했다. "도서관에 기억을 맡겼습니다. 도서관은 당신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대신 당신을 반복의 밤에 가두었습니다. 당신의 무의식이 기억을 되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읽는 책들은 그 무의식의 신호입니다. 당신이 꼭 알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반복을 끝낼 수 있나요?" 유진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은희와 김준호가 눈을 마주쳤다. 그들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긴 침묵이 흘렀다. 사무실의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오후 6시 18분이었다.
"모든 기억을 마주해야 합니다," 이은희가 말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가장 끔찍한 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무의식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진이 물었다. 그녀는 이은희의 얼굴에서 더 많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은희가 말했다. "기억과 자아는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당신을 만듭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너무 어두우면, 그것을 받아들인 당신도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당신의 정체성이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진은 사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삑 소리를 냈다. 의자 아래에는 바퀴가 있었고, 그 바퀴는 도서관의 마루를 따라 굴렀다. 유진은 의자를 천천히 돌렸다. 360도. 한 바퀴. 또 한 바퀴.
"그렇다면 선택이 있다는 뜻이네요," 유진이 말했다. "반복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계속 기억을 피할 것인지."
"그렇습니다," 김준호가 답했다.
"반복을 피하면 어떻게 되나요? 영원히 밤 11시를 반복하나요?"
"아닙니다," 이은희가 말했다. "반복은 계속되지만, 당신은 점점 약해집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당신이 조금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신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도서관에만 남게 됩니다."
"책이 되는 거네요," 유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은희가 답했다.
유진은 일어났다. 그녀의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손이 정상적인 색으로 돌아왔다. 반투명함이 사라졌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그 자리에 채워졌다. 단호함이었다. 결연함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이은희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6시 24분. 유진은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1층에서 2층으로. 책 냄새가 짙어졌다. 그 냄새는 곰팡이 냄새였다. 시간이 멈춘 곳의 냄새였다. 유진은 2층 서고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복도로 향했다.
박철수 청소 담당자가 복도에서 나타났다. 그는 손에 걸레를 들고 있었다. 그 걸레에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이 마루에 닿으면 자국이 생겼다. 마치 발자국처럼.
"아직도 가시겠어요?" 박철수가 물었다.
"네," 유진이 답했다.
박철수는 유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매우 오래된 눈이었다. 마치 수백 년을 산 사람의 눈처럼. 그 눈에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었다. 모두 유진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연하고 절망적인 표정.
"그럼 이것을 가져가세요," 박철수가 말했다. 그가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열쇠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열쇠였다. 녹이 슬어 있었다. "지하 끝에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 문은 이미 열려 있지 않나요?" 유진이 물었다.
박철수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슬픔이 섞여 있었다. "겉으로는 열려 있지만, 실제로는 닫혀 있습니다. 그 문을 진정으로 열려면, 이 열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택이 필요합니다."
유진은 열쇠를 받아들였다. 열쇠가 손에 차가웠다. 마치 얼음처럼. 그 차가움이 손가락을 통해 팔로 퍼져 나갔다.
오후 7시 42분. 유진은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의 각 단계마다 자신의 발소리가 울렸다. 하나, 둘, 셋.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빛이 줄어들었다. 형광등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꺼뜨리는 것처럼.
지하 1층에 도달했다. 여기는 반암반명의 공간이었다.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유진은 책장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모든 책들이 자신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책 제목들이 보였다. '나현을 잊기로 한 날', '어머니가 한 말들', '도서관의 계단', '죽음의 여러 가지 방법들', '내가 아닌 것들', '기억을 버리는 법'.
유진은 계속 내려갔다. 지하 2층. 여기는 더 어두웠다. 형광등이 없었다. 대신 촛불 같은 것들이 책장의 모서리에 놓여 있었다. 그 불빛은 노란색이었다. 마치 수백 년 전의 불빛처럼.
지하 3층. 거기에는 문이 있었다. 거대한 금속 문이었다. 문의 표면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문의 중앙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문 옆에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돌아오지 말 것. 여기 너머에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필체는 유진의 필체였다.
유진은 박철수에게 받은 열쇠를 들었다. 열쇠가 손에서 빛을 냈다. 파란 빛이었다. 그 빛이 문의 열쇠 구멍으로 향했다. 유진이 열쇠를 꽂았다.
오후 8시 52분.
열쇠가 돌아갔다. 딸깍.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마치 도서관 전체가 이 방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책들은 유진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책장 깊숙한 곳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파란 빛이었다.
유진은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책장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왼쪽, 오른쪽, 왼쪽. 책들이 유진의 옷자락을 스쳤다. 책들이 속삭였다. 유진의 목소리로. 여러 개의 목소리로. 모두 다른 감정으로.
'돌아가. 돌아가.'
'계속해. 계속해.'
'멈춰. 멈춰.'
'알아야 해. 알아야 해.'
유진은 계속 걸어갔다. 책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책이 있었다. 금색 표지의 책. 하지만 그것은 다른 책들과 달랐다. 표지에 적힌 이름이 유진의 이름이 아니었다.
'유미영의 비밀'
유진의 손이 떨렸다. 파란 빛이 손가락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살을 통해 책의 색깔이 비쳤다.
책을 펼치려다 멈췄다.
오후 8시 59분. 도서관 전체에서 소리가 났다. 시계가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1층의 모든 출입문이 동시에 닫혔다. 2층의 모든 창문이 닫혔다. 지하의 모든 통로가 막혔다.
밤 11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은 책을 들었다. 책의 무게가 아주 무거웠다. 마치 돌을 들고 있는 것처럼.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
한 장의 사진. 도서관 지하 입구 앞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얼굴이 검은 펜으로 지워져 있었다. 그 필체는 유진의 필체였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당신의 어머니는 도서관에서 죽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되도록 했다."
유진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장소였다. 병원이었다. 하얀 천장. 심장 모니터의 소리. 뚜, 뚜, 뚜.
유진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옷은 환자복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실 문이 열렸다. 경찰관이 들어왔다. 그 경찰관의 얼굴은 흐릿했다.
"유진 씨, 당신의 어머니 유미영 씨가 3년 전 도서관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혀가 부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혀를 꿰매어 버린 것처럼.
"당신은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경찰관이 계속했다.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도 그 도서관에 자주 방문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병실의 벽을 봤다. 벽에는 갈라진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벽에 부딪혀 쓰러진 자국처럼.
경찰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점점 더 멀어졌다. 유진은 그 목소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벽의 갈라진 자국을 봤다. 그 자국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피가.
"유진 씨?"
유진은 눈을 떴다. 사무실이었다. 책상 위에는 '유미영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었다. 책은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 페이지들이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넘기지 않았는데도.
오후 6시 12분.
반복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았다. 유진의 손에는 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더 이상 유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