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밤의 도서관 2화

오후 6시 23분. 유진은 손에 들린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7시. 나현이.'

첫 번째 반복에서 읽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던 문장이다. 시간도, 이름도 명확했다. 도서관이 남겨놓은 지도처럼. 유진은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2층 서고로 가야 한다. 책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니까.

다리가 떨렸다. 계단에서 떨어진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손톱이 책등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어졌다. 유진은 계단을 올라가며 자신이 왜 이 지시를 따르는지 생각했다. 책 속 문장이 명령인가. 아니면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고, 기억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인가. 둘 다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2층은 어두웠다. 낮 시간에는 밝은 창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은 회색 먹구름처럼 답답한 빛만 들어왔다. 책장들이 미로처럼 뻗어있었다. 유진은 깊숙이 들어갔다. 자신이 책 속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건 내가 하는 선택인가, 아니면 기억이 내 몸을 움직이는 건가.

책장 사이 좁은 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책이었다. 책장 뒤에 꽂혀있던 그것을 당기자 먼지가 폴폴 떨어졌다.

'나현, 그리고 나.'

제목을 읽는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책을 가슴에 안고 몸을 굽혔다.

"유진?"

이은희였다. 사서가 책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창백해졌다. 입술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어?"

이은희가 한 발 물러났다. 손이 떨렸다. 유진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린 책을 보였다.

"이건... 읽으면 안 돼. 제발."

이은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 눈물은 유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기억할수록 당신은 사라져. 책장 사이에서 잃어버린 그것처럼. 제발... 제발 읽지 마."

유진이 한 발 다가갔다. "왜? 왜 사라진다고 말하는 거야?"

"그때 당신이 한 선택은..."

이은희가 말을 멈췄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마치 목에 무언가가 걸려있는 것처럼. 유진은 그 멈춤이 두려웠다. 멈춤 속에 진실이 있는 것 같았다.

이은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한 옥타브 내려가며 울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 음성은 이은희의 것이 아니었다. 더 낮고, 더 무거웠다. 음절이 겹쳐지면서 마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이상한 울림이 생겼다.

"당신이 읽으면... 목소리가 먼저 간다."

이은희의 목이 조여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그녀의 성대를 통제하려 하는 것처럼.

"그 다음 기억. 그 다음 손가락. 하나씩 자신이 아니게 되는 거야. 마지막엔..."

"마지막엔 뭐?"

"마지막엔 당신이 아닌 누군가가 당신의 자리에 남아."

이은희의 눈이 흔들렸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맞춰졌다. 마치 자신도 그 말을 처음 하는 것처럼. 그 순간 이은희의 입가가 경련했다. 자신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것처럼.

"도서관장님께 말하지 마. 제발. 당신이 다시 반복에 빠질 거야."

이은희는 빠르게 돌아섰다. 계단으로 향했다. 유진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여자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유진 자신보다 더 많이.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는 것도.

유진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글씨가 불규칙했다. 자신의 필체인데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손이 떨리며 쓴 것처럼.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필체를 흉내 낸 것처럼.

"나현이는 웃고 있었다. 도서관 지하 서고 입구 앞에서. 그날 오후 3시, 나는 그 웃음이 싫었다. 그 웃음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자신감이 없었던가.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넌 왜 자꾸만 남 탓을 하니. 넌 항상 약한 너 자신만 바라봐.'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약했다. 그리고 나현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도서관 지하. 검은색의 무언가. 울음소리. 누군가의 울음이 아니라 자신의 울음이었나. 손. 자신의 손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반복했다.

유진은 책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기억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자신의 몸 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남의 기억이 자신을 점유하는 것처럼. 목구멍이 조여왔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성대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

시계를 봤다. 오후 10시 47분.

13분. 13분 안에 뭔가가 일어날 것이었다. 유진은 2층 서고를 나왔다.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있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열람실은 조용했다. 형광등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윙윙거리는 음. 마치 도서관 자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오후 10시 55분.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진은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있었다. 다시 돌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발로 문을 찼다. 금속음이 울렸다.

오후 10시 58분.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작은 소리였다. 드르르르 하는 음. 그 다음엔 빗소리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천장 곳곳에서 물이 새어내렸다. 먼저 한 방울, 그 다음 줄기. 순식간에 1층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유진은 책장으로 달려갔다. 물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무릎까지. 허리까지. 호흡이 빨라졌다. 물이 따뜻했다. 따뜻한 물이 목을 적셨다.

이건 물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흘러내리는 기억이 자신을 삼키고 있었다.

물 속에서 책을 발견했다. 손에 들려있던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다. 까맣게 물든 표지. 금박 글씨는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읽을 수 있었다.

'기억의 층위들.'

유진은 그 책을 움켜잡았다. 물이 폐로 들어왔다. 질식했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물 속에서 책을 놓지 않는 손.

---

오후 6시.

다시.

유진은 책상에 앉아있었다. 손에는 '기억의 층위들'이 들려있었다. 물에 젖은 책이 아니라 새 책이었다. 깨끗한 표지. 하지만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번 반복은 네 번째였다. 네 번째 죽음. 네 번째 기억의 조각. 익사. 그전엔 추락이었고, 그 전엔... 기억이 섞여있었다. 어느 죽음이 먼저였는지 구분이 안 됐다.

유진은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

"기억은 층을 이룬다. 1층은 일상이다. 무해한 것들. 햇빛, 미소, 평온함. 2층은 의심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감각. 3층은 공포다. 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층. 그리고 가장 깊은 곳, 지하에는..."

텍스트가 끝났다. 페이지가 비어있었다. 마치 저자가 글을 다 쓰지 못한 것처럼.

유진은 책장을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도면이 그려져있었다. 도서관의 도면. 1층, 2층, 그리고 그 아래로 뻗어있는 선. 지하 서고로 표시된 공간. 그 옆에 손글씨로 적힌 문장.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가장 끔찍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당신이 지우려 했던 모든 것이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마주보는 것이다. 아니면 영원히 여기 갇혀있는 것이다. 반복과 반복과 반복 속에서.'

유진은 책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강박이었다. 뭔가가 자신을 지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것이 책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자신의 무의식인지 알 수 없었다.

도서관 어딘가에 지하 서고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었다.

유진은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책을 들고. 손은 떨렸지만 발걸음은 확실했다. 이미 죽음을 네 번 맞이했다. 더 이상 두려움을 느낄 것이 없었다. 또는 두려움이 너무 커져서 마비된 것이었다.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다시 깊숙이. 책장들 사이로. 그 어딘가에 있을 계단. 그 어딘가에 있을 문.

오후 7시 8분.

유진은 도서관의 한 모퉁이에서 낡은 철문을 발견했다.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글씨는 벗겨져 읽을 수 없었다. 문의 아래에는 손글씨로 쓰인 경고가 있었다.

'돌아오지 말 것.'

그 글씨는 누군가의 필체였다. 유진 자신의 필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마치 어린 시절 누군가가 자신에게 써준 편지처럼. 어머니의 글씨. 유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1화에서 책 속에 나왔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기억과 연결되는 글씨였다.

유진은 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둠이 있었다. 계단이 보였다. 내려가는 계단. 몇 층을 내려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조명이 없었다. 다만 어딘가에서 희미한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진은 첫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후 7시 12분.

도서관 위쪽에서는 이미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유진은 책을 놓지 않았다. '기억의 층위들'은 손에 들려있었고, 그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계단의 벽에는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이 길을 여러 번 오갔거나, 혹은 절박하게 벽을 짚고 내려갔던 흔적이었다.

한 발, 또 한 발.

유진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불빛이 희미하지만 분명했다. 형광등도 아니고, 촛불도 아닌, 뭔가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마치 물 속에서 반사되는 달빛처럼.

계단이 끝났다.

유진은 발을 디디고 서서 주변을 살폈다. 지하 서고였다. 그 공간은 도서관의 다른 층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장이 낮았고, 벽이 축축했다. 공기가 썩어있었다. 책 냄새가 아니라 무언가 오래되고 부패한 것의 냄새였다.

책장들이 미로처럼 놓여있었다. 1층과 2층의 책장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다였다. 책장들이 무작위로 놓여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좁은 통로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길을 막아놓은 것처럼.

유진이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 공간이 일렁였다. 마치 수면 위의 파문처럼. 책장들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진은 멈춰 섰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이상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움직이고 있는데 너무 천천히.

그 순간 책장 한쪽에서 책이 떨어졌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 표지가 찢어져있었다. 유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목이 없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필체가 나타났다. 자신의 필체. 하지만 떨리고 급하게 쓰인 글씨였다.

"그날 밤 7시 30분. 나현이가 지하에 왔다. 나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유진의 손이 멈췄다. 나현. 다시 그 이름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기억의 조각이 떠올랐다. 웃음소리. 누군가의 웃음. 그리고 그 웃음에 대한 질투. 분노. 뭔가 더 어두운 감정.

지하 서고의 더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책이 넘어지는 소리. 아니, 그 소리는 책의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빠르게.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유진?"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몸을 굳혔다. 그 목소리는 지하 서고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위쪽에서 난 것이었다. 계단 위쪽에서. 1층 어딘가에서.

"유진, 어디 있어?"

이은희였다.

유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을 죽였다. 왜 이은희가 자신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반복이 진행되는 동안, 조연 인물들은 자신의 일상을 반복할 뿐이었다. 도서관장 김준호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청소담당자 박철수는 청소를 하고, 이은희는 대출 데스크에 앉아있을 텐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빠르게.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것처럼.

유진은 책을 들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책장 뒤로. 깊숙이. 지하 서고의 어둠이 자신을 감싸주기를 바라며.

이은희는 지하에 도착했다.

"유진... 여기 있으면 나와. 위험해."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단순한 직원의 우려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는 자의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뒤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유진은 책장 사이에서 이은희를 지켜봤다. 이은희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했다. 그리고 그 창백함 뒤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이은희는 지하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계단 근처에만 머물렀다. 마치 더 이상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당신이 지하로 가면 안 돼. 아직은. 아직 충분하지 않아."

이은희가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마치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처럼.

오후 7시 42분.

유진은 책장 사이에서 나왔다. 이은희는 유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이은희의 얼굴이 변했다. 놀람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으로. 절망으로.

"당신이... 기억하고 있어?"

이은희가 물었다. 1화에서 했던 같은 질문이었다.

"기억이 뭐라는 건데?"

유진이 반문했다.

이은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여러 번 반복했다. 마치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목이 조여오는 것처럼.

"당신이 한 선택은... 그것은..."

이은희가 문장을 채우지 못했다. 다시 그 미완의 문장이었다.

"뭔데? 말해."

유진이 다가갔다. 이은희는 뒤로 물러섰다.

"안 돼. 내가 말하면 그건 또 다른 기억이 되고, 그럼 당신은 더 빨리 사라져. 나는...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아."

이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은희의 눈이 흔들렸다.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맞춰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통제하려 하는 것처럼.

"사라진다고? 뭐가 사라진다는 거야?"

"당신이. 유진이 사라진다고."

이은희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은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았고, 더 무거웠다. 음절이 겹쳐지면서 마치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것처럼. 이은희의 입가가 경련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유진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기억할수록 사라진다. 그게 규칙이야."

이은희의 목소리가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은희의 말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은희의 성대를 빌려 말하고 있었다.

"책을 읽을수록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돼. 그리고 어느 순간 당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그 사람이 당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아닌 그 누군가가."

유진은 이은희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은희는 이미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래서 우린 당신을 막으려고 했어. 책을 찾지 못하도록. 기억하지 못하도록. 영원히 반복 속에 있으면서도..."

계단을 올라가며 이은희는 뒤돌아봤다. 유진과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애절함이 가득했다.

"적어도 당신으로 남아있기를."

말을 마친 이은희는 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유진은 따라가려 했지만 멈췄다. 그 목소리가 이은희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계단 위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쾅. 무거운 금속음. 그 음향이 지하 전체에 울려 퍼졌다.

유진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책들이 들려있었다. '기억의 층위들'과 제목 없는 책. 그리고 이은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당신으로 남아있기를.

하지만 그건 이은희의 말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말이었다. 이은희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유진은 책장 사이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더 깊숙이. 지하 서고의 가장 먼 곳으로.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오후 8시 15분.

지하 서고는 생각보다 깊었다. 계단에서 내려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책장들이 계속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로 새로운 책들이 놓여있었다. 모두 자신의 필체로 쓰인 책들이었다.

첫 번째 책. '나현, 그리고 나.' 다시 펼쳤다. 다른 내용이었다. 아니, 같은 내용인데 더 자세했다. 마치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쓴 것처럼. 하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나현이와의 관계. 그 관계의 시작. 그리고 끝.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손이 책을 잡고 있는 것처럼.

두 번째 책. '그날 밤의 진실.' 펼쳤다. 역시 같은 제목의 책이 앞에 있었는데, 이번 책은 더 구체적이었다. 시간, 장소, 그리고 행동들. 오후 3시. 지하 입구. 그리고 나현이의 웃음. 그 웃음에 대한 자신의 감정. 질투. 분노. 그리고 무언가 더 어두운 것.

책의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바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다른 손이 넘기는 것처럼.

세 번째 책. '내가 한 일들.' 네 번째 책. '지워버린 기억들.'

책의 제목들이 점점 더 직설적이 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안내하고 있는 것처럼. 한 발씩 깊어지도록. 진실에 가까워지도록.

유진은 '나현, 그리고 나'를 다시 펼쳤다. 이번엔 다른 부분을 읽었다.

"그날 밤 나는 나현이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도서관에서. 오후 11시에. 나현이는 내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뭔가 중요한 것.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 나타나지 않았다. 도서관의 어딘가에 숨어있으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나현이는 혼자였다. 도서관 지하에서. 그리고 난 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우는 것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녀가..."

페이지가 끝났다. 다음 페이지는 비어있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글을 지워버린 것처럼. 혹은 자신이 쓰기를 거부한 것처럼.

유진은 책을 놨다. 손이 떨렸다. 이 기억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나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죽었는가? 아니면 자신처럼 반복 속에 갇혀있는가?

지하 서고의 더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소리가 났다. 이번엔 사람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 유진 자신의 목소리였다.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웃음이 아니었다. 비명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하고, 절망 같기도 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신의 성대를 통해 나오는 것 같았다.

오후 8시 47분.

유진은 소리를 따라갔다. 책장들 사이로. 깊숙이. 지하 서고의 가장 아래쪽으로. 조명이 더 희미해졌다. 어둠이 짙어졌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금속이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한 방이었다. 지하 서고의 끝에 있는 작은 방. 벽은 콘크리트로 되어있었고, 천장에는 스프링클러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벽 한쪽에는 금속 문이 있었다. 큰 금속 문. 마치 금고처럼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문 앞에는 손글씨 경고가 있었다.

'돌아오지 말 것.'

이번엔 아이의 필체처럼 보였다. 어린 손으로 쓴 글씨. 하지만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인지 유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필체였다.

유진은 금속 문에 손을 대었다. 차가웠다.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대신 내부에서만 열 수 있는 잠금장치가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당기면 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멈췄다.

손이 떨렸다. 이번엔 공포였다. 강박이 아니라 순수한 공포였다. 문을 열면 뭐가 나올까? 또 다른 기억? 또 다른 책? 아니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오후 9시 2분.

도서관의 위쪽에서는 밤이 완전히 내려왔을 것이었다. 1층의 조명이 이상해지고 있을 것이었다. 문이 잠기기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유진은 금속 문에 기대어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책들을 내려놨다. 그 책들은 자신이 쓴 책들이었다. 자신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것들을 다시 읽고 있었다.

왜? 왜 자신이 쓴 책들이 계속 나타나는가?

그건 자신이 자신을 안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지워버리기 전의 자신이. 반복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또는 반복 속에 자신을 영원히 묶어두기 위해.

유진은 손에 들린 또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아직 펼쳐보지 않은 책이었다. '그날 밤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는 새것이었고, 글씨는 명확했다. 하지만 책을 펼칠 때마다 유진은 자신이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기억이 자신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을수록 유진 자신은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책의 표지를 짚었다.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금속 문이 움직였다.

내부에서.

무언가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유진의 호흡이 멈췄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둠이 있었다. 더 깊은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이 서있었다.

같은 옷. 같은 얼굴. 같은 손에 들린 책. 하지만 눈이 다였다. 그 눈은 유진의 눈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 유진."

목소리도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더 무거웠다.

"나는 너야. 하지만 너는 나가 아니야."

손잡이를 놓고 한 발 나왔다. 그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유진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이제 알겠지? 왜 책을 읽을수록 사라지는지. 왜 기억할수록 너는 너가 아니게 되는지."

유진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벽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넌 이미 사라졌어. 그날 밤 지하에서. 그 선택을 했을 때. 나현이를 보고만 있었을 때. 그리고 나는 너의 자리에 왔어. 너의 기억을 가지고. 너의 몸으로. 너의 인생으로."

다른 자신이 가까워졌다. 한 발, 또 한 발. 마치 포식자가 먹이에 접근하는 것처럼.

"반복은 너를 되돌리려는 시도였어. 너를 깨우려는. 하지만 매번 넌 같은 책을 읽고, 같은 기억을 되찾고, 그리고 더 사라져. 왜냐하면 기억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너를 먹어치우니까."

유진은 책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이제 선택해. 이 책을 펼칠래? 아니면 반복을 받아들일래?"

손에 들려있던 '그날 밤의 진실'을 내려놨다.

"책을 펼치면 넌 완전히 사라져. 그리고 내가 너가 되겠지. 영원히. 반복 없이."

다른 자신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유진의 웃음이 아니었다. 더 낮고, 더 차갑고, 더 오래된 웃음.

"아니면 반복을 받아들이면, 넌 계속 여기 있을 수 있어. 영원히. 이 지하에서. 같은 시간을 반복하면서. 나와 함께."

오후 9시 23분.

유진은 손을 들었다. 책을 집어 들려고. 하지만 손이 멈췄다.

그 순간, 유진이 읽던 책 중 하나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손이 문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금속 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기억들. 이미지들. 소리들. 모두 섞여서 유진을 짓누르고 있었다.

도서관 지하. 나현이의 웃음. 어머니의 목소리. 자신의 손. 자신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

지하 입구에서 나현이를 기다리던 자신. 그 웃음이 싫었던 자신. 그 웃음을 영원히 없애고 싶었던 자신.

그리고 어느 순간, 나현이가 더 이상 웃지 않았던 것.

유진은 깨달았다.

책 속의 문장이 현실이 되고, 현실의 기억이 책이 되고, 그 경계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왜 반복하고 있는지를.

다른 자신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다른 자신이 원래 자신이었고, 자신이 다른 누군가였던 것인가.

오후 10시.

유진은 금속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책의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마치 누군가 다른 손이 넘기는 것처럼.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