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흰색 격리실은 소리를 빼앗는 곳이었다.

눈을 뜬 순간, 린은 그것을 알았다. 자신의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들리지 않았다. 손을 들어 보자 손가락이 움직였는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없었다. 세상이 음성 처리된 영상처럼 보였다.

격자무늬 천장에서 하얀 불빛이 쏟아졌다. 천장, 벽, 바닥—모든 것이 같은 색이었다. 색깔이 많을수록 뇌는 구분 지을 수 있는데, 흰색만 있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곳은 정체성을 지우는 방이다.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는 것을 어쩌다 알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저주다. 린은 그 빛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이 맞나? 손가락 관절, 손톱, 손금—모두 낯선데, 동시에 친숙했다. 이 손은 누군가를 쓰러뜨린 손이고, 누군가를 잡아낸 손이고, 누군가를 저주한 손이다. 이 손은 누구의 손인가?

린이 중얼거렸다. "이게... 나야?"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면서 세상의 음성이 돌아왔다. 호흡음, 심장 박동, 그리고 누군가의 발소리. 격자무늬 천장 위에서.

"그래. 모두 너야."

강화유리 너머에 카인이 있었다. 격리실의 상층부 관찰창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은 어두웠지만 목소리는 선명했다. 카인의 손가락이 격자무늬 천장의 나사를 푸는 중이었다.

"그리고 넌 그것들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

카인이 천장판을 치웠다. 미끄러지는 소리, 몸이 떨어지는 소리—모든 음성이 돌아왔다. 카인이 격리실 안으로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카인은 린을 향해 걸어왔다.

"카인... 너?"

"그래. 날 기억해?"

린은 카인을 봤다. 검은 머리, 차가운 눈빛, 그리고 입꼬리의 미묘한 경직.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 본 얼굴? 어디서 본 얼굴? 기억이 흐렸다. 마치 물속에 잠긴 사진처럼. 하지만 무언가가 그 얼굴을 '카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기억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모르겠어. 근데... 넌 내 편인 것 같아."

"맞아."

카인이 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면 뭔가 바뀔 것 같았다. 린은 손을 보았다. 검은 빛이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그 빛을 보며 린은 생각했다. 이것도 나인가? 이 어두움도?

"잠깐."

격리실의 벽에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에리카 박사의 목소리였다.

"흥미로운 장면이네요. 기억을 완전히 소실한 상태에서 '자유'를 말씀하시다니, 카인 요원."

벽의 한 부분이 투명해졌다. 에리카 박사가 관찰실에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하나의 실험 결과를 보고 있는 과학자처럼.

"린은 현재 기억 무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의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본능입니다. 본능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건 넌 상관없어."

카인이 손을 거둬 린을 잡지 않았다. 대신 격리실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카인이 손을 들었다. 기억 강화 능력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공기가 떨렸다. 문의 잠금 메커니즘이 울음을 냈다.

"린을 놔둬."

에리카 박사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격리실의 바닥이 떨렸다. 격자 모양의 금속 격자가 바닥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가시처럼. 카인이 몸을 날렸다. 격자 사이로 몸을 굴렸다. 날카로운 끝이 카인의 팔을 그었다. 피가 떨어졌다.

"카인!"

린이 외쳤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왜 이 사람이 다쳐지는 게 싫을까? 그 감정이 너무 강해서 린은 그것을 따라갔다.

검은 빛이 폭발했다.

격자들이 녹았다. 아니, 사라졌다. 저주의 힘으로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린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내 능력이야? 아니면 내 저주야? 둘 다야?

격리실의 문이 열렸다.

복도가 보였다. 흰 벽의 복도. 그 복도 어딘가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린! 미안해!"

노아였다. 격리실 밖에서 울음을 쏟고 있었다. 목이 쉰 목소리로, 계속 반복했다.

"미안해! 미안해! 난 널 이용했어! 내 기억을 되찾고 싶어서! 그래서 널 끌어들였어!"

린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기억이 없어도,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도, 그 사람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기억이 없는데?

"넌 그럴 필요 없어."

린이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무언가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기억 없는 자신도 타인의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게,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게. 그 깨달음이 낯설고도 무거웠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버렸다.

"넌 그걸 원했어."

노아의 울음이 멈췄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

"린. 넌 자유야."

시온이었다. 격리실 밖에서, 강화유리 너머에서 말하고 있었다. 시온의 손이 유리에 닿아 있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하지만 그 손 아래 눈빛은 차갑게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저주도 능력도 모두 너의 선택이야. 그리고 그 선택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어. 넌 자유야, 린."

린은 시온을 봤다. 그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부르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넌 자유야.' 그 말이 반복되면서, 뭔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천재 린. 책상에 앉아 있는 소년.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얼굴 위에 절망이 내려앉는 장면.

그 다음. 평범한 린. 교실에 앉아 있는 소년.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를 배우는 소년.

그 다음. 지금의 린. 격리실에 누워 있는 소년.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소년.

세 개의 린이 동시에 존재했다.

"이 모든 게 나야?"

린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뭔가가 깨달아졌다. 자신이 천재였던 것도 맞다. 자신이 평범했던 것도 맞다. 자신이 능력을 가진 것도 맞다.

모두 맞다.

그렇다면 저주는?

린의 손이 떨렸다. 검은 빛이 손가락 끝에서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빛을 바라보며 린은 깨달았다.

저주는 도망이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천재라는 정체성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을 저주했다. 그것이 저주였다. 그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거부감이 만든 저주.

그런데... 왜?

린이 그 질문에 집중했다. 왜 자신은 천재인 자신을 거부했을까? 왜 도망쳤을까?

이미지들이 더 깊어졌다.

아카데미의 회의실.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칭찬이 아닌 기대. 기대가 아닌 압박. 압박이 아닌 감옥.

'천재 린.'

그 이름이 자신의 목을 조였다.

'천재 린은 이렇게 해야 해.'

'천재 린은 실패할 수 없어.'

'천재 린은 이것도 모르니?'

자신의 이름이 감옥이 되어갔다.

'천재'라는 단어 안에서 자신이 죽어갔다.

그래서 도망쳤다. 저주를 걸었다. 모든 것을 지웠다. 천재라는 이름도, 능력도, 기억도.

평범함 속으로.

그리고 평범함이 좋았다. 평범함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곳이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곳이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격리실에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린은 깨달았다.

자신이 거부했던 것은 천재가 아니었다.

자신이 거부했던 것은... 선택이었다.

천재로 살 것인가, 아니면 평범함으로 살 것인가. 그 선택을 할 자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선택이 자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선택이 자신을 묶고 있었다.

그래서 저주를 걸었다. 선택권을 지우기 위해.

하지만 지금, 시온이 말했다.

'넌 자유야.'

그 말을 들으며, 린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선택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였다.

자신이 천재일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고, 능력을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린의 손이 떨렸다. 검은 빛이 손가락 끝에서 맥박처럼 고동쳤다. 저주가 사라진 게 아니라, 저주가 '선택'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린!"

카인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린이 받아들였다. 손을 잡는 순간, 카인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억 관리국과 싸우던 카인의 결연한 표정. 그의 팔에 난 상처. 그의 결심. 모든 것이.

"나가자. 빨리."

카인이 끌었다. 격리실 밖으로. 복도로.

노아가 있었다. 눈이 부어있었다. 시온이 있었다. 표정이 차분했다. 하지만 눈빛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기억 관리국이 온다," 시온이 말했다. "3분 안에 이 층을 빠져나가야 해."

"어떻게?"

"비상 탈출 통로가 있어. 지하 7층에."

"그 아래로?"

"그 아래는 금지된 공간이야. 기억 관리국도 가기 싫어하는 곳."

복도 저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빠른 발걸음. 많은 사람들이. 하얀 제복을 입은 요원들이. 그들의 손에는 기억 차단 장치가 들려 있었다.

"가!"

카인이 외쳤다. 린이 달렸다. 노아와 시온도. 복도를 따라 계단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그 순간.

계단 중간 층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재윤이었다.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실제 칼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구현된 칼. 기억 조작 능력의 최고 경지.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능력.

"안 돼!"

재윤이 외쳤다. 목이 쉬었다. 눈에는 광기가 가득 찬 상태였다.

"넌 나가서는 안 돼!"

"재윤, 물러나."

린이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기억을 잃었지만, 이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넌 왜?"

재윤의 목이 떨렸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는 압박. 그 압박이 자신을 짓누르는 모습. 그리고 그 압박의 원인이 린이었다는 깨달음.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깨달음.

"넌 내 인생을 망쳤어!"

재윤이 칼을 휘둘렀다. 공기가 갈라졌다. 아니, 공기가 아니라 현실이 갈라졌다. 계단의 벽이 금이 가고,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졌다. 그 틈으로 기억들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기억. 재윤의 기억. 자신을 짓누르던 기대의 무게. 그것이 모두 린 때문이라는 환상.

"그래서 난 널 끝내야 해!"

재윤이 칼을 들어올렸다. 계단이 흔들렸다. 기억의 칼이 현실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물러나."

카인이 나타났다. 재윤의 칼과 카인의 팔이 부딪혔다. 기억의 칼과 현실의 팔.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불꽃이 튀었다. 계단의 난간이 부서졌다.

린의 손이 떨렸다. 검은 빛이 손가락 끝에서 고동쳤다. 카인을 도와야 한다는 본능. 하지만 그것이 정말 본능인가? 아니면 자신이 선택하는 건가? 에리카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 무상태에서의 선택은 본능이라는 말.

그렇다면 나는 정말 선택하고 있는가?

"카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 위에서. 기억 관리국의 요원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손에는 기억 차단 장치가 들려 있었다.

"린! 이 쪽으로!"

노아가 옆 복도를 가리켰다. 시온이 그쪽을 열고 있었다. 비상 탈출 통로의 문. 그 너머로는 어둠이 보였다.

린은 선택의 순간 앞에 섰다.

카인을 따를 것인가. 재윤의 광기로부터 카인을 구하고 함께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재윤과 마주할 것인가. 이 소년이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상처가 되었는지 직면할 것인가.

아니면 노아의 손을 잡을 것인가.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도망칠 것인가.

세 갈래의 길. 세 개의 선택.

린의 손이 떨렸다. 검은 빛이 손가락 끝에서 고동쳤다. 그 빛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인가. 그것이 자신의 선택을 말해줄 것이다.

기억 없는 자신도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능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다.

"가. 빨리!"

카인이 소리쳤다. 재윤과 싸우면서도, 손가락으로 린을 밀어냈다.

린은 달렸다. 노아와 시온을 따라. 어둠 속으로.

뒤에서는 칼 부딪히는 소리, 기억 차단 장치의 울음, 계단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비상 탈출 통로는 나선형이었다. 계단이 아니라, 미끄러운 금속 통로. 내려가면서 린은 생각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누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거야?

왜 자신을 도와주는 거야?

기억이 없는데, 왜 이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유가 뭔데?

아직도 답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자신은 선택하고 있다는 것.

저주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능력을 받을 것인가.

평범함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천재로 돌아갈 것인가.

그 모든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

하지만 에리카 박사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기억 무상태에서의 선택은 본능이라는 말. 정말 그럴까? 아니면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걸까?

통로가 깊어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무거워졌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는 듯한. 그리고 냄새가 났다. 금속과 먼지, 그리고 뭔가 오래되고 잊혀진 것의 냄새. 지하 7층. 그 아래는 금지된 공간.

통로의 끝에서 문이 보였다. 그 문 너머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노아가 손을 올렸다. 문을 열려던 순간.

"기다려."

린이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손가락 끝의 검은 빛이 더욱 강하게 고동쳤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린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뭐가 있어?"

시온이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이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근데... 이게 맞는 선택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그 순간, 린은 깨달았다.

에리카 박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기억 무상태에서의 선택은 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의심하는 것도 선택이다.

자신은 지금, 자신의 본능을 의심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열어."

린이 말했다.

노아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안에서 자신은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린은 그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빛이 조용하게 피어올랐다.

저주도 능력도 아닌, 선택의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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