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의 별들이 흐릿해졌다.
린의 눈에는 별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 맺혔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니 공기가 진동했다. 아까 기숙사 방에서 물건들을 띄웠던 그 능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 강해졌다.
손가락 끝이 타는 듯 따뜻해졌다. 뇌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아니라 자신 자체가 재구성되는 느낌이었다.
에리카 박사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넌 천재였지만, 그 정체성을 거부했어. 그래서 스스로를 저주했어.'
거부. 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자신이 자신을 거부했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 장면—자신이 자신에게 손을 뻗는 장면—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린."
카인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카인과 노아가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카인의 왼쪽 팔은 붕대로 감싸여 있었고, 노아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의무실에서 나오면 안 되는데—"
"내가 저주했어."
린이 말했다. 별을 보는 척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 기억 조각들이 현실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 뭐라고 했어?"
"내가 내 자신을 저주했다고."
이번엔 돌아서서 두 사람을 봤다. 카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노아는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기억이 돌아와. 조각조각이지만, 계속 돌아와. 그리고 다 보이는 거야. 내가 뭘 했는지." 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어. 왜냐하면…"
말을 멈췄다. 왜인지 모르겠다는 건 거짓이었다. 알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이미 봤다. 자신이 왜 자신을 거부했는지.
"왜냐하면 난 나 자신이 싫었어."
목이 메었다. 눈물이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꺾였다. 옥상의 차가운 바닥에 앉으면서 손가락에서 더 이상 불빛이 피어오르지 않았다. 대신 온몸이 떨렸다.
"내가 천재라는 게 싫었어.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는 게 싫었어. 실수가 허락되지 않는 그런 자리가 싫었어. 그래서…"
"그래서 뭐?"
노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 린의 어깨에 닿으려 했다.
"건드리지 마."
린이 몸을 날렸다. 노아가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난 피해자가 아니야. 난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저주를 건 거야. 피해자가 될 자격도 없어."
"그래도 넌 지금 고통받고 있잖아."
카인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고통? 이게 고통인가?"
린이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자꾸 떨렸다. 뇌가 두 개인 것 같았다. 한쪽은 2년 전 천재였던 자신이고, 다른 한쪽은 지금 평범함을 원하는 자신이었다. 둘 다 린이었는데, 둘 다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린!"
재윤의 목소리가 옥상에 울렸다. 그가 나타났다. 뒤에는 여러 명의 학생들이 따라왔다. 기억 복원팀의 일원들이었다.
"맞아. 넌 자신을 저주했어.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재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 넌 돌아오면 안 되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최강자가 될 기회를 얻었거든. 넌 사라져야 해. 영원히."
"재윤, 넌 린의 저주를 방조했어?"
시온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냉정했지만, 목소리에는 미묘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방조? 나는 적극적으로 도왔어. 린이 천재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
재윤이 한 발 다가섰다. 그의 손에서 자주색 빛이 피어올랐다. 기억 조작의 신호였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너, 뭐 하려고—"
카인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재윤의 기억 조작이 린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린의 몸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폭발했다.
기억들이 현실로 쏟아져 나왔다.
2년 전의 교실. 린이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의 린과는 완전히 달랐다. 금발이 아니라 검은 머리였고, 눈빛이 차갑고 예리했다. 모든 과제를 완벽하게 해내고,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죽어 있었다.
린이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이 자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날 지워줘."
그것은 기도였다. 간청이었다. 절망했다.
"날 지워줘. 이 모든 걸. 이 천재라는 게. 이 완벽함이라는 게. 모두 지워줘. 난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그 순간, 2년 전의 자신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저주의 마법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었다.
"미안해."
2년 전의 자신이 말했다. 그리고 손을 자신의 뇌에 꽂았다.
검은 빛이 퍼져 나갔다.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져 나갔다. 천재였던 모든 것이. 완벽함이 모두. 그리고 자신도.
하지만 그 순간, 뭔가 다른 감정이 흘러나왔다. 해방감이었다. 긴 감옥에서 풀려난 듯한. 동시에 죄책감도 있었다. 자신을 버린다는 죄책감. 그 모순된 감정들이 한데 섞여 쾌감처럼 느껴졌다.
현재의 린이 옥상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
기억이 너무 강력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던 게 아니라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현재와 과거가 섞였다. 자신이 누군지 헷갈렸다.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자신인가.
"린! 린!"
누군가 손을 잡았다. 카인이었다. 그의 손이 따뜻했다. 하지만 그것도 기억이었다. 모든 게 기억이었다. 손도, 옥상도, 별도. 모두 기억 속의 환각일 수도 있었다.
"이제 뭐하려고…?"
린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순간, 검은 빛이 모든 것을 삼켰다.
———
의식이 돌아올 때, 린은 흰 벽을 보고 있었다.
천장도 흰색이었다. 바닥도 흰색이었다. 창문이 없었다. 문도 없었다. 다만 한쪽 벽면에 두꺼운 강화유리가 있었을 뿐이다.
격리실이었다.
린은 천천히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뇌 안에서 뭔가가 손상된 느낌이었다. 기억이 계속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깼네."
유리 너머에서 에리카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해. 넌 완전한 피험자가 되었어."
에리카 박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실험실의 냉동고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차갑고 무정했다. 린은 유리 너머를 바라봤다. 박사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였다. 하얀 코트, 검은 머리,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미소.
"넌 자신을 저주했고, 그 저주를 깨우려다 또 다른 저주를 만들었어. 이제 넌 저주 자체가 되었어. 아름답지 않아?"
에리카가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는 2년 전의 기록이 떴다. 천재 린이 아카데미의 도서관 지하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 마법의 빛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자신의 뇌에 꽂고 있었다. 검은 빛이 퍼져 나갔다.
박사가 린을 바라봤다. 침묵으로 압박했다. 손을 움직여 모니터 각도를 조정했다. 그 손가락이 화면을 가리켰다. 모니터 속 기록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린이 입을 열려다 말았다. 생각이 정렬되지 않았다. 뇌 안에서 기억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2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섞여 있었다. 누가 누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 기억 속의 절망한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날 지워줘.'
유리의 다른 쪽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해. 난 너를 지키지 못했어."
카인이었다. 그는 격리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에리카 박사가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기억 조작의 마법이 담겨 있었다. 검은 빛이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렸다.
린이 강화유리에 손을 대었다. 손가락이 유리 위에서 떨렸다.
"기억을 다시 지우면…"
린이 중얼거렸다.
"내가 또 저주를 걸겠네."
에리카 박사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흥미로운 데이터를 발견한 연구원의 눈빛이었다.
"그렇지. 그게 자기 저주의 본질이야. 기억을 지우려 할수록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넌 자신을 지우고 싶기 때문이야."
카인이 유리를 두드렸다. 작은 음성으로 계속 두드렸다.
"린. 들려? 나 여기 있어. 넌 혼자가 아니야."
하지만 린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다. 아니, 정말로 들리지 않았다. 뇌 안의 소음이 너무 컸다. 2년 전의 자신의 목소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날 지워줘. 날 지워줘. 날 지워줘.'
린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뭐 했던 거야?"
에리카 박사는 여전히 침묵했다. 모니터만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말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린의 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아주 작은 빛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저주의 마법이었다.
"내가 이걸 조종할 수 있을까?"
린이 물었다.
에리카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게 넌 모르겠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저주를 걸었는지. 지금 넌 그 저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거든."
그 순간, 격리실의 한쪽 벽이 흔들렸다. 카인이 외부에서 강하게 부딪혔다.
"에리카! 이 미쳤 년아! 린을 내놔!"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린이 지금까지 들어본 카인의 목소리 중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다시 벽을 부딪혔다. 또 다시. 강화유리는 끄떡없었지만, 그의 울분만 계속 부딪혔다.
에리카가 손을 들었다. 격리실의 벽이 더욱 밝은 빛으로 반짝였다. 방음 차단 마법이 강해졌다.
"이제 넌 아무도 만날 수 없어. 여기서 선택해야 해. 기억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일 것인가."
린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더욱 강하게 모였다. 하지만 그 빛을 향해 또 다른 빛이 나타났다. 하얀 빛이었다. 기억을 조작하는 린의 능력이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손가락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게 울렸다. 능력의 대가가 발동하고 있었다.
두 빛이 충돌했다.
검은 빛(저주)과 하얀 빛(조작)이 린의 손 위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안해."
린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기억 속의 목소리가 또 울려 나왔다.
'날 지워줘.'
그리고 지금의 린이 대답했다.
"아니야. 넌 지워지지 않아. 절대로."
린의 두 손이 마주쳤다. 검은 빛과 하얀 빛이 완전히 얽혔다. 그 순간, 격리실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찼다.
에리카 박사가 눈을 가렸다.
"뭐 하는 거야…?"
유리 너머에서 카인이 소리쳤다.
"린!"
하지만 린은 이미 선택했다. 기억을 지우지도, 저주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제3의 길을. 두 빛을 동시에 조종하는 길.
그 순간, 린의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능력의 대가가 발동했다. 기억을 조작할 때마다 자신의 현재 기억이 사라진다는 그 끔찍한 대가가.
시야가 완전히 뒤틀렸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린은 자신이 누구인지 까먹기 시작했다. 동시에, 2년 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까먹기 시작했다.
모든 게 하얀 소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격리실 밖에서 들려오는 카인의 목소리였다.
"제발. 돌아와. 내가 있잖아."
린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의식도 함께.
———
어둠 속에서 다시 깨어났을 때, 린은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흰색 천장. 익숙한 천장이었다. 하지만 왜 익숙한지는 몰랐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이 있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 정상적인 손이었다. 하지만 왜 이 손이 자신의 손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깼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린은 고개를 돌렸다. 창문 같은 강화유리 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낯설었다. 하지만 눈이 친숙했다. 그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사람의 눈빛처럼.
"난 누구야?"
린이 물었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난 누구야? 여기가 어디야? 왜 이렇게 하얀 벽만 보이는 거야?"
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뇌 안에서 뭔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기억을 찾으려는 절박함이.
남자가 강화유리를 두드렸다.
"린. 나 카인이야. 기억나? 린!"
카인. 그 이름이 들렸을 때, 린의 뇌 안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통증이 흐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기억이 아니었다. 그저 통증일 뿐.
린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아, 맞다. 자신은 저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왜 자신은 저주를 하고 싶은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흥미로워. 정말 흥미로워."
하얀 코트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완전한 기억 소실. 정체성의 완전한 붕괴. 넌 이제 진정한 백지가 되었어. 그리고…"
여자가 손을 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린은 손가락의 검은 빛을 바라봤다.
이 빛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것을 원했다. 이것을 사용하고 싶었다. 이것으로 뭔가를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뭘 지우고 싶은지는 모를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게 목표였을지도.
자신이 뭘 지우고 싶었는지조차 지워버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격리실 안의 하얀 벽들이 점점 더 밝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