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실의 형광등 아래서 깨어났을 때, 세상은 이미 다른 색깔이었다.
카인의 손을 놓고 일어나려는 순간, 팔에 극심한 통증이 흘렀다. 주삿바늘 자국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뭔가 주입되었다. 뭔가를 빼냈다.
기억 관리국 리포트였다.
카인이 건네준 문서는 한 장이었지만, 그 한 장이 린의 세계를 부숴버렸다.
**자기 저주 확률: 89.7%**
붉은 글씨로 찍힌 숫자. 그 아래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넌 너 자신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야.' 아니면 에리카 박사의 목소리?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거부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기숙사 방에서 나가야 했다.
카인이 손을 잡아주었지만, 그 손도 떨리고 있었다. 손등에 핏자국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뭐... 뭐라고?"
"기억이 흐려졌나?"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마치 입 안에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니. 그게 말이 되나? 저주는 누군가가 마법을 시전해서 걸리는 건데, 자신이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그럼 자신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둘 다인가?
아카데미 전체에 비상벨이 울렸다.
우우우우우—
그 음향은 린의 정신을 과거로 데려갔다. 기억이 아닌 감각으로. 복도에서 누군가 소리를 쳤다. "린! 린이 저주를 받았어!" 그리고 누군가는 웃었다. "또 시작이네. 천재 프로그램의 또 다른 희생자?" 이건 자신의 기억인가? 아니면 노아나 카인의 기억에서 흘러나온 조각인가?
"린."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복도 모퉁이에서 나타난 선생님은 평소와 달랐다. 늘 무심한 얼굴이 무너져 있었다. 눈이 빨갛고,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린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넌 2년 전에 스스로를 저주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마치 죽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 이유는... 넌 너 자신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야."
린의 몸이 얼어붙었다. 카인이 뒤에서 린의 어깨를 감싸려 했지만, 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뭐라고?"
"그때 넌 너무 괴로워했어. 천재라는 것이 너를 짓누르고 있었어."
선생님이 한 발 다가섰다. 복도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비춰주었고, 린은 선생님의 나이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많은 것을 짊어졌다.
"천재 프로그램. 알지?"
린은 몰랐다. 아니,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단어를 들으면 뭔가 뒤틀린 감각이 일어났다. 무거운 책상. 끝없는 숫자들.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싶던 절박한 마음.
"넌 그 프로그램의 최강자였어. 모든 아카데미 학생들이 너를 봤을 때 두려움을 느꼈어. 근데 넌 그게 싫었어. 모두가 너를 천재로만 봤어. 누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도 그 뒤에 따라붙는 건 '천재'라는 수식어였어."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작은 결정체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기억 기록 장치였다.
"난 너를 말렸어. 저주를 걸지 말라고. 하지만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선생님이 기억 기록 장치를 작동시키려 했다. 장치에서 파란 빛이 나오기 시작했고, 뭔가 영상이 떠오르려는 순간—
장치가 깨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기억 기록은 산산조각이 났다.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에리카 박사가... 너의 기억을 연구하려고 지웠나 봐."
기억 관리국 요원들이 복도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기억 추적 장치에서 나오는 신호음. 그 신호음은 2년 전 기억 봉인 장치의 신호와 일치했다. 기억 관리국이 천재 린의 절망을 보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기억을 통해 저주의 원본을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뇌를 건드리는 것처럼.
"도망쳐!"
선생님이 외쳤다.
"난 그들을 막아줄게!"
린이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선생님과 기억 관리국 요원들 사이의 충돌 소리가 들렸다. 마법의 섬광. 뭔가 폭발하는 음향. 그리고—
그리고 선생님의 기억이 강제로 소거되는 음향.
그건 마치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같으면서도, 동시에 무언가가 영원히 사라지는 음향이었다. 기억 능력자인 린은 그 음향을 감지했다. 기억이 소거될 때 나는 특유의 파장. 그건 마치 자신의 뇌 안에 울리는 비명 같았다.
린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다리가 자동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건 본능이었다. 생존 본능. 아니면 누군가 다른 자신의 명령인가?
복도를 달리면서, 기숙사 방으로 향하면서,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고, 손톱 사이에는 선생님의 기억이 아직도 끼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기억이 아니었다. 단지 착각일 뿐이었다.
아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기억 보관소에서 들렸던 그 음향. 그건 분명히 선생님의 기억이 소거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만약 선생님이 기억을 잃으면, 그가 린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도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2년간 자신을 지켜왔던 모든 것이.
린은 기숙사 복도에서 멈췄다.
노아가 기숙사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에는 휴대 통신기가 들려 있었다.
"린! 빨리! 재윤이가..."
"뭐?"
"재윤이가 기억 저주 시술을 완성했어. 그리고... 그리고..."
노아가 숨을 고르려 했다.
"그리고?"
"재윤이는 시술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억을 담보로 걸었대. 카인이 말했어. 재윤이가 두려워했다고. 자기 저주가 실패할까봐.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갈아 넣었대."
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3시간 안에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 거야."
린은 노아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3시간. 그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자신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린? 넌 뭐해?"
노아가 물었다.
린은 웃음이 나왔다. 다시 그 광기 어린 웃음.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웃고 있는 것처럼.
"기억을 읽어야 해. 자신의 기억을."
린이 중얼거렸다.
"그 안에서... 나를 찾아야 해."
기숙사 방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 얼굴은 낯설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그 얼굴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평범한 학생 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천재 린.
"들어와."
린이 노아에게 말했다.
노아는 주저하지 않고 방에 들어섰다. 그 순진함이 다시 한번 위험하게 느껴졌다. 린은 방문을 닫았고,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아카데미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그 음향이 마치 자신의 뇌를 울리는 것 같았다.
"3시간이라고 했어?"
"응. 카인이 말했어.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노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섞여 있었다.
"그럼 카인은?"
"기억 관리국과 싸우고 있어. 넌 도망쳐야 해, 린. 이 아카데미를 벗어나야..."
"아니."
린이 잘라냈다.
"난 도망치지 않아."
노아의 눈이 커졌다.
"왜? 넌 기억을 잃어버릴..."
"기억을 잃기 전에 기억을 읽어야 해."
린이 자신의 손을 봤다. 그 손가락들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 안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떨림이었다.
"자신의 기억을?"
"그래. 선생님이 말했어. 기억을 읽는 능력으로 확인하면 된다고. 내가 진짜 나 자신을 저주했는지."
린이 침대에 앉았다. 침대의 모서리가 삐걱거렸다.
"근데 문제가 있어. 내가 자신의 기억을 읽을 때마다, 현재의 기억이 1~2시간 사라져. 그리고 지금 남은 시간이 3시간이야."
노아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그럼..."
"계산이 맞지 않아. 하지만 시도해야 해."
린이 손을 펼쳤다. 손 위에는 작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읽을 때 나타나는 그 특유의 빛. 마치 별빛이 손 위에 모여드는 것 같았다.
"넌 밖에서 시간을 재. 정확히 몇 분이 지나는지. 그리고 내가 깨어나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으면?"
"그럼 내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거야."
린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이제 광기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노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난 그걸 못해. 린."
"해야 돼. 넌 할 수 있어."
린이 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노아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어머니의 얼굴. 그 얼굴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기억. 부모를 잃은 슬픔.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도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넌 기억을 공감하는 능력이 있잖아. 내가 기억 속에서 길을 잃으면, 넌 날 찾아와. 내 감정을 따라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노아는 목이 메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난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고마워."
린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형광등이 다시 윙윙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는 소리 같았다. 린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터치했다.
기억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아카데미의 조명. 노아의 목소리. 자신의 신체 감각. 모든 것이 사라졌고, 대신 다른 영상이 나타났다.
2년 전. 같은 기숙사 방. 하지만 다른 사람.
그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은 린이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다른 버전의 린이었다. 얼굴은 같지만 눈빛이 달랐다. 그 눈에는 천재의 광기가 있었다. 손가락 끝에는 마법이 맴돌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수십 개의 노트가 쌓여 있었다. 그 노트들은 모두 같은 단어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이렇고 싶지 않아.'
'나는 이렇고 싶지 않아.'
'나는 이렇고 싶지 않아.'
천재 린의 손이 떨렸다. 노트 위에서 펜이 미끄러졌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손 위에서 검은 빛이 피어올랐다.
"충분해."
천재 린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은 안 돼."
손가락에서 검은 빛이 나타났다. 저주의 빛. 그건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의 절망에서, 자신의 거부감에서, 자신의 광기에서.
"날 지워줘."
천재 린이 외쳤다.
"이 모든 것을 지워줘!"
검은 빛이 그 자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기억이 끊겼다. 마치 필름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그 이후의 기억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아니 자신이 지웠던 것 같았다.
그 순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
노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노아는 방 밖에 있어야 했다. 왜 기억 속에서 노아의 목소리가?
"린, 깨어나. 나를 따라와."
노아의 손이 기억의 어둠을 헤쳤다. 그의 기억 공감 능력이 작동하고 있었다. 린의 감정을 따라 기억의 미로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노아는 린의 절망을 느꼈고, 그 절망 속에서 린을 찾아내고 있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돌아와."
노아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기억의 어둠이 물러났다. 린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린의 눈이 떠졌다.
침대 위의 린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1분 52초."
노아가 말했다. 노아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손가락은 여전히 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기억이 흐려졌어?"
린이 물었다.
"응. 1분 52초 동안... 너를 찾으려고 했어. 너의 감정을 따라갔어."
노아의 목소리는 약했다. 그의 기억 공감 능력을 사용한 대가였다.
"고마워."
린이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충분했다. 충분하게도 남아 있었다.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는 기억. 그 절망의 기억. 그리고 그 이유—
천재라는 것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지우고 싶었던 그 간절한 마음.
"린, 너... 정말로..."
"내가 했어. 노아."
린이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날 저주했어. 천재인 날 지우고 싶었어."
그 순간, 기숙사의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많은 수의 발걸음. 그리고 기억 관리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린.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재윤 학생의 저주 시술이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도주는..."
하지만 린의 관심은 그쪽에 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 무언가가 달라졌다. 눈빛이 변했다. 평범한 학생의 눈빛이 아니라, 2년 전의 천재의 눈빛으로.
"뭐... 뭐야?"
노아가 물었다.
"저건..."
"내가 깨어나고 있어."
린이 중얼거렸다.
"다른 내가. 천재였던 내가."
그리고 기숙사 방의 모든 등이 켜졌다. 창문의 커튼이 흘러내렸다. 책상 위의 물건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마법이 아니라, 기억 능력의 폭발. 억압되었던 힘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 기억이 복원되면서 능력도 함께 각성되는 메커니즘.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 곧 자신의 진정한 힘을 되찾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기억 관리국의 요원이 외쳤다.
"학생 린의 능력 레벨이 급상승했습니다!"
기숙사 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린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건 어제의 린이 아니었다.
"3시간이라고 했어?"
린이 물었다.
"충분해."
그리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가락에서 나오는 빛은 이제 검은색이 아니었다. 무지개색이었다. 모든 기억의 색이 섞여 있었다.
"난 나 자신을 저주했고, 지금 나 자신을 되살리고 있어."
린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 넌..."
선생님. 그가 선생님의 기억을 지우려던 그 요원들을 찾아야 했다.
"넌 누구 기억도 지울 수 없어."
기억 관리국의 요원들이 물러섰다. 그들이 본 것은 더 이상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그건 각성한 천재였다. 아카데미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흥미로운데요."
에리카 박사의 목소리였다. 기억 관리국 요원들의 무전기에서 그녀의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녀가 개입하고 있다는 신호.
"2년 전에 자신을 저주했던 학생이, 지금 자신을 되살리고 있군요. 자기 기만의 메커니즘이 역으로 작동하는 순간이군요."
에리카 박사가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기억 추적 장치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2년 전 천재 린의 절망이 봉인되어 있었다. 기억 관리국이 저주의 원본을 보관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천재 프로그램의 최강자를 관리하기 위해, 그의 약점을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었다.
"그 안에는 뭐가..."
린이 물었다.
"아, 이건요?"
에리카 박사가 웃음을 흘렸다.
"이건 당신이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에요. 당신이 천재였던 이유. 그리고 당신이 그 모든 것을 거부했던 진짜 이유."
그 순간, 린의 뇌에 또 다른 통증이 왔다.
그건 기억의 통증이 아니었다.
그건 진실의 통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