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의무실의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광등이 윙윙거리고, 카인의 손이 따뜻했고,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깨어났다.

눈을 뜬 순간 세상이 달랐다. 색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심지어 공기의 무게까지 달랐다. 린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뇌 한 귀퉁이가 욱신거렸다. 아니, 욱신거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 부서지고 있었다.

기억이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졌다가, 다시 흐릿해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깨어났네."

목소리는 차갑고 정중했다. 린은 고개를 돌렸다. 의무실의 문이 열렸고, 하얀 코트를 입은 여인이 들어섰다. 검은 머리를 완벽하게 묶은 여인. 에리카 박사였다.

"어떤 기분이세요? 기억 조각들이 떠오르는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요?" 에리카는 임상적인 표정으로 린에게 접근했다. 그 미소는 의료진의 미소가 아니었다. 과학자의 미소였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손가락들이 펜을 쥐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린은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생체 신호가 모든 것을 말해주니까요." 에리카가 손목 위의 생체 측정기를 확인했다. 린은 그제야 자신의 팔뚝에 센서가 붙어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부터? 깨어나기 전부터인가? "자기 저주 현상을 보이는 피험자는 정말 드물어요."

거부할 수 없었다. 에리카의 손이 린의 팔을 잡았고, 그 손에는 무언가 다른 힘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 차단. 카인이 이전에 말했던 능력이었다. 에리카는 린이 저항하거나 도움을 청하려는 생각마저 차단해버렸다.

복도를 걷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2층, 3층...

그런데 계속 내려갔다. 4층, 5층...

그리고 6층.

린은 아카데미에 6층이 있다는 걸 몰랐다. 5층도 기억 저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래가 또 있다니. 계단을 빠져나가자 복도가 나타났다. 모든 게 하얀색이었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여기가 금지된 실험실입니다."

에리카가 손을 들었다. 벽에 설치된 생체 인식 패널이 빛났고,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린은 숨을 멈췄다.

유리 캡슐들이 줄지어 있었다. 정확히 27개. 그 안에는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사람들. 기억 저주의 피해자들. 아니면 '자기 저주'의 피해자들.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린이 한 캡슐 앞에서 멈췄다. 그 안의 사람을 본 순간, 뭔가 떨렸다. 손가락이 경직되고, 호흡이 짧아졌다.

"아, 그 사람이요?" 에리카가 옆에 섰다. "세 번째 피험자. 3년 전 기억 저주로 들어왔습니다. 이름은... 아, 당신이 기억 차단 때문에 못 보겠네요."

린은 그 얼굴을 봤다. 누군가 친숙한. 그런데 기억이 흐릿했다. 에리카의 기억 차단이 작동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좌우로 떨리며 움직였다. 그 얼굴의 주인은... 남학생이었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뭔가가 밀어내렸다.

"당신도 흥미롭습니다." 에리카가 벽의 모니터를 켰다. 그 위에는 데이터들이 떴다. 뇌파 그래프, 기억 활동도, 생체 신호 기록들. "기억을 지우면서 동시에 기억을 읽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정말 드물어요."

"그런데 당신은?" 에리카가 린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호기심이 아니었다. 수집욕이었다. "당신은 능력이 강화됐어요."

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에리카가 다른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논문 더미와 실험 기록들이 있었다. 그녀는 한 권의 보고서를 꺼냈다. 표지에는 '자기 기만 마법: 자기 거부감에서 비롯된 저주 현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기 저주는 외부의 저주사가 시술하는 게 아닙니다. 피험자 자신의 무의식이 만드는 거예요."

린의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들이 움찔거렸다.

"당신은 천재였어요. 정말 뛰어난. 그런데 그 천재가 되는 것이 싫었던 거다."

에리카의 말이 린의 뇌에 박혔다. 천재. 싫었다. 그 단어들이 서로 충돌했다. 자신이 정말로 천재였나? 그리고 정말로 그걸 싫어했나?

그 순간이었다.

총성.

세 발. 연달아.

에리카의 어깨를 스친 총알이 벽을 부숴버렸다. 카인이 문 너머에서 나타났고,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단호했다.

"린. 나와."

하지만 에리카가 손을 들었다. 실험실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완벽한 어둠.

그 안에서 린은 자신의 기억 조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논문의 글자들이 흐릿해졌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글씨처럼. 에리카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왜 당신은 천재가 되는 것이 싫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외쳤던 말.

*'날 잊어 줄래?'*

린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까 에리카가 뭐라고 했더라... 논문 제목이... 자신의 이름이... 하지만 손가락 끝으로만 닿을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물감을 문지르듯이.

카인의 손이 어둠 속에서 린을 잡았다. 그의 기억 강화 능력이 발동했고, 어두운 복도가 희미하게 빛났다. 카인이 린을 끌었다. 계단을 올라가고, 복도를 뛰고, 여러 층을 거쳐 올라갔다.

그리고 3층 복도에서 멈췄다.

선생님이 서 있었다.

미스터 K.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눈빛이 흔들렸다.

"린..."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해. 난 너를..."

린은 손을 뻗었다. 기억을 읽으려고. 그의 기억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그 감정들이 린의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하지 마."

선생님이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복도를 따라 빠르게 도망쳤다.

린이 손을 내렸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뭔가를 알고 있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아니, 자신이 저주를 건 이유에 대해서. 그 죄책감 어린 눈빛이 가장 무서웠다. 선생님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알고 있었다.

"린." 카인이 그의 팔을 잡았다. "움직여. 여기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뇌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에리카의 목소리가 계속 반복됐다.

*'왜 당신은 천재가 되는 것이 싫었을까요?'*

기억을 되찾는 게 정말 원하는 건가? 아니면 이 흐릿함 속에서 영원히 숨고 싶은 건가?

"카인." 린이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뭘 알고 있어?"

"지금은 묻지 마.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카인이 린의 팔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의 기억 강화 능력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어서, 어둠 속에서도 주변이 희미하게 보였다. "에리카의 추적 드론들이 이 층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미 2대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움직이고 있어."

린은 비로소 움직였다. 카인을 따라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메탈 계단을 울렸다.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뒤를 돌아봤지만, 선생님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3층을 벗어나 2층에 도착했을 때, 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시온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린은 무의식적으로 받았다.

"린, 지금 어디야?" 시온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안에 긴장이 묻어났다. "카인이 너를 데리고 이동 중이지?"

"어떻게 알았어?"

"기억 감지. 카인의 기억 강화 능력이 켜져 있으면 감지된다. 그리고 에리카 박사의 드론 신호도 감지됐어." 시온이 한 숨을 내쉬었다. "기억 관리국이 아카데미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바뀌었다는 거야?"

"당신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됐다는 것. 기억 관리국은 너를 통제 대상으로 보고 있고, 에리카는 너를 연구 대상으로 보고 있고, 그리고..." 시온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는 너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 하고 있어."

"누군가? 재윤?"

"재윤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위층의 누군가. 아마도..."

통화가 끊겼다.

린은 화면을 봤다. 신호가 없었다. 기억 관리국의 신호 차단이었을 것이다.

카인이 린의 팔을 놓았다. 비상계단 창문을 통해 밤하늘이 보였다. 아카데미의 야경등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1층으로 가서 밖으로 나가자." 카인이 말했다. "일단 아카데미 밖에서 생각해야 한다."

"기억 관리국이 밖에도 있을 거야."

"그래도 에리카의 실험실보다는 낫다." 카인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1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린과 카인은 발을 멈췄다.

"이쪽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 관리국의 요원으로 보였다. "린이 이 층에 있는 것으로 감지됐어."

카인이 즉시 린의 손을 잡았다. 다시 위층으로. 하지만 위층에서도 발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도 움직임이 감지돼!"

포위됐다.

린이 생각했다. 빠르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까? 기억을 읽어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기억이 흐릿해진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현재의 기억이 1~2시간 사라진다.

린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까 에리카가 뭘 말했지? 논문이 뭐였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적혀 있었지?

기억이 없었다.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물감을 문지르듯이.

"린?" 카인이 그를 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무언가를 감지한 표정이었다. "너... 기억이 사라졌어?"

"능력을 쓰면 현재 기억이 사라진다고 했잖아."

"그런데 너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넌 지금 뭘 기억하고 있어?"

린이 입을 열려다 멈췄다. 자신이 뭘 기억하고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만 닿을 수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여기야! 2층에서 3층 사이!"

카인이 린을 끌었다. 하지만 이번엔 계단이 아니라 옆의 복도로. 학생들의 기숙사 복도였다. 문들이 양옆으로 나열되어 있었고, 거의 모두 닫혀 있었다. 밤 11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쪽이야!" 카인이 한 문 앞에서 멈췄다. 손가락으로 잠금장치를 따 냈다. 기억 강화 능력으로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을 극도로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이 열렸다.

어둠 속의 기숙사 방.

"미안해." 카인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린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침대 위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여학생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미안합니다!" 카인이 그 학생의 기억을 강화해서 진정시켰다. 학생이 다시 누웠고, 눈이 감겼다. 잘못 기억하도록. 이건 꿈이었다고.

카인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창문 너머를 봤다. 아래층에서 기억 관리국 요원들이 계단을 지나가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쉿." 카인이 손가락을 입에 댔다.

두 사람은 침묵했다. 어둠 속에서. 기숙사 방의 침대 옆 바닥에 앉아서.

아래층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인." 린이 속삭였다. "선생님이 뭘 알고 있어? 정말로."

카인이 옆을 봤다. 그의 얼굴이 어둠에 가려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모른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짜 모른다." 카인이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의 저주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니라는 거야. 내 분석 리포트에도 그렇게 적혔고, 에리카도 너한테 그 말을 했고, 그리고 선생님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거지."

"그럼 내가 나 자신을 저주했다는 건데."

"맞아."

카인의 대답이 침묵처럼 들렸다.

창문 너머로 아카데미의 야경이 보였다. 거대한 탑. 그 안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자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저주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기억을 지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비밀을 아카데미는 감싸고 있었다.

린이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들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카인의 손이 그 손을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현재의 온기.

"만약에..." 린이 천천히 말했다. "만약에 내가 그 기억을 되찾으면... 내가 정말로 나 자신을 저주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럼 난 뭐가 될까?"

카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린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 온기가 린의 떨림을 천천히 멈춰세웠다.

"그건... 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순간, 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시온이 아니었다.

노아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두려워하는 톤이었다.

"린... 빨리 나와. 지금... 재윤이 기억 저주 시술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 대상이..."

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대상이 너야."

---

린의 혈액이 얼었다.

기억 저주. 그것도 지금. 그것도 자신을 대상으로.

"뭐라고?"

"기억 보관소에 있는 저주 파일이 활성화됐어. 재윤이 뭔가를 했다. 에리카의 드론 신호 감지로 아카데미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탄 거 같아. 그리고 현재 신호 기반으로는... 넌 3시간 안에 모든 기억을 잃을 거야."

린이 손가락을 구부렸다. 구부려도 구부려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기억을 잃는 것.

또 다시.

이번엔 영원히.

카인이 이미 일어나서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었다. "3시간이면 충분해. 우린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는 게 정말 원하는 건가? 아니면 이 흐릿함 속에서 영원히 숨고 싶은 건가?

자신이 천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천재가 되는 게 싫어서 자신을 저주했다는 것.

그런 기억이 돌아오면...

자신은 누가 될까?

"린!" 카인이 소리쳤다. "나와! 지금!"

그 순간, 아카데미 전체에 비상벨이 울렸다.

비상벨의 울음이 린의 선택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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