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실의 형광등이 윙윙거렸다. 린은 천장을 바라보며 카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따뜻했다.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자기 저주."
시온의 말이 맴돌았다.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니. 분명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그래야 피해자인 거고, 그래야 도망칠 이유가 있다.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그 순간, 세상이 반으로 갈렸다.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는 문장이 뇌를 관통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카인의 손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이 그 온기를 밀어내려고 했다. 지금 이 손을 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지금 자살할 생각 중이야."
카인의 손이 경직됐다.
"농담이야."
거짓말이었다. 반은.
의무실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인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폴더를 꺼냈다. 기억 관리국 공식 문서였다. 빨간 스탬프로 '기밀'이라고 찍혀 있었다.
"이거 봐야 해."
"뭐야? 너 감시자 맞네. 나한테 증거 자료까지 보여주다니."
"감시가 아니라 보호야.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넌 알아야 해."
린은 폴더를 열었다.
**[린 대상자 저주 분석 리포트 - 기억 관리국 기술 담당관 카인]**
**저주 시술자: 외부 요인이 아닌 대상자 자신일 가능성 89.7%**
**근거:** - **저주 패턴 분석**: 기억 소거가 일반적인 외부 시술형(무작위 편집)과 달리,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 '자신의 정체성' 중심으로만 타겟팅됨. - **마법 흔적**: 저주 흔적에서 '자기기만 마법(Self-Deception Hex)'의 특성 검출. 이는 대상자의 거부감이 강할수록 강화되는 형태. 외부 시술자가 이 정도 정밀도로 시술하려면 대상자의 내면을 완벽히 파악해야 함. - **기억 소거 범위**: 능력, 정체성, 관계 기억만 삭제. 기초 지각(언어, 운동능력)은 보존. 이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자아'를 선별적으로 거부하는 패턴.
**결론**: 피해자이자 가해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지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글씨가 흔들려 보였다. 손가락이 종이를 뚫을 것 같았다.
"내가... 날 저주했다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확정은 아니야."
린은 폴더를 내팽개쳤다. 종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왜 이런 걸 보여줬어? 내가 나를 미워하는 피해자라는 게 더 낫지 않아?"
"너한테 진실을 줄 의무가 있어."
"의무? 넌 기억 관리국 요원이잖아. 날 감시하려고 이 정보를 보여주는 거야. 내가 자살할 생각을 하게 만들려고."
카인은 일어섰다. 등을 돌렸다가 다시 린을 바라봤다.
"날 따라와."
"싫어."
"따라와."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린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직도 기억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노아의 기억을 읽은 후로 자신의 현재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안 간다.
카인이 팔을 잡았다. 그대로 끌고 나갔다. 의무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중앙탑의 비상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두 층, 계속. 린의 숨이 차올랐다.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카인의 손은 놓지 않았다.
옥상 문이 열렸다.
밤이었다.
별이 떴다. 무수한 별들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린은 한 번도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없었다. 도시의 밤하늘에는 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아카데미의 옥상은 높았다. 세상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저 별들도 죽은 거 많아."
카인이 말했다.
"이미 사라진 별인데 우리는 아직도 그 빛을 보고 있어. 죽은 별의 유령을 보면서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어."
"왜 자꾸 죽는 얘기를 해?"
"넌 자꾸 죽을 이유를 찾으니까."
카인이 난간에 기댔다. 린도 기댔다. 둘은 나란히 밤하늘을 봤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린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나 기억 관리국 요원 맞아."
"알아."
"그래도 괜찮아?"
"뭐가?"
"나한테 감시당하는 거."
린은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음이 아니라 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이미 당하고 있는데 뭐. 넌 나를 보호한다고 했지?"
"진심이야."
"진심이라도 감시는 감시야."
카인이 손을 뻗었다. 린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너를 믿어."
"넌 날 믿을 자격이 없어. 넌 나한테 대한 정보 하나도 없잖아."
"기억 관리국 파일에 따르면 넌 피해자야."
"파일이 뭘 알아? 나도 모르는데."
카인이 손을 놨다. 린은 또 다른 손을 쥐었다.
"기억이 돌아오면, 넌 날 잊을 거겠지?"
카인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 모르겠어."
"솔직한 대답이네."
"넌 기억 관리국 요원이잖아. 나한테서 기억 정보를 빼내려고 하는 사람이잖아."
"그래."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이 자꾸 말을 했다.
"나 너한테서 뭘 기대할 자격이 없어. 내가 나를 저주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일 수도 있어. 가해자가 자신을 믿는다는 게 말이 돼?"
카인이 옆을 봤다. 린도 카인을 봤다. 어둠 속에서 카인의 얼굴이 흐릿했다. 하지만 눈은 보였다. 눈에는 뭔가가 있었다. 감정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감시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정보를 모으려고?"
"나는 너를 지키려고."
"같은 말이야."
"아니야."
카인이 난간에서 손을 놨다. 옥상 가장자리에서 한 발 물러섰다.
"기억 관리국은 너를 데이터로 본다. 기억 저주 현상의 표본. 하지만 나는..."
카인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침묵이 길어졌다. 린은 카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무언가를 결정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너를 지키고 싶어."
카인이 마침내 말했다.
"그게 내 일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순간, 하늘이 울렸다.
드론이었다.
적색 조명을 깜빡이며 옥상 상공에 나타났다. 작은 기계였다. 카인의 손가락만 한 크기의 구체. 그 표면에서 빛이 나왔다.
"뭐야?"
린이 물었다.
"기억 관리국 감시 드론. 아니... 다른 거야."
카인이 빠르게 말했다.
"에리카다."
드론에서 빔이 나왔다. 붉은색 레이저가 린의 뇌 쪽을 향했다. 린이 움직이려 했을 때, 통증이 폭발했다.
뇌 안쪽에서 무언가가 갈렸다.
"아악!"
린이 쓰러졌다. 무릎이 옥상 바닥에 부딪혔다. 눈앞이 하얗게 물렸다.
"뭐하는 거야!"
카인이 소리쳤다. 손을 들어 드론을 때리려 했다. 하지만 드론은 재빠르게 상승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왔다. 또 다른 각도에서 빔을 쐈다.
린의 척추가 경련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기억이 흔들렸다. 뇌에서 무언가가 밀려나가는 느낌.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린? 그게 맞나. 진짜 이름은 뭐더라.
손가락이 타인의 손처럼 경련했다. 팔다리가 자신의 통제 밖으로 움직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기분. 자신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뭐하는 사람이었나. 왜 여기 있나.
"카... 카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도.
공포가 밀려왔다. 죽음보다 끔찍한 공포. 자신이 자신이 아니 되어가는 느낌.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났다.
"흥미로운 피험자네요. 기억 저주와 기억 조작 능력을 동시에 지닌 사례는 처음 봅니다."
에리카 박사였다.
"즉시 중단해!"
카인이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규정을 어기고 있어요. 기억 관리국의 승인 없이..."
"저는 승인을 받았습니다. 직속 상관의."
드론이 다시 내려왔다. 더 가까워졌다. 레이저가 더 강해졌다.
린은 손을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카인을 밀어냈다. 기억 조작 능력이 발동하려 했다. 드론의 기억을 읽고 조작해서 이 공격을 멈추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름을 잊었다. 나이를 잊었다. 어제가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카인이라는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얼굴도, 자신의 목소리도, 자신이 좋아하던 것도, 자신이 싫어하던 것도 전부 사라졌다. 오직 현재의 고통과 끝없는 공허만 남았다.
"아악!"
린이 비명을 질렀다.
카인이 린을 안았다. 린을 덮으면서 자신의 등을 드론에 노출했다. 등에 레이저가 맞았다. 카인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뭐해! 도망쳐!"
린이 소리쳤다.
"싫어."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에서. 매우 가까워서.
"난 너를 놔줄 수 없어."
드론이 다시 상승했다. 그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그 순간, 옥상 출입구에서 불이 튀었다.
누군가가 드론을 맞혔다. 드론이 떨어졌다. 옥상 바닥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꺼져, 에리카. 규정 위반이 맞아."
선생님(미스터 K)이었다. 손에는 기억 봉인 장치가 들려 있었다. 파란색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드론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선생님은 옥상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드론이 상공에 떠올랐을 때부터 여기 있었을 것이다. 신호를 감지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거나.
"이건 아카데미 내 규정 위반입니다. 기억 관리국 직속 상관이라도..."
스피커에서 에리카의 목소리가 끊겼다.
선생님이 기억 봉인 장치를 드론에 가져다댔다. 드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침묵이 내려왔다.
선생님이 린과 카인을 바라봤다. 손으로 드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부수었다. 기계 부품들이 옥상 바닥에 흩어졌다.
"넌 이제 더 이상 옥상에 올 수 없어."
선생님이 린에게 말했다.
"기억 관리국이 너를 노리고 있어. 에리카는 특히 위험해.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뭐야?"
린이 물었다. 기억이 아직도 흐렸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하지만 이 사람(선생님)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전에 본 적이 있다. 여러 번. 중요한 순간들에.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리고 기억 관리국 내에서 에리카의 권력이 커지고 있다. 그녀는 자기 저주 현상을 연구하고 있어. 너처럼 자신을 저주한 피험자들을."
"그러니까... 날 연구 대상으로 본다는 거네?"
"그래."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한테서 뭔가 얻으려고 해. 에리카의 파벌은 너의 능력을 통제하려고 한다. 만약 그들이 성공하면..."
선생님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아직 말할 수 없어. 넌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선생님이 카인을 봤다. 카인은 등에 화상을 입고 서 있었다. 옷이 타버렸다.
"넌 기억 관리국에 보고해야 해. 드론 파괴 건과 에리카의 규정 위반."
"하겠습니다."
카인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린은..."
"린은 내가 지킨다. 최대한 오래."
선생님이 말했다.
"그 시간 동안에 넌 기억을 정리해. 넌 왜 자신을 저주했는지. 그 이유를 알 때까지."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린을 일으켜 세웠다.
"넌 의무실로 가.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오늘 밤 일을 누구한테도."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은 린을 떠나지 않았다.
"가."
선생님이 재촉했다.
카인이 옥상을 떠났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린은 혼자 남겨졌다. 아니, 선생님과 함께였다.
"선생님..."
"이 얘기는 누구한테도 하면 안 돼. 시온도, 노아도, 재윤도. 특히 재윤한테는."
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기억 관리국 요원들도. 그들은 너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말을 끝내지 않았다.
"뭐야?"
"이용하려고 해."
선생님이 린의 어깨를 안았다.
"너는 지금 가장 위험한 상태야. 기억이 돌아오면서 동시에 능력이 깨어나고 있어. 그리고 기억 관리국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근데 넌?"
"나도 알고 있어."
선생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 밑에 주름이 있었다. 피로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결연했다.
"그 차이가 중요해."
"뭐가?"
"내가 너를 보호한다는 것과 이용한다는 것의 차이."
선생님이 떠났다.
린은 옥상에 혼자 남겨졌다.
별들이 여전히 떴다. 죽은 별들의 유령들. 그들은 언제 죽었을까. 얼마나 오래전에 사라진 걸까. 그런데도 계속 빛나고 있다.
린도 그렇겠지. 죽은 자신의 유령. 계속 빛나는 척하면서 산다.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에리카 박사를 찾으세요. 긴급 상황입니다!"
"기억 관리국 직속 상관이 도착했습니다!"
"드론 신호 두 개가 더 감지됩니다!"
아카데미가 들썩였다. 혼란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린은 알았다.
이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기억이 돌아올수록, 자신을 지우려는 손들이 더 많아질 거라는 것을.
카인의 손도, 선생님의 손도, 모두가 자신을 향해 있다.
그들이 정말로 자신을 지키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기억을 이용하려는 건지.
그것도 이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뀔 테니까.
선택의 순간이 온다.
천재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평범함 속에서 죽은 척할 것인가.
린은 밤하늘을 봤다. 손을 천천히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별들이 사라졌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이 별을 가릴 때마다 세상이 더 어두워졌다. 마지막 별이 손 안에 갇혔을 때, 린의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