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온의 의심
어둠 속에서 린의 눈이 떠졌다.
천장이 아니었다. 돌벽이었다. 지하 5층의 캡슐 실험실. 선생님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조명 패널만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린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에 힘이 없었다. 뇌가 으깬 고추처럼 욱신거렸다.
'기억석이 뭐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진짜 별로다.'
중얼거림도 힘들었다. 입안이 말라있었다. 린은 천천히 일어나 벽을 짚으며 복도로 나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다. 거울 속 다른 눈빛의 그것. '날 잊어 줄래?'라는 음성. 그리고 선생님의 말. 자신이 캡슐에 누워있었다는 것.
'내가... 죽어있었단 말이야?'
지하 3층 기억 복원팀 사무실의 문을 밀었을 때, 시온은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는 수십 개의 데이터로 뒤덮여 있었다. 기억 파형, 신경 활동 그래프, 저주 시술의 흔적들. 그리고 가운데 크게 써진 한 줄.
**「자기 기만 마법 — 외부 개입 없음」**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완벽했다.
"깨어났군요, 린. 기분은 어때요?"
"뭐 하는 거야?"
"조사예요. 당신의 저주에 대한." 시온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2년 전 저주 발생 당시 아카데미의 모든 기억 능력자를 추적했어요. 범인을 찾기 위해서죠. 그런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시온이 중앙 모니터에 리포트를 띄웠다. 제목은 「린의 저주 사건 — 재분석 보고서」였다.
"당신의 저주는..." 시온이 천천히 말했다. "외부에서 온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린의 숨이 멈췄다. 동시에 뇌가 울렸다. 아주 짧은, 하지만 분명한 고통. 마치 누군가가 린의 두개골 안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카인이 옆방에서 나왔다. 그의 표정은 단단했다. 그는 시온의 리포트를 한 번 훑더니 노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가 들어왔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자기 저주라고?" 노아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불안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시온이 그래프를 가리켰다. "저주는 대상자의 감정 강도에 따라 범위가 결정돼요. 외부 시술자의 경우, 그 감정이 분노나 증오 같은 명확한 정서로 나타나죠. 하지만 린의 저주는..." 시온이 멈췄다. "극도로 복잡했습니다. 분노도, 증오도 아니고. 오직 '거부'만 있었어요. 자신을 거부하는 감정."
그 말을 들으면서 린의 몸이 반응했다. 손가락이 경련했다. 마치 누군가가 린의 신경을 직접 튕겨내는 것처럼. 린은 책상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나뭇결이 손톱에 파고들었다.
카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자기 저주라면 매우 위험한 신호입니다. 외부 저주는 해제할 수 있지만, 자신이 자신을 거부하는 마법은... 자신이 원하는 한 절대 풀리지 않아요."
노아가 일어섰다.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린은 피해자잖아!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문제예요." 시온이 노아를 바라봤다. 미소는 여전했다.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거죠. 린이 스스로를 저주했다면,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니까요."
침묵이 떨어졌다. 무거운 침묵.
린은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자신의 내부에서 갈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자? 가해자? 둘 다? 아니면 둘 다 아닌 건가?
'내가... 날 저주했다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뇌가 또 욱신거렸다. 이번엔 더 강했다. 시야가 흔들렸다. 린은 책상에 손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카인이 재빠르게 나아갔다.
"린, 괜찮아?"
"응... 그냥..."
린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거울 속의 다른 눈빛.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절망했다. 극도로.
'날 잊어 줄래?'
누군가의 목소리가 뇌 안에서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동시에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지금은 가설일 뿐이에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합니다." 시온이 말했다.
노아가 린 옆에 앉았다. 그녀의 손이 린의 팔을 잡았다. 따뜻했다. 하지만 린은 그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뇌 안의 무언가가 자꾸 튕겨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린은 핑계를 대고 나갔다. 아카데미의 상층부로. 기억 보관소 근처의 조용한 복도로. 거기서 혼자 앉아 벽에 기댔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47분. 그 숫자가 보이자마자 린의 뇌는 또 아팠다.
'어? 이게... 뭐지?'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침 8시경에 뭐 했는지 생각이 안 났다. 점심은? 그것도 흐렸다.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있지만, 지난 2시간의 기억이 마치 물에 젖은 사진처럼 번져있었다.
'타인의 기억을 읽으면 자신의 기억이 소실된다고 했는데... 이건...'
린은 지금까지 노아의 기억을 읽었다. 그때는 1~2시간이 흐릿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됐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기억이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뇌에 구멍이 나 있는 것처럼.
'혹시... 선생님이 기억석을 켰을 때?'
그 생각을 하자 뇌가 또 울었다. 린은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땀이 흘렀다. 이번엔 더 많았다. 손이 떨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들렸다. 린은 고개를 들었다.
재윤이었다.
"넌 왜 여기 있어?"
재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었다. 린은 이미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어제 기억 보관소에서 읽었던 재윤의 기억 속에 그 공포가 잔뜩 들어있었으니까.
린은 재윤을 바라봤다. 말하려던 말이 입술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자신도 모르는데.
"그냥... 좀 쉬는 중이야."
재윤이 한 발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옷깃이 헐렁했다. 이전의 우아한 재윤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냥감처럼 보였다.
"넌 왜 돌아와?" 재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대로가 낫지 않냐?"
린은 그 말에 뭔가 깨달았다. 재윤이 두려워하는 건 린의 귀환이 아니었다. 린 자신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것 자체가 재윤에게는 재앙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된 건가?'
그 순간이었다. 뇌가 붕괴했다. 마치 뇌 안의 모든 기억이 동시에 무너지는 느낌. 린은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 입이 떨렸다. 눈앞이 하얘졌다. 시각이 흔들리고 청각이 왜곡되었다. 마치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감각.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발가락까지 저렸다.
"린!"
누군가가 린을 잡았다. 카인이었다. 그의 팔이 린의 등을 감싸안았다. 온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린은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뇌가 너무 아팠다.
"이 능력... 뭔가 이상해..."
중얼거리다가 린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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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의 천장이 너무 하얬다.
린이 눈을 떴을 때, 의사는 이미 기계를 들고 있었다. 뇌파 측정기. 모니터에는 불규칙한 파형이 그려지고 있었다.
"뇌파가 불안정하네요." 의사가 중얼거렸다. "최근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셨나요?"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인이 옆에 앉아있었다. 그의 얼굴은 단단했지만, 눈은 뭔가 다르게 보였다.
의사가 나갔다. 그제야 카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다. 거의 속삭임 수준이었다.
"기억을 조작하면 자신의 기억도 함께 손상된다는 게 기억 관리국의 가설이야."
린이 카인을 바라봤다.
"그게... 뭐야?"
"너처럼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조사하면서 나온 결론이야. 타인의 기억을 건드릴 때마다, 너 자신의 자아도 함께 붕괴된다는 거지. 과도하게 사용하면..." 카인이 멈췄다. "기억 없는 빈 껍데기가 될 수 있어."
린의 손이 떨렸다. 카인이 그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린의 손목을 감쌌다. 맥박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난 너를 감시하는 게 아니야." 카인이 천천히 말했다. "보호하려는 거야. 넌... 매우 위험한 길을 가고 있어."
린은 카인의 눈을 봤다. 거기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진실도 모두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넌... 뭐야?'
그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의무실의 문이 열렸다. 시온이었다. 그의 미소는 여전히 완벽했다.
"네, 린. 혹시 깨어났어요? 다행이네요." 시온이 다가왔다. "사실 우리가 당신에게 물어봐야 할 게 있어요."
"뭔데?"
"당신이 지난 2년 동안 누굴 만났어요?"
린의 심장이 멈췄다.
의무실의 형광등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윙윙거리는 그 음파가 린의 두개골을 울리는 것 같았다.
"지난 2년?"
시온의 미소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완벽함이 오히려 더 끔찍했다.
"네. 당신이 깨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굴 만났어요?"
카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확정적이었다. 시온과 카인 사이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뭐하는 거야, 시온. 지금은 상태 관찰 시간이야."
"상태 관찰이 우리 팀의 역할이니까요." 시온이 카인을 무시하고 린을 봤다. "혹시 기억하지 못해요? 괜찮아요.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이 녀석...'
린은 시온을 보며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제 기억 복원팀 사무실에서 본 파일. '자기 기만 마법 의심'. 그리고 오늘 아침, 시온이 작성했을 분석 리포트.
"기억 복원팀이 뭔가 발견했나?"
시온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사냥감이 덫에 걸렸을 때 사냥꾼의 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네요. 당신은 충분히 똑똑해요, 린. 그래서 더 위험한 거지만." 시온이 한 발 다가섰다. "우리가 발견한 게 뭐냐면요. 당신의 저주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린의 호흡이 얕아졌다.
"무슨... 소리야?"
"자기 저주. 들어봤어요?" 시온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마치 학생에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처럼. "타인의 저주는 외부의 악의로 비롯되지만, 자기 저주는 내부의 거부감에서 비롯돼요. 자신이 자신을 거부할 때. 그럴 때 발생하는 마법이에요."
린은 침을 삼켰다. 그의 입이 말라있었다.
"내가... 스스로?"
"가능성이 높아요." 시온이 의자에 앉았다. 매우 편안한 자세였다. 마치 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듯이. "우리 팀의 카인이 분석해봤는데, 당신의 저주 흔적에는 외부 마력의 침입이 거의 없어요. 대신 내부에서 자신을 거부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어요."
'거부감?'
린은 자신의 뇌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2년 전의 기억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그 빈 공간 속에 무언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인이 입을 열었다.
"이건 추측일 뿐이야, 시온. 자기 저주라는 게 증명된 게 아니야."
"네, 맞아요. 추측일 뿐이죠." 시온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추측이잖아요? 만약 이게 맞다면, 린은 동시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거거든요."
그 말이 린의 가슴을 관통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자신을 거부한 가해자. 그리고 그 거부감에 의해 저주당한 피해자. 둘 다예요." 시온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궁금한 거예요. 당신은 뭔가를 거부했어요? 자신을 거부할 만큼 강한 뭔가를?"
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뭘 거부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기억들은 모두 없었다. 하지만 시온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자신을 거부하는 감정. 자신을 거부할 만큼 강한 뭔가.
'내가... 뭘 거부했어?'
그 질문이 떠오르자 뇌가 울렸다. 마치 누군가가 린의 내부에서 손톱으로 벽을 긁는 것 같은 느낌. 아픔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불편했다. 뭔가 자신의 일부가 거부당하고 있다는 느낌.
의무실의 침대 밑이 쿵 소리를 냈다. 카인이 일어서며 시온을 봤다.
"충분해. 린을 더 이상 자극하지 마."
"자극?" 시온이 일어섰다. "우리는 그냥 진실을 말해주는 거예요, 카인. 당신이 감추려던 그 진실을."
"감춰? 누가?"
"당신들 기억 관리국이 말이야." 시온이 한 발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린의 저주가 자기 저주라면 이건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거든. 그럼 조사할 대상도 없고, 처벌할 대상도 없어. 그냥 불행한 개인의 정신적 붕괴일 뿐이야. 기억 관리국은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자기 저주라는 가설을 은폐하려고 했던 거지."
카인의 얼굴이 굳었다. 시온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뜻이었다.
"그럼 기억 복원팀은?" 카인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넌 뭘 원하는 거야?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시온이 대답했다. 그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진실. 린이 누굴 만났고, 뭘 했고, 왜 자신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카데미의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린이 피해자라면, 그 피해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니까."
"그건 기억 복원팀의 역할이 아니야."
"맞아요. 우리의 역할은 저주 피해자들을 돕는 거죠. 그리고 린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을 찾아주는 거예요." 시온이 카인의 눈을 똑바로 봤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시온이 린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움직임은 천천히, 의도적으로 느렸다.
"내일 오후 3시. 지하 3층 사무실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할 거예요. 당신의 기억을 더 깊이 파고들어갈 거고요. 준비해 두세요."
시온이 의무실을 나갔다. 그 뒤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카인이 린의 옆에 앉았다. 이번엔 의자를 끌어당겨 매우 가깝게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거의 없었다.
"넌 시온의 말을 믿지 마."
"뭘... 믿으라고?"
"자기 저주라는 게 너를 정의한다는 거. 넌 피해자야. 뭐가 됐든 넌 피해자야." 카인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있었다. 거의 절박함에 가까운. "그리고 난 너를 보호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야."
"보호?"
"기억 관리국에서는 너 같은 능력자들을 위험 요소로 본다. 특히 자기 저주 케이스라면 더욱이야. 왜냐하면 자신을 거부하는 마음이 다시 깨어날 수 있거든. 그럼 또 다시 저주를 걸 수도 있고." 카인이 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린의 손목을 감쌌다. 맥박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난 너한테 가까이 있는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린은 카인의 손을 봤다. 따뜻했다.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졌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 안의 근육이 경직됐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린의 머리가 또 울렸다. 이번엔 전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뭔가가 깨어나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기억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카인과 대화하던 몇 분간이 마치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사라졌다.
'또... 또 빠졌다?'
린은 휴대폰을 들었다. 오후 8시 12분. 어느 사이에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지난 1시간 25분의 기억이 불분명했다. 의무실에 누워있던 건 기억난다. 카인이 손을 잡고 있던 건 기억난다. 시온이 뭔가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그 사이의 대화 내용은?
'뭐라고 했지? 시온이 뭐라고 했어?'
린은 자신이 뭘 말했는지, 카인이 뭘 말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린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린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내가... 뭔가를 거부했어?'
그 생각이 자꾸만 돌아왔다. 마치 물 위의 나뭇잎처럼. 계속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의무실의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여전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뇌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린은 깨달았다. 자신이 뭔가를 거부했다면, 그건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거부했다는 뜻이라는 것.
즉, 자신 안에 두 개의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는 지우고 싶어 하고, 하나는 살고 싶어 하는.
그리고 지금 깨어나는 것은, 아마도 죽으려던 그 자신일 수도 있었다.
린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거울이 없었지만, 자신의 손가락이 느껴주는 얼굴의 윤곽은 낯설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뺨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이게... 내 얼굴이야?'
카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조차 이제는 두렵게 느껴졌다.
내일 오후 3시. 시온이 기억 조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기억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아침 8시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이 흐릿해졌다. 이 속도라면 내일이 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수도 있다.
린은 휴대폰 화면을 켰다. 오후 8시 12분. 지난 1시간 25분 동안 뭘 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이 시간대에 기억이 빠졌다. 그 전 시간대도 마찬가지였다. 점심때도. 아침도.
'몇 시간 단위로 사라지고 있다.'
린은 휴대폰의 메시지 기록을 열었다. 오후 6시 47분에 노아에게 받은 메시지가 있었다. "어디 있어? 걱정돼." 그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답장은 오후 7시 15분.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 그 사이 28분의 기록은 있는데, 그 시간에 뭘 했는지 기억이 없었다.
더 이상한 건, 오후 7시 15분 이후의 기록이었다. 오후 8시 12분까지 57분의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뭘 했는지 완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의무실에 있었던 건 알겠는데, 그 시간에 누가 뭐라고 했는지,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
그 깨달음이 들자 공포가 밀려왔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 린은 휴대폰을 가슴에 안았다.
기억이 사라진다. 계속 사라진다. 몇 시간 단위로.
내일 오후 3시까지 몇 시간이 남았나. 약 19시간. 이 속도라면 내일이 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수도 있다. 아니, 벌써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린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거울 속의 다른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은 절망했다. 극도로. 그리고 그 눈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날 잊어 줄래?'
누군가의 목소리가 뇌 안에서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동시에 완전히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