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 4층 계단을 내려가며 린은 손가락을 꼭 쥐었다. 발광 석영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피부를 비추고, 그 위에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노아가 한 발 앞에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 뒤를 시온과 카인이 따라왔다.

"정말 괜찮은 거야?" 노아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선생님이 말한 걸 들으면..."

"들은 건 뭐니?" 린이 먼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방금 전 복도에서 린만 따로 붙잡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차라리 잊고 살아.*

그 말이 자꾸만 되돌아왔다.

시온이 손전등을 켰다. 불빛이 복도의 끝을 비추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문양 중앙에는 작은 기억석이 박혀 있었다.

"기억 보관소의 진입구야." 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아카데미 상층부의 감시가 활성화돼 있어. 3분 안에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린이 카인을 바라봤다. 어제 지하 3층에서 본 그 남자. 낯설면서도 극도로 익숙한 얼굴.

"넌 왜 이러는 거야?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거야, 아니면 감시하는 거야?"

카인이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꽤 길었다.

"둘 다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기억 관리국의 비공식 요원이야. 아카데미에 잠입해서 너 같은 위험한 능력자들을 감시하는 게 내 임무야."

린의 호흡이 한순간 멈췄다. 노아가 놀라 카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카인이 계속했다. "너는 그냥 위험한 능력자가 아니야. 그 기억 저주의 대상자야. 그리고 그 저주가 얼마나 강한지 알면...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질 거야."

"그래서 도와주는 거야?"

"그래." 카인이 기억석에 손을 올렸다. 파란빛이 흘러나왔다. "너는 자기 기억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기억 관리국에서 봤던 사람들...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알거든."

기억석이 울렸다.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시온이 한 발 물러섰다. "이건 너무 위험해. 만약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면..."

"그럼 빨리 들어갔다 나오면 돼." 카인이 손을 들어 시온을 제지했다. "넌 여기서 복도를 지켜. 누가 오면 신호해."

"나도 들어갈게." 노아가 말했다. "린을 혼자 두면 안 돼."

린이 노아의 손을 잡았다. 노아의 손이 따뜻했다. 어제 노아의 기억을 읽었을 때, 그 안에 있던 부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혀진 사람들. 자신처럼.

철문 너머로 들어가자,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기억 보관소였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선반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수천 개의 기억석들이 놓여 있었다. 각각의 석질에서는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의 색깔이 모두 달랐다. 어떤 건 붉고, 어떤 건 푸르고, 어떤 건 검었다.

"이게 다..." 노아가 숨을 헐떡였다.

"저주당한 사람들의 기억들이야." 카인이 말했다. "완전히 소거된 건 아니고, 분리된 거야. 기억 저주는 단순히 지우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거거든. 대상자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 그 거부감이 강할수록 저주가 강해져. 그걸 자기 기만 마법이라고 부르는데..."

카인이 선반 사이를 헤쳐나가며 기억석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끔씩 카인의 손이 특정 기억석에 닿으면, 그 석질의 정보가 공중에 투영되었다. 이름, 저주의 날짜, 강도.

린은 투영된 정보들을 흘깃 봤다.

**대상자: 김준호 - 저주 이유: 자기 기만 - 강도: 중상위**

**대상자: 박수진 - 저주 이유: 불가능한 현실 거부 - 강도: 최상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처럼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 자신처럼 기억을 잃은 사람들.

"여기 있어." 카인이 한 기억석 앞에 멈춰섰다.

화면에 띄워지는 정보를 린이 읽었다.

**기억 저주: 대상자 미상. 시술자 미상. 강도: 최상위. 특이점: 자기 기만 마법 의심됨.**

"강도 최상위. 시술자 미상. 대상자..." 카인이 화면을 응시했다. "미상?"

자기 기만 마법.

린의 뇌에서 뭔가 울렸다. 그건 마치 오래전에 어디선가 본 단어 같았다. 아니, 단어라기보다는 감각. 그런 감각.

"이게 너야." 카인이 말했다.

그 순간 린은 깨달았다. 기억석의 정보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것. 시술자가 미상이라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혹시 자신이 시술자인가.

혹시 자신이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건가.

그 생각이 뇌를 관통하는 순간, 경보음이 울렸다.

**삐 삐 삐 삐—**

붉은 불이 천장에서 반짝거렸다.

"나가!" 카인이 외쳤다. "감시 드론이 감지했어!"

셋이 달렸다. 선반들 사이를 헤치며 계단으로 향했다. 린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노아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철문을 빠져나가자, 복도의 불빛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쪽이야!" 시온이 복도 끝에서 손짓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순간, 복도의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재윤이었다.

"린!" 재윤이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 아닌 다른 감정이 떠 있었다. 공포. "넌 뭐하는 거야!"

재윤이 손을 내밀었다. 마치 린을 잡으려는 듯.

본능이었다.

린이 재윤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재윤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이건 노아의 기억과 달랐다. 노아의 기억은 따뜻한 슬픔이었다면, 재윤의 기억은 차가운 것이었다.

기억 속에서 린은 보았다.

천재 린이 돌아오는 것을 바라는 재윤의 눈빛.

그리고 동시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재윤의 눈빛.

그 두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뒤엉켜 있었다.

*돌아와 줄래? 아니, 돌아오지 마. 제발 돌아오지 마.*

그 감정의 파도가 린을 휩쓸었다. 린이 손을 놓았다. 재윤의 기억에서 벗어났다.

"미안해." 재윤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넌 돌아오면 안 돼."

그 말이 계단에서 울렸다.

카인이 린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가!"

셋이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는 여전히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지하 3층으로 나가자, 복도는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더 무서웠다.

"사무실로." 시온이 말했다.

그들이 사무실에 들어가자, 시온이 문을 닫고 특수한 기억석을 터치했다. 경보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차단했어. 감시 시스템을." 시온이 말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거야. 5분 안에 뭔가 해야 한다."

린은 여전히 재윤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 양면적인 감정. 그 절박함.

*돌아오지 마.*

왜 그럴까. 왜 자신이 돌아오는 걸 원하면서도, 동시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을까.

"너 괜찮아?" 노아가 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린은 노아를 바라봤다. 그 순진한 눈.

"난... 뭔가 이상해." 린이 말했다. "재윤의 기억에서 본 건데... 내가 돌아오는 걸 두려워해.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봐."

"그건 당연하지." 카인이 말했다. "넌 천재니까. 돌아오면 모든 게 바뀔 거야."

"아니야." 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재윤의 기억에는... 내가 돌아오면 안 된다는 거절감이 있었어. 그냥 경쟁심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거."

시온이 모니터를 켜고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화면에 기억 저주의 메커니즘에 관한 자료가 떠올랐다.

**기억 저주: 자기 기만 마법의 메커니즘**

**1. 대상자의 깊은 자기 거부감으로부터 시작**

**2. 그 거부감이 강할수록 저주의 강도가 증가**

**3. 외부 시술자가 아닌 경우,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 절대 풀리지 않음**

린의 눈이 커졌다.

자기 거부감.

선생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차라리 잊고 살아.*

"이 기억들이 뭐야?" 린이 화면을 가리켰다.

"기억 저주의 이론이야." 시온이 말했다. "에리카 박사가 쓴 논문인데, 자기 저주는 피험자의 깊은 거부감에서 비롯된다고 했어. 너 같은 경우는..."

"내가 나 자신을 거부했다는 건가?" 린이 중얼거렸다.

경보음이 다시 울렸다.

"나가!" 카인이 외쳤다.

그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던 그 순간, 린의 뇌에서 뭔가가 울렸다.

그건 기억이 아니었다.

그건 감각이었다.

거울 속의 다른 눈빛. 그 눈빛이 말했던 말.

*날 잊어 줄래?*

린은 멈춰 섰다. 복도의 한가운데에서.

"린!" 노아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뇌 한구석에서 뭔가가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건 무엇인가.

그건 누구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건 왜 자신을 잊어 달라고 했을까.*

노아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다시 그녀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부모의 얼굴. 따뜻한 손. 사라진 기억들.

"가!" 카인이 다시 외쳤다.

린은 노아의 손을 쥐고 달렸다. 뒤에서는 경보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온과 카인이 앞서 달렸다.

계단을 올라가며 린은 계속 생각했다.

*자기 기만 마법.*

*자신을 거부하는 마법.*

그렇다면 자신을 거부한 건 누구인가. 자신이 된 다른 자신인가.

아니면—

"여기!"

카인이 옆 복도로 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들이 옆 통로로 들어가는 순간, 주 복도에서 기억 관리국의 요원들이 지나쳤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인물들. 그들의 눈은 기계처럼 차가웠다.

"숨어." 시온이 속삭였다.

그들은 통풍구 아래 어두운 틈새에 몸을 숨겼다. 린은 노아 옆에, 카인은 시온 옆에 웅크렸다.

경보음이 점점 멀어졌다.

5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났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은 채 기다렸다.

마침내 카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괜찮아."

그들이 나왔을 때, 아카데미는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억 보관소에서 뭘 봤어?" 시온이 물었다.

린은 화면에 떠올랐던 글귀를 다시 떠올렸다.

**특이점: 자기 기만 마법 의심됨.**

"내 저주가... 자기 기만 마법이라고 했어."

"맞아."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외부에서 저주를 당한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저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그건 불가능해." 린이 말했다. "내가 왜 날 저주하겠어?"

"정확히 그 이유를 찾아야 해." 시온이 말했다. "그래야 너는 깨어날 수 있어."

그 순간, 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선생님'이라고 떠 있었다.

린은 잠깐 망설였다가 받았다.

"네, 선생님."

"지금 어디야?"

선생님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아니, 불안했다.

"... 기숙사에요."

"거짓말하지 마. 기억 관리국에서 비상 소집이 떨어졌어. 너한테 뭔가 있는 건가?"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 보관소에 접근했어, 그치?"

그 말에 린의 심장이 철렁했다.

"선생님,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널 지키려고 이 학교에 있는 건데..."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넌 왜 잠자는 개를 깨워."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묻어났다. 보호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막으려는 간절함.

"선생님이 뭘 알고 계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는 선생님의 고민이 가득했다.

"만나자. 지하 5층. 지금 바로."

전화가 끊겼다.

"뭐라고?" 카인이 물었다.

"선생님을 만나야 해. 지하 5층에서."

"지하 5층?" 시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거기는..."

"금지된 구역이야." 카인이 끝을 맺었다.

"그곳에 에리카 박사의 실험실이 있지 않나?" 노아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일어났다. "나 가봐야 해."

"위험해." 카인이 말했다. "지하 5층은 기억 관리국이 직접 관리하는 구역이야."

"그래도 선생님이 부르셨어."

"함정일 수도 있어." 시온이 말했다.

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발걸음이 무거웠다. 기억 보관소에서 본 정보. 자신이 시술자라는 가능성. 그리고 지금 선생님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 모든 게 엉켜 있었다.

기억석 인식 장치를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함정이라면, 지하 5층 진입 전에 무언가를 확인해야 한다. 린은 계단 입구의 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기억석의 위치, 경보 시스템의 흔적, 선생님의 이상한 태도.

"뭐 하는 거야?" 노아가 물었다.

"확인하는 거야." 린이 대답했다. "정말 함정인지."

카인이 린의 옆에 섰다. "기억석 인식 장치는 일반인이 조작할 수 없어. 특수한 권한이 필요해."

"선생님은 그 권한이 있을 거야." 린이 말했다. "그럼 선생님이 날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뭐야?"

"모르지." 카인이 말했다. "하지만 너는 조심해야 한다. 지하 5층은..."

"나도 가." 노아가 말했다. "린을 혼자 두면 안 돼."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 린이 말했다.

노아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도 함께 가고 싶지만, 린이 거절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위험에 빠진 사람을 또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그 절박함. 재윤의 기억에서 읽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노아도 알고 있었다.

"약속해. 돌아와." 노아가 중얼거렸다.

린은 답할 말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1층. 지하 2층. 지하 3층.

기억 복원팀의 사무실 앞을 지났다. 아무도 없었다.

지하 4층으로.

그리고 지하 5층으로.

계단의 끝에는 거대한 금속 문이 있었다. 그 위에는 경고 문구가 빨간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진입 금지. 허가자 외 출입 불가.**

문의 옆에는 기억석 인식 장치가 있었다. 린이 손을 대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선생님이 문 안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치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사람처럼.

"들어와."

린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지하 5층의 내부는 끔찍했다.

하얀 벽. 하얀 바닥. 하얀 천장.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수십 개의 투명한 캡슐이 놓여 있었다.

각 캡슐 안에는 누군가가 들어 있었다.

그들의 눈은 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떨리는 눈꺼풀. 희미하게 나오는 숨.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상태.

"이게... 뭐예요?" 린이 중얼거렸다.

"기억 저주 피해자들이야." 선생님이 말했다. "완전히 소거된 기억 때문에 의식만 남아있지만 정신은 없는 상태. 이 학교가 '도와준다'고 했던 사람들이야."

린은 캡슐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허한 표정.

각 캡슐 옆에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대상자: 이준영 - 저주 이유: 불가능한 미래 거부 - 상태: 기억 완전 소거**

**대상자: 최민지 - 저주 이유: 자신의 선택 부정 - 상태: 기억 완전 소거**

그들도 자신처럼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자신처럼 기억을 잃었다. 그들도 자신처럼 여기 갇혀 있었다.

"왜... 이걸 보여주세요?"

"넌 깨어나면 안 돼." 선생님이 말했다. "넌 절대로 이 상태가 되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해."

"왜요?"

"왜냐하면..." 선생님이 한 캡슐 앞에 멈췄다. "넌 이미 한 번 여기 있었거든."

린의 피가 식었다.

"뭐라고요?"

선생님이 캡슐의 명패를 가리켰다.

**대상자: Lin(린) - 학번 미상 - 상태: 기억 완전 소거 - 입원 시간: 2년 전**

린은 그 명패를 바라봤다.

그리고 캡슐 안의 얼굴을 봤다.

그건 자신이었다.

아니, 자신처럼 보이는 누군가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그 눈빛은 공허했다.

린의 뇌가 거부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이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몸은 반응했다. 손이 떨렸고, 호흡이 얕아졌고, 세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두 개라는 것.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것.

그 깨달음이 뇌를 짓누르고 있었다.

"2년 전에 넌 완전히 소거됐어." 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기억 관리국은 너를 '회복 불가능'으로 판정했다. 하지만 내가 너를 여기서 꺼냈어. 그리고 새로운 신원을 만들어줬어. 평범한 학생 린으로."

"그럼 난... 누구예요?"

"넌 그 캡슐 속의 너야." 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지금의 너야."

린은 캡슐을 만지려고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감각이 터져나왔다.

얼굴을 깍아내는 통증.

뇌를 불태우는 고통.

그리고—

*날 잊어 줄래?*

그 목소리.

그건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 린이 무릎을 꿇었다.

"더 알고 싶으면 안 돼."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나와. 이 기억들을 다시 묻어. 평범하게 살아. 그게 너를 위하는 거야."

하지만 린은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캡슐의 이름표를 다시 봤다.

**대상자: Lin(린)**

그 명패를 읽었다. 그 안의 얼굴을 봤다. 그 공허한 눈빛을 봤다.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공포.

자신이 두 개라는 불가능.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깨달음.

모든 게 명확해졌다.

자신이 시술자라는 것. 자신이 자신을 저주했다는 것. 그 감정이 이제 이해가 된다. 재윤의 기억에서 읽은 '돌아오지 마'라는 절박함. 그것이 지금 대상이 자신이었다는 것.

자신은 누구인가.

지금 여기 서 있는 이 린인가.

아니면 캡슐 안의 저 린인가.

"선생님..." 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진짜 누구예요?"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손에서 기억석이 빛났다.

그리고 지하 5층의 모든 캡슐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흰 빛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다. 각 캡슐의 기억석에서 나오는 빛이 린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 빛이 린의 피부를 지나 뼈를 관통하고, 뇌를 태웠다.

린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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