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본
박준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의료기록 첫 장을 넘기고 있던 그는 날짜를 다시 읽었다. 3주 전의 초진 기록, 그 다음장의 재평가 기록. 같은 환자, 다른 진단.
초기 평가: 의학적 긴급성 높음(Level 1). 좌심실 박출률 18%. 수술 적응 가능.
재평가(이준호 센터장): 의학적 부적응증. 이식 부적절.
박준우는 두 페이지를 나란히 펼쳤다. 병원 대기실의 형광등 아래서 글씨가 떨려 보였다. 손을 내려놨다. 무릎 위에 기록을 펼쳐 놨다.
첫 평가를 작성한 의사는 김윤희 전임의. 그녀는 박민철의 심장 상태를 수치로 정리했다. 박출률, 폐동맥 압력, 신장 기능, 간 기능—모두 이식 대기 기준을 만족했다. 마지막 항목에 초록색 펜으로 체크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장.
이준호 센터장이 쓴 재평가 기록에는 의료적 수치가 없었다. 대신:
"의학적 판단상 현 환자는 수술 후 생존율 예측 불가. 사회적 재활 가능성 낮음. 추천하지 않음."
'생존율 예측 불가'? 초기 평가에서는 예측 가능했는데?
'사회적 재활 가능성'이라는 항목이 왜 의료기록에 있는가?
박준우는 두 기록 사이의 공백을 재려고 했다. 14일의 간격. 14일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는가. 환자의 상태? 아니다. 의료기록에는 그 기간 심장 수치가 오히려 안정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인가.
박준우는 의료기록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모든 글씨를 하나하나 따라갔다. 초기 평가의 환자 정보 섹션. 나이 44세, 직업 기재: 조기퇴직 노동자, 가족 구성: 독신(아들 1명), 소득 수준: 저소득층.
저소득층.
그 단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의료기록에 왜 소득 수준이 기재되어 있는가? 심장이식의 적응증을 결정하는 데 소득이 무슨 상관인가?
박준우는 재평가 기록을 다시 봤다. 거기에도 같은 정보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옆에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조기퇴직 노동자. 독신. 저소득층."
붉은색 펜. 이준호 센터장의 펜이다. 병원에서 그것으로 유명하다. 붉은색 펜으로 줄을 치면, 그것이 최종 결정이다.
박준우의 호흡이 빨라졌다. 의료기록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기록을 내려놨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질병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선택이었다. 의료진의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생명을 평가하는 선택.
박준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검색창으로 향했다. "의료사고 변호사". 엔터. 화면 위에 수십 개의 로펌 이름이 떴다. 그는 맨 위의 사무실에 메시지를 보냈다.
"의료 판단 오류로 인한 환자 사망 사건입니다. 심장이식 부적응 판정 후 3주 만에 사망했습니다. 의료기록 상 판정 근거가 없습니다. 상담 가능한지 확인해주세요."
메시지를 보낸 후 박준우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기실의 형광등이 계속해서 윙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의료기록의 한 장을 다시 들었다. 붉은 펜으로 그은 밑줄이 보였다. 조기퇴직 노동자. 독신. 저소득층.
누가 이렇게 판단했는가.
누가 아버지의 생명을 이렇게 평가했는가.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 법률사무소 정우.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일 오전 10시 상담 가능합니다. 의료기록과 입원 당시의 모든 서류를 지참해주세요."
박준우는 화면을 끄지 않고 그것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의 떨림은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명확한, 방향이 정해진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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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환자실 6호실.
박민철의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수치판에 SPO2 87%. 위험 수준. 간호사 이은희는 산소 농도를 85%에서 100%로 올렸다. 환자의 숨이 가빠졌다. 가슴 위로 오르내리는 호흡의 폭이 커졌다.
"선생님, 환자 상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최태호 부센터장이 회진 중에 들었다. 그는 박민철의 가슴 청진을 했다. 폐음이 지글거렸다. 폐부종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기록 차트를 봤다. 3주 전 폐부종 위험 경고에서 시작된 악화 곡선이 계속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뇨제 용량을 다시 조정하세요. 그리고..."
최태호는 말을 멈췄다. 뒤에 서 있는 이준호 센터장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박민철 환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심장 초음파를 다시 하겠습니다. 박출률 재측정이 필요합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마치 기계가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간호사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초음파 기계를 가져왔다. 젤을 박민철의 가슴에 펴 바르고 프로브를 댔다. 모니터에 심장이 나타났다. 좌심실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박출률이 측정되었다. 12%.
12%.
3주 전의 18%에서 더 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더 약해졌다. 펌프질할 수 없는 심장.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일직선이었다.
이준호는 초음파 모니터를 한 번 봤다. 그 다음 환자의 얼굴을 봤다. 박민철의 눈이 뜨여 있었다. 의료진의 움직임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직감일까.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이준호는 눈을 돌렸다. 최태호에게 지시했다.
"강심제를 유지하고, 호흡기 준비를 해두세요. 언제든 상황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고 정확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최태호는 남겨진 차트를 들었다. 박민철의 심장 박출률 수치 옆에 이준호가 쓴 글씨가 있었다. 빨간 펜으로: "부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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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15분. 박민철의 심장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삐─삐─
심박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90에서 75로. 65로. 55로.
"의료진! 환자 심박수 저하!"
간호사 이은희가 외쳤다. 최태호가 뛰어왔다. 뒤를 따라 인턴과 전임의들이 들어섰다. 응급 카트가 밀려왔다. 제세동기 패드를 환자의 가슴에 붙였다.
"200줄 준비하세요. 리드미넷 1mg 정맥주사. 에피네프린 1mg 정맥주사!"
최태호의 음성이 중환자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간호사들이 약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민철의 몸이 경련했다. 심실세동. 심장이 더 이상 혈액을 펌프질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것은 죽음의 시작이었다.
"200줄!"
전기 충격이 박민철의 몸을 관통했다. 몸이 위로 튀어올랐다. 모니터를 봤다. 여전히 평평한 파형. 여전히 죽음의 신호였다.
"에피네프린 추가!"
또 다른 약물이 주사되었다. 또 다른 충격. 또 다른 실패.
최태호는 시계를 봤다. 11시 32분. 이미 20분이 지났다. 뇌 손상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약물을 추가하고, 충격을 반복했다. 하지만 모니터는 응답하지 않았다.
11시 45분. 또 다른 충격.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태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계를 다시 봤다. 11시 47분. 그리고 의료진들을 돌아봤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끝났다는 것을.
최태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을 기록하겠습니다. 밤 11시 47분."
그는 박민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심장이 더 이상 혈액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손가락은 아들의 손을 잡지 못할 것이었다. 그 손은 더 이상 어디도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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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이준호는 병원에 있었다. 12층 사무실이 아닌, 중환자실 구석의 의료진 대기실. 그는 박민철의 사망 보고를 받았을 때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최태호가 들어와 "박민철 환자가 새벽 00시 47분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준호는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결과였다는 뜻이었다. 심장이식을 거부한 순간부터, 박민철의 죽음은 필연이었다. 의료진의 선택이 환자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것이 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이제 그는 박민철의 의료기록을 다시 펼쳐 보고 있었다. 초기 평가부터 재평가, 그리고 최종 악화 기록까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한 환자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거였다.
증거.
그 단어가 그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쓴 "부적응"이라는 두 글자를 봤다. 그 옆의 빨간 펜 밑줄. 조기퇴직 노동자. 독신. 저소득층.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다. 떨린 것이 아니다. 그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다. 감정은 약함의 신호였다. 의사는 약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은.
그는 의료기록을 닫았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새벽의 서울 하늘이 검었다. 불빛들만 어둠 속에서 떠 있었다.
박민철은 죽었다.
그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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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박준우는 아직도 의료기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밤을 새웠다. 병원 카페에 앉아서, 그 기록을 몇십 번이나 다시 읽었다. 처음 평가와 재평가 사이의 차이.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의 주치의 최태호 부센터장이었다.
"박준우님, 아버지 환자분이 어제 밤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병원으로..."
박준우는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으로 "법률사무소 정우"를 다시 검색했다. 주소를 복사했다. 강남역 근처. 그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의료기록을 가방에 넣고.
새벽 7시 30분. 그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로펌 앞에 서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의료기록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8시가 되었다. 로펌의 불이 켜졌다. 9시가 되었다. 문이 열렸다.
박준우는 일어섰다. 신발 끈을 다시 묶었다.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을 밀고 들어갔다.
"저는 박준우입니다. 어제 메시지를 보낸."
사무실 안의 변호사 정우진이 그를 봤다. 30대 중반의 남자. 냉정한 표정. 그의 눈에는 수백 건의 의료사고 사건을 본 사람의 피로가 있었다.
"의료기록을 가져오셨나요?"
박준우가 가방에서 기록을 꺼냈다. 정우진이 받아들었다. 그는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처음 평가. 재평가. 그 사이의 공백.
정우진의 눈이 뭔가를 포착했다. 그는 두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
"초기 평가에서는 수술 적응 가능이 맞고..."
그는 손가락으로 재평가의 항목들을 짚었다.
"여기는 의료적 근거가 없다. 이건 의료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입니다."
박준우가 목을 삼켰다.
정우진이 그를 봤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우진이 말했다.
"변화입니다."
박준우의 입술이 떨렸다. 변화라는 단어가 현재형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를 살리지 못하는 변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변화. 그 차이가 무엇인지 박준우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정우진의 눈 속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호를 읽었다.
정우진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강신혜 윤리위원장이신가요? 저는 정우진 변호사입니다. 박민철 환자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의료기록을 검토했는데, 몇 가지 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통화는 3분 30초가 걸렸다. 정우진이 끊고 박준우를 봤다.
"강신혜 윤리위원이 이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신 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도."
박준우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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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12층. 아침 회진.
이준호는 환자들의 침상을 돌았다. 손에는 차트. 얼굴에는 집중. 주변의 의료진들은 그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읽을 것이 없었다. 박민철의 사망은 이미 기록된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의료 통계의 일부일 뿐이었다.
"폐이식 환자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졌습니다."
한 인턴이 보고했다.
"Prednisone을 증량하세요. 내일 CT를 재촬영하겠습니다."
이준호가 차트에 지시사항을 썼다. 그의 필체는 정확했다. 감정의 흔들림 없이. 최태호는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이준호의 눈에는 어떤 불안도 없었다. 최태호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최태호는 입을 다물었다.
회진을 마친 이준호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점심 시간이 아직 멀었다. 그는 컴퓨터를 켰다. 병원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에 접속했다. 박민철의 기록이 그대로 있었다. 그는 마우스로 "사망"을 클릭했다. 시스템에 최종 기록이 입력되는 순간, 박민철은 통계가 되었다.
"완전 폐부전. 예상된 결과."
이준호는 혼잣말을 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 행정실 오세진 원장이었다.
"센터장님, 어제 박민철 환자 건으로 변호사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의료사고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의료윤리위원회에도 고발을 할 예정이라고."
침묵.
"센터장님?"
"알겠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뭔가 다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대응 방안을 준비하겠습니다."
오세진이 말했다.
"의료기록을 정리하고, 법률 자문을 받겠습니다. 센터장님의 결정이 의학적으로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네."
이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것이 떨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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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윤리위원회 회의실. 오후 6시 15분.
회의실의 탁자 한쪽에는 이준호와 최태호가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강신혜, 박유석, 그리고 법률자문 김유진이 앉아 있었다. 김유진은 이 회의를 위해 오세진 원장이 고용한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우진 변호사의 소개를 받은 의료법 전문가였다.
박유석이 회의를 시작했다.
"이준호 센터장님, 박민철 환자의 심장이식 제외 결정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의학적 부적응증입니다. 환자의 나이, 전반적인 건강 상태, 수술 후 회복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심장이식의 성공률이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강신혜가 질문했다.
"초기 평가에서는 수술 적응 가능이라는 결정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의료진의 재평가입니다."
이준호가 답했다.
"저는 추가적인 임상 데이터를 검토하고 판단을 변경했습니다."
김유진이 의료기록을 펼쳤다.
"추가 임상 데이터가 무엇입니까? 의료기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침묵.
"센터장님?"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아주 작게. 하지만 강신혜는 그것을 봤다. 그것은 움직임이 아니라, 흔들림이었다.
"의사의 임상적 판단은 때로 수치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것을 직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김유진이 다시 질문했다.
"의료법 제2조에서는 의료행위를 '질병의 진단, 치료 또는 예방'으로 정의합니다. 의료진의 주관적 판단으로 환자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 그 범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유진이 의료기록에서 한 항목을 지적했다. 빨간 펜으로 그어진 글자들.
"조기퇴직 노동자. 독신. 저소득층. 이것이 의료적 판단 근거입니까?"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준호의 손이 탁자 위에서 떨렸다. 아주 작게. 하지만 모두가 봤다.
그의 손가락은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톱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분노가 아니라, 공포였다. 자신이 한 선택이 이제 빛 속에 드러나고 있다는 공포.
"그것은 환자의 사회적 배경 정보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의료 판단에 참고하는 자료 중 하나입니다."
"참고 자료가 의료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인가요?"
김유진의 질문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렇다면 센터장님은 '누가 살 자격이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한 것 아닙니까?"
이준호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강신혜가 천천히 말했다.
"이준호 센터장님,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의 의료 기술은 정말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생명을 선별하는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의료진입니다. 의사가 아닌 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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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을 나온 이준호는 복도에서 멈춰 섰다. 최태호가 뒤에서 따라왔다.
"센터장님..."
최태호가 말을 걸었지만, 이준호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봤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불빛들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의료진입니다. 의사가 아닌 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신혜의 말이 그의 뇌에서 반복되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받았다.
"이준호 센터장님이신가요? 저는 의료기관평가인증원 조사관 김태현입니다. 박민철 환자 건으로 병원 조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선택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될 때까지, 이 떨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