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7시 30분, 중환자실 복도는 이미 술렁거리고 있었다.
"센터장님 회진 준비 완료했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는 신체를 경직시키는 신호음처럼 전 병동에 울려 퍼졌다. 인턴부터 전임의까지, 모두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재정렬했다. 페이지를 맞추고, 옆사람의 어깨를 곧게 펴고,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마치 군부대의 장교 점호를 기다리는 병사처럼.
이준호가 나타났다.
하얀 의복을 입은 그의 뒷모습은 복도의 형광등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를 최태호 부센터장과 레지던트 3명이 따랐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준호가 입을 열 때까지 침묵은 규칙이었다.
"차트."
한 단어. 손을 펼쳤을 뿐인데 인턴이 벌떡 일어나 차트를 건넸다.
첫 번째 환자. 폐이식 수술 후 3일차인 54세 여성. 산소포화도 94%, 호흡음 정상. 공식적인 기록은 양호했다.
"산소 포화도만 본 건가?"
침묵.
"흉부 X선 재확인했나?"
"네, 센터장님. 어제 오후..."
"어제가 아니라 지금 봐. 지금."
이준호가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누군가 달려가 태블릿을 들고 돌아왔다. 최신 영상. 이준호가 그것을 흘낏 보고 한 문장을 던졌다.
"좌상엽 폐렴 침윤 범위 22% 확대됐다. 항생제 변경. 내일 재촬영."
전임의가 메모했다.
"그리고 중심정맥압을 확인했냐? 저 포화도는 거짓말이다. 심장 부하가 증가했을 것이다."
"어... 센터장님, 심장 수치는 정상 범위..."
"정상 범위는 기계가 판단한다. 난 환자를 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준호는 환자 침상으로 다가갔다. 손으로 환자의 흉부를 만졌다. 불과 3초. 그 후 돌아섰다.
"폐부종 초기 증상. 이뇨제 증량. 저염식으로 변경."
다시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모두가 자신의 판단 오류를 인식했다. 이준호가 본 것과 자신들이 본 것 사이의 거리. 그 거리는 메디컬 스쿨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천재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직관'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최태호는 그것을 '위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환자. 간이식 수술 후 2주차인 62세 남성. 회진표에는 '안정적'이라 적혀 있었다.
"박민철 환자는?"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최태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준호가 명함처럼 던진 그 이름은 복도의 온도를 낮췄다.
"중환자실 8번 침상입니다."
"가자."
복도를 돌아 8번 침상에 도착했을 때, 박민철은 깨어 있었다. 눈을 떴다가 천천히 감았다. 의료진이 왔다는 것을 알아도, 기대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 그런 식의 동작.
침상 옆 모니터는 계속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지난 12시간 바이탈?"
"산소포화도 91%, 호흡수 32회. 어제 대비 호흡 곤란 호소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네?"
"그래서 뭘 했냐고."
인턴이 차트를 뒤적거렸다. 마지막 기록은 3시간 전이었다. 그 이후 아무것도 없었다.
이준호가 직접 X선 영상을 들었다. 최신 촬영본. 그의 눈이 영상을 훑어내렸다. 정지된 시간처럼 보였다. 5초. 10초. 15초.
"폐 하엽 침윤 20% 악화됐다."
"어제 오후와 비교해서...?"
"난 지금을 본다. 어제와의 비교 따윈 의미 없다. 이 속도면 48시간 내 급성 폐부종."
이준호가 차트를 내팽개쳤다.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산소 농도 60%로 올려. 스테로이드 고용량. 오늘 밤 상태 확인 후 내일 재검사."
그리고 떠났다.
복도에서 레지던트가 중얼거렸다. "어제는 괜찮다고 했는데..."
"닥쳐."
최태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모두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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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철은 침상에 남겨졌다. 산소 마스크 너머로 천장을 바라봤다. 호흡이 가빠졌다. 아까보다 더. 의료진이 산소 농도를 올렸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악화. 더 빠른 악화.
손가락이 침상 난간을 움켜잡았다. 손톱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48시간.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48시간 내 급성 폐부종.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았다. 의료진은 완곡한 표현을 썼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왜? 왜 갑자기?
박민철의 눈이 천장에서 벗어났다. 손가락이 침상 난간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두 달 전. 이준호가 자신을 보고 한 말.
'의학적 부적응증. 이식 부적절.'
그 말 이후로 무엇이 바뀌었나? 신체 상태가 악화된 건 맞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렇게 빨리?
손가락이 떨렸다. 생각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제외 결정 이후로 자신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처음엔 심리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절망감. 포기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체가 거부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의료진의 판단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다 멈췄다.
'의료진의 판단에 동의한다고?'
박민철의 눈이 떠졌다. 천장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봤다. 침상 옆 차트. 의료 기록. 그곳에 무엇이 쓰여 있을까?
'심박출량 지수 18.2%. 신기능 GFR 45%. 간기능 정상.'
그 수치들은 이식 기준을 만족한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의료진이 말해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은 죽어가고 있지 않다. 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 침상 난간을 놨다. 주먹이 쥐어졌다.
이준호는 왜? 왜 자신을 제외했나? 의료적 근거가 있었나?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
박민철의 호흡이 더 가빨라졌다. 산소 마스크가 얼굴에 차가웠다. 48시간. 그 시간은 이미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은 깨달았다.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선택된 것이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침상 옆 호출 버튼을 눌렀다. 간호사가 왔다.
"침상 번호를 다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 아들한테 연락해주세요. 박준우. 번호는..."
박민철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명확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환자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알아챘다. 포기의 눈빛이 아니었다. 결정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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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의 사무실은 12층 코너 끝에 있었다. 통창으로 한강이 보였다. 그 위치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최태호는 문을 두드렸다. 두 번. 정확히 2초 간격.
"들어와."
사무실 안은 의외로 단순했다. 책상, 의자, 그리고 벽면 가득한 의료 논문들.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인물도, 가족도, 기념 같은 것도. 오직 '성과'만 있었다.
"센터장님, 박민철 환자 제외 결정에 대해서..."
최태호가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뭐?"
이준호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차트 시스템.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의료윤리 기준으로... 환자의 의학적 상태만 봤을 때는 충분히 이식 대상이..."
"그래?"
"네. 심박출량 지수가 18% 이상 유지되고 있고, 신기능도..."
"넌 환자를 본 적이 있나?"
이준호가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네?"
"내 질문에 답해. 넌 환자를 본 적이 있나? 직접.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그 환자의 눈을 보면서."
최태호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난 본다. 매일 본다. 그 환자가 얼마나 버티고 있는지.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지. 그 차이를 아나?"
"센터장님, 의료 판단은..."
"의료 판단? 넌 의료 정치를 하고 있는 거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렇기에 더 차가웠다.
"내가 이 센터를 만들었다. 불가능한 환자들을 살렸다. 그 과정에서 수천 번의 판단을 했다. 모두 맞았다. 넌?"
최태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넌 어디서 왔지? 부산대? 아니, 경북대?"
"서울대입니다."
"그래도 여긴 다르다. 여긴 최고다. 최고가 되려면 최고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준호가 다시 모니터로 돌아섰다.
"네가 센터장이 되고 싶으면, 내 판단에 따르면 된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 말이 끝나자 최태호는 문을 나갔다. 복도에 나서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펼쳤다가 오므렸다. 다시 펼쳤다가 오므렸다.
그 반복 속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최태호는 계단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 발걸음이 빨라졌다. 8층. 기록실.
기록실의 문은 자동 잠금이었다. 최태호는 카드키를 꺼냈다. 녹색 불이 켜졌다. 문이 열렸다.
안은 회색 파일 캐비닛으로 가득했다. 환자별로 분류된 의료 기록들. 수천 명의 삶과 죽음이 종이로 보관되어 있었다. 최태호는 'ㅂ' 섹션으로 향했다. 박민철. 파일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파일을 열었다.
초기 평가 기록. 이름, 나이, 진단명. 그리고 수치들.
'심박출량 지수 18.2%. 신기능 GFR 45%. 간기능 정상. 평가: 이식 적응 가능.'
담당의 서명. 날짜. 정확한 기록.
그 다음 페이지. 재평가 기록. 같은 날짜, 같은 수치들. 하지만 결론이 달랐다.
'의학적 부적응증. 이식 부적절.'
이준호의 서명. 그리고 그 아래 최태호의 필적으로 쓰인 메모.
'초기 평가: 적응 가능. 재평가: 부적응. 기준 변경 사유 미기재.'
최태호는 그 글자를 다시 읽었다. 미기재. 그것은 의료 기록의 결함이었다. 의료진이 판단을 바꾼 이유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의료 기준은 명확해야 한다. 그것이 의료 기록의 기본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꺼냈다. 휴대폰 카메라. 페이지를 촬영했다. 초기 평가. 재평가. 그리고 그 사이의 공백.
파일을 다시 넣었다. 기록실을 나왔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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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로비. 오후 2시.
간호사 둘이 커피머신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인근 소파의 보호자들에게는 충분히 들렸다.
"저 심장 수술 환자 있잖아. 2년 전에 이준호 센터장이 했던..."
"어, 민준이 엄마 친구 남편이었던가?"
"그래. 그 사람 지금 심한 거 알아? 거부반응이 자꾸 생긴다더니, 이제는 항상 숨이 찬대."
"어? 그런데 수술은 성공했다고..."
"성공이 뭐냐고. 이준호 센터장은 수술은 하지만, 그 이후는 안 본대. 수술실에서 나오면 끝인 거야. 나머지는 후속 의료팀 탓이라고."
"진짜? 그럼 합병증 엄청 많겠네."
"많지. 근데 병원은 아무도 안 말해. 이준호 센터장 명성이 중요하니까."
바로 그때 누군가가 로비 입구에서 멈춰 섰다. 간호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간호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이 다물어졌다.
이준호는 그들을 계속 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한 명의 간호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준호는 지나가며 그녀의 팔에 눈길을 주었다. 단 1초. 그것으로 충분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간호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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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강신혜의 사무실.
의료윤리위원회 위원장의 방은 작았다. 12층 끝 모서리, 햇빛이 들지 않는 곳. 이준호의 사무실과는 정반대편이었다. 거리로는 50미터. 권력으로는 무한한 거리.
강신혜가 노크를 했을 때, 이준호는 서류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신청서. 의료윤리 기준 검토 요청. 박민철 환자 제외 결정의 의료적 근거 재검토.
"들어와."
강신혜가 들어섰다. 이준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박민철 환자의 의료기록을 검토했습니다."
"그래?"
"심박출량 지수, 신기능, 간기능 모두 이식 적응 기준을 만족합니다. 초기 평가와 재평가 사이에 의학적 변화가 없는데도 판정이 바뀌었습니다."
이준호가 드디어 눈을 들었다.
"기준 변경의 사유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의료 기록에 기재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넌 그 환자를 본 적이 있나?"
강신혜가 멈췄다. 그 질문을 이미 한 번 던진 것 같았다. 아니, 던졌다. 최태호에게.
"환자의 의료 기록이..."
"기록은 거짓말이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한강이 보였다. 대교 위를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내가 이 센터를 키운 건 기록 때문이 아니다. 직관 때문이다. 수천 명의 환자를 봤다. 그들의 눈을 봤다.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봤다."
그가 돌아봤다.
"넌 환자를 본 적이 없다. 난 매일 본다. 그 차이가 의료윤리보다 크다."
"센터장님, 의료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객관적 기준이..."
"객관적 기준으로는 불가능한 수술을 가능하게 한 게 나다."
이준호가 책상으로 돌아왔다. 서류 더미 위로 손을 뻗었다. 박민철의 의료기록. 처음 평가 기록. 심박출량 지수 18.2%. 신기능 GFR 45%. 간기능 정상.
그리고 그 아래 재평가 기록. 이준호의 서명. '의학적 부적응증. 이식 부적절.'
최태호의 필적이 그 옆에 있었다.
'초기 평가: 적응 가능. 재평가: 부적응. 기준 변경 사유 미기재.'
이준호의 눈이 그 글자에 멈췄다. 사유 미기재. 그것은 의료 기록의 결함이었다. 의료 기준의 결함이 아닌, 의료 기록의 결함. 그것은 패턴이 될 수 있었다.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센터장님?"
강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단 1초. 그 다음 눈을 떴다.
"조사는 절차적으로 진행해. 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졌다."
"의료윤리 위원회는..."
"의료윤리 위원회는 형식이다. 의료는 의학으로 한다. 그리고 의학은 의사가 한다. 나는 의사다."
강신혜가 물러섰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었다. 이준호는 서류를 펼쳤다. 박민철의 기록을 다시 들었다. 눈이 글자를 따라갔다.
'심박출량 지수 18.2%.'
손가락이 글씨를 더듬었다. 그것은 이식 적응 기준이었다. 명백한 기준. 이의 없는 기준.
하지만 그 기록 옆, 작은 글씨로 누군가 추가 기록을 했다. 최태호의 필적이었다.
'기준 변경 사유 미기재.'
이준호가 펜을 집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펜을 종이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내렸다.
무언가를 기록해야 했다. 기준이 변경된 이유를. 그것이 의료 기록의 완전성이었다. 그것이 의료 기준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렸다.
만약 기록한다면? 만약 사유를 적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판단이 흔들렸다는 뜻이었다. 의료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은 최고였다. 최고는 의심받지 않는다.
이준호가 펜을 놨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펜을 다시 집었다. 이번엔 더 빠르게. 종이 위에 글을 썼다.
'환자 신체 상태 악화로 판정 변경.'
글씨가 흔들렸다. 거짓이었다. 신체 상태는 변하지 않았다. 수치는 같았다. 오직 판단만 바뀌었다.
이준호가 펜을 놨다. 글씨를 바라봤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기록의 위조였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글씨를 지웠다. 지우개가 종이를 문질렀다. 검은 글씨가 옅어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종이는 다시 깨끗해졌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이준호는 펜을 놨다. 그것이 책상 위에서 구르며 떨어졌다. 펜은 바닥에 닿았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강신혜가 바라봤다. 이준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센터장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정리했다. 박민철의 기록을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그 위에 다른 서류들을 겹쳤다.
강신혜를 바라봤다.
"조사를 진행해도 좋다. 하지만 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의료윤리 위원회의 권한은..."
"권한은 형식이다. 현실은 나다."
강신혜가 돌아섰다. 문을 향했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강 위원장."
강신혜가 멈췄다.
"로비에서 들은 말이 있나?"
침묵.
"간호사들의 수다. 나에 대한 수다. 그런 말들이 병원 곳곳에 퍼지고 있다. 의료진의 신뢰도를 흔드는 말들."
강신혜가 천천히 돌아섰다. 이준호의 눈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 표정도 없이.
"의료윤리 위원회의 위원장이라면, 그런 소문을 관리할 책임도 있지 않을까?"
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협력하면 소문은 사라질 것이고, 거부하면 그것이 퍼질 것이라는 뜻.
강신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나서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손가락이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연락처를 검색했다. 검사청. 의료감시팀.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다만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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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5분. 이준호의 사무실.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창밖의 한강은 어두웠다.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의 불빛만 보였다. 그 불빛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이준호의 책상 위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화면이 어두웠다. 그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손가락이 휴대폰 위에서 멈춰 있었다.
울리지 않은 전화를 기다리는 듯.
아니면 전화를 걸어야 할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손가락이 움직였다. 화면이 켜졌다. 연락처를 검색했다. 최태호. 이름이 뜨고 사라졌다. 다시 뜨고 사라졌다.
결국 손가락이 멈췄다. 휴대폰을 놨다. 책상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손에서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봤다. 한강 위의 불빛들. 그것들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마치 자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