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2001년 2월의 서울은 여전히 겨울 끝자락이었다.

김준호가 눈을 뜬 건 라이온스 구단 산하 숙소의 낡은 침대였다. 천장의 물얼룩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떨렸다. 왼손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준욱'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1차 회귀 때는 없던 전화였다.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심박수가 110을 넘어섰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 터질 듯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받았다.

"스카우터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네, 이준욱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제 이전 팀 감독님이 번호를 알려줬습니다. 혹시...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김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거울로 달려갔다. 관자놀이에는 흰머리가 검은머리 사이를 파고들었고, 눈가의 주름은 더 깊어졌다. 1차 회귀 때보다 심하다. 왼쪽 무릎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스카우터님? 아직 계신가요?"

"네. 여기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지금 SK 엔터프라이즈 산하 팀에 있습니다. 정해진 부장님이 저를 데려가셨거든요."

전화가 끊어졌다.

---

거울에서 돌아선 김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1차 회귀 후 3년 반이 남았다던 의료진의 예측은 틀렸다. 신체가 정직하게 대답했다. 회귀할 때마다 소모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2년. 아니, 1년 반."

중얼거린 말이 다시 돌아왔다. 2차 회귀에서 이미 기억의 10%를 잃었다. 박준호는 명확했지만, 그 다음 후보들의 정보가 희미했다. 1차 회귀 당시 작성한 노트에서 4번과 5번의 이름 칸이 비어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 정보는 더욱 불명확해졌다. 처음부터 기록되지 않은 것인지, 기억에서 사라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그리고 이준욱은 정해진에게 먼저 확보되었다. 3주 만에.

라이온스 구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였다. 이준영은 이미 타격 연습 중이었다. 1차 회귀에서 보던 그의 모습과 거의 같았지만, 뭔가 달랐다. 스윙의 타이밍이 0.1초 더 빨랐다. 하체 회전의 각도가 더 컸다.

"준호, 어제 영상 봤나?"

박태수 감독이 다가왔다.

"네, 감독님."

"이준영 스윙이 달라졌어. 왜 그럴까?"

김준호는 대답을 미뤘다. 정확한 이유를 알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이준영이 박태수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차 회귀에서 김준호가 제시한 하체 회전 각도를 박태수가 다시 설명했고, 이번엔 더 빨리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데이터와 경험의 교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좋은 신호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1차 회귀 때의 의심스러운 표정은 사라지고 있었다.

최민재는 불펜에서 구질을 다듬고 있었다. 체인지업의 낙폭이 더 컸다. 138km/h의 구속은 변하지 않았지만, 회전력은 더욱 명확해졌다.

김준호는 사무실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1차 회귀 때 작성한 다섯 명의 후보 목록이 있었다. 그 중 세 번째 이름인 박준호(포수)의 옆에 빨간 줄을 그었다. 그리고 옆에 메모를 추가했다.

"불가."

박준호는 더 이상 라이온스의 스카우팅 대상이 아니었다. 어제 정해진의 직원이 그를 SK 엔터프라이즈의 산하 팀으로 데려갔다. 1차 회귀에서 박준호를 발굴한 지 정확히 3주 후였다. 정해진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이준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외에도.

김준호는 2001년도 고등학교 야구 리그 일정표를 펼쳤다. 통계 기억에서 남은 선수들의 정보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 정보들이 흐릿했다. 2차 회귀의 대가였다. 기억의 10% 손실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포수 박준호는 명확했지만, 그 다음 후보들의 정보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불명확했다. 4번과 5번 선수의 이름, 팀명, 신체 특성—모든 게 흐릿했다. 처음부터 기록되지 않은 것일 수도,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었다. 구분할 수 없는 혼란.

"이게 문제야."

혼잣말이 사무실에 울렸다. 김준호는 창문을 통해 구장을 바라봤다. 이준영이 여전히 타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스윙이 하나 더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최민재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기회는 3번. 3명을 더 발굴해야 한다."

수학이었다. 단순한 수학이었다.

---

정해진이 라이온스 본부에 나타난 건 그날 오후였다. 이민준 경영이사의 방으로 직행했다. 박태수 감독도 함께 호출됐다.

"저는 경고하려고 왔습니다."

정해진은 의자에 앉지 않고 섰다.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 안에는 이준영과 최민재의 사진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통계 수치들이 적혀 있었다. 모두 부정적이었다. 이준영의 체지방률, 최민재의 구속, 둘의 신체 대칭성 불균형. 모두 '미달'이라는 빨간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두 선수를 보십시오. 신체 조건이 프로 무대에 미달합니다. 특히 이준영은 키 173센티미터. 유격수로서는 심각한 결함입니다. 그리고 최민재는 구속 138킬로미터. 투수의 기본 조건 미충족입니다."

이민준이 파일을 들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저 아이들을 기존 스카우팅의 기준으로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통계라는 명목 아래 말입니다. 제 질문은 간단합니다. 혹시 당신이 틀렸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박태수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정해진이 먼저 계속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스카우터의 방식이 성공한다면 한국 야구의 모든 기준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세운 신체 규격, 구속 기준, 선수 평가 체계. 모두 거짓이 되는 거죠. 그럴 리 없습니다. 30년간 이 기준으로 우리는 성공해왔습니다. 삼성, SK, LG 모두 이 기준을 따릅니다."

정해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스카우터는 시스템을 부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스템이 부러지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라이온스가 그 누군가가 되고 싶으신가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민준은 파일을 다시 탁자에 놨다. 그의 손가락이 이준영의 사진 위에 머물렀다.

"그게 나쁜 건가?"

목소리가 작았지만 명확했다. 박태수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말이 맞다면, 기존 기준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놓친 선수들은 몇 명일까요? 100명? 1000명? 그들을 되돌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민준이 정해진을 바라봤다.

"기준이 바뀐다는 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게 진실이라면 말입니다."

정해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도박입니다."

"네. 도박입니다."

이민준이 인정했다.

"하지만 라이온스는 원래 도박하는 팀입니다. 저 스카우터를 믿기로 도박을 했고, 지금까지 그 도박이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정해진이 돌아섰다. 문을 나가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책임지지 못할 일입니다."

박태수는 정해진이 나간 후 이민준을 바라봤다.

"그 남자는 자신의 기준이 흔들린다는 게 두렵습니다."

"네."

"우리는 겁내야 할 게 다릅니다. 돈입니다."

이민준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짙었다.

"올해 우승 데드라인이 있습니다. 경영진이 정했어요. 이 시즌 우승 못 하면 예산 50% 삭감. 그럼 라이온스는 끝입니다."

박태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도박이 아니었다. 절박함이었다.

"그럼 우리는?"

"밀어붙입니다. 더 강하게."

---

라이온스 구장의 야간 조명이 켜졌을 때, 강수민이 나타났다.

그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사복 차림으로 구장 펜스 너머에서 이준영의 타격 연습을 지켜봤다. 30분을 보다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이준영이 배트를 내려놨다. 강수민을 봤을 때, 그의 얼굴이 경직됐다.

"안녕, 이준영."

강수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네?"

"지금 기분이 어때? 이제 넌 프로 야구 선수고, 나는 어디 팀 벤치에 앉아있지. 기분이 좋아?"

이준영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전국 최고의 유격수였어. 지금도 그래. 근데 넌 나한테 자리를 빼앗겼지. 이상한 신체 조건으로, 기이한 스카우터한테 선택되어서."

강수민이 한 발 가까워졌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넌 정말 자신이 있냐는 거야. 아니면 그 스카우터의 말을 믿기만 하는 건가?"

이준영이 배트를 놨다. 그리고 강수민을 똑바로 봤다.

"나는 당신을 이기려고 온 게 아닙니다."

목소리가 낮고 차분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왔습니다. 내 신체가 결함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왔어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강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자신의 기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우월성이 거부당했다. 그것이 분노였다.

"좋아. 그럼 증명해봐.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그 스카우터의 환상인지."

강수민이 돌아섰다.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이준영이 바라봤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자신의 신체를 의심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근육에 스며들었다. 다음 스윙은 더 강할 것이다. 더 빠를 것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이준영은 배트를 다시 들었다. 타격 연습을 재개했다. 스윙의 리듬이 이전보다 빨라졌다. 강수민의 도전이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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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는 그날 밤 1차 회귀 때 작성한 원본 노트를 꺼냈다. 그 안에는 당시 발굴 대상으로 고려했던 다섯 명의 선수 명단이 있었다.

1. 이준영 (유격수) - 확보 2. 최민재 (투수) - 확보 3. 박준호 (포수) - 미확보 4. ??? (외야수) - 미기록 5. ??? (내야수) - 미기록

4번과 5번의 이름 칸이 비어 있었다. 1차 회귀에서 그 정보를 기록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제 2차 회귀에서 그 기억은 더욱 흐릿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김준호는 2001년도 고교 야구 리그 기록지를 펼쳤다. 통계 기억 속에서 남은 정보를 짜내려고 했다. 회전력이 뛰어난 외야수... 신체 불균형의 내야수... 그런데 그 이상의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불안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1차 회귀 때는 없던 전화였다. 발신자는 '이준욱'이었다.

김준호는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봤다. 이준욱은 과거 김준호가 발굴하려다 놓친 선수였다. 25년 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2군 선수로 머물렀다. 그런데 지금 전화를 걸었다. 왜?

받았다.

"스카우터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네, 이준욱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왜 전화를... 어떻게 번호를?"

"제 이전 팀 감독님이 알려줬습니다. 혹시... 저를 찾으시는 건가요?"

김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만나볼 수 있을까?"

"저는... 지금 SK 엔터프라이즈 산하 팀에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준욱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정해진 부장님이 저를 데려가셨거든요. 혹시 스카우터님이 저를 영입하려던 거였다면... 이미 늦었습니다."

김준호는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마치 손가락이 얼어붙은 것처럼.

"스카우터님? 아직 계신가요?"

"네. 여기 있습니다."

"그...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당신은 왜 나를 봤어요? 왜 나라는 선수에게 관심을 가졌어요?"

김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대답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준욱을 통계로 봤다. 그저 숫자였다. 회전력, 타율, 주루 속도. 숫자 위의 숫자. 이준욱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미안합니다."

그게 유일한 말이었다.

"당신은 나를 버렸습니다."

이준욱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

김준호는 사무실 바닥에 앉았다. 왼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맥박이 110을 넘어 120에 육박했다. 의료진이 경고했던 신체 신호들이 모두 울리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메모를 시작했다.

"1차 회귀: 5년의 시간 폭. 3명 발굴. 신체 수명 3년 반 소모. 2차 회귀: 3년의 시간 폭. 이준욱 미확보. 박준호 미확보. 정해진의 개입 확대. 신체 수명 1년 반 추가 소모. 남은 신체 수명: 약 2년. 남은 회귀 기회: 3번. 필요한 선수: 3명. 시간 폭: 계속 줄어듦. 기억: 계속 흐려짐. 정해진의 압박: 계속 심화됨."

수식이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밤의 구장을 봤다. 조명이 꺼져 있었다. 이준영도 최민재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김준호는 결정의 기로에 섰다.

휴대폰을 들었다. 의료진의 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확인했다.

"3차 회귀를 할 경우... 신체 수명이 얼마나 남을까요?"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한 톤이었다.

"1년 정도입니다. 정확히는 11개월에서 13개월 사이."

김준호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3차 회귀 발동. 목표: 세 명의 선수를 동시에 확보. 신체 대가: 약 1년. 남은 회귀 기회(3차 후): 2번. 남은 신체 수명(3차 회귀 후): 약 1년.

정해진은 계속 움직일 것이다. 4차, 5차 회귀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체는 견딜 수 있을까?"

펜을 놨다. 손가락이 심하게 떨렸다. 심장 박동이 130을 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이 밀려왔다.

정말 해야 하나.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김준호는 멈췄다.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3차 회귀 후 신체가 견딜 수 있는 회귀는 2번뿐이다. 그리고 정해진의 개입 속도는 매번 빨라지고 있다. 1차에는 3주 만에, 2차에는 더 빠르게.

4차 회귀를 할 때쯤이면 정해진은 모든 유망주를 장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3차가 실패하면 끝이다. 라이온스도, 이준영도, 최민재도, 그리고 자신도.

하지만 3차가 성공한다면?

김준호는 창문을 다시 봤다. 여전히 어둠만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선택만 남아 있었다.

정말 해야 하나.

그 물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회귀 발동의 신호는 점점 강해졌다. 신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뼈가 모래처럼 흩어지고, 혈관이 끊어지고, 신경이 타들어가는 고통. 그 고통이 극점에 달했다.

그리고 세상이 반전됐다.

다시 시작됐다.

김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이 다르다. 낡은 물얼룩이 아니라 새것이었다. 침대도 다르다. 더 크고 더 좋다. 왼손을 들었다. 떨림이 없었다. 신체가 새로워졌다.

휴대폰을 집었다. 날짜를 확인했다. 2001년 2월 3일. 3차 회귀 발동.

그리고 시간은 다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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