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두 번째 통계, 세 번째 선수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김준호는 2000년의 거리를 걸으며 목 뒤의 통증을 느꼈다. 어제 회의실에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손가락이 떨려서 차 문을 열기도 버거웠고, 거울에 비친 얼굴은 더 이상 22세 청년의 것이 아니었다. 백발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고, 눈 아래 주머니는 깊어졌다. 회귀가 신체를 완전히 되돌리지 못했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것처럼, 남은 신체 수명도 매일 깎여나가는 중이었다.

라이온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박태수 감독과 이민준 이사는 경기 영상을 재생 중이었다. 경주 고등학교 투수 최민재의 구속 데이터가 화면에 떠 있었다. 138km/h. 한국 프로 야구의 평균 구속은 142km/h였다.

"감독님, 이사님. 최민재 선수 계약을 재검토해 주십시오."

김준호는 노트북을 펼쳤다. 최민재의 회전력 수치, 구질 분석, 향후 5년 성장 곡선이 펼쳐졌다. 박태수는 화면을 눈여겨봤지만 얼굴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구속이 138이잖아. 우리가 저런 투수를 쓸 여유가 있나?"

"회전력이 상위 5%입니다. 메이저리거 평균 2,400 RPM인데 이 선수는 2,420입니다. 구속은 보완할 수 있지만 회전력은 타고난 재능입니다."

이민준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는 숫자에 약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RPM이 뭐지?"

"회전력입니다. 공이 초당 몇 바퀴 도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인데, 이 수치가 높을수록 타자 입장에서 공이 더 크게 보입니다. 구속이 낮아도 회전력이 높으면 타자의 반응 시간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박태수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코치들이 그걸 어떻게 이해할까? 구속이 낮으면 낮은 거지. 회전력이 뭐 어떻게 되든."

"선수 본인이 이해하면 됩니다. 최민재는 자신의 방식이 맞다고 믿는 투수입니다. 그를 믿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민준이 박태수를 바라봤다. 감독의 눈빛에 흔들림이 생겼다. 라이온스는 저예산 구단이었다. 우승이라는 목표는 기적에 가까웠고, 기적이 되려면 누군가는 미친 도박을 걸어야 했다. 그 누군가가 지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금이 얼마나?"

"최소한입니다. 다른 팀에서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요."

이민준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것이 동의의 신호였다.

박태수는 한숨을 쉬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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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고등학교 야구장. 최민재는 라이온스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받아들었을 때 손가락이 떨렸다. 138km/h의 구속으로 거절당한 지 한 달. 구속만 재는 이 나라에서 자신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구속을 재지 않았다.

"회전력이 우수하다고?"

"네. 상위 5%입니다."

김준호는 최민재의 어깨를 봤다. 투수의 어깨는 솔직했다. 이 선수는 자신의 방식을 믿고 있었다. 그것이 회귀 데이터보다 더 중요했다.

"그래요. 제 방식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구속만 높다고 좋은 투수가 아니잖아요."

최민재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자신의 회전력 그래프가 떠 있었다. 그것은 거울 같았다. 누군가 자신을 제대로 봤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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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스 훈련장. 코칭 스태프의 반응은 예상과 같았다.

"138km/h? 저런 투수가 프로에서 먹히나?"

최민재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 경험 많은 투수 코치 김영수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최민재의 첫 번째 투구는 직구였다. 136km/h. 포수의 글러브에 소리 없이 박혔다.

"저 정도면 이차팀도 힘들다."

최민재는 듣고 있었다. 자신이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의도적이었다. 최민재의 두 번째 투구는 슬라이더였다. 구속은 떨어졌지만 회전이 달랐다. 타자는 헛스윙했다.

"뭐 이런..."

세 번째 투구는 포크볼이었다. 타자는 한 발 물러섰다. 네 번째 투구에서 타자는 삼진을 당했다.

김영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김준호가 옆으로 다가갔다.

"회전력 때문입니다. 구속이 낮아도 공이 예상 궤적에서 벗어나는 폭이 크면 타자는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게... 그런 거야?"

김준호는 노트북을 펼쳤다. 최민재의 회전력 데이터, 구질별 이동 거리, 삼진율 예측 그래프가 나타났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영수의 표정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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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관중석. 라이온스 1군과 2군의 연습경기였다. 최민재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 기성 야구인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구속 138km/h. 누구나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첫 이닝. 최민재는 직구로 시작했다. 타자는 헛스윙했다. 그 다음은 슬라이더. 타자는 눈을 떴다. 공은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다. 세 번째 투구는 포크볼. 삼진.

두 번째 이닝. 최민재의 회전력은 더 분명해졌다. 타자들은 공의 궤적을 읽을 수 없었다. 1, 2, 3번 타자 모두 삼진. 삼구삼진.

관중석의 코치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속이 138인데..."

"회전이 이상한데?"

"뭐하는 거야, 저 타자들?"

최민재가 마운드를 내려올 때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구속계에 나타나는 숫자는 여전히 138km/h였다. 하지만 타자들의 눈빛은 달랐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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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스 사무실. 박태수 감독이 김준호를 불렀다.

"앉아."

김준호가 의자에 앉았을 때 박태수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 구단이 우승하는 날, 넌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농담이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김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박태수는 자신의 신체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회귀 후 72시간이 지나면서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졌고, 흰머리는 계속 늘어났고, 손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가고 있었다. 남은 신체 수명은 3년 반. 그 안에 5명의 선수를 발굴해야 했다.

"감독님, 농담 같지 않습니다."

박태수가 웃었다.

"알아. 너 진짜 이상하다. 뭔가 자꾸 죽을 것처럼 행동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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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 귀가 길. 최민재가 김준호를 따라갔다.

"스카우터님,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당신의 재능을 본 것일 뿐입니다."

"아니에요. 저는... 제 구속 때문에 포기하려고 했어요. 근데 당신은 그걸 안 봤어요. 회전력을 봤어요."

최민재는 멈춰 섰다.

"구속만 재는 한국 야구, 제 방식으로 성공하면 모든 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김준호는 최민재를 바라봤다. 투수의 눈빛에서 단순한 욕망이 아닌 다른 것을 봤다. 시스템을 바꾸고 싶은 의지. 자신이 당한 거절을 다른 선수들이 당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욕망.

"그래. 그럼 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최민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줬을 때의 그 표정. 김준호는 그 표정을 많이 봐야 했다. 4명의 선수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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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스 경영진 회의실. 강수민이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즉시 경직되었다. 강수민은 전국 최고의 유격수였다. 기본기가 완벽했고, 신체 조건도 우수했다. 라이온스에 입단한 이후로도 그는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민준 이사님,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말해봐."

"왜 저를 홀대하는 거죠? 이준영이 들어온 이후로 저는 계속 벤치에 있습니다."

이민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감독의 결정이야."

"아니에요. 스카우터 김준호의 결정입니다. 그 사람은 저를 무시합니다. 제 신체 조건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전국 최고의 유격수예요. 173cm 키에 왜 제가 밀려야 하죠?"

강수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불안이었다. 프로에 입단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선수의 불안이었다.

"강수민, 넌 충분히 좋은 선수야. 근데 이준영도—"

"이준영이 뭐가 좋아요? 키도 작고, 기본기도 떨어지고, 경험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 선수에게 집착하는 거죠?"

이민준은 말을 잃었다. 그는 경영인이었지 야구인이 아니었다.

"감독과 상담해봐."

강수민이 나가고 나서 문이 열렸다. 정해진이 들어왔다. 그는 SK 구단의 스카우팅 부장이었다.

"이사님,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이민준이 정해진을 바라봤다. 정해진은 웃고 있었다.

"저 스카우터의 두 번째 선수 최민재도 실패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실패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남자의 방식은 한 번의 실패로 모두 무너집니다. 통계는 쌓인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한 명이 실패하면 그 다음 선수들도 함께 실패합니다.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정해진이 경기장을 가리켰다.

"그게 우리의 기회입니다. 저 선수들이 실패하면, 저 스카우터는 끝입니다. 그리고 라이온스는 더 빨리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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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귀가 길. 강수민이 서 있었다. 정해진이 옆에 섰다.

"넌 충분히 좋은 선수야."

강수민이 정해진을 바라봤다. 정해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아래에는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 스카우터가 너를 무시하는 건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선수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넌 그 도구가 된 거지."

강수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기다려. 저 선수들이 실패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야. 그리고 그때 넌 이 구단의 유일한 희망이 되는 거야."

정해진과 강수민이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강수민의 불안이 분노로 변했다. 자신을 도구로 취급한 스카우터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는 정해진의 말에 의해 증폭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강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 조명이 하나둘 꺼지고, 야구장은 어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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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라이온스 사무실.

김준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최민재의 시뮬레이션 경기 영상을 반복 재생했다. 삼진, 삼진, 삼진. 통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계 너머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강수민의 불안감, 정해진의 음모, 그리고 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깎여나가는 자신의 신체.

화면 위의 최민재는 여전히 공을 던지고 있었다. 138km/h의 구속. 메이저리거 수준의 스핀 레이트. 타자의 배트는 공허한 공간을 휘젓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수치가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순간. 그 순간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었다.

김준호는 노트북을 닫고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야경이 멀리 보였다. 25년 뒤에서 가져온 기억과 현재의 현실 사이의 간극.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 그것이 남은 회귀 동안 해야 할 모든 일이었다.

책상 위의 거울을 집었다. 흰머리가 관자놀이 근처까지 번져 있었다. 심장 박동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왼쪽 무릎에서 뭔가 끼인 느낌이 있었다. 회귀 후 3개월이 지났고, 신체는 서서히 쇠해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3년 반. 남은 선수는 3명. 남은 회귀는 4번.

계산이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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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훈련장.

최민재는 마운드에 섰다. 그의 어깨는 다른 투수들보다 더 낮았다. 체형이 비표준적이었다. 등이 휜 편이고, 다리는 짧은 대신 상체가 길었다. 기성 스카우터들이라면 한 눈에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 체형이었다.

"최민재, 투구 폼 체크."

코치 이영식이 외쳤다. 그는 30년 경력의 투수 코치였고, 구속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최민재가 공을 던졌다. 138km/h. 스피드건의 숫자는 냉정했다.

"그게 뭐 하는 거야?"

이영식이 손을 들었다.

"구속이 130대? 저건 고등학교 수준이야. 넌 프로에서 못 던져. 차라리 야수 전향 생각해봐."

훈련장이 조용해졌다. 최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이런 말을 수백 번 들었다. 매번 할 때마다 뭔가가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꿈이 천천히 질식하는 기분이었다.

김준호가 나타났다.

"최민재, 계속해."

이영식이 고개를 돌렸다.

"스카우터님, 저 구속으로 뭘 하려고요? 이건 프로가 아니라—"

"스핀 레이트를 재봤나요?"

"스핀 레이트?"

"회전력입니다."

김준호가 손으로 공의 궤적을 그렸다.

"저 공이 타자의 손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셨습니까? 구속이 아니라 그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이영식이 웃음을 터뜨렸다.

"움직임? 스카우터님, 야구는 구속이 모든 거야. 150km/h 이상, 그게 프로의 기본이야. 저건 고등학교도 안 돼."

"2020년의 메이저리그 평균 스핀 레이트는 2350rpm입니다."

김준호가 계속했다.

"최민재의 스핀 레이트는 2480rpm입니다."

"2020년? 뭘 말씀하시는 거—"

"상위 5% 수준입니다."

침묵. 이영식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는 '스핀 레이트'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들었다.

최민재가 다시 투구했다. 138km/h.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공이 타자의 손 위에서 떨어지듯 떨어졌다. 타자는 배트를 휘었지만 공은 이미 다른 궤도에 있었다.

삼진.

이영식의 입이 벌어졌다.

"어? 그게..."

"회전축의 각도가 다릅니다. 구속이 아니라 공의 궤적이 타자의 판단을 방해합니다."

김준호가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영식의 눈이 이미 본 것이 전부였다.

최민재가 또 던졌다. 138km/h. 이번엔 더 빠르게 떨어지는 공. 타자는 다시 헛스윙했다. 삼진.

"저건..."

이영식이 중얼거렸다.

"저건 뭐야?"

"새로운 통계입니다."

김준호가 말했다.

"구속만 재는 한국 야구는 이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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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옆 벤치에 앉은 박태수 감독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30년간 느껴온 야구의 본질이 흔들리고 있었다. 구속이 진리가 아니라면, 자신이 평생 믿어온 것이 무엇인가?

그가 김준호에게 다가갔다.

"스카우터님."

"감독님."

"저 투수가 정말 프로에서 먹힐까요?"

김준호가 박태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네. 메이저리그까지 갑니다."

"메이저리그?"

"네."

박태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불안한 웃음이었다. 오래된 신념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이 구단이 우승하는 날, 넌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김준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박태수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떨림은 신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었다.

"스카우터님, 괜찮아요?"

"네, 감독님."

김준호는 거짓말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매일 매일 신체가 쇠해가고 있었다. 흰머리가 늘어나고, 심장이 불규칙해지고, 왼쪽 무릎이 끼이고 있었다. 회귀 후 3개월. 신체 수명 3년 반. 남은 선수 3명.

계산은 여전히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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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라이온스 사무실.

최민재가 김준호의 책상 앞에 섰다.

"스카우터님."

"뭐야?"

"제 구속이 느린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최민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눈빛에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25년간 받아온 모욕의 불이었다.

"그런데 스카우터님이 제 회전력을 본 순간, 처음으로 제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다."

"구속만 재는 한국 야구, 제 방식으로 성공하면 모든 게 바뀐다고 생각해요."

최민재가 김준호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김준호가 일어났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더 이상 분석가의 눈이 아니었다. 회귀한 자의 눈이었다. 미래를 이미 본 자의 눈이었다.

"구속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국 야구계를 바꾸는 게 너의 꿈이어야 한다.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

"네?"

"넌 단순히 메이저리거가 되는 게 아니라, 한국 야구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게 너의 역할이다."

최민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단지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주는 짐은 그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저 혼자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넌 혼자가 아니다."

김준호가 책상을 펼쳤다. 노트북의 목록이 보였다.

"이 다섯 명이 함께 바뀐다."

최민재는 다섯 개의 이름을 봤다. 이준영, 최민재, 박준호, 그리고 두 개의 빈 칸.

"아직 발굴하지 못한 두 명?"

"네. 하지만 그들도 너처럼 시스템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이 성공하면, 한국 야구는 변한다."

김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구속, 체형, 신체 규격. 그 모든 것에 갇힌 선수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게 너의 진짜 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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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라이온스 경기장 외부.

정해진이 경영진 이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이민준이 옆에 섰다.

"뭐죠?"

"저 스카우터의 두 번째 선수도 실패할 겁니다. 아니, 반드시 실패해야 합니다."

정해진이 경기장을 바라봤다.

"저 남자의 방식은 한 번의 실패로 모두 무너집니다. 통계는 쌓인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한 명이 실패하면 그 다음 선수들도 함께 실패합니다.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의 기회입니다."

이민준이 말을 잃었다. 그는 경영인으로서 정해진의 논리를 이해했다. 한 명의 실패는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조직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선수."

정해진이 벤치에 앉아 있는 강수민을 가리켰다.

"그 선수가 우리의 도구가 될 겁니다."

강수민이 일어났다. 정해진과 이민준을 바라봤다. 세 사람이 야구장의 어둠 속에서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동맹이 아니라 거래였다.

강수민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정해진은 새로운 분석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민준은 라이온스의 안정성을 위해 움직였다. 각자의 목표가 겹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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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시. 라이온스 사무실.

김준호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최민재의 영상을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삼진, 삼진, 삼진. 통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왼쪽 무릎이 끼이고 있었다.

흰머리가 관자놀이까지 번져 있었다.

회귀 후 3개월. 신체 수명 3년 반. 남은 선수 3명. 남은 회귀 4번.

계산은 여전히 맞지 않았다.

노트북의 목록을 다시 켰다.

1. 이준영 (유격수) - 확보 완료. 메이저리그 진출 확정. 2. 최민재 (투수) - 확보 완료. 메이저리그 진출 확정. 3. 박준호 (포수) - 미발굴. 부산 해운대 야구장. 2003년 4월 발견. 순발력과 판단력 우수. 4. ? (외야수) - 미발굴. 기억 희미함. 2004년경? 5. ? (내야수) - 미발굴. 기억 희미함. 2005년경?

미래의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회귀할 때마다 10%씩 감소한다고 했다. 1회 회귀는 이미 끝났다. 2회, 3회, 4회, 5회가 남아 있었다. 2회 회귀를 하면 기억은 80%가 된다. 3회에서 70%. 4회에서 60%. 5회에서 50%.

50%의 기억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손가락이 더 떨렸다.

창밖의 서울 하늘이 어두웠다. 새벽 2시. 야구장은 죽어 있었다. 경기장의 조명도 꺼져 있었고, 관중석도 비어 있었다. 오직 불이 켜진 사무실만 남아 있었다.

그 안에는 한 명의 스카우터가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심장이 뛰고, 무릎이 끼이고, 머리가 하얀 스카우터가.

남은 시간 3년 반. 남은 선수 3명. 남은 회귀 4번.

그리고 남은 신체는 얼마나 될까?

노트북을 닫으려는 순간, 화면에 한 줄의 기억이 떠올랐다.

'2006년 6월 15일. 한강 라이온스 우승. 최민재 월드시리즈 MVP. 이준영 한국시리즈 MVP.'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김준호, 2006년 7월 3일 사망.'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의 글씨가 흐릿해졌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1회 회귀만 했는데도, 기억이 10% 감소했고, 그 다음의 기억들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2006년 7월 3일.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날인가?

아니면 그것도 기억의 왜곡인가?

노트북을 닫았다.

경기장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새벽 훈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수들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김준호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왼쪽 무릎이 끼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은 선수는 3명. 남은 회귀는 4번. 남은 신체는...

알 수 없었다.

오직 시간만이 그것을 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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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 야구장. 2003년 4월 15일.

김준호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고, 눈은 마운드에 집중되어 있었다. 경주 고등학교와 부산 해운대 고등학교의 연습경기였다.

포수 박준호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는 포수였지만 투수로도 활동했다. 비표준적인 선수였다. 키는 172cm로 작았고, 체형도 일반적인 포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다른 선수들과 달랐다. 경기를 읽는 눈이었다.

3회말. 부산 해운대가 2점 뒤진 상황이었다. 박준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투수의 공을 보았다. 직구. 박준호는 배트를 휘었다.

타구는 좌중간으로 날아갔다. 2루타. 관중석의 코치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포수, 뭐하는 거야? 타격까지?"

김준호는 박준호를 계속 봤다. 그의 움직임, 그의 판단, 그의 타이밍. 모든 것이 기억과 일치했다. 박준호는 단순한 포수가 아니었다. 그는 경기를 지배하는 선수였다.

5회말. 박준호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주자 2루. 2아웃. 2스트라이크. 절박한 상황이었다.

투수가 공을 던졌다. 변화구였다. 박준호는 공을 봤다. 그리고 배트를 휘었다.

타구는 중간으로 날아갔다. 3루타.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다. 동점.

경주 고등학교의 투수가 화를 냈다. 그는 구속이 높은 투수였다. 하지만 박준호는 그의 공을 읽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7회말. 박준호가 또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엔 주자 1루. 1아웃. 상황은 유리했다.

투수가 공을 던졌다. 직구였다. 박준호는 공을 봤다. 그리고 배트를 휘었다.

타구는 우중간으로 날아갔다. 홈런. 부산 해운대가 역전했다.

경주 고등학교의 감독이 화를 냈다. 그는 투수를 교체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부산 해운대는 경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경기는 부산 해운대의 5:2 승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나고 김준호는 박준호에게 다가갔다.

"박준호."

박준호가 돌아봤다. 그는 누군가를 보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세요?"

"스카우터입니다. 라이온스의 스카우터 김준호입니다."

박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라이온스요?"

"네. 당신의 경기를 봤습니다."

"저는 포수인데요. 구속도 없고, 키도 작고, 체형도 이상한데요."

박준호의 목소리는 자조적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비표준적인 선수. 프로에 갈 수 없는 선수.

"당신은 경기를 읽습니다."

김준호가 말했다.

"구속이나 체형이 아니라 경기를 읽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박준호가 김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뭔가가 생겼다. 희망이었다.

"정말요?"

"네. 당신은 프로에서 먹힙니다."

김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라이온스에 와서 함께 시스템을 바꿉시다."

박준호가 손을 잡았다.

경기장의 조명이 저물고 있었다. 부산 해운대 야구장은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두 명의 남자가 손을 맞잡고 있었다.

한 명은 미래를 본 자. 다른 한 명은 미래를 믿기 시작한 자.

그들의 손잡음은 약속이었다. 한국 야구를 바꾸겠다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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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스 사무실. 밤 11시.

김준호는 노트북을 업데이트했다.

1. 이준영 (유격수) - 확보 완료. 메이저리그 진출 확정. 2. 최민재 (투수) - 확보 완료. 메이저리그 진출 확정. 3. 박준호 (포수) - 확보 완료. 프로 진출 확정. 4. ? (외야수) - 미발굴. 5. ? (내야수) - 미발굴.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밝았다.

남은 시간 3년 반. 남은 선수 2명. 남은 회귀 4번.

계산이 맞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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