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직후 — 폐역 플랫폼
하수도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철역 벽에 이준호의 등이 닿았다. 콘크리트는 차갑고,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신용도 게이지를 확인하는 손가락이 떨렸다.
【신용도: 48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4시간 23분】
화면 끝에 빨간 테두리가 생겼다. 경고음은 없었지만,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 거래를 할 때마다 10~15씩 깎인다. 그럼 이제 남은 시간은...
"30분이면 충분해."
강민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그는 휴대폰 화면의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옛날 호러 영화에서 유령들이 하는 짓처럼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계산적이었다. "누군가가 온다고 했어. 누구냐고?"
"아직 말할 수 없어."
"그게 도움이 되냐고?"
강민준은 휴대폰을 내렸다. 어둠이 그의 얼굴을 삼켰다. "도움이 될 거야. 아니면 이미 끝난 거고."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무선 통신기, 그리고 몇십 명이 움직이는 울음. 길드연합의 추격대였다. 플랫폼 양쪽 끝에서 손전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강민준이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누군가가 플랫폼에 나타났다.
유정희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검은 옷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휴대폰 화면의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신용도 게이지가 보였다.
【유정희 신용도: 420 / 거래 추방 상태】
이미 끝난 얼굴이었다.
"당신은 우리를 버릴 수 없어."
유정희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줬으니까. 이제 우리가 당신을 도울 차례야."
이준호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유정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 남편이 이렇게 됐어. 신용도 420이야. 이제 거래를 할 수 없어. 우리 가게도 닫았어. 하지만 난 미워하지 않아. 당신이 우리를 도와줬으니까."
이준호는 한 발 물러섰다. 유정희의 신용도를 보고 있었다. 420. 거래 추방 상태. 자신 때문이었다. 역수수료로 그녀의 신용도를 올려주려다 오히려 깎아먹었다. 그리고 남편까지.
"미안해."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미안하다고? 그럼 우리가 여기 있잖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그런데 너는 더 깎여 있어."
이준호가 유정희의 신용도 게이지를 가리켰다. "나 때문에. 이건 내 책임이야."
유정희가 한 발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눈물이 흘렀지만, 그 눈은 단호했다.
"당신 책임이 아니야. 시스템이 잘못된 거야."
"상관없어. 넌 이미 거래 추방 상태야. 나랑 있으면 더 위험해진다고."
"그럼 뭐 어떤데? 난 이미 추방 상태잖아."
유정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신이 우리를 도와줬을 때, 우리는 그걸 알았어. 당신이 신이라는 걸. 그래서 우린 따랐어. 그리고 지금도 따르고 싶어. 당신이 우리를 버려도."
이준호는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자신의 발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유정희의 손이 뻗어났다가 내려왔다.
"당신은 우리 신이야. 신이 우리를 버릴 수 없어."
그 말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거래소에서 몇십 명이 했다. 하지만 신은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은 주변을 파괴하는 존재였다. 박서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의도 악의도 아닌 구조적 악이야."
이준호의 발이 멈췄다.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자신의 이상이 타인을 파괴하는 구조. 그것을 깨달은 순간,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깨달음. 신이 될 수 없다는 절망.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타협할 수 있다는 희망.
"미안해. 진짜."
이준호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유정희를 도우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를 파괴했다. 그것이 신의 길이었다.
강민준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플랫폼 위의 손전등이 더 가까워졌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 강민준과 이준호는 철로를 따라 어둠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유정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우리를 버릴 수 없어!"
그 목소리는 외침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그리고 그 절규는 이준호의 등을 칼처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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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속에서 신용도는 계속 떨어졌다.
【신용도: 47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4시간 1분】
이준호는 화면을 껐다. 확인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매분 떨어지고 있었다.
"저기 봐."
강민준이 손가리켰다. 터널 끝에 불빛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직선이었고, 양쪽에서 추격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왼쪽이야."
강민준이 벽의 틈을 가리켰다. 환기 통로였다. 그들은 몸을 날렸다. 손가락이 갈라졌고, 무릎이 찢어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통로 끝에 작은 방이 있었다. 예전 신호실인 것 같았다. 강민준이 문을 닫고 잠궜다.
"여기서 기다려."
"누가 오는 거야?"
강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여러 개의 채팅방이 켜져 있었다. 길드연합의 내부 통신이었다. 강민준은 그것들을 빠르게 스크롤했다.
【한태원: 폐역 완전 포위. 신용도 300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대기. 거래 추방 자동 활성화 후 체포】
【김준석: 신용도 감시 중. 현재 460. 1시간 내 임계점 도달 예상】
【한태원: 거래 추방 프로토콜 준비. 시스템 상 모든 거래 플랫폼에서 '이준호' 식별자 차단】
강민준이 화면을 내렸다. "그들이 뭘 할 건지 알아?"
"뭐?"
"신용도가 0이 되면, 넌 이 세상의 모든 거래소에서 '죽은 사람'이 돼.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모든 플랫폼에서. 누구도 너와 거래할 수 없어. 음식을 살 수 없고, 집을 빌릴 수 없고, 돈을 송금할 수도 없어. 신용도가 없으면 이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없는 거야."
이준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방법이 있어."
강민준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칩이었다. 반도체처럼 생겼고, 표면에는 미세한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박서연이 만들었어. 시스템 백도어야. 이걸 거래 터미널에 연결하면 신용도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무시할 수 있어."
"그게 가능해?"
"박서연이 만들었으니까. 그 여자는 트레이드 코어 개발팀 출신이야. 원래부터 이 백도어를 만들 계획이었어. 길드연합의 압력으로 침묵만 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도움을 청했고, 지금 그 칩이 여기 있는 거고."
강민준이 칩을 들었다. 불빛 아래에서 회로가 반짝였다.
"이 칩은 시스템에 백도어를 열어. 신용도 0 상태에서도 관리자 모드로 진입할 수 있게. 그리고 관리자 모드에선..."
"뭘 할 수 있는데?"
"신용도를 올려."
"아, 그럼 끝나는 거네. 신용도 높으면 거래할 수 있고—"
"아니야."
강민준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눈이 차갑고 명확했다.
"신용도를 다시 올리는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야. 넌 또 역수수료를 쓰고, 또 떨어지고, 또 이 짓을 반복할 거야. 그게 아니라..."
강민준이 칩을 들었다.
"수수료 시스템 자체를 바꿔."
"뭐?"
"거래 추방 상태에서 관리자 모드로 진입하면, 넌 시스템 수수료를 조정할 수 있어. 완전한 0%는 아니지만, 모든 거래의 수수료를 5%로 낮출 수 있어. 길드연합도 이익을 얻고, 거래자들도 수수료를 덜 내고, 세상은 조금 더 공평해져."
"그게 타협이란 거야?"
"그게 타협이야. 완전한 혁명은 세상을 파괴해. 하지만 타협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이준호의 입이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처음으로, 아주 처음으로,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되려는 욕망.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거야?"
"너 혼자면 이미 죽은 거야. 하지만 우린 여기 있어. 박서연도, 김준석도, 그리고 나도."
벽이 울렸다. 추격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들이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럼 우린 안 나가."
강민준이 말했다. 아주 단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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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실의 창문을 통해 손전등이 보였다.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용도: 20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1시간 47분】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200. 거의 다 왔다. 한태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이준호. 들려?"
강민준이 신호했다. 대답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준호는 손을 들었다. 휴대폰 마이크를 켰다.
"네."
"넌 이 세상에서 거래할 수 없게 될 거야. 신용도가 0이 되는 순간, 넌 모든 플랫폼에서 차단돼. 그게 네가 선택한 결과야. 이 거래는 최종이야. 항복해."
"아니요."
"그럼 죽어."
신호가 끊겼다.
【신용도: 10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23분】
화면이 빨개졌다. 글자가 깜빡였다.
【신용도: 5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12분】
이준호의 숨이 멎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치 자신이 수렁에 빠져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민준이 칩을 거래 터미널에 연결했다. 작은 불빛이 켜졌다. 시스템이 반응하고 있었다.
【신용도: 10 / 거래 추방 임계점까지 2분】
화면이 검게 변했다.
【거래 추방 상태 진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면은 완전히 검었다. 이준호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과 거래할 수 없을 것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갈 때, 자신은 공기처럼 취급받을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이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처럼. 숨을 쉬는데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터미널이 울렸다.
【관리자 모드 진입】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거래 수수료 조정 판넬이었다. 슬라이더가 30%에서 시작했다. 강민준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30% → 20% → 15% → 10% → 5%
슬라이더가 5%에서 멈췄다.
【수수료 조정 완료: 모든 거래 플랫폼 적용】
이준호는 그 화면을 바라봤다. 자신은 완전한 0%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5%는 무엇인가? 타협이었다. 혁명이 아닌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계속될 수 있었다.
벽이 폭발했다.
추격대가 들어왔다. 손을 들었다. 무기를 겨냥했다. 하지만 멈췄다. 그들의 통신기에서 음성이 들렸다.
【모든 추격 중단. 대상자는 현재 관리자 모드 상태. 거래 추방 프로토콜 해제】
한태원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통신기 너머에서.
【이준호를 길드연합 공식 중개인으로 인정. 협상 개시】
강민준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게임을 바꿨어."
그 순간, 신호실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총을 들고 있었다.
김준석이었다.
그의 신용도 게이지를 보였다.
【신용도: 0 / 거래 추방 상태】
"난 더 이상 길드연합을 따를 수 없어."
김준석이 말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추격 지휘자였던 그의 음성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단순한 한 명의 거래자였다. 가장 낮은 위치의 거래자였다. 신용도 0. 그럼에도 그는 여기 있었다.
"너를 도울게."
추격대가 움직였다. 무기를 다시 들었다. 한태원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울렸다.
【김준석을 배신자로 낙인. 즉시 체포】
"저항하지 마. 넌 이미 끝났어. 넌 거래 추방 상태야. 이 세상에서 아무도 너를 도울 수 없어."
그 순간, 신호실 위의 천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모래와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강민준의 사람들이었다. 추격대원들이 몸을 날렸고, 총성이 울렸다.
김준석이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빨리!"
강민준이 다른 쪽 팔을 잡았다. 세 명이 신호실 뒤쪽의 통로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폭발의 흔적이 계속 들렸다. 강민준의 부하들이 시간을 벌고 있었다.
통로는 어둡고 좁았다. 이준호는 자신의 발이 바닥을 제대로 밟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미쳐 날뛰었다. 이것이 현실인가? 아직도?
"여기!"
강민준이 옆의 문을 밀었다. 철제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세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강민준이 손가락으로 신호했다. 침묵하라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추격대가 통로를 지나갔다. 그들의 통신기에서 음성이 계속 울렸다.
【목표 인물 미발견. 재탐색 명령】
【신용도 0인 거래자 2명 감지. 추격 계속】
이준호는 벽에 등을 기댔다. 신용도 0. 자신은 이제 뭔가? 아무도 그와 거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민준은 어떻게 여전히 자신과 있을 수 있는가?
"강민준이 신용도 0이 아니야?"
이준호가 속삭였다.
강민준이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난 오래전에 거래 추방 상태였어. 신용도 조작으로. 길드연합이 나를 버렸을 때부터."
김준석이 이준호를 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깨진 것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추격 중에 신용도가 0이 됐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추격대 지휘자가 신용도 0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본보기로. 그래야 다른 추격자들이 너를 쫓는 데 더 열심히 할 테니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김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가 아니었다.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난 깨달았어. 그림자 거래소에서 본 사람들이 자꾸만 떠올랐어. 상인 아주머니, 대학생, 무직자들. 넌 그들을 도왔어. 나는 그들을 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게 맞는 건지 묻기 시작했어."
김준석이 총을 내려놨다.
"박서연이 말해줬어. 길드연합에서 일했을 때, 신용도 시스템이 처음부터 부정하게 설계되었다고. 그녀는 고발하려다가 압력을 받고 입을 다물었어. 하지만 넌 계속 나아갔어. 넌 잘못된 거 아니었어."
이준호의 목이 메었다.
"근데 내 때문에 넌..."
"내가 선택한 거야. 길드연합을 따르는 게 더 이상 내 선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 지역 탐색 명령. 신용도 0 거래자 2명 및 이준호 추격 계속. 길드연합 특수 부대 진입】
강민준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이 없었다.
"이제 다음 단계야."
"다음 단계?"
"넌 공식 중개인이 됐어. 길드연합이 인정했어.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널 죽이고 싶어. 그리고 난 여전히 거래 추방 상태야. 김준석도."
강민준이 이준호를 봤다.
"넌 이제 길드연합과 협상할 수 있어. 넌 더 이상 사냥감이 아니야. 협상 상대야."
"협상이라고? 뭘 협상해?"
"공식 중개인의 조건. 넌 5% 수수료로 거래하도록 인정받았어.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야. 넌 이제 길드연합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어."
"난 그럴 힘이 없어."
"있어. 넌 이미 증명했어. 입소문이 퍼졌어. 거래소의 모든 사람이 너를 따라. 넌 이제 신화가 아니야. 현실이야."
뒤쪽에서 폭발음이 또 들렸다. 강민준의 사람들이 시간을 더 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유정희는?"
이준호가 물었다.
강민준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신용도가 420까지 떨어졌어. 그녀는 너를 원망할 수도 있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어. 넌 그들을 도우려고 했다는 걸. 이제 넌 공식 중개인이야. 넌 그들을 다시 도울 수 있어."
이준호의 눈이 떨렸다. 그것이 맞는가?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인가? 완전한 0%가 아닌 5%로 만족하는 것이. 타협하는 것이.
문이 폭발했다.
길드연합의 특수 부대가 들어왔다. 검은 방탄복을 입은 수십 명이 총을 들고 섰다. 그들 뒤에 한 명이 섰다.
한태원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는 이준호를 바라봤다.
"이준호. 넌 많은 걸 파괴했어. 하지만 넌 똑똑해. 시스템을 완전히 부수지 말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방법을 배웠어. 5% 수수료. 좋은 선택이야."
"그건 제 선택이 아니라..."
"상관없어. 결과가 중요해. 넌 이제 길드연합의 공식 중개인이야. 모든 거래자는 넌 신뢰할 수 있는 중개인으로 인식할 거야. 그리고 넌 5%로 거래할 거고, 그 5%의 일부는 길드연합에 올 거야."
한태원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넌 혁명가가 아니야. 넌 사업가야. 그게 더 현실적이야."
이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 길드연합과 거래를 하고 있는가? 타협하고 있는가?
그 순간, 신호실의 통신기에서 음성이 들렸다.
【박서연에서 통신. 길드연합 리더 한태원에게】
한태원이 통신기를 들었다.
"뭐?"
【공식 중개인 계약서 전송. 확인 요청】
화면에 문서가 떠올랐다. 길드연합의 공식 중개인 계약서였다. 조건은 명확했다. 5% 수수료. 길드연합에 월 10억 크레딧 상납. 대신 길드연합의 보호와 공식 지위.
하지만 맨 아래 조항이 있었다.
【공식 중개인은 모든 거래자에게 동등한 서비스 제공 의무. 신용도 차별 금지. 수수료 투명성 공개 의무】
한태원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뭐야?"
"제 조건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5%로 만족하는 대신, 신용도 차별을 없애야 합니다. 모든 거래자가 동등해야 합니다."
"그건 안 돼. 신용도가 낮은 거래자는 위험해."
"아니요. 신용도가 낮은 이유는 그들이 거래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래에 실패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차별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한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냉소였다.
"넌 여전히 이상주의자네. 하지만 이제 넌 시스템의 일부야. 시스템을 바꿀 수 없어. 시스템은 바뀔 수 없어."
"그건 거짓입니다."
강민준이 나아왔다. 그의 눈은 한태원을 마주했다.
"시스템은 항상 바뀌어. 그건 단지 누가 그걸 바꾸냐의 문제일 뿐이야."
한태원이 손을 들었다. 특수 부대가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신호실의 벽 전체가 밝아졌다.
모니터들이 일제히 켜졌다. 화면에는 이준호의 역수수료로 인해 신용도가 회복된 거래자들이 보였다. 수천 명이었다. 그들은 거리에 모여 있었다.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신용도 차별 철폐】
【공평한 거래를 원한다】
【이준호를 지지한다】
화면이 계속 바뀌었다. 다른 도시들도 나타났다. 모두 같은 메시지를 외치고 있었다.
한태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뭐야?"
박서연의 목소리가 통신기에서 들렸다.
【난 길드연합 내부 데이터를 모두 공개했어. 신용도 조작, 수수료 배분, 모든 것. 지금 인터넷은 이것으로 뒤집혔어. 길드연합의 내부 고발자는 여럿이야. 넌 더 이상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어】
한태원이 천천히 물러났다. 특수 부대도 무기를 내렸다. 그들은 더 이상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강민준이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정말로 시작이야."
이준호는 화면을 바라봤다. 수천 명이 자신을 위해 나왔다. 자신의 이상을 따라왔다. 자신이 도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승리인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김준석이 이준호의 옆에 섰다. 그의 신용도는 여전히 0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후회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이제 뭘 할 거야?"
이준호가 물었다.
"길드연합과 협상해. 그리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 완전한 0%는 아니지만,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강민준이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
"모르지. 하지만 시스템은 바뀐다. 우리가 바꾸니까."
강민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순간, 신호실의 모니터들이 모두 같은 문구를 띄웠다.
【시스템 업데이트: 신용도 차별 정책 폐지 검토 중】
이준호는 화면 속의 수천 명을 다시 봤다. 그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공평한 거래】
【신용도 차별 철폐】
【이준호】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신호실 밖에서는 길드연합의 내부 분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서연의 고발로 밝혀진 부정부패는 조직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다른 메가 길드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준호의 5% 수수료 시스템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인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이.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타협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었다. 결정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할게."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명확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신용도 차별 폐지는 선택이 아니야. 필수야. 그리고 내가 공식 중개인이 되는 순간, 난 길드연합의 감시 대상이 될 거야. 그럼 강민준과 김준석도 보호받아야 해. 그들이 거래 추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해."
한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동의였다.
이준호는 화면 속의 시위대를 다시 봤다. 유정희가 보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거리에 나와 있었다. 신용도 420의 그 남편이. 그들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것이 이준호가 원했던 변화였다.
"계약서를 가져와."
이준호가 말했다.
한태원이 손을 들었다. 한 명의 부하가 계약서를 들고 들어왔다. 이준호는 펜을 집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서명을 했다.
【공식 중개인 계약 체결】
【신용도 차별 정책 폐지 협상 개시】
【새로운 거래 질서 수립 예정】
모니터에 메시지가 떴다.
강민준이 이준호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이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신호실의 창문 너머로 거리의 시위대가 보였다. 그들은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목소리는 다르게 들렸다. 절규가 아니라 희망이었다.
완전한 0%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준호의 선택이었다. 이것이 그가 믿는 길이었다.
신호실의 모니터들이 계속 켜져 있었다. 길드연합의 내부 통신이 울렸다. 협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태원은 이미 상층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준호의 공식 중개인 지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준호는 강민준과 김준석을 봤다. 둘 다 신용도 0이었다. 하지만 둘 다 여기 있었다. 그들이 함께 바꾼 세상 속에서.
시위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다른 도시들도 동참하고 있었다. 이것이 혁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