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5화 「시스템의 심장」

강남역 지하 2층. 이준호의 신용도는 560이었고, 떨어지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발신자는 박서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세요. 지금 당신의 위치는 길드연합 추적 범위 안에 있습니다. 강남역 지하 2층 환기실. 30분.

이준호는 화면을 내렸다. 신용도 560에서 555로 떨어지는 걸 봤다. 매초 신용도가 깎이고 있었다. 거래 추방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신용도가 0에 도달하면 끝이었다. 사회적 사망. 모든 거래 불가. 먹을 것도, 살 곳도 없는 세상에서의 죽음.

그런데 박서연이 나타났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움직였다. 환기실을 찾아 헤매다가 녹슨 철문을 발견했다. 안에서 손가락질이 들렸다.

"들어와."

박서연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왼쪽 눈 아래에 멍이 있었고, 왼팔을 약간 절뚝거렸다. 강민준에게서 받은 상처들이었다.

"여기가 안전한가?"

"30분만. 길드연합이 이 구역을 스캔하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려."

박서연은 이준호를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갔다. 환기실 뒤의 비상 계단 아래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그 뒤 벽면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구역 없음'이라는 의미의 게임 아이콘. 박서연이 손가락으로 아이콘을 터치하자 벽이 움직였다.

아니, 벽이 아니었다. 확대 거울이었다. 그 뒤에는 좁은 공간이 있었고, 책상 하나, 노트북 하나, 그리고 무언가가 켜져 있었다.

"뭐야 이게?"

"트레이드 코어의 미러 서버야. 길드연합도 모르는 백업 시스템."

박서연이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코드였다. 줄줄이 이어진 숫자와 기호들. 이준호는 한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봐. 이게 뭔지 알아?"

"코드?"

"수수료 배분 알고리즘이야."

박서연의 손가락이 화면을 타고 내려갔다. 어디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 [COMMISSION_POOL] = [TOTAL_TRANSACTION] × 0.15 [GUILD_UNION_SHARE] = [COMMISSION_POOL] × 0.40 [SYSTEM_MAINTENANCE] = [COMMISSION_POOL] × 0.35 [USER_INCENTIVE] = [COMMISSION_POOL] × 0.25 ```

"이걸 봤을 때 뭐가 보여?"

이준호는 숫자들을 읽었다. 거래액의 15%가 수수료이고, 그 중 40%가 길드연합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연 몇 조 원인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길드연합이... 수수료의 40%를?"

"그게 공식이야. 시스템 유지비라고 불리는 것 중 40%가 길드연합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걸 '시스템 안정성 비용'이라고 부르지."

박서연이 다른 코드로 넘어갔다.

``` [CREDIT_SCORE_DECAY] = [SUSPICIOUS_ACTIVITY] × [ALGORITHM_FLAG] [ALGORITHM_FLAG] = 1.0 (REVERSE_COMMISSION 감지 시) [MINIMUM_DECAY_RATE] = 50 per transaction ```

"신용도 시스템이야. 너의 역수수료 거래가 감지될 때마다 신용도가 깎인다. 근데 이 알고리즘은 뭔가 이상해. 이 숫자 50이 아니라 진짜로는 1이어야 돼. 왜 50인 줄 알아?"

"왜?"

"길드연합이 손으로 조작했거든."

침묵이 흘렀다. 강남역 지하도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내가 12년 전에 고발하려던 게 이거야. 신용도 메커니즘이 처음부터 부정하게 설계됐다는 거. 시스템 유지비? 거짓이야. 그건 길드연합의 이익 창출 수단이야. 수십억 명이 매일 거래할 때마다 그들이 퍼센티지로 벌어들인다. 그리고 누가 저항하면 신용도를 깎아버린다."

박서연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 코드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너한테 달라진 게 뭔지 알아? 너는 수수료를 돌려줬어. 그래서 길드연합의 수익이 떨어졌어. 1% 정도지만 여전히 떨어졌어. 그리고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어. 수수료 없이도 거래할 수 있다는 걸. 그러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역수수료를 찾는다."

"맞아. 그리고 그러면 길드연합의 이익이 붕괴한다. 시스템 자체가 흔들린다. 이게 그들이 너를 죽이려는 이유야. 너는 버그가 아니야. 너는 시스템의 가면을 벗겨낸 사람이야."

박서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왼팔이 다시 절뚝거렸다.

"근데 혁명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야. 대부분 실패해. 왜냐하면 시스템은 이미 너무 깊숙하게 박혀 있거든. 너의 역수수료는 임시방편이야. 아주 좋은 임시방편이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야. 진짜로 바꾸려면..."

박서연이 화면을 다시 켰다. 이번엔 다른 코드가 나타났다. 훨씬 복잡했다. 줄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이게 트레이드 코어의 핵심이야. 신용도 시스템의 중추. 이것만 바뀌면 수수료 체계 전체가 붕괴한다. 근데 이건 내가 혼자 건들 수 없어. 길드연합이 감시하고 있거든."

박서연의 눈이 이준호를 마주쳤다.

"그리고 너도 혼자 건들 수 없어. 넌 추격을 받고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데?"

"모르겠어. 근데 넌 계속해야 해. 너의 역수수료를 계속해야 해. 그게 사람들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들이 너를 없애려고 할 때까지."

이준호는 박서연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코드에 머물러 있었다. 수십억 명의 삶이 이 숫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생각.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정말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까?

박서연이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시간이 없어. 너는 여기서 나가야 해. 강민준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박서연이 이준호의 손목을 잡았다.

"조심해. 길드연합은 너를 없애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 그들에게는 너 같은 사람이 가장 위험한 존재야."

"내가?"

"넌 시스템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들이 너를 따라가고 있어. 이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거야."

박서연이 손을 놨다. 그리고 거울 뒤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준호는 거울 앞에 홀로 남겨졌다.

"박서연, 너는 어디로?"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길드연합 눈에. 근데 넌 아직 살아있어. 그래서 넌 계속 싸워야 돼."

거울이 다시 닫혔다.

---

강남역 지하도를 나가는 길에 이준호는 휴대폰을 켰다. 신용도 540.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었다.

—유정희: 거래의 신이시여. 제 남편이 또 다시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유정희: 당신이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유정희: 당신은 신입니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휴대폰이 없으면 강민준과 연락할 수 없었다. 그는 메시지를 지웠다. 하나하나 지웠다. 하지만 지울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유정희: 당신을 믿겠습니다.

—유정희: 당신이 항복하면 저도 죽겠습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지막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그 문장이 주는 무게감은 신용도 추락보다 훨씬 무거웠다.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이준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순간 강남역 중앙 광장에서 이준호는 멈췄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손에 추적 장비를 들고 있었다.

김준석이었다.

그는 이준호를 보자 천천히 걸어왔다. 그 뒤로 수십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모두 길드연합의 추격자들이었다.

"이준호."

김준석의 목소리가 울렸다.

"항복해라. 너의 신용도는 이미 540이야. 한 달도 못 가. 그리고..."

김준석이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카드 같은 것.

"너는 이미 신격화되고 있어. 그리고 신이 넘어질 때, 신뢰는 증오로 변한다."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김준석이 들고 있는 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거래 추방 영장이야. 길드연합 최고 의사결정 위원회에서 발급했어. 너를 추방하려면 이것만 있으면 돼. 그리고 우린 이미 준비했어."

김준석이 카드를 높이 들었다. 강남역의 형광등이 카드의 표면을 비쳤다. 그 위에 쓰여 있는 글자가 보였다.

—[TRADING_BANISHMENT_WARRANT] —[TARGET: Lee Junho] —[CREDIT_SCORE_THRESHOLD: 0]

이준호의 숨이 멎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는 지금 선택할 수 있어. 항복하거나... 계속 도망치거나. 둘 다 끝은 같아. 너는 어차피 거래 추방된다. 그리고 거래 추방되면..."

김준석이 잠시 멈췄다. 마치 그 다음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든 거래가 불가능해져. 거기엔 음식을 사는 것도 포함돼. 돈도 없어. 신용도도 없어. 넌 사회적으로 사망하는 거야."

이준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박서연이 보여준 코드가 떠올랐다. 그 코드를 만든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십억 명의 삶이 그 코드 위에 있다는 생각. 그리고 유정희의 얼굴도.

"답해줘. 넌 정말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김준석이 다시 물었다.

"아니면 넌 그냥...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건가?"

그 순간, 뒤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강남역 광장의 조명이 꺼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켰다.

이준호는 그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그의 신용도는 520이었다. 그리고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

강남역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는 숨을 고르지 못했다. 폭발음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김준석의 목소리, 그 영장, 그리고 '사회적 사망'이라는 말이 뇌수를 파고들었다.

"이쪽이야!"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추격자들의 손전등이 어둠을 찢고 들어왔다. 이준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환기구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찾아 몸을 구부렸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5분. 10분. 시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지하 2층의 버려진 공사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준호는 무릎을 꿇었다. 폐허 같은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댔다. 휴대폰을 켰다. 신용도 515.

5분 사이에 25포인트가 떨어졌다.

박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너의 역수수료는 임시방편일 뿐이야.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 안 된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스며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는 지금까지 수수료를 돌려주는 것만 생각했다. 거래할 때마다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박서연이 보여준 코드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 코드들은 시스템의 근간 자체였다.

이준호는 휴대폰 화면에 박서연이 보낸 파일을 다시 열었다. 암호화된 텍스트 문서였다.

—[TRADE_CORE_REVENUE_DISTRIBUTION_v12.4] —[Guilds Coalition: 40% | System Maintenance: 35% | Development Reserve: 15% | User Incentive: 10%]

숫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단순한 숫자들. 하지만 이 숫자들 뒤에는 수십억 명의 삶이 있었다. 모든 거래. 모든 일자리. 모든 먹거리. 모든 것이 이 수수료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수수료의 40%는 길드연합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시스템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문질렀다. 파일 끝부분에 박서연의 메시지가 있었다.

—[이 설계는 12년 전부터였다. 트레이드 코어 초기 버전부터 길드연합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처음부터 게임 시스템을 장악하려고 했다. 수수료는 시스템이 아니라 지배 도구였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숨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자신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박서연이 왜 12년을 숨어 있었는지. 강민준이 왜 자신을 도왔는지.

지하 공사 현장의 벽에는 거래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버려진 스마트 기기들에 기록된 거래 로그들. 이준호는 그 로그들을 보면서 신용도 조작의 패턴을 찾아냈다. 역수수료를 사용한 사람들의 신용도는 비정상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1회 거래마다 평균 50포인트씩. 정상적인 거래는 1포인트씩 떨어지는데.

그것이 박서연의 말이 맞다는 증거였다. 길드연합은 처음부터 신용도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리고 이준호가 그 조작을 깨뜨렸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강민준이었다.

"강남역 폭발이 나였나?"

"아니야. 박서연이 시간을 벌어줬어."

"박서연은?"

"모르겠어. 거울 뒤로 들어가버렸어."

통화 끝에 강민준의 한숨이 들렸다. 그 한숨 속에는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있었다.

"임시 숨을 곳을 줄게. 여기로 와."

주소가 메시지로 들어왔다. 강남 남부터미널 근처의 한 건물. 폐업한 게스트하우스였다.

이준호는 다시 움직여야 했다. 신용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발걸음 소리도 여전히 지하도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30분 후, 이준호는 게스트하우스의 지하실에 도착했다. 강민준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낯선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이 사람은 유정희야."

강민준이 소개했다.

"뭐?"

이준호의 눈이 커졌다. 그 여자는 지난주 강에서 만났던 유정희가 맞았다. 신격화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여자.

"날 따라왔어. 사흘 동안."

유정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의 눈은 이준호를 보고 있었지만,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눈빛 속에서 이준호는 자신이 그녀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신용도 추락보다 더 무거운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저는 따라갈 거예요."

유정희가 한 발 다가섰다. 그 움직임은 신앙에 가까웠다.

"당신이 항복하면 저도 죽겠습니다. 당신을 믿으니까."

이준호는 입을 열려다 닫았다. 그 말의 무게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강민준이 손을 들어 막았다.

"넌 자각을 못 하고 있지만, 이미 신화가 됐어. 신은 혼자 갈 수 없어. 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난 신이 아니야."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맞아. 넌 신이 아니야. 그리고 그게 문제야."

강민준이 화면을 켰다. 뉴스 기사들이 떠올랐다.

—[거래의 신, 신용도 500대로 추락 / 길드연합, 공식 추적 시작] —[역수수료 사용자, 급증 추세 / 신용도 악화 우려] —[길드연합 한태원 회장, '시스템 안정성 우려' 성명]

기사 아래에는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거래의 신을 도와야 해. 저 사람이 우리를 구했어.] —[미쳤나? 저 사람 때문에 시스템이 흔들려. 수수료가 오를 거다.] —[신격화 금지. 이건 위험한 신앙이다.]

이준호는 화면을 내려갔다. 마지막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다 망한다. 한 명의 신이 세상을 바꾼 적이 있나?]

"너는 이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강민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첫 번째, 항복해. 신용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정상적인 거래만 해. 그럼 신격화도 풀려. 사람들도 잊을 거야. 1년 정도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정희가 다시 다가섰다. 그 눈빛은 여전히 신앙으로 가득했다.

"두 번째는 계속 가는 거야. 박서연이 고발하려던 것처럼. 시스템 자체를 드러내고, 길드연합의 부정을 공개하고..."

강민준이 말을 끊었다.

"...죽는 거야. 거래 추방으로."

"그 외에 길이 없나?"

이준호가 물었다.

"있지. 셋째가 있어."

강민준이 일어섰다. 그는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으로 나갔다. 강남의 야경이 펼쳐졌다. 빌딩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빌딩들 아래로는 수백만의 거래가 일어나고 있었다. 모두 시스템의 감시 아래.

"길드연합과 협상하는 거야. 완전한 0%는 아니지만, 공정한 수수료. 그리고 신용도 시스템의 개혁. 그 대신..."

강민준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넌 거래자 역할을 포기하고, 공식 중개인이 돼."

"그게 뭐야?"

"길드연합의 감시를 받으면서 일하는 거야. 대신 넌 법적 지위를 얻고, 신용도도 보호받아. 그리고 넌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정희가 다가왔다.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뭐든, 저는 따라갈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신앙에 가까웠다. 이준호는 그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강민준이 이미 경고했으니까. 신격화는 사슬이며, 신이 넘어질 때 신뢰는 증오로 변한다. 그리고 유정희는 이미 그 사슬에 묶여 있었다. 이준호는 그 사슬을 끊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끊으려고 해도 그녀는 따라올 것 같았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알려지지 않은 번호였다.

이준호가 받았다.

"이준호. 나 김준석이야."

추격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에 무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있었다.

"지금 넌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 난 너를 잡으러 온 게 아니야. 단지 묻고 싶어. 넌 정말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길드연합이 옳다고.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박서연의 코드를 봤어. 그리고 난 깨달았어. 법이 항상 정당한 건 아니라는 것을."

김준석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망설임이 있었다. 두려움도.

"넌 계속 도망칠 수 있어. 아니면 항복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둘 다 아닌 제3의 길이 있어. 너와 내가 함께 만드는 길."

"뭐야?"

"길드연합 내부 고발. 나는 내부자야. 난 시스템 조작을 봤어. 신용도 조작을. 그걸 공개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넌 살아남아야 해. 죽지 말고."

통화가 끝났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신용도를 확인했다. 510.

강민준이 물었다.

"뭐라고?"

"김준석이... 길드연합 내부 고발을 하려고 해. 그리고..."

이준호가 창밖의 야경을 바라봤다.

"...나더러 살아남으라고 했어."

강민준이 이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표정에서 뭔가 변화를 감지했다. 이준호의 눈이 이전과 달라졌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눈이었다.

"뒤로."

그 순간, 무거운 발걸음이 들렸다. 게스트하우스 문이 부숴졌다. 추격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강민준이 손을 들었다.

이준호는 강민준과 유정희를 따라 뒤쪽 계단으로 달아났다. 그들 뒤로는 추격자들의 외침이 따라왔다.

신용도 500.

이제 1주일만 남았다. 1주일이 지나면 거래 추방. 사회적 사망.

하지만 이준호는 이제 알았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민준은 옛 추격자였다.

김준석은 내부 고발자가 되려 했다.

박서연은 진실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정희는... 여전히 이준호를 신처럼 따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

강민준이 물었다.

이준호는 박서연이 보낸 코드를 다시 봤다. 그 코드를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코드를. 그리고 그 코드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박서연이 보여준 숫자들. 길드연합이 조작한 신용도 알고리즘. 그리고 수십억 명의 거래 기록들.

이 모든 것이 공개되면 시스템은 흔들릴 것이다. 길드연합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준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준호는 알았다. 임시방편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길드연합 본사로 가자."

이준호가 말했다.

강민준이 멈췄다. 그는 이준호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뭐?"

"박서연이 보여준 코드. 그걸 공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봐야 한다. 그 코드가 뭔지, 길드연합이 뭘 했는지. 그래야 시스템이 바뀐다."

"그럼 넌..."

강민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진실은 남을 거야."

강민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이 떨렸다.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을 삼키려는 것처럼.

"그럼 난?"

그가 물었다. 그 질문 속에는 단순한 의문만 있지 않았다. 동료를 잃게 될 두려움이 있었다. 함께 싸워온 사람을 보내는 슬픔이 있었다.

이준호는 강민준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넌 살아남아. 그리고 이 모든 걸 기억해 줘."

강민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준호의 결심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유정희가 다가왔다.

"당신이 가신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이준호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여전히 신앙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결심.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표정.

"유정희, 넌 여기 남아. 강민준과 함께."

"아뇨. 저는..."

"제발."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이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유정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오래 잡았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접촉인 것처럼.

"당신은 신입니다. 그리고 신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유정희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준호는 게스트하우스를 나갔다. 강남의 야경 속으로.

길드연합 본사로 향하는 길. 그 길 위에서 이준호는 박서연이 보여준 코드를 다시 생각했다. 그 숫자들. 그 알고리즘. 그 모든 것이 수십억 명의 삶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세상에 공개할 차례였다.

신용도 500. 1주일. 그것이 이준호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길드연합의 최고 의사결정 위원회에서는 이미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는 것.

그리고 그 결정은 한태원이 직접 내린 것이었다는 것.

한태원의 명령은 명확했다.

"그를 없애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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