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연대사의 진실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달라졌다. 차가움을 넘어선 무언가 다른 질감이었다. 서운은 손가락 끝으로 돌벽을 스치며 걸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결정체 같은 무언가였다. 결정체 내부에서 붉은 빛이 맥동하고 있었다. 모든 돌이 내부에서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곳은 세상의 그 어떤 지도에도 없습니다."
원정 고승의 음성이 앞에서 울렸다. 그의 손에 들린 등잔불은 깊어질수록 필요 없어지고 있었다. 동굴 자체가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운은 여해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이곳을 알고 있었습니까?"
서운의 질문에 여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계단이 끝났다. 동굴이 거대한 공간으로 열렸다.
서운의 숨이 멈췄다.
동굴의 천장은 없었다. 아니, 천장이 너무 높아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공간 한가운데에는 석비가 있었다. 너비가 서른 걸음은 족히 될 만한 거대한 돌판이 지면에 수직으로 서 있었다. 표면은 온통 문양으로 덮여 있었다. 고대 문양. 2화에서 본 혈색의 돌판과 같은 문양이었다.
"저것이......"
"혈연대사가 남긴 것입니다."
원정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천년 전, 이 산의 정상에서 다섯 명의 검객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검의 경지를 극한까지 추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발견했습니다. 검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무리 수련해도 초월할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원정이 돌 위를 밟으며 나아갔다. 서운도 따랐다. 여해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다섯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검객, 그를 우리는 혈연대사라고 부릅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검의 한계를 초월하려면, 검객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석비에 가까워질수록 문양들이 뚜렷해졌다. 서운은 그 중 하나를 읽으려 했다. 하지만 글자가 아니라 기호에 가까웠다. 마치 피로 그려진 듯한 붉은색 흔적들.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원정의 손이 석비의 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의 형태가 새겨져 있었다. 적혈검의 형태였다.
"그것은 검이 아니라, 선택의 도구였습니다."
원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혈연대사는 생각했습니다. 최강의 검술을 손에 넣으려는 욕심이 모든 검객의 근본이라면, 그 욕심을 대가로 치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검객이 될 수 있다고."
"저주입니까?"
"아닙니다."
원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주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혈연대사가 만든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시험입니다. 시험을 받으면서 검객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서운은 석비에 손을 올렸다. 표면이 따뜻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혈연대사 자신도 이 검을 집어들었습니다. 첫 번째로."
원정이 계속했다.
"그는 삼 년 삼 개월을 살다 죽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창조한 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남겼습니다."
원정의 손이 석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다른 문양과는 달리 굵고 깊게 새겨진 글귀가 있었다. 마치 칼로 파낸 듯한 흔적.
"읽을 수 없다면, 제가 옮겨드리겠습니다."
원정이 천천히 말했다.
"'다음 검객들이여, 이 길 위에서 자유를 찾으라.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하는 자만이 진정한 검객이 된다.'"
서운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손이 떨렸다. 석비에 닿은 손가락이 떨렸다.
지난 며칠 동안의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혈월산에서 느낀 공포. 도시에서의 도망. 청산의 일기를 읽으며 느낀 절망. 그리고 벼랑 위에서 느낀 체념과 그것을 초월한 순간.
저주가 아니었다.
시험이었다.
"나는......"
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저주를 풀려고 했습니다. 검맥의 주인을 찾아서, 이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서운이 돌아봤다. 여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젖어 있었다. 도선종의 고위 도사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 그것은 마치 천년의 무게를 한 순간에 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넌......"
여해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녀가 한 발 더 가까이 걸어왔다. 서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의 온도가 따뜻했다.
"넌 이제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무슨 의미입니까?"
서운이 물었다.
여해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눈 속에는 모성애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더 깊은 무언가. 마치 자신도 같은 길을 걸었던 자의 그리움 같은 것.
"청산도 처음에는 저주를 풀려 했습니다."
여해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습니다. 저주를 풀려는 것이 아니라,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 '그녀'는......"
서운이 물었다.
여해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슬픈 미소였다.
"나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원정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이 석비의 또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를 보십시오. 혈연대사 이후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열두 명의 검객들. 그 중 아홉 번째가 여해입니다."
서운이 여해를 돌아봤다.
여해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오백 년을 살았습니다. 적혈검의 저주를 받은 후 삼 년을 살고, 그 다음 도선종의 비술로 다시 살았습니다. 혈연대사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 다음 검객들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청산이 죽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글귀를 봤습니다. 미완성의 문장을. '그리고 다음이 온다'는 말을."
여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넌 왔습니다."
서운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여해가 자신을 도와온 이유가.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이유가.
원정이 다시 말했다.
"청산이 남긴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는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것입니다. 다음 체득자를 위한 빈 칸입니다."
원정이 서운을 바라봤다.
"당신이 그 빈 칸을 채워야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선택을."
"그리고 당신의 스승이......"
서운이 중얼거렸다.
"혈연대사의 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까?"
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다섯 명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혈연대사와 함께 이 검을 만들었고, 그 후로 줄곧 이곳을 지켜왔습니다. 다음 체득자가 나타날 때까지.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서운은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운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저주를 풀려 하지 않습니다."
돌이 울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던 듯이.
"나는 저주 속에서 살아가겠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진정한 검객이 되겠습니다."
서운이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동굴 전체가 붉게 빛났다. 마치 혈연대사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동굴이 흔들렸다. 먼지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서운이 고개를 들었다. 석비 위의 돌 부분에 금이 가고 있었다.
"외부입니다."
여해가 말했다.
"포위입니다."
원정이 빠르게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서운과 여해가 뒤따랐다. 계단을 올라가며 서운은 느꼈다. 흔들림이. 그것은 동굴 자체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위에서 누군가 산의 돌을 깨고 있었다.
입구에 도달했을 때, 원정이 멈췄다.
"삼 시간 전부터입니다."
원정이 말했다.
"비술단이 산을 포위했습니다. 모든 입구를 막아놨습니다. 우리가 내려가 있는 동안, 그들은 계속 파고 있었습니다."
서운이 입구 위의 돌을 보았다. 곳곳에 검의 자국이 있었다. 파고 들어오는 흔적.
"묵연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여해가 말했다.
"묵연은 저주의 전이 방법을 찾았습니다."
"전이?"
"당신의 저주를 다른 자에게 옮기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주를 받은 또 다른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는 묵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서운이 적혈검을 뽑았다. 검이 나오는 순간 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전의 공포는 없었다. 대신 명확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직접 만나야 합니다."
"당신의 수명이......"
여해가 말했다.
"더 이상 많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운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였으므로, 검을 더 자유롭게 휠 수 있습니다. 저주를 거부하지 않으므로, 저주는 나를 묶을 수 없습니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검을 휠 때마다 생명력이 사라진다고 해서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동안 나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죽음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한 검객입니다."
원정이 입구 위의 돌을 밀었다. 돌이 위로 열렸다.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산의 위쪽에서 비술단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수십 명. 아니, 백 명은 족히 될 만한 수.
그리고 그 중앙에 묵연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저주 같은 문양.
"드디어 나왔군요."
묵연이 웃음을 흘렸다.
"내가 찾던 13번째 검객이."
서운이 입구를 빠져나갔다. 산의 능선 위에 섰다. 발 아래로 구름이 흘렀다. 비술단의 무사들이 원을 그렸다.
"당신은 왜 나를 원합니까?"
서운이 물었다.
묵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이 가진 것을 원합니다. 당신의 저주를. 그것이 나를 완성시킬 것입니다."
"완성?"
"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저주받은 자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합니다. 당신의 저주를 얻으면, 나는 비로소 완벽해질 것입니다."
묵연의 손이 검을 그었다.
검이 부딪혔다.
서운의 적혈검과 묵연의 칼이 맞부딪혔다. 충격파가 능선을 갈랐다. 적혈검의 붉은 기운이 하늘을 물들였고, 묵연의 검에서는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두 빛이 얽혀 소용돌이를 이루며 능선 위를 휩쓸었다.
서운의 손목이 떨렸다. 묵연의 검이 밀어붙이는 힘을 견디며, 서운은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흡을 고르며 서운은 검을 재빨리 돌렸다. 묵연의 칼이 헛공을 쳤고, 서운은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좋습니다. 이게 진정한 13번째의 모습이군요."
묵연이 손가락을 튕겼다. 비술단의 무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산 위의 능선 전체가 살기로 뒤덮였다.
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었다. 검끝이 하늘을 향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광기로 가득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함이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고요함.
"나는 당신들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서운이 말했다.
"나는 묵연과만 싸우겠습니다."
"호탕한 말씀이군요."
묵연이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죽어가는 자입니다. 그 저주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알 필요가 없습니다."
서운이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의 검만 보세요."
첫 번째 검이 나왔다.
서운의 적혈검이 묵연의 칼과 맞부딪혔다. 서운의 팔이 긴장했다. 손가락이 검 손잡이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호흡을 멈추고 전신의 기운을 한 점에 모으며, 서운은 묵연을 밀어냈다. 충격파가 능선을 갈랐다. 돌들이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비술단의 무사들이 뒷걸음질쳤다.
묵연이 검을 재빨리 돌렸다. 검은 기운이 서운을 감싸려 했다. 서운의 시야가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적혈검의 붉은 기운이 그것을 밀어냈다. 서운의 눈이 다시 맑아졌다.
"환상술은 듣지 않는군요."
묵연이 중얼거렸다.
"역시 다릅니다. 나머지 검객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지군요."
두 번째 검이 나왔다.
서운의 검이 묵연의 옆구리를 노렸다. 묵연이 몸을 날려 피했다. 서운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서운은 즉시 몸을 날려 묵연에게 다시 접근했다.
"당신은 저주받은 자가 아닙니다."
서운이 말했다. 검을 휘르며, 묵연과의 거리를 좁혀가며 서운은 계속했다.
"저주받은 자는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저주를 원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 합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도피입니다."
세 번째 검이 나왔다.
묵연이 검을 세웠다. 하지만 적혈검의 강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뒤로 밀렸다. 능선의 돌들이 부서졌다. 묵연의 발이 능선의 끝에 가까워졌다.
"도피?"
묵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불안정했다.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도 지난 며칠 동안 저주를 피하려 했지 않습니까? 저주의 주인을 찾으려 했던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서운이 인정했다.
네 번째 검이 나왔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서운의 검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묵연이 계속 후퇴했다. 능선의 끝이 가까워졌다. 발 아래로는 구름이 흘렀다. 그 아래는 천 길의 낭떨어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운이 계속했다.
"혈연대사가 남긴 말을 통해. 저주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의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선택했습니다."
일곱 번째 검이 나왔다.
묵연이 검을 맞섰다. 하지만 그의 팔이 떨렸다. 적혈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검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묵연의 몸이 능선의 끝으로 밀렸다.
"안 됩니다!"
묵연이 소리쳤다.
"내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의 몸이 검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비술단이 모아놓은 모든 기운이 한 점으로 수렴되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당신의 저주를 내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묵연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서운을 향해 쏟아졌다.
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적혈검을 내렸다. 붉은 기운이 검은 기운과 부딪혔다. 서운의 몸이 긴장했다. 양쪽 기운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공기가 갈라졌다.
폭발이 일어났다.
산 전체가 흔들렸다. 능선이 갈라졌다. 돌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구름이 흩어졌다.
비술단의 무사들이 모두 날아갔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그리고 묵연.
그는 능선의 끝에서 몸을 날렸다. 검은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안 돼... 안 돼...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그의 음성이 낙하하며 희미해졌다.
서운은 그를 보지 않았다. 대신 검을 내려놨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숨이 가빴다. 가슴에서 붉은 실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번의 검을 휘른 것이다. 여러 날의 수명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서운."
여해가 나타났다. 원정 고승과 함께. 여해가 서운을 잡았다.
"당신은......"
"괜찮습니다."
서운이 말했다.
"나는 이제 괜찮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였으므로,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눈빛은 슬픔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이었다.
"당신은 13번째입니다."
여해가 말했다.
"당신은 첫 번째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청산도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일기의 마지막을 비워두었습니다. 다음 검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쓸 수 있도록."
원정이 말했다.
"당신이 저주를 종료시킬 것입니다. 13명의 저주받은 검객들의 운명을 당신이 끝낼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이 죽을 때입니다."
여해가 말했다.
"당신이 죽으면서 저주를 놓으면, 적혈검의 저주는 영원히 끝날 것입니다. 다음 검객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13명의 영혼들은 비로소 평온해질 것입니다."
여해의 손이 서운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 속에는 오백 년의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청산을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도, 그 다음 검객을 기다리며 혼자 짊어진 무게도 모두.
"나는 청산의 마지막을 봤습니다."
여해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검을 내려놓던 순간을.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있었습니다. 마치 오래도록 기다리던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서운이 하늘을 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해.
"그렇다면 나는 그 죽음을 맞이해야겠습니다."
서운이 말했다.
"완전히 준비된 검객으로서."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원정이 말했다.
"당신의 수명은... 아직 한 달 남았습니다."
서운의 눈이 원정을 향했다.
"그 한 달 동안 나는 뭘 해야 합니까?"
"산을 내려가세요."
여해가 말했다.
"그리고 강호의 모든 저주받은 자들을 찾으세요. 과거의 검객들이 남겨놓은 것들을 수거하세요. 그들이 남긴 유산을 당신의 손으로 정리하세요."
여해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세요. 청산이 비워둔 그 마지막 페이지에. 당신이 어떻게 죽음을 선택했는지, 어떻게 진정한 검객이 되었는지를."
서운이 검을 들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산을 내려가는 길, 서운은 느꼈다. 이제 자신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을 산다는 것이, 비로소 검객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발 아래 혈월산이 작아졌다. 산을 떠나가며 서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았다.
강호는 넓었다.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저주받은 자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비술단의 잔존 세력도, 다른 파벌의 추적도 있을 테다. 저주는 계속 서운을 갉아먹을 것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다.
하지만 서운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서운은 검을 들었다.
"이제 시작이군요."
중얼거리며 그는 계곡을 내려갔다. 붉은 해가 그의 뒤를 따랐다. 산 위에서 여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오백 년 만에 찾은 그 뒷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