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벼랑 위의 바람이 매섭다.

구름 아래 세 사람이 섰다. 서운과 여해, 그리고 검은 옷의 비술단주 묵연. 서운의 손은 여전히 청산의 일기장을 쥐고 있었고, 묵연의 눈은 그 책을 향해 있었다. 아니, 책이 아니라 서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살려주겠다고?"

서운의 목소리가 차갑다. 벼랑 아래로 수천 길 구름이 소용돌이친다.

묵연이 한 발 내디딘다. 그의 뒤로 비술단의 검사들이 산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다. 호수 가의 검은 옷들, 셀 수 없이 많다.

"저주를 나에게 넘겨주면, 넌 자유다."

묵연의 목소리는 꿀처럼 부드럽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독이 흐른다.

"불가능하다."

서운이 일기장을 품에 눌러 담으며 발을 옮긴다. 청산의 글씨들이 눈에 떠오른다.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초월이 아닌 수용.

"가능하다."

묵연이 웃는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30년 강호를 누비며 기이한 능력들을 모은 자의 미소다.

"적혈검의 비밀 중 하나가 저주의 전이(轉移)다. 검맥의 창조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체득자가 원한다면 자신의 저주를 다른 자에게 옮길 수 있다. 그러면 넌 살고, 그자는 죽는다. 간단한 거래 아닌가?"

여해의 몸이 경직된다.

서운이 입을 연다. "정말 가능한가?"

"그렇다. 없으면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겠나."

묵연이 한 발 더 나간다. 비술단의 군대가 벼랑 위로 몰려온다. 100명이 넘는다. 산 전체가 검은 옷으로 뒤덮인다.

여해가 서운 앞으로 나선다. 도교의 비술이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오른다. 시간을 늦추는 능력. 공기가 걸쭉해진다.

"안 된다."

서운이 여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다.

"날 봐."

묵연이 한 발을 더 내딛는다. 이제 그는 서운과 팔 길이만 떨어져 있다.

"생각해봐, 서운. 넌 천재다. 최강의 검객이다. 하지만 3년이면 죽는다. 그게 너의 운명이다. 내가 그걸 바꿀 수 있어. 누군가 대신 죽으면 넌 산다. 얼마나 간단한가?"

서운이 검을 뽑는다.

적혈검이 공기를 가르며 나온다. 붉은 빛이 벼랑 위에 물든다. 묵연의 얼굴에도, 그 뒤 비술단 검사들의 얼굴에도.

"넘길 수 없다."

"강제로 빼앗겠다."

묵연이 손을 올린다.

비술단의 검사들이 일제히 칼을 그어낸다. 100개의 검이 동시에 공기를 나누며 올라온다. 구름이 갈라진다. 바위가 진동한다. 벼랑 위의 세 사람을 향해 검의 파도가 밀려온다.

서운이 먼저 움직인다.

적혈십삼식(赤血十三式)의 첫 번째 기술. 그의 몸이 흐릿해진다. 검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공중에 붉은 궤적이 그려진다. 첫 번째 검사가 떨어진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명, 열 명.

여해가 손을 뻗는다. 시간의 비술이 펼쳐진다. 몇몇 검사들이 느려진다. 원정 고승이 목탁을 울린다. 도교의 음향 비술이 산을 진동시킨다. 비술단의 진형이 흔들린다.

하지만 너무 많다.

서운이 적혈십삼식의 두 번째 기술을 펼친다. 이번엔 더 빠르다. 더 강하다. 검이 호를 그리며 내려온다. 20명이 동시에 뒤로 날아간다. 피가 구름 속으로 떨어진다.

세 번째 기술. 서운의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간다. 붉은 실 같은 것. 그것이 공중을 떠돈다. 서운의 피부가 옅어진다.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 저주를 사용할 때마다 생명력이 깎인다. 매 기술마다 며칠, 몇 주의 시간이 사라진다. 그 대가로 얻는 힘. 그 힘으로 또 누군가를 죽인다. 이 악순환을 계속해야 하는가?

네 번째 기술. 50명이 더 떨어진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산 전체가 진동한다. 바위들이 부서진다. 구름이 폭발한다.

서운이 멈춘다.

그의 앞에는 이제 비술단의 검사가 20명도 남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바위 위에 쓰러져 있다. 어떤 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묵연이 천천히 걸어온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없다.

"좋다. 그 정도면 충분해."

서운이 검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그의 손이 떨린다. 온몸이 떨린다.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검은 머리에 흰 것이 섞여 있다.

한 달.

한 달치의 생명력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그게 너의 강함이야, 서운. 아름답지 않은가? 최강이면서도 죽음으로 향하는 검. 그런데 넌 왜 그걸 계속 들고 있지? 넘겨줘. 그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묵연이 한 발 더 나간다. 이제 그는 서운의 검 닿을 거리에 있다.

"너의 저주, 내게 줘."

서운이 검을 든다. 하지만 묵연을 향해 내리치지 않는다. 단지 방어만 한다.

묵연이 웃는다.

"거절하는구나."

"그렇다."

"왜?"

서운이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여해가 앞으로 나선다.

"우리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너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여해의 목소리가 차갑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따뜻하다. 서운을 바라보는 눈이 어머니의 눈 같다.

"그 저주는 넘길 수 없어. 왜냐하면 그건 너의 것이기 때문이야. 너의 검이기 때문이야."

서운이 여해를 바라본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여해가 미소를 짓는다. 가느다란, 거의 보이지 않는 미소.

"넌 이미 깨달았으니까."

그 말이 서운의 가슴을 때린다. 깨달음? 자신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묵연이 움직인다. 그의 손에서 비술이 피어오른다. 독의 향기. 환상의 빛. 타인의 정신을 흔드는 음향.

여해가 손을 뻗는다. 시간이 느려진다. 묵연의 움직임이 마치 수중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둔해진다.

원정 고승이 목탁을 울린다. 또 다른 비술단 검사들이 올라오려 하자, 그의 음향 비술이 그들을 밀어낸다.

묵연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가 지금 너를 죽일 순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넌 어차피 죽을 테니까. 3년이 안 될 거야. 이 속도면 2년쯤 되겠지."

그가 비술단의 검사들을 손짓으로 모은다. 그들이 천천히 물러난다.

"저주를 전이하는 방법을 찾으면 다시 올 거야. 그때까지 잘 있어."

묵연이 마지막으로 서운을 본다. 그 검은 눈에는 욕망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

"그리고 서운. 넌 생각보다 특별해. 네 저주 속에 더 큰 비밀이 있어. 나는 알고 있어."

그가 돌아선다. 비술단의 검사들이 산을 내려간다. 100명이 올라왔고, 70명 정도만 내려간다. 나머지는 벼랑 위에 남는다.

서운이 검을 내린다. 그의 손이 떨린다.

여해가 서운의 손을 잡는다.

"함께 가자."

서운이 고개를 든다.

"넌 왜? 넌 도선종의 도사잖아. 왜 나를 도와?"

여해가 미소를 짓는다. 이번엔 더 깊은 미소다.

"넌 절대 저주를 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야."

"어떻게 알아?"

"난 너 같은 자를 본 적이 있거든."

여해의 눈이 흔들린다. 그 순간, 서운은 깨닫는다. 여해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기억이다. 누군가를 잃은 자의 기억.

계단으로 향하는 길. 어둠이 점점 짙어진다.

벼랑 위에는 죽은 비술단 검사들만 남는다. 그들 사이에서 하나의 팔찌가 빛난다. 검은색 팔찌. 묵연이 떨어뜨린 것이다.

그 팔찌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산 지하실의 혈색 돌판과 같은 문양.

바람이 그것을 벼랑 끝으로 밀어낸다.

팔찌가 구름 속으로 떨어진다.

# 5화 「청산의 유언」 이후

계단을 내려가며 서운은 자신의 손을 본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저주를 넘길 수 있다는 말. 그것이 계속 맴돈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죽음을 넘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살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 생각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서운은 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3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킨다. 호흡이 불규칙해진다. 한 발, 또 한 발.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진다. 누군가를 죽이면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한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 누구를? 묵연? 비술단의 검사? 아니면 자신을 따르는 이들?

뒤에서 여해의 목소리가 들린다.

"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서운이 멈춘다. 어둠 속에서 여해의 실루엣이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넌 이미 깨달았으니까."

"깨달았다고? 무엇을?"

여해가 한 발 더 내려온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보인다. 도사의 창백한 얼굴. 하지만 그 눈은 다르다. 뭔가를 알고 있는 눈.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죽음이 두려운 거야. 넌 그걸 이미 알고 있어. 청산의 일기에서."

서운의 호흡이 멈춘다.

여해가 계속한다.

"그래서 넌 절대 저주를 넘기지 않을 것이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너처럼 죽을 테니까. 의미 없이."

뒤에서 원정 고승이 천천히 내려온다. 그의 손에는 촛불이 있다. 그 촛불이 계단을 밝힌다.

"저주의 전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적혈검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선택의 도구다."

원정이 말한다.

"13명의 검객들이 모두 3년 전후로 죽은 것이 우연일 리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무슨 선택?"

"저주를 넘기지 않기로."

산 아래에서 무언가 울린다. 마치 종을 치는 듯한 소리. 그것은 점점 커진다. 마치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 같다. 깊고 오래된 목소리.

"가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여해가 서운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은 차갑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기가 있다. 마치 누군가를 붙잡는 손처럼.

계단을 내려갈수록 어둠이 짙어진다. 촛불이 겨우 한 발 앞을 밝힐 뿐이다.

"여해."

"무엇?"

"넌 왜 날 도와?"

여해가 걸음을 멈춘다. 그녀의 등이 서운 앞에 보인다.

"넌 누구야? 정말로."

"도선종의 도사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아니다."

서운이 여해를 돌려 마주본다. 촛불이 여해의 얼굴을 비춘다. 그 얼굴에는 주름이 있다. 하지만 그 눈은 젊다. 마치 과거에 갇혀 있는 눈처럼.

"넌 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해. 내가 뭘 할지, 내가 뭘 생각할지. 마치 이미 본 것처럼."

여해가 한참을 침묵한다. 촛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낸다.

"난 너 같은 자를 본 적이 있다. 오래전에."

"누구?"

"청산."

서운의 호흡이 멈춘다.

"청산? 그 검객?"

"그가 죽기 직전. 나는 그를 만났다. 도선종의 기록실에서."

여해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기억이 그녀를 휘감는다.

"그는 자신의 일기를 남기고 있었어. 그리고 나에게 말했어. 다음 검객이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 검객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선택? 무슨 선택?"

여해가 서운을 본다. 그 눈이 맺힌다.

"저주를 받아들이기로. 초월하기로. 그 속에서 살아가기로."

"그게 가능해?"

"가능해. 청산이 했으니까. 그리고 넌 할 수 있어."

여해가 다시 손을 내민다. 이번엔 더 단호하게.

"더 이상 묻지 말고 따라와. 거기서 넌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

계단이 끝난다. 그 앞에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진다.

촛불이 밝히는 범위 내에서, 서운은 벽을 본다. 그 벽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자다. 하지만 그 한자들은 서운이 본 어떤 문자와도 다르다. 마치 혈색으로 새겨진 듯이, 벽에 빛이 난다.

"이것은?"

원정이 촛불을 높이 들어올린다. 벽 전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글씨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이다. 13개의 이름. 각 이름 옆에는 숫자가 적혀 있다.

서운의 눈이 각 이름을 따라간다. 첫 번째 이름. 그 옆의 '3년 1개월'. 그 이름을 읽으며 서운의 가슴이 철렁한다. 혈연대사. 적혈검을 만든 창조자. 그도 같은 저주를 짊어졌던가.

두 번째 이름. '3년 2개월'. 세 번째 이름. '3년'. 네 번째 이름. '2년 11개월'. 그 숫자들이 서운의 가슴을 친다. 모두 3년 전후. 청산이 남긴 3년 1개월과 같은 시간. 이들이 모두 같은 저주를 짊어졌다는 뜻인가? 아니면 같은 선택을 했다는 뜻인가?

마지막 이름이 비어 있다. 그 옆에는 숫자가 없다. 대신 그곳에는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다.

"그리고 다음이 온다."

서운이 그 문장을 읽는다. 청산의 일기에서 읽었던 그 문장. 미완성의 문장. 그 문장의 끝이 어디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

"이건 청산이?"

"아니다."

원정이 답한다.

"이것은 첫 번째 검객이 남긴 말이다. 혈연대사가."

"혈연대사?"

"적혈검을 만든 자. 그는 자신이 죽을 때, 이 벽에 이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다음이 온다.' 그 뒤로 1200년 동안, 12명의 검객들이 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 말을 읽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서운이 벽에 손을 댄다. 그 문자들이 따뜻하다. 손가락이 각 이름을 더듬는다. 벽에 새겨진 13개의 이름. 13명의 검객. 13명의 죽음. 서운의 손이 멈춘다. 청산의 이름을 찾아낸다. 그 옆의 '3년 1개월'을 만진다.

청산의 일기 속 구절들이 떠오른다.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초월이 아닌 수용.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리고 다음이 온다.'

청산도 이 벽 앞에 섰을 것이다. 청산도 이 이름들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청산도 선택했을 것이다. 저주를 넘기지 않기로.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로.

"넌 완성할 수 있을까?"

여해가 묻는다.

"완성한다는 것이 뭐야?"

"저주의 의미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모든 검객들을 위해 그 의미를 남기는 것."

서운이 손을 떨어낸다.

"그건 죽음이야."

"맞다. 죽음이야. 하지만 의미 있는 죽음이야. 청산처럼."

벽 뒤에서 다시 소리가 난다. 마치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 깊고, 오래되고, 슬픈 목소리. 그 목소리 속에는 12명의 검객들이 있다. 그들의 울음. 그들의 기원. 다음 검객을 향한 그들의 부름.

"뭐야, 그 소리?"

"적혈검의 울음이다."

원정이 말한다.

"저주가 쌓인 1200년의 울음. 그리고 다음 울음을 기다리는 울음."

"다음 울음?"

"너의 울음."

서운이 뒤를 본다. 계단이 보인다. 그 위에는 밝은 빛이 남아 있다. 여전히 도망칠 수 있다. 여전히 시간이 있다. 묵연에게 저주를 넘길 수도 있다. 누군가 다른 자에게 넘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살 수 있다. 3년이 아니라 평생을 살 수 있다.

"묵연이 말했어. 저주를 전이할 수 있다고. 그럼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저주를 풀 방법 말이야."

여해가 서운을 본다.

"있다. 하나 있어."

"뭐야?"

"다른 누군가에게 저주를 넘기는 것."

서운의 얼굴이 굳는다.

"그건 안 돼."

"그럼 넌 죽어야 해."

"그래. 알아."

여해가 웃는다. 그것은 슬픈 웃음이다. 청산을 떠나보낸 자의 웃음.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는 자를 보고 싶지 않았던 자의 웃음.

"그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네."

서운이 벽을 본다. 13번째 이름. 그 옆의 빈 공간. 그리고 미완성의 문장. '그리고 다음이 온다.'

서운이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음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완성한다. 그 문장을."

"어떻게?"

"죽음으로."

벽이 흔들린다. 그 순간, 벽 뒤에서 빛이 난다. 붉은 빛. 마치 피처럼.

"가자."

여해가 서운의 손을 다시 잡는다.

"벽 뒤로."

"저기가 뭐야?"

"혈연대사의 무덤이다. 그리고 적혈검의 진정한 기원이다."

벽이 천천히 열린다. 그 안에서 붉은 빛이 쏟아진다. 그 빛 속에서 무언가 형체를 드러낸다. 검. 하나의 검. 서운의 검과 같은 형태지만, 더 오래되고, 더 붉고, 더 무거운 검.

"그게?"

"혈연대사의 검이다."

원정이 말한다.

"그것을 만난 순간, 넌 이제 정말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산 전체가 우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 속에서 서운은 청산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더 많은 목소리들을 듣는다. 12명의 검객들. 그들이 모두 부르고 있다. 자신의 뒤를 따를 자를 향해.

"가자."

여해가 서운을 끌어당긴다.

"저기로. 너의 죽음으로. 그리고 모든 죽음의 끝으로."

서운이 마지막으로 계단을 본다. 그 위의 밝은 빛. 그 빛 속에는 묵연이 있다. 그 위에는 강호가 있다. 그 위에는 여전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

하지만 서운은 돌아서지 않는다.

그는 여해의 손을 잡고, 붉은 빛 속으로 걸어간다.

벽이 닫힌다.

산 위에는 적요만 남는다.

산 아래에서 묵연이 눈을 뜬다. 그의 손에는 검은 팔찌가 없다. 그것은 벼랑에서 떨어졌다. 구름 속으로.

그 팔찌에 새겨진 문양은 산 지하실의 혈색 돌판과 같다.

그리고 그 문양은, 적혈검의 벽에 새겨진 글씨와도 같다.

묵연이 입을 연다.

"그리고 다음이 온다."

그의 목소리 속에는 확신이 있다. 마치 계획대로 되어가는 목소리처럼.

묵연이 손가락을 튕긴다.

비술단의 검사들이 일어난다. 70명. 그들이 산을 내려간다.

"서운을 놔둬. 그 놈은 이제 우리가 아니라 다른 것을 만날 거야."

"비술단주님? 그럼 저주는?"

"저주는 사라질 거야. 그놈의 죽음과 함께. 그리고 그 저주는 다시 태어날 거야. 새로운 형태로."

묵연이 하늘을 본다. 그 위에는 구름만 있다.

"그리고 그 저주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거두면 돼."

그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팔찌의 문양을 그린다. 같은 문양. 같은 기호. 산 지하실의 혈색 돌판, 적혈검의 벽, 그리고 자신의 팔찌에 새겨진 것들.

"14번째 검객. 그게 바로 나다."

산이 다시 흔들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 안에서가 아니라, 산 밖에서. 강호 전체에서.

도선종의 종이 울린다. 검성파의 기를 올린다. 비술단의 기도가 외쳐진다.

그리고 서운은 이 모든 것을 더 이상 듣지 못한다.

그는 이미 다른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붉은 빛 속에서, 혈연대사의 검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검에서 나오는 울음. 그것이 서운을 부르고 있다.

12명의 검객들의 울음을 담은, 그 울음.

그리고 서운도 이제 그 울음에 응답해야 한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여해가 서운의 손을 놓는다.

"가. 너의 끝으로."

서운이 한 발 나아간다.

혈연대사의 검이 울음을 높인다.

그 순간, 서운의 동공이 붉게 변한다.

적혈검의 모든 비밀이, 한 순간에 그의 몸을 관통한다.

13명의 저주. 그것은 하나의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죽음을 거부하는 자의 저주.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천명.

그 둘의 경계선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검의 진정한 의미.

서운이 손을 뻗는다.

혈연대사의 검을 향해.

손가락이 검의 자루에 닿는 순간, 세상이 변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아니, 모든 것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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