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성파의 신념
새벽 첫 빛이 혈연사의 기와지붕을 밝히던 순간, 뜨거운 기운이 산을 휘감았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 무엇인지 서운은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기운의 무게감만으로도 혈연사의 돌벽이 떨렸다.
"검성파주가 온다."
여해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녀는 기록실의 창을 통해 산길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서운이 그 떨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검성파주?"
"한백검.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자. 정통 검술의 거장."
여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말하는 것은, 이 만남이 단순한 대면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원정 고승이 기록실의 깊은 곳에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 있었다.
"이제 올 시간이 되었군. 한백검이 상경하기 시작한 지 삼일. 빠르도다."
"뭔가 알고 계신가요?"
서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청산의 일기장을 쥔 손가락은 경직되어 있었다. 미완성의 문장 "그리고—"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한백검은 검성파의 신념을 지키는 자다. 기연을 거부하고, 정통만을 추구한다. 그에게 너는 이단이다."
원정 고승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산 위에서 검의 기운이 퍼져 나왔다. 그것은 칼날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정통의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기록실의 문이 열렸다.
한백검은 생각했던 것보다 젊었다. 육십 살을 넘겼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오십 대의 나이만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천 년을 본 자의 눈빛을 담고 있었다. 은색 수염이 흘러내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녹이 슬지 않은 철색의 검이었다. 정통의 검. 어떤 기연도 담지 않은, 순수한 검술만으로 연마된 칼날.
"서운이라 하는 자인가?"
한백검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안에는 심판자의 무게가 있었다. 그는 서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음성은 마치 강화된 철을 두드리는 듯했다.
"적혈검. 강호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이 다시 나타났군."
한백검의 눈이 서운의 동공에 맺힌 붉은 빛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만나는 순간, 서운은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한백검의 기운이 자신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검이 아니라, 저울이었다.
"강호의 정통을 지키는 자로서, 나는 너를 경고한다. 그 검은 강호의 질서를 해친다. 그것은 검이 아니라, 저주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서운의 대답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검을 쥐고 있었다. 청산의 일기장이 기록실의 책장 위에 놓였다. 그 미완성의 문장이 마치 자신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저주를 알면서도 그 검을 휘르는가?"
"네."
"그렇다면 넌 미친 자거나, 아니면 진정한 검객이 아니다. 둘 중 하나다."
한백검의 칼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의 움직임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십 년 이상 같은 검술을 연마한 자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완성도가 있었다. 정통의 움직임. 어떤 낭비도 없고, 어떤 과잉도 없는, 순수한 검술의 움직임.
"검성파는 강호의 질서를 지킨다. 기연은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 넌 그 질서를 무너뜨리려 하는 자다. 따라서 넌 죽어야 한다."
한백검의 검이 날아왔다.
그 검술은 생각했던 것보다 정확했다. 매 동작이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고, 그 안에는 검술의 모든 원리가 담겨 있었다. 서운이 칼을 들어 막을 때, 한백검의 검은 이미 다음 자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록실의 돌벽이 부서졌다. 한백검의 검기가 그 뒤의 벽을 갈라놓았다.
서운의 적혈검이 반격했다. 하지만 한백검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이미 다음 자리로 이동해 있었고, 서운의 검은 공기만 가르고 있었다.
"느리다. 너의 검은 강하지만, 느리다."
한백검의 목소리가 기록실을 가로질렀다. 그의 검이 다시 날아왔고, 이번에는 서운의 몸을 노렸다. 팔을 노린 검, 다리를 노린 검, 목을 노린 검. 한백검의 공격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서운은 방어에 집중했다. 적혈검의 힘으로 반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생명력이 깎여나갔다. 한 번의 강한 검마다, 하루가 사라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전투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백검의 검이 서운의 적혈검과 부딪힐 때마다,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 붉은 것.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빠져나가는 무언가. 한백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그 붉은 것을 따라갔고, 그의 검이 그것을 잡으려 했다.
"그것이 저주인가?"
한백검의 목소리 안에 뭔가가 들어왔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질문이 섞여 있었다.
"정확하다. 정통 검술의 거장답군."
서운이 대답했고, 그 순간 그의 검이 방향을 바꿨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하지만 그것은 적혈검의 힘을 실은 공격이 아니었다. 청산의 일기장에서 읽은, 저주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검객들의 검술. 기원의 검술. 정통의 움직임.
서운의 검이 한백검의 옆구리를 노렸다. 동작은 단순했다.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궤적. 그 안에는 어떤 낭비도 없었다.
한백검이 그것을 막았지만, 막는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고통의 표정이 아니었다. 놀라움의 표정이었다.
"정통 검술인가? 어디서?"
"여기서."
서운이 청산의 일기장을 바라봤다. 그 미완성의 문장이 자신의 검술을 이끌고 있었다. 기연이 아니라, 정통으로 싸우는 방법. 저주를 받은 자도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의 검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서운의 몸이 변했다. 검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호흡이 깊어졌다. 마치 강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저항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백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공격의 강도가 줄어들었다. 서운은 그것을 느꼈다. 한백검의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백검은 서운의 정통 검술을 계속 관찰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작정 강한 힘이 아니라,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기초였다. 저주받은 자가 어떻게 정통을 터득했을 것인가. 그 질문이 한백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서운의 다음 검이 날아왔다. 한백검은 그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이 검객은 강함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다. 기연도 저주도 아닌, 순수한 검술의 본질을.
한백검의 칼날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이로 인한 떨림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지켜온 신념이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한백검은 서운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이전의 심판자의 무게감이 줄어들어 있었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들어와 있었다. 의문. 그리고 그 의문 안에는 자신이 수십 년간 지켜온 신념을 흔드는 뭔가가 있었다.
"넌 누구인가?"
한백검이 물었다. 그의 칼날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다.
"천하제일 검객. 적혈검의 체득자. 그것이 내 이름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한백검이 서운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서운의 동공에 맺힌 붉은 빛을 다시 보고 있었다.
"왜 살려고 하는가?"
그 질문 안에는 수십 년간 지켜온 신념이 흔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서운이 대답을 찾고 있을 때, 여해가 나타났다. 그녀는 한백검을 바라봤다.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한백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파주, 위험합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은 창밖을 향했다. 산 아래에서 검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해... 넌 아직도..."
한백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나이로 인한 떨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파주. 오랜만입니다."
여해의 말 한마디가 기록실을 가로질렀다. 그 말 속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한백검은 여해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 깊은 과거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떨리는 손가락. 수십 년 전 자신이 본 그 손가락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떨리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을 때.
"그대는... 그 여해인가?"
한백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아졌다. 그의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혈월산. 그곳에서 본 검객 여해. 그리고 그녀가 왜 더 이상 검을 들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
원정 고승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고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한백검이여, 그대도 우리와 같은 운명의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여해는 저주받은 검객이었고, 이제 서운이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죽었다. 모두."
"그렇지 않다. 살아있다. 그들은 저주 속에서, 죽음 앞에서 살아있다."
원정 고승의 목소리가 기록실을 채웠다. 한백검의 검이 완전히 내려왔다. 그의 눈이 서운을 다시 바라봤을 때, 그 안에는 심판자의 무게감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깨달음. 그리고 그것과 함께 오는 고통.
한백검은 여해를 바라봤다. 그 떨리는 손가락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가락 너머의 얼굴을 보았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절망과 의지가 동시에 담긴 그 눈빛.
"강호는 넌 누구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호는 틀렸다. 강호는 변할 것이고, 그 변화의 중심에 넌 서 있을 것이다."
한백검이 서운에게 말했다.
"검성파는 정통을 지킨다. 그러나 정통도 진화한다. 넌 그 진화를 이끌 것이다. 비술단이 너를 원하는 이유는, 너의 강함이 아니라 너의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도선종이 너를 지키려 하는 이유는, 너의 저주가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나는 너를 봤다. 정통으로 싸우는 저주받은 자를."
한백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신념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넌 누구를 찾고 있는가?"
"적혈검의 창조자를 찾고 있습니다."
서운의 대답은 명확했다. 하지만 한백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적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창조자가 아니라, 너 자신일 수도 있다. 저주받은 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한백검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의 움직임은 이전의 공격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길을 떠나는 자의 움직임이었다.
"여해, 그리고 원정 고승. 나는 이제 강호에 알리겠다. 천하제일 검객 한백검이 본 것을, 그리고 내 신념이 과연 맞는 것인지 묻겠다."
한백검이 기록실을 나가려 하는 순간, 여해가 그의 팔을 잡았다.
"파주, 위험합니다. 묵연이 온다."
여해의 목소리는 경고였다. 그녀가 바라보는 산 아래에서, 검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술단주 묵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십 개의 기운들.
한백검이 여해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그 떨리는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린 함께 내려가야 한다. 정통과 신비, 그리고 저주받은 자. 강호에 그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줄 시간이 왔다."
한백검이 검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운을 겨누지 않았다. 산 아래로. 올라오는 검은 기운을 향해.
서운은 청산의 일기장을 다시 집어들었다. 미완성의 문장 "그리고—"가 자신의 손에서 따뜻해졌다. 그것을 완성할 시간이, 이제 정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록실의 창 밖에서 새벽의 빛이 사라지고, 검은 기운이 산을 덮기 시작했다.
여해가 서운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내려가야 한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아직 한백검이—"
"그는 알았다. 우리가 무엇인지."
여해의 눈이 창밖의 검은 기운을 따라 움직였다. 묵연의 무리는 이미 산 중턱을 넘어섰다. 원정 고승이 기록실 깊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고대 종이들이 흩어지며 날렸다. 그는 손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서운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기록이었다. 미래를 위한 기록. 그 기록은 청산의 일기장처럼 미완성으로 남겨질 것이었다. 원정 고승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시간과 경쟁하듯이. 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서운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한백검이 기록실 입구에 섰다. 그의 검은 이미 뽑혔고, 그 날에는 검성파의 정통이 흐르고 있었다. 정통이란 것은 기이한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것이 때로는 가장 강한 것이 되는 법이었다.
"서운아. 넌 아직도 모르는군."
한백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전투의 그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나누는 스승의 그것이었다.
"적혈검의 창조자를 찾는다고 했지만, 그건 틀렸다. 창조자는 이미 죽었다. 천년 전에."
"그렇다면 저주를 푸는 방법은?"
"저주는 푸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이미 여해와 원정이 말했을 것이다. 저주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한백검이 창밖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산 아래에서 검은 기운이 급격히 올라왔다. 수십 개의 인영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비술단의 추격대였다.
"여해. 그를 데려가거라. 내가 여기서 시간을 번다."
"파주님, 그렇게 되면—"
"나도 알았다. 내 신념이 과연 맞는 것인지를."
한백검의 검이 공중에서 휘어졌다. 기록실의 벽이 갈라졌다.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격문이었다. 강호 전체에 울려 퍼질 신호.
서운이 움직였다. 여해가 그를 멈추려 했지만, 서운은 이미 검을 뽑고 있었다.
"제가 갑니다."
"넌 아직 약하다. 생명도 많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써야 합니다."
서운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적혈검의 기운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청산의 일기장을 품에 안은 채, 서운은 기록실을 나갔다. 한백검은 그를 바라봤고,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통을 배운 저주받은 자. 강호는 이제 정말 변할 것이다."
한백검과 서운이 나란히 섰다. 그들 뒤에는 원정 고승이 여전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여해는 기록실의 다른 출구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고대 문양이 새겨진 돌 조각이 들려 있었다. 혈월산 지하실에서 발견한 그것이었다.
산 아래에서 묵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백검! 물러서거라! 그 아이는 내 것이다!"
"강호에는 누구의 것도 없다. 모두가 강호의 것일 뿐이다."
한백검이 대답했다. 그의 검이 산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갔다. 검선이 그려졌고, 그 경로를 따라 돌이 무너졌다. 산 자체가 무기가 되었다. 정통 검술의 경지는 이런 것이었다. 검과 천지가 하나가 되는 것.
서운은 한백검의 옆에 서서, 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배웠다. 정통이란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는 방식이었다. 한백검의 검이 산을 그을 때, 그 궤적 속에는 강의 흐름이 있었고, 바람의 방향이 있었다. 서운은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 비술단 추격대가 기록실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검을 들었고, 서운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한백검의 검이 먼저였다. 그의 검선은 직선이었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검술. 가장 효율적인 형태의 검술. 그 일격 속에는 천 년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추격대의 인원들이 물러났다. 그들은 한백검을 이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서운을 잡기 위해 온 것이었다.
"넌 뛰어야 한다, 서운아."
한백검이 말했다. 그의 검이 계속해서 산을 그었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번다. 그 시간 안에 넌 강호를 알아야 한다. 적혈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저주가 되었는지."
서운이 움직였다. 여해가 이미 기록실의 뒤쪽 출구를 열고 있었다. 그곳은 산의 내부로, 혈월산의 숨겨진 길이었다.
"여해!"
"따라오세요."
여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긴급함이 담겨 있었다. 서운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한백검은 여전히 기록실 입구에서 비술단의 무리를 막고 있었다.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눈은 서운을 따라갔다.
산 내부의 길은 어두웠다. 횃불이 없었고, 오직 암흑만 있었다. 하지만 여해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손에서 미미한 빛이 나왔다. 도선종의 비술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신비한 능력.
"여해, 한백검은—"
"그는 살 것입니다. 그는 천하제일이니까요."
"그럼 우린?"
"우린 살기 위해 뛰어야 합니다."
산의 내부가 점점 깊어졌다. 계단이 나타났다. 고대의 돌 계단. 그것을 밟을 때마다 먼지가 일어났다. 천년 이상 아무도 밟지 않은 계단이었다.
서운의 가슴에서 뭔가가 떨렸다. 청산의 일기장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책이 살아있는 것처럼.
"미완성의 문장을 아세요?"
"예. 청산이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라는 말이 뭘까요?"
여해가 걸음을 멈췄다. 계단의 밑바닥이 나타났다. 그곳은 지하실이었다. 거대한 지하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뭔가가 있었다.
돌판이었다. 혈색의 돌판. 서운이 처음 적혈검을 발견했을 때 본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문양이 아니라, 글자였다.
여해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가리켰다. 서운은 천천히 가까워졌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 읽었다. 돌판에 새겨진 글자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리고 다음이 온다.'"
서운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산이 남기려 했던 말입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하실 전체에 울렸다.
"당신이 13번째입니다, 서운. 그리고 14번째도 있을 것입니다."
서운의 눈이 커졌다. 다음이 온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혈검의 저주는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영원히. 한 검객이 죽으면, 다음 검객이 깨어납니다."
서운이 물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 이 저주를 끝내려면?"
"당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 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청산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서운은 돌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이 글자를 다시 따라갔다. 13번째. 14번째. 끝나지 않는 저주.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또 깨어날 것이고, 그 사람도 이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 생각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절망이 아니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비극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누군가는 자신 때문에 또 다른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 깨달음이 서운의 몸을 경직시켰다. 손가락이 돌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실의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비술단이 산 내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뛰세요!"
여해가 손을 내밀었다. 서운이 그것을 잡았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지하실의 반대편으로. 또 다른 출구로.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산의 벼랑이었다. 혈월산의 북쪽 벼랑. 그 아래는 구름이었다.
"여기서?"
"여기서 뛰어내립니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것도 운명입니다."
여해가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그녀의 눈이 서운을 바라봤다. 그 눈 안에는 수십 년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모성애, 절망,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 그것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한 절박함이었다.
비술단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묵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망치지 마, 적혈검이여! 넌 내 것이다!"
여해가 한 발을 벼랑 끝에 내디뎠다.
"당신은 이미 13번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벼랑 위에서 검은 옷이 나타났다.
묵연이었다.
비술단주의 눈이 서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여해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냥꾼이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웃음이었다.
"여해. 넌 여전히 그를 보호하려 하는군."
"당신이 그를 해치면 안 됩니다."
"왜? 그는 단지 저주받은 아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저주는 내 것이 되어야 한다."
묵연이 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을 예측했던 것이다. 산 아래의 추격대가 올라오는 시간, 그 정확한 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서운의 손에서 적혈검이 뽑혔다. 검의 날이 붉게 타올랐다. 생명력이 소모되기 시작했다. 한 번의 검 사용에 하루. 하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클 것이었다.
"도망쳐요, 여해."
"안 됩니다."
"이건 내 싸움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싸움입니다."
여해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빛이 더욱 강해졌다. 시간을 다루는 능력. 그것이 벼랑 주변의 공기를 왜곡했다.
묵연이 움직였다. 검은 기운이 벼랑을 가로질렀다. 비술단의 독이 섞인 기운이었다.
서운이 검을 들어올렸다. 청산의 일기장이 가슴에서 떨렸다. 그것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미완성 문장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운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깨어났다. 적혈검 안의 무언가가.
벼랑 아래에서 붉은 빛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