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계의 붕괴
앞에 서 있는 것도 이준호였다.
지하 1층의 공기가 멈춰 있었다. 아니, 너무 천천히 움직여서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그 손이 권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자신인가.
정확히 같은 얼굴. 정확히 같은 높이. 정확히 같은 손. 다만 그의 눈빛이 달랐다. 눈 뒤의 무언가가 다했다. 텅 빈 것. 아니, 너무 많이 찬 것. 구분이 안 갔다.
"난 너고."
미래의 이준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인데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현실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지하 1층의 습한 공기를 울리지 않았다. 이준호의 귓속에만 울렸다.
"난 넌데."
현재의 이준호가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 권총을 들고 있었다. 같은 각도로 들고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하지만 거울이라면 총구는 자신을 향해야 한다. 지금 두 총구는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넌 왜 나를 죽이려고 하지?"
"넌 왜 나를 죽이려고 하지?"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현장의 온도가 1도 내려갔다. 시간이 인지할 수 있는 속도로 역행하기 시작했다.
박민준이 경찰청 현관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나타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그를 뒤로 밀어붙였다.
김태식과 서연희가 지하 1층 입구에서 멈춰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시간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밤 11시 59분 30초. 자정 직전의 멈춤. 그들은 이 순간에 갇혀 있었다.
"우리가 같은 사람이고."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고."
미래의 이준호가 이어받았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간에서만 울리는 목소리. 시간의 경계에서만 존재하는 목소리.
"우리가 범인이고."
"우리가 피해자다."
둘 다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가락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밀리초 단위로 움직였다. 그런데 누구도 발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현재가 죽으면 미래가 없어진다. 미래가 죽으면 현재도 없어진다. 그것은 자살이면서 살인이고, 살인이면서 자살이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권총을 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우리가 사라져야 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완벽한 논리. 완벽한 결론. 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미래의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증거를 남겨야 한다."
"누군가 우릴 기억해야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권총을 내렸다. 하강하는 팔의 각도가 완벽했다. 이미 계획된 것처럼. 아니, 이미 일어났던 것처럼.
서연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밤 11시 59분 45초. 그 시간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만 움직였다. 공포가 그 눈빛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를 구하려던 그 눈빛이 점점 흐려졌다.
김태식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이준호를 향해 움직였다. 너무 천천히. 영원히 도달하지 않을 속도로. 그의 입술도 움직였다.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목구멍에서만 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최영재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던 것이 보였다. 이미 일어났던 순간이 역순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는 이준호를 보고 있었다. 현재의 이준호를 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최영재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알아들었다. 그 목소리는 시간의 경계에서만 울렸다.
"난 증거가 되고 싶어."
이준호가 대답했다. 역시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분명히 그 문장을 형성했다. 미래의 이준호도 같은 입술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녹음된 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누군가 날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박민준이 총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어디를 조준해야 할지 몰랐다. 현재의 이준호인가, 미래의 이준호인가? 둘 다 범인이었다. 둘 다 피해자였다. 둘 다 죽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올라갔다. 하지만 그도 발사하지 못했다. 누구를 쏘면 되는가? 시간의 경계에서 누구를 죽일 수 있는가?
그 순간 밤 11시 59분 59초가 도달했다.
시간이 멈췄다.
현재의 이준호가 권총을 내렸다. 그 순간 세상이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계가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비명을 질렀다. 세상이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저주의 역행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준호의 선택이었다. 그가 자신과 미래의 이준호 모두를 소멸시키기로 결정한 순간, 시간이 그의 의지에 응했다. 저주가 진화했다. 더 이상 시간을 역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조종하는 것으로. 그의 결정이 세계의 법칙을 바꿨다.
박수진 변호사의 시신이 거울처럼 흐릿해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아니, 살아났다. 목 압흔이 역순으로 풀려갔다. 피가 역으로 흘러올라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떴다. 검은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붙어 있는 먼지가 보였다. 그녀는 숨을 쉬었다.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갔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은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던 것이었다. 그 다음은 공백. 검은색 공백.
동대문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시체가 호흡을 되찾았다. 손목에 시계가 다시 나타났다. 목의 압흔이 사라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깨어났다. 숨을 쉬기 시작했다.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폐가 팽창했다. 다시 수축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살아 있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이 흐릿했다. 그 얼굴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피해자가 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손이 투명해졌다. 권총이 손에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그것을 역순으로 움직였다. 총은 다시 그의 손에 들려졌다. 아니, 들려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처음엔 있었다. 시간이 자기 자신과 모순되고 있었다.
미래의 이준호도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눈빛이 사라졌다. 기억이 침식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인 그 손이 투명해졌다. 그 손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억이 지워졌다. 그 손이 존재했다는 기억이 지워졌다. 미래의 이준호는 현재의 이준호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최영재가 움직였다.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현장을 떠났다. 이준호를 보던 눈빛이 사라졌다. 그 눈빛 자체가 지워졌다. 최영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이 역순으로 소멸했다. 그는 지하 1층에 내려오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이 그를 뒤로 밀어붙였다. 그의 기억도 함께 역순으로 소멸했다. 이준호를 본 기억. 이준호와 대화한 기억. 이준호가 존재했다는 기억.
박민준도 마찬가지였다. 총을 들었던 손이 역순으로 내려갔다. 손이 다시 올라갔다. 아니, 총을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지워졌다. 그는 계단을 올라갔다. 경찰청 현관으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사라졌다. 그의 기억에서 이준호가 사라졌다.
김태식이 손을 거두었다. 앞으로 나아갔던 발이 역순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현장을 떠났다. 지하 1층 입구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말이 사라졌다. 그의 눈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이준호를 구하려 했던 그 순간이 역순으로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는 지하 1층에 내려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려올 이유가 없었다. 이준호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서연희가 입을 다물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워졌다. 그 시간에 그녀가 있었다는 기억이 역순으로 소멸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그녀의 목에서 비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
밤 11시 40분.
이준호만 남았다. 아니, 이준호도 남지 않았다. 그의 형체가 점점 투명해졌다. 손가락이 사라졌다. 손이 사라졌다. 팔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역순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세포가 역순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느꼈다.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가슴의 무게가 사라졌다. 3년간의 저주를 짓누르던 시간의 쇠사슬이 끊어졌다. 모든 피해자들을 살려내고 자신은 사라지는 것. 그것은 해방이었다.
밤 11시 30분.
기억이 완전히 지워졌다. 어제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주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3년 전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 남았다. 한 가지 이름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오지훈.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마치 거울 속의 다른 얼굴처럼.
밤 11시 정각.
이준호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니, 그것은 거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합성상이었다. 모든 피해자들의 얼굴이 겹쳐 있었다. 박수진 변호사의 눈. 동대문 여성의 입. 그리고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얼굴. 또 다른 얼굴.
그 거울 속의 얼굴이 변했다. 이준호의 얼굴이 사라졌다. 오지훈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낡았다. 주름이 깊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칼로 난 흉터가 있었다. 입술이 비뚤어져 있었다. 그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안녕."
그 목소리는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깊었다. 더 낡았다. 10년을 더 산 목소리였다. 20년을 더 고통받은 목소리였다.
그 얼굴이 거울에서 나왔다.
아니, 거울이 부서졌다.
두 개의 손가락이 보였다. 왼손 약지와 오른손 약지. 양쪽 모두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왼손에는 '이준호'라고 새겨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오지훈'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손이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손이었다.
지하 1층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형체일 뿐이었다. 그 형체가 거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또 다시 변했다. 이번엔 더 낡았다. 더 깊은 시간에서 온 얼굴이었다.
시간이 다시 역행하기 시작했다.
밤 10시 45분.
밤 10시 30분.
밤 10시.
밤 9시.
밤 8시.
시간이 역행할 때마다 그 얼굴은 더 낡아졌다. 주름이 더 깊어졌다. 흉터가 더 많아졌다. 눈빛이 더 텅 비어졌다. 입술이 더 비뚤어졌다.
밤 7시.
밤 6시.
밤 5시.
시간이 계속 역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이준호에서 오지훈으로. 오지훈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그 누군가 다른 사람에서 또 다른 누군가로.
경찰청 특수수사팀의 모니터들이 깜빡였다.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이 작동했다. 화면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떴다. 그리고 그 이름이 지워졌다. 그리고 다시 떴다. 그리고 또 지워졌다.
이준호의 데이터가 시스템에서 소멸했다. 아니, 소멸하고 있었다. 3년 전부터 소멸하기 시작했다. 아니, 10년 전부터였다. 아니, 처음부터였다.
밤 12시.
시간이 정지했다.
밤 11시 59분 59초.
다시 시작했다.
밤 11시 59분 58초.
밤 11시 59분 57초.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준호는 없었다. 오지훈도 없었다. 미래의 이준호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시간 속에 남겨졌다. 아니, 시간이 그들을 가져갔다.
지하 1층은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있지 않았다. 아무도 있을 수 없었다.
밤 11시 59분.
밤 11시 58분.
밤 11시 57분.
시간이 정상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팀의 모니터들이 켜졌다. 데이터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준호 검사의 이름은 없었다. 그의 위치 데이터도 없었다. 그의 이동 기록도 없었다. 그의 심전도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김태식이 사무실에서 깨어났다. 꿈을 꿨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 펼쳐진 파일을 봤다. 낡은 사건 기록이었다. 3년 전 오지훈 사건. 왜 이 파일을 펼쳐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파일을 닫았다.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만 남았다. 하지만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연희의 휴대폰에 울림이 없었다. 아무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아무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사라진 것처럼.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봤다. 최근 통화 기록에 누군가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클릭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 번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박민준은 경찰청 현관에서 권총을 내려놨다. 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누구를 쏘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를 놓쳐버렸다는 막연한 죄책감만 남았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최영재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었나?"
박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확신이 없었다.
최영재는 CCTV 영상을 재생했다. 지하 1층의 영상이었다. 하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 공간만 있었다. 아무도 없었던 곳. 아무도 있을 수 없었던 곳. 그는 영상을 되감기했다. 다시 재생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그 공간이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밤 11시 56분.
밤 11시 55분.
밤 11시 54분.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거울 조각이 지하 1층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 거울 조각의 뒷면에는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낸 글씨였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고, 범인이고, 피해자다."
그 글씨 아래에는 두 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준호"
"오지훈"
그리고 그 두 이름 사이에는 등호 기호가 있었다.
=
밤 11시 50분.
CCTV 카메라가 거울 조각을 포착했다. 하지만 녹화되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마치 그 조각이 없는 것처럼.
밤 11시 45분.
청소 로봇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거울 조각을 치웠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밤 11시 40분.
지하 1층은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아무도 있지 않았다. 아무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밤 11시 35분.
김태식의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3년 전 오지훈 사건 파일을 다시 검토하라는 알람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알람을 설정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 알람을 꺼버렸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그 알람을 지우려던 손가락이 멈춰 있었다. 무언가가 그를 막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밤 11시 30분.
특수수사팀의 모니터에 새로운 사건이 뜨기 시작했다. 시간대 증거로 추적해야 할 또 다른 연쇄살인마. 또 다른 미해결 사건.
박민준이 최영재에게 말했다.
"새로운 팀을 꾸려야 한다."
최영재가 대답했다.
"누가 이끌어야 할까요?"
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마치 누군가를 기억하려 하듯이.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어떤 이름을 말하려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누군가 시간에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밤 11시 24분.
거울 조각이 다시 나타났다. 청소 로봇이 치웠던 그 조각이. 아니, 그것은 다른 거울 조각이었다. 새로운 거울 조각이었다. 그 조각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증거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름이 없었다. 단지 빈 공간만 있었다. 채워져야 할 빈 공간.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갈 빈 공간.
최영재가 거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이 조각을 본 것 같은데. 이 글씨를 본 것 같은데. 누군가를 잃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김태식도 거울 조각을 봤다. 서연희도 봤다. 박민준도 봤다. 그들 모두 같은 감정을 느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감정. 누군가를 잊었다는 죄책감. 하지만 그 누군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누군가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밤 11시 23분.
최영재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팀원을 모집해야 합니다."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찾아야 할까?"
최영재는 거울 조각을 들었다. 그 빈 공간을 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자신이 그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듯이.
"누군가 새로운 이름으로."
그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느꼈다. 그 빈 공간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에 와야 한다는 것을.
밤 11시 22분.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