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선택의 시점

유치장의 철창이 열렸다.

아무도 이준호를 풀어주지 않았다. 센서 고장인지, 시스템 오류인지 이준호는 알 수 없었다. 심전도 수치가 160 bpm에서 멈춘 후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손가락의 뜨거운 통증이 사라졌다. 반지 안의 '오지훈'이라는 글자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다. 자신의 다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발, 한 발.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CCTV는 검은 화면이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경찰청 로비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4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민준이 서 있었다.

"자수입니다."

이준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 자신이 한 말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목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자수라니요?"

박민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위험한 웃음. 그의 손이 허리 뒤로 움직였다. 권총을 꺼냈다.

"이준호 검사, 당신을 체포합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김태식이 계단을 내려왔다. 창백한 얼굴. 손에 파일을 들고 있었다. 박민준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파일 모서리에서 떨리고 있었다.

"3년 전 오지훈 사건. 증거 재검증 결과가 나왔습니다. 혈흔 DNA가 조작되었습니다. 이준호가 한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박민준이 말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이준호 검사의 증거 조작을. 그 조작이 만든 것들을."

박민준은 총을 이준호에게 겨냥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럼 왜 지금까지..."

김태식의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박민준의 입가가 비틀렸다.

"당신의 능력이. 당신이 범인을 잡고 그 과정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완벽합니다. 능력 있는 검사가 도움이 됐다가 정신병으로 자살하는 극적인 스토리. 조직은 한 점의 흠도 없습니다."

박민준은 이준호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당신도 모르겠지만, 이 조직에 속한 모든 사람이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당신이 조작한 증거로 죽은 오지훈의 저주. 그것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저주도 풀린다. 당신이 우리의 미끼였던 이유입니다."

이준호는 박민준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봤다. 왼손 약지에 '오지훈', 오른손 약지에 '이준호'가 새겨져 있었다. 두 개의 이름. 한 개의 손.

박민준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오래된 영상을 빨리 감기한 것처럼. 윤곽이 깨져나갔다. 먼저 발이 사라졌다. 그 다음 다리. 이준호는 박민준의 몸이 아래에서 위로 사라지는 것을 봤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박민준의 얼굴.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건..."

"시간 역행입니다."

최영재가 나타났다. 이준호의 옆에 섰다. 이준호는 최영재를 보지 못했다. 최영재가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미 죽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당신의 시간이 역행합니다. 당신이 죽기 전의 모든 순간을 되살린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과 만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최영재의 목소리가 변했다. 더 깊고, 더 차갑고, 더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의 미래입니다. 당신이 될 것입니다."

이준호는 돌아섰다. 최영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자신과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눈. 같은 입. 같은 손. 하지만 그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권총이 아니라 메스였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확실합니까?"

미래의 이준호가 웃었다.

"당신이 3년 전 오지훈을 죽인 순간, 당신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 이후의 모든 순간은 당신이 만든 환상입니다. 죽음 직전의 뇌가 만드는 마지막 환상. 그 안에서 당신은 계속 범인을 쫓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당신입니다. 항상 당신이었습니다."

미래의 이준호가 칼을 들어 올렸다. 이준호의 목을 겨냥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아니, 역행했다.

오후 4시 47분에서 4시 46분으로. 초침이 역방향으로 돌아갔다. 이준호의 시야가 흔들렸다. 심장음이 역재생되는 소리가 들렸다. 미래의 이준호가 사라졌다. 박민준이 다시 나타났다. 몸이 아래에서 위로 복원되었다. 다리. 몸통. 얼굴. 박민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대사를 다시 했다. 이번엔 이준호가 움직였다. 박민준 뒤로 몸을 날렸다. 권총 소리가 울렸다. 총알은 이준호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흘렀다.

"최영재!"

이준호가 외쳤다.

최영재가 나타났다. 이번엔 최영재 자신이었다. 창백한 얼굴.

"데이터 시스템에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

"그게..."

"지금!"

경찰청 5층, 시간 데이터 분석 센터. 최영재가 이준호를 안내했다. 입구의 카드키 인식기가 그의 카드를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이 열렸다. 센터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모니터들만 켜져 있었다.

이준호는 마우스를 집었다. 손이 떨렸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신의 위치 데이터를 검색했다. 지난 3개월간의 모든 기록. 강남역, 동대문, 을지로, 반포동. 그리고 또 다른 기록. 자신과 정확히 같은 좌표에서 발생한 또 다른 이준호의 기록.

두 개의 이준호.

한 명의 이준호가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할 때, 다른 이준호는 점 C에서 점 D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 경로들이 교차했다. 여러 번. 강남역에서 한 번, 동대문에서 한 번, 을지로에서 한 번. 그리고...

반포동.

이준호가 지도를 확대했다. 반포동의 한 건물. 주소는 서초구 반포1동 78-5. 낡은 오피스텔. 건물 정보를 검색했다. 등기부등본, 건축 허가, 임차인 기록. 그 건물의 지하 1층은 3년 전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3년 전.

오지훈이 죽던 그 날.

이준호의 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화면 위의 지도에 두 개의 이준호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빨간 점과 파란 점. 그 두 점이 만나는 지점. 반포동 오피스텔 지하 1층. 그 지점에서 두 개의 경로가 겹쳤다. 완벽하게 겹쳤다.

그 순간 이준호는 깨달았다. 자신의 행동이 두 개로 분기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3년 전 그 지하에서 자신이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두 개의 시간선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곳에서 당신이 죽습니다."

서연희가 나타났다.

이준호는 돌아섰다. 서연희의 얼굴이 창백했다. 손에는 3년 전의 파일이 들려 있었다. 오지훈 사건 파일. 표지에는 새로운 피 자국이 있었다.

"당신은 자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서연희가 말했다.

"그럼 미래를 죽여야 합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는 거야요."

"알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모니터 앞에서 떠났다. 최영재가 그를 막지 않았다. 서연희도 막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경찰청을 나갔다.

밤 9시 15분. 하늘이 검었다. 강남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택시를 탔다. 반포동 오피스텔이라고 말했다. 기사는 묻지 않았다. 기사의 얼굴도 흐릿했다.

밤 10시 47분. 반포동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건물의 현관이 열려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계단 끝에는 문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지하 1층. 어둠. 한 줄기 불빛만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환영합니다."

그것은 미래의 이준호였다. 하지만 얼굴이 이상했다. 더 늙어 있었다. 더 많은 상처가 있었다.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준호가 물었다.

"나는 당신입니다."

미래의 이준호가 대답했다.

"아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박민준의 권총.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은 내 미래가 아닙니다. 당신은 오지훈입니다."

미래의 이준호가 웃었다. 인간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음. 고장 난 녹음기의 소리였다.

"당신이 나를 죽였습니다. 3년 전에. 증거를 조작해서. 그 순간 당신도 함께 죽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하에서. 3년을."

오지훈이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은 밤마다 시간이 역행하는 저주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당신이 죽는 과정입니다. 천천히. 3년 전부터."

이준호는 권총을 들어 올렸다. 손이 떨렸다. 오지훈을 겨냥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확실합니까?"

오지훈이 웃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밤 10시 46분. 오지훈이 사라졌다. 이준호 혼자가 남았다. 지하 1층. 한 줄기 불빛. 그 불빛 아래에는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시체였다.

이준호는 그 시체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3년 전의 자신. 총에 맞은 자신. 피투성이 자신.

그 시체의 손 위에는 검은색 손장갑이 놓여 있었다. 손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준호의 손이 아닌 다른 손. 약지에 반지가 있었다. 반지 안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준호'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약지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오지훈'

시간이 계속 역행했다. 밤 10시 45분. 밤 10시 44분. 밤 10시 43분.

이준호의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밤 10시 42분. 밤 10시 41분. 밤 10시 40분.

이준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눈이 감기고 있었다. 뇌 속에서 이준호라는 이름이 점점 희미해졌다. 물에 녹아내리는 그림처럼.

그리고 그 순간, 이준호는 마지막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3년 전부터 자신은 이미 미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미래 모습인 오지훈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밤 10시 39분. 지하 1층의 문이 열렸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린 발걸음. 의도적인 발걸음. 사냥꾼의 발걸음.

이준호는 권총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올려졌다. 하지만 누구를 겨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인가. 미래인가. 둘 다인가.

계단 끝에 나타난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인지 오지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나를 죽여야 합니다. 아니면 나에게 죽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멈췄다. 순간의 선택. 자신을 죽일 것인가. 미래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인가.

이준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권총을 내렸다.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시간이 역행했다.

밤 10시 38분.

밤 10시 37분.

밤 10시 36분.

이준호의 기억이 한 조각씩 떨어져나갔다. 검사라는 직업. 박민준이라는 상관. 오지훈이라는 피해자. 증거 조작.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밤 10시 35분.

밤 10시 34분.

밤 10시 33분.

이준호라는 이름마저 흐릿해졌다. 뇌 속 어딘가에서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처음엔 희미했다. 점점 선명해졌다.

오지훈.

그 이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차지했다. 기억. 정체성. 욕망.

밤 10시 32분.

손이 낯설어졌다. 마치 처음 움직여보는 손처럼 경직되고 무거워졌다. 목소리가 변했다. 더 이상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깊고 낮은 음성으로 변해갔다. 몸이 일어났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처럼 느껴졌다.

밤 10시 31분.

새로운 기억이 시작되었다.

3년 전. 지하 1층. 검사가 자신을 쏘았다. 검사가 증거를 조작했다. 검사가 자신의 인생을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은 죽었다. 3년 전에.

하지만 지금 자신은 살아 있다.

밤 10시 30분.

오지훈은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 1층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나갔다. 거리로 나갔다. 밤의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오지훈은 걸어갔다.

검사를 찾아가기 위해.

죽인 자를 죽이기 위해.

3년 전의 선택을 완성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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