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문실 문이 열렸다
최영재가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서연희와 김태식뿐이었다.
이준호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반지. 약지에 검은 반지가 있었다. 새겨진 글자는 흐릿했다. 오지훈.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떨린다는 표현이 맞지 않았다.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신체 부정감. 서연희가 진단한 그 단어가 정확했다.
심문실 불이 꺼졌다.
누군가 스위치를 눌렀다. 아니다. 스위치 같은 게 없다. 그냥 어둠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마치 시간이 역행하듯이. 오후 2시 15분에서 오후 2시 14분으로. 그 다음 2시 13분. 가속도가 붙었다. 초침이 거꾸로 돈다. 아니, 초침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거꾸로 돌았다.
어둠이 걷혔다.
밤 11시였다.
**【제1사이클 역행】**
이준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세 사건의 파일을 펼쳐놓고 있었다. 손에는 펜이 있었다. 시각을 적고 있었다. 11시 47분, 오후 7시 33분, 오전 3시 22분. 다음은? 오전 11시 11분. 정확히 4시간 간격. 완벽한 패턴.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반대편 책상에 앉았다.
이준호는 얼굴을 들었다.
자신과 같은 얼굴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했지만 뭔가 다른 얼굴. 눈이 비어있었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그런 눈.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떠 있었지만 그것도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그냥 근육의 수축. 기계적인 움직임.
"안녕, 나."
그 인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현재의 이준호와 같았다. 같되, 무언가 울림이 없었다. 에코처럼 반복되는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처럼.
"뭐야."
이준호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소리가 안 났다. 책상 위의 파일들이 흩어졌다. 역시 소리가 없었다. 세상이 음성을 잃었다.
그 인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현재의 이준호가 이미 자신을 알고 있으니까.
"넌 날 쫓고 있어. 나는 너를 죽이고 있어."
그 인물이 손을 들었다. 약지에 검은 반지가 있었다. 현재의 이준호가 자신의 손을 봤다. 같은 반지. 같은 위치. 같은 색깔. 글자는 여전히 흐릿했지만 오지훈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저주야."
그 인물이 말했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심문실의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공기 자체에서.
"왜? 왜 이래?"
이준호가 묻고 있었다. 자신이 묻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이미 과거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시간이 꼬였다. 과거와 현재가 섞였다.
그 인물이 대답했다.
"기억이 사라지니까. 계속 죽여야 존재한다고 느껴져. 죽임으로써 나는 내가 있다는 걸 증명해."
그 인물이 일어섰다. 현재의 이준호를 마주봤다. 거울처럼. 아니, 거울이 아니라 그냥 자신과 자신의 대면. 책상 위의 파일들이 반사되어 보였다. 한쪽 인물의 손가락이 다른 쪽 인물의 손가락과 겹쳤다. 검은 반지가 두 번 빛났다.
"3년 전."
그 인물이 말했다.
"그 사건. 기억나?"
이준호가 기억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아직 미래였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역행하는 기억. 밤마다 역순으로 기억되는 사건들. 그 중에 3년 전 사건이 있었다.
동대문 주택가. 여성 시체. 목 압흔. 시계가 제거되었다. 손목에는 반지 자국이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먼저. 더 오래전.
이준호가 기억했다. 3년 전 미해결 사건. 용의자 오지훈. 경찰청 지하 보관소에 보관된 파일. 범인의 얼굴 사진이 흐릿했다. 초점이 맞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된 것처럼.
"그 사건의 범인도 나였어."
그 인물이 말했다.
"근데 넌 날 못 잡았어. 대신 다른 놈을 범인으로 몰았어."
"그건…"
이준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3년 전 그 사건. 정말 자신이 수사했던 사건인가? 아니면 누군가 그렇게 기억하도록 만든 건가?
"그 용의자는 옥중에서 자살했어."
그 인물이 계속했다.
"무죄인데 자살했어. 죄책감 때문에 아니라 이미 시간이 역행했기 때문에.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이준호가 깨달았다.
그 용의자도 저주에 걸렸던 거다. 자신처럼. 범인을 쫓는 자에게 저주가 전이되듯이, 범인으로 몰린 자에게도 저주가 전이된 거다. 시간이 역행하고 기억이 사라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저주.
"그래서 넌 그 용의자를 잊었어. 파일도 흐릿하게 처리했어. 자신이 한 실수를 지우려고."
그 인물이 말했다.
"근데 나는 그걸 기억해. 나는 계속 죽인다. 계속 죽임으로써 내가 있다는 걸 증명한다. 넌 나를 쫓는다. 나는 넌 죽인다. 우린 이미 하나야."
이준호가 물었다.
"넌 내가 될 거고, 난 넌데?"
그 인물이 웃었다. 감정이 없는 웃음. 기계적인 웃음.
"너는 이미 날 추적하고 있어. 우린 이미 하나야."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
심문실 벽에 비친 그림자. 하나의 검은 형태. 벽의 거울 같은 표면에 두 개의 얼굴이 중첩되어 보였다. 한쪽 인물의 눈이 다른 쪽 인물의 눈과 겹쳤다. 입술이 겹쳤다. 반지를 낀 손가락이 겹쳤다.
그 순간이었다. 심문실 문이 열렸다.
서연희였다. 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경찰 권총. 그 인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서연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전 아내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가울 수 있나. 하지만 그 차가움은 두려움이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총구가 흔들렸다.
그 인물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연희가 쏠 수 있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쏴."
그 인물이 말했다.
"쏠 수 있어?"
서연희가 망설였다. 총의 조준선이 흔들렸다. 조준점이 그 인물에게서 현재의 이준호로 옮겨갔다. 다시 그 인물으로. 떨리는 손 때문에 조준점이 둘 사이를 오갔다.
"쏠 수 있어?"
그 인물이 다시 물었다.
"그를 죽이면 이 사람도 죽어."
현재의 이준호를 가리켰다.
"넌 둘 다 죽일 수 없어. 우린 이미 하나니까."
서연희가 총을 내렸다. 손이 완전히 떨렸다. 총이 바닥을 향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현재의 이준호와 마주쳤다. 현재의 이준호는 서연희를 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그 순간이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밤 11시였다. 아니, 밤 11시가 아니었다. 오후 2시 15분이 역행했다. 그 이전이 역행했다. 그 모든 게 동시에 역행했다.
이준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파일을 펼쳐놓고 시각을 적고 있었다. 동시에 이준호는 서연희 앞에 서 있었다. 동시에 이준호는 심문실 복도에 있었다. 동시에 이준호는 유치장에서 탈출하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가속도가 붙었다.
초침이 거꾸로 돈다. 초침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과거가 현재를 삼킨다. 현재가 미래를 삼킨다. 미래가 과거를 삼킨다.
마침내 모든 시간선이 충돌했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어둠이 들어왔다. 완전한 어둠. 음성도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공간도 없었다.
그저 무(無).
그 무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두 개의 의식이 하나로 수렴하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해졌다. 어디서부터가 이준호이고 어디서부터가 그 인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이 깨어났다.
아니, 깨어난 게 아니었다. 어둠 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화면이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깨어나기 위해 눈꺼풀을 들어올리듯.
이준호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회색의 천장. 형광등. 깜빡이는 형광등. 한 번, 두 번, 세 번. 리듬이 있었다. 리듬은 곧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정상이었다.
역행하지 않았다.
이준호가 일어나 앉았다. 손가락이 아파했다. 양손의 약지. 반지가 파고 있었다. 검은 반지. 안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손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손가락을 구부렸다. 펼쳤다. 다시 구부렸다.
그 다음 다른 손을 들어올렸다.
두 손 모두 자신의 손이었다.
하지만 몸은 하나였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 서늘했다. 타일이었다. 병원 바닥. 흰 타일. 의료용 타일.
병원이었다.
이준호가 주변을 봤다. 침대. IV 스탠드. 심전도 기계. 기계가 '비프'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규칙적인 음. 심박수를 나타내는 음.
한 줄의 파형이 화면에 그려졌다. 정상. 일정한 리듬. 80 bpm.
이준호가 창문으로 갔다. 밤이었다.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남역 일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병동.
"깨어났군."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가 돌아봤다.
박민준 팀장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을 짚고. 피곤한 표정. 며칠을 자지 않은 표정.
"얼마나 자셨나?"
박민준이 물었다.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뭐였지? 어둠이었다.
"사흘이야."
박민준이 대답했다.
"사흘을 주사로 재웠어. 신경과 전문의 지시로."
이준호가 자신의 팔을 봤다. 주사 자국. 여러 개. 채혈 자국도 있었다. 혈액 검사를 여러 번 했다는 뜻이었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어."
박민준이 파일을 들었다.
"한 사람의 혈액만 있어. 너의 혈액. 두 사람의 혈액이 섞여 있다는 건 샘플 오염이었어. 검사실 실수야."
이준호가 침대에 앉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반지가 손가락을 누르고 있었다.
"너의 위치 데이터도 재검토했어."
박민준이 계속했다.
"세 사건 현장에 너의 위치 기록이 있었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너의 휴대폰 기록이 아니라 팀 시스템의 기록이야. 누군가 너의 신분으로 위치를 조작했어."
이준호가 물었다.
"누가?"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일을 건넸다.
CCTV 분석 리포트였다. 강남 아파트 박지수 사건 현장. 시간대별 인물 분석. 11시 50분. 누군가 현장에 들어갔다. 검은 옷. 얼굴이 흐릿했다. 마스크와 모자 때문이었다.
"저건 너가 아니야."
박민준이 말했다.
"저건 다른 사람이야."
이준호가 파일을 봤다. CCTV 영상의 프레임을 한 장씩 넘겼다. 11시 50분. 11시 52분. 11시 55분.
그 다음 프레임에서 두 개의 인물이 현장에 있었다. 검은 옷의 인물. 그리고 또 다른 인물. 두 인물이 마주보고 있었다. 한쪽은 피해자를 보고 있고, 다른 쪽은 그 피해자를 보고 있는 인물을 보고 있었다. 거울 같은 구도. 반사된 이미지처럼.
"저건 뭐야?"
이준호가 물었다.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프레임을 넘겼다.
12시 02분. 한 인물만 있었다. 검은 옷의 인물. 다른 인물은 사라졌다.
"수사 재검토 결과 세 사건은 연쇄 살인이 맞아. 하지만 범인은 따로 있어."
박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너를 모방하고 있었어. 너의 행동 패턴을. 너의 시간 분석 방식을. 너의 모든 걸."
이준호가 손가락의 반지를 봤다. 글자가 흐릿했다.
"3년 전 미해결 사건의 용의자. 오지훈."
박민준이 파일을 펼쳤다.
자살 기록. 옥중 자살. 서초 교도소 3동. 2021년 3월 14일 밤 11시 47분.
"그 사건을 너는 수사했어. 그리고 오지훈을 범인으로 지목했어. 증거도 충분했어. 근데 다시 봤어. 증거가 조작되었어. 시간 데이터가 조작되었어."
박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오지훈은 범인이 아니었어. 너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파일을 흐릿하게 처리했어. 자신의 실수를 숨기려고."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리고 오지훈이 자살한 바로 그 시각에, 진짜 범인이 첫 번째 피해자를 죽였어. 박수진. 밤 11시 47분. 정확히 같은 시각이야."
박민준이 파일을 덮었다.
"범인은 오지훈을 모방하고 있었어. 너를 모방하고 있었어. 너의 시간 분석 능력을. 너의 집착을. 너의 약점을."
"그럼 지금 범인은?"
이준호가 물었다.
박민준이 일어섰다.
"우리가 잡았어. 3시간 전에. 강남역 일대에서."
박민준이 문으로 갔다. 문을 열었다.
"잠깐."
이준호가 말했다.
박민준이 돌아봤다.
"내 손에 있는 반지. 이건?"
이준호가 검은 반지를 들어올렸다.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고 나갔다.
이준호가 반지를 봤다. 안쪽에 새겨진 글자.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우려고 한 것처럼.
그 순간, 심전도 기계가 울렸다.
'비프' 음이 빨라졌다. 80 bpm에서 95 bpm으로. 100 bpm으로. 115 bpm으로.
이준호의 심박수가 올라갔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조각조각. 파편처럼.
유치장. 검은 옷의 인물. 자신과 비슷한 얼굴. 오지훈. 아니, 자신의 기억 속 인물.
이준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시 누웠다. 손가락이 떨렸다. 반지가 자꾸만 아팠다. 마치 반지 자체가 자신을 쥐고 있는 것처럼.
밤이 깊어갔다. 창밖의 야경이 점점 어두워졌다. 조용해졌다. 서울이 잠들고 있었다.
그리고 밤 11시가 되었다.
정확히 11시 47분이 되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제2사이클 역행】**
이번엔 약했다. 살짝. 마치 누군가 이준호의 기억을 살살 건드리는 것처럼.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기억이 흐르고 있었다. 역순으로. 사흘 전부터.
그런데 이상했다. 사흘 전의 기억이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기억. 다른 하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
그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상. 그 사람의 손으로 하는 행동.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은 계속 죽이고 있었다.
박수진. 김순철. 박지수.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
아직 죽이지 않은 누군가.
이준호였다.
그 사람은 이준호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눈을 떴다. 병원 천장. 형광등.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그 순간 병원 문이 열렸다.
서연희였다. 손에 파일을 들고 있었다. 진료 기록. 자신의 진료 기록.
"당신 계속 깨어나고 또 자고 있어. 의식이 불안정해."
서연희가 말했다.
"주사가 안 먹혀. 마치 누군가 자꾸 깨우려고 하는 것처럼."
이준호가 물었다.
"범인은?"
서연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으로 갔다. 밤 11시 47분. 여전히 그 시각이었다.
"박민준이 거짓말했어. 범인을 잡지 못했어."
서연희가 말했다.
"대신 너를 격리했어. 너를 범인으로 뒤집어씌울 준비를 하고 있어."
이준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떨렸다.
"왜?"
"왜냐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 조직 전체가 무너지니까."
서연희가 돌아봤다.
"범인은 경찰청 내부의 누군가야."
이준호가 물었다.
"누가?"
서연희가 입을 열다가 멈췄다. 그 순간, 병원 현관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경찰차의 사이렌.
"도망쳐."
서연희가 이준호를 밀었다.
"지하 통로가 있어. 빨리."
이준호가 되묻는 듯 서연희를 바라봤다. 심리상담사가 병원 구조를 왜 알고 있는가? 그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서연희가 다시 말했다.
"내가 여기 근무한 적 있어. 오래전에. 이 병원에서 일했던 거 기억 안 나? 그 시절이 있었어."
이준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병원 복도에 발소리가 들렸다. 여럿. 많은 사람들.
이준호가 창문을 봤다. 3층. 밖은 어둠이었다. 서울 밤. 아래로 떨어지면 죽을 것이었다.
그 순간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
"이준호 검사. 우리 팀으로 돌아와."
김태식이었다. 자신의 선배. 멘토.
"당신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있어."
하지만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알게 되었다.
김태식도 알고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침묵으로 조직을 지키기로.
이준호가 서연희의 손을 잡았다.
"지하 통로."
서연희가 이준호를 끌었다. 복도를 따라. 계단을 따라. 어둠 속으로.
그리고 그 순간, 밤 11시 48분이 되었다.
시간이 또 역행했다.
**【제3사이클 역행】**
이번엔 더 강했다.
이준호의 기억이 빨리 역순으로 흘렀다. 사흘 전. 일주일 전. 한 달 전. 석 달 전.
그리고 3년 전에 도달했다.
오지훈. 자살한 용의자. 그의 얼굴이 명확해졌다.
그 얼굴은 이준호와 비슷했다. 하지만 눈이 같았다. 같은 절망. 같은 광기. 같은 무언가.
"당신이 나를 만들었어."
오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증거를 조작했어. 나를 범인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자살했어. 밤 11시 47분에."
이준호가 깨어났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시. 또 다시. 사이클이 반복되고 있었다.
심전도 기계가 울리고 있었다. 140 bpm. 150 bpm. 160 bpm.
이준호가 손가락을 봤다.
반지가 두 개였다.
양손 약지에 모두.
한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쪽에는 또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준호가 이해했다.
저주가 무엇인지.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오지훈이 자살한 그 순간, 첫 번째 피해자 박수진이 죽었다. 밤 11시 47분. 정확히 같은 시각.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이준호는 이미 죽어 있었다.
3년 전부터.
오지훈이 자살한 그 순간부터.
박민준이 증거를 조작한 이유도 명확했다. 상급자의 압박. 자신의 책임 회피. 그리고 조직 보호. 진짜 범인을 잡으면 경찰청 내부가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민준은 이준호를 격리했다. 무죄인 사람을 범인으로 뒤집어씌우면서도.
밤이 더 깊어갔다.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역행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준호는 알았다.
자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3년 전부터.
오지훈이 자살한 그 순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