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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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장의 쇠창살이 열렸다. 언제 열렸는지 모른다.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창살을 눌렀고 창살이 움직였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통로를 걸었다. 시간이 섞였다.

경찰청 지하 주차장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신발이 콘크리트를 밟는 소리. 자신의 발인지 확실하지 않다. 손에 피가 묻어있지 않다. 그런데 왜 손이 따뜻한가. 누군가의 온기인가.

서울 밤거리. 강남역 일대. 이준호는 거울을 찾아다녔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누구지. 주름이 깊다. 눈이 죽어있다. 턱이 각지다. 이것이 자신의 얼굴인가.

신문 가판대에 자신의 사진이 붙어있다. '용의자 이준호 검사 수배'. 포스터를 뜯어 내렸다. 종이가 찢어졌다.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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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특수수사팀 사무실. 아침 8시.

박민준 팀장이 책상 위에 파일을 내팽친다. 세 개의 폴더. 박수진. 김순철. 박지수. 모두 목 압흔. 모두 시계가 제거되었다. 모두 이준호의 동선과 일치한다.

"이준호 검사의 데이터를 모두 삭제하라."

박민준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감정이 없다.

"그게 무슨—" 최영재가 입을 열었다.

"기록 말소. 자료실에서도. 시스템에서도. 모든 데이터를 제거하라. 그리고 언론에는 용의자가 현재 도주 중이라고 발표한다."

김태식이 일어난다. "박민준, 이건 말이 안 된다. 검사님이—"

"검사님이 범인이다." 박민준이 목을 잘라낸다. "증거가 모두 일치한다. 위치 데이터, 시간 데이터, 행동 패턴. 모두 그를 가리킨다."

"보호가 아니라—"

"그럼 당신도 공범인가?"

침묵. 김태식의 얼굴이 굳었다. 천천히 앉았다.

최영재는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클릭. 클릭. 파일이 삭제된다. 이준호의 신원 기록. 수사 노트. 시간 분석 데이터. 모두 사라진다. 화면에 '영구 삭제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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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편의점. 오후 4시 47분.

이준호가 편의점 앞에 서있다. 손에 물을 들고 있다. 편의점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 계속. 그 얼굴을 보고 있다.

"이준호."

여자의 목소리. 이준호가 돌아본다.

서연희다. 검은 코트를 입은 서연희. 얼굴이 창백하다. 눈이 두렵다.

"나야. 기억하지?"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얼굴이 누구인지 모른다. 두려움도 감정이고, 감정은 이미 떠나갔다.

서연희가 이준호의 손을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누군가의 온기다. 이준호의 손도 따뜻한가. 자신의 체온인가.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체온이 이미 자신 속에 들어와있는 건가.

"당신은 감정을 너무 오래 버렸다고 했잖아. 기억나? 내가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당신이 망가졌어. 감정을 다시 느껴봐. 나를 봐. 나를 기억해."

이준호의 손이 서연희의 손에서 빠진다. 천천히.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자신의 팔을 움직이는 것처럼. 손가락이 구부러진다. 펴진다. 구부러진다. 자동으로. 그것이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동작처럼.

"누구세요?"

서연희의 얼굴이 으그러진다. 입술이 떨린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자신의 목에 닿을 듯 말 듯하다. 공기를 조르는 동작. 그것이 누군가를 죽이는 동작으로 변해간다.

"당신이... 날 모르세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데. 손가락이 더욱 경직된다. 서연희의 목에 닿으려 한다. 하지만 이준호의 다른 손이 그것을 막는다. 자신을 제어하려는 듯. 두 손이 싸운다. 한 손은 죽이려 하고, 한 손은 죽이지 않으려 한다.

서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이 유일한 대답이다. 이준호는 그 눈물을 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감정 없이. 하지만 손은 계속 떨린다. 제어 불능의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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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7분. 시간이 역행한다.

이준호는 길 위에 누워있다. 몸이 경련한다. 팔이 꺾인다.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기억이 쏟아진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박지수. 목 압흔. 손목에 반지 자국. 아파트 거실. 11:47이 표시된 시계. 그 시계를 부수는 손. 검은 장갑. 반지.

그 전. 박수진. 오피스텔. 검은 장갑. 왼손. 반지 없는 손가락. 굵은 관절. 피가 묻은 손. 벽에 튀는 혈흔.

그 전. 김순철. 주택가. 시간이 지워진다. 증거가 사라진다. 하지만 손은 남는다. 계속 조르는 손.

그 전. 더 전. 더 더 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소. 따뜻한 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준호야, 너는 착한 아이야." 그 목소리가 깨진다. 왜곡된다. 다른 목소리로 변한다. "넌 이미 망가졌어."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색이 바랜다. 그 자리에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 같은 얼굴인데 다르다. 미래의 얼굴. 죽은 눈. 검은 장갑.

자신이 왜 경찰이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어머니가 원했는가. 아버지가 원했는가. 자신이 원했는가. 모르겠다. 기억이 사라졌다.

자신의 이름이 뭐지.

입을 벌린다. 목이 잠긴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가. 아니다. 자신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 손가락이 목에 박혀있다.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죽이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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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편의점 CCTV 모니터실.

이준호가 들어온다. 또는 이미 있었다. 시간이 섞여있다.

CCTV 모니터에는 편의점 내부가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이미지. 같은 편의점. 같은 시각. 두 개의 이미지가 동시에 재생된다.

한쪽 화면: 남자가 편의점 점원의 목을 잡고 있다. 검은 장갑. 왼손. 반지 없는 손가락. 굵은 관절. 튀어난 혈관. 얼굴에는 감정이 없다. 기계적으로. 냉혹하게. 목을 조인다.

다른 한쪽 화면: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다. 같은 얼굴. 같은 옷. 같은 신발.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본다. 자신이 하는 일을 본다. 자신이 될 일을 본다.

두 이준호. 같은 시각. 같은 공간. 한 명은 죽인다. 한 명은 죽임을 당한다. 아니다. 둘 다 죽인다. 한 명은 행동으로. 한 명은 방관으로.

이준호가 비명을 지른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 누군가 다른 자신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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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7분. 시간이 역행한다.

이준호는 강남대로 위 인도에서 경련을 일으킨다. 몸이 굽혀진다. 팔이 꺾인다.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기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역순으로 쏟아진다.

3년 전 사건 파일. 용의자의 얼굴. 점점 흐릿해진다.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로 변한다.

자신의 휴대폰. 사진들. 아내의 얼굴. 사라진다. 남은 것은 혼자인 자신의 사진뿐. 계속 혼자.

자신의 집. 주소. 기억이 안 난다. 집이 있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나.

자신의 이름. 무엇인가. 이준호. 오지훈. 누구. 무엇. 무엇이 자신을 이루는가. 이름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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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경찰청 특수수사팀 건물 앞.

이준호가 눈을 뜬다. 아스팔트가 차갑다. 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준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이 이준호와 같다. 미래의 이준호다. 나이가 들었다. 눈이 더 죽어있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다. 손에는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다. 왼손. 반지 없는 손가락. 그 손가락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구부러진다. 펴진다. 조르는 동작. 계속.

그가 말한다. 목소리는 이준호 자신의 목소리와 같다. 하지만 톤이 다르다. 감정이 없다. 기계음처럼.

"시간이 역행할 때마다 당신은 점점 나에게 가까워진다.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당신은 점점 나가 된다. 마지막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이준호가 일어나려 한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당신이 나를 잡으려고 할수록, 당신은 나를 만든다. 이것이 순환의 끝이다."

미래의 이준호가 한 발 다가온다. 발소리. 신발이 아스팔트를 밟는 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이준호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미래의 그 남자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

"내 이름이... 뭐지?"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려온다. 이준호의 목을 향해. 이준호는 눈을 감는다.

경련이 멈춘다.

이준호는 몸을 날린다. 옆으로.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벗어난다. 아스팔트에 구르며 몸을 말아 올린다. 뒷다리로 밀어낸다. 일어난다.

미래의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선다. 이준호를 바라본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날 쫓아 왔구나. 좋다. 이제 끝낼 수 있다."

미래의 이준호가 입을 벌린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손가락이 움직인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구부러진다. 펴진다. 구부러진다.

이준호는 뒷걸음질친다. 건물의 벽을 느낀다. 등이 벽에 닿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누구야. 당신이 누구야."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린다.

미래의 이준호가 다시 다가온다. 한 발. 또 한 발. 걸음이 절뚝거린다. 왼쪽 다리를 끌며 걷는다.

"내가... 당신이다."

미래의 이준호가 손을 뻗는다. 검은 장갑이 아스팔트의 불빛에 반사된다.

그 순간. 헤드라이트.

자동차가 건물 앞 도로를 지나간다. 미래의 이준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차의 불빛이 지나가고. 어둠이 돌아온다.

미래의 이준호는 없다.

이준호는 한 번 숨을 쉰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손을 짚고 벽을 타고 내려온다. 무릎이 약하다.

그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검사님!"

최영재다. 특수수사팀 부팀장. 제복을 입고 있다. 뒤에는 두 명의 경찰관이 더 있다.

이준호는 입을 벌린다. 말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음절이 아니다. 그저 공기음이다.

최영재가 다가온다. 손을 들어 보인다. 무장하지 않았다는 신호다. 경찰관들은 뒤로 물러난다.

"검사님. 저예요. 최영재입니다."

이준호의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최영재의 얼굴이 떨린다.

"당신은... 누구지?"

최영재의 표정이 굳어진다.

"검사님이 저를 기억 못 하세요?"

이준호는 고개를 저는다. 천천히. 다시. 또 다시.

"기억이... 없어요. 누가 말해줄 수 있어요? 내가... 누구라고?"

최영재가 뒤를 본다. 경찰관들이 움직인다. 무전기가 울린다. 작은 소리로.

"—용의자 이준호 발견. 특수수사팀 건물 정문 앞. 상태는... 정신 이상 증상."

최영재가 이준호에게 다시 돌아온다. 얼굴에는 공포가 흐르고 있다.

"검사님. 저랑 함께 가요."

이준호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 이름을 말해줄래?"

최영재가 입술을 깨문다.

"이준호... 검사님. 이준호."

이준호가 그 이름을 되뇐다.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이준호... 이준호..."

반복된다. 계속 반복된다. 마지막에는 의미를 잃은 음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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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47분. 경찰청 특수수사팀 심문실.

이준호는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 손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왼손과 오른손. 모두 보인다. 약지에 감긴 검은 반지가 보인다. 안쪽에 새겨진 글자. '오지훈'. 그 글자를 이준호 자신도 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는 것처럼.

박민준 팀장이 앉아있다. 대면 위치에. 얼굴이 경직되어 있다.

"당신이 뭘 했는지 알아?"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책상을 본다. 책상의 나이테를 따라간다.

"세 명이 죽었어. 모두 당신 손으로."

박민준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신이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 CCTV. 신용카드 거래 기록. 휴대폰 위치 데이터. 모두 당신을 가리키고 있어."

이준호의 입이 움직인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했어?"

박민준이 귀를 기울인다.

"내... 손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나온다.

"손이 아니라? 뭐가 손이 아니라는 건데?"

이준호가 손을 들어올린다. 천천히.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는 것처럼. 검은 반지가 걸린 손가락을 본다.

"이건... 내 손이 아니에요."

박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심문실의 CCTV 카메라를 본다. 그리고 다시 이준호를 본다.

"정신과 검사를 다시 한 번 봐야겠습니다."

박민준이 일어난다. 문을 열고 나간다. 문이 닫힌다.

이준호는 혼자 남는다. 손을 다시 내려놓는다. 책상 위에. 그리고 그것을 본다. 마치 처음 본 손처럼.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혐오감으로 가득한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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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12분. 경찰청 지하 1층 보안실.

CCTV 모니터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수십 개의 화면. 수십 개의 각도. 경찰청 곳곳이 실시간으로 촬영된다.

김태식이 화면을 본다.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계속 움직인다.

최영재가 옆에 선다.

"검사님 심문이 끝났습니다."

김태식이 고개를 돌린다.

"상태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도 기억을 못 하고..."

최영재의 말이 끝나지 않는다.

김태식이 화면을 가리킨다. 한 화면에. 특수수사팀 건물 앞의 CCTV. 새벽 5시경의 기록.

"저게 뭐라고 생각해?"

최영재가 화면을 본다. 이준호가 벽에 기대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가 서 있다.

"용의자... 오지훈?"

"맞아. 그런데 이 화면을 봐."

김태식이 다른 화면을 가리킨다. 다른 각도. 같은 시각. 이준호가 보인다. 혼자. 벽에 기대어 있다. 다른 남자는 없다.

"같은 시각이야. 다른 각도인데... 두 화면에서 본 건 다르지."

최영재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건... 버그인가요?"

김태식이 화면을 계속 본다. 정지화면을 확대한다. 이준호의 손. 검은 장갑. 반지.

"버그가 아니야. 이건... 시간이 겹친 거야."

최영재가 입을 벌린다. 말을 하려다 멈춘다.

"두 개의 시간이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는 뜻이야.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김태식이 다시 화면을 본다. 이준호의 표정. 미래의 이준호의 표정. 같은 얼굴인데 다른 감정.

"그리고 이 남자. 오지훈이라고 했지? 그는 누구야?"

최영재가 대답하지 못한다.

"신원 조회를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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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3분. 경찰청 특수수사팀 회의실.

박민준이 화이트보드 앞에 서 있다. 세 사건의 사진이 붙어있다. 박수진 변호사. 동대문의 여성. 박지수. 세 명 모두. 목에 압흔이 있다. 시계가 모두 제거되었다.

팀원들이 앉아있다. 최영재. 그 외 수사관들. 모두 심각한 표정이다.

"이준호 검사의 신체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박민준이 폴더를 펼친다.

"약지의 반지 내부 DNA. 이준호의 DNA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반지 표면의 DNA는 다릅니다."

침묵.

"두 개의 서로 다른 DNA가 반지 위에 겹쳐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는 이준호. 하나는 미확인 인물. 그리고..."

박민준이 또 다른 보고서를 펼친다. 의료 데이터. 뇌파 수치. 혈액 분석 결과.

"이준호의 혈액형 검사에서 비정상적인 수치가 나왔습니다. 혈소판 수치는 정상 범위의 187%. 헤모글로빈은 156%. 마치 두 사람의 혈액이 섞여있는 것처럼. 뇌파 패턴도 이중 구조를 보입니다. 정상적인 패턴과 역행하는 패턴이 동시에 기록되었습니다."

최영재가 일어난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또 다른 화면을 켠다. CCTV 영상이다. 특수수사팀 건물 앞. 새벽 5시. 이준호와 미래의 이준호가 마주하는 장면.

"이 영상 말입니다. 법의학 팀이 분석했습니다."

박민준이 화면을 일시정지한다.

"두 사람. 한 프레임. 같은 시각. 다른 각도. 이는 시간이 겹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같은 공간에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박민준이 다시 화면을 켠다.

"이준호 검사가 그 영상 속에 두 번 나타났다는 건 확실합니다. 한 번은 피추적자로. 한 번은 추적자로."

팀원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침묵만 흐른다.

최영재가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럼 용의자가 두 명이라는 뜻인가요?"

박민준이 고개를 저는다.

"아니야. 같은 사람이야. 다른 시간대의."

김태식이 몸을 앞으로 숙인다.

"당신이 말하는 건... 이준호가 자기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건가?"

박민준이 대답하지 않는다. 화면을 끈다.

"오지훈이라는 인물의 신원이 나왔습니다. 15년 전 살인 용의자. 현재 행방불명. 그런데..."

박민준이 사진 두 장을 붙인다. 이준호의 사진. 오지훈의 사진.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뭔가 닮았다.

"이 사진들이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얼굴 인식 분석에서 87% 일치율이 나왔어요."

침묵.

"이준호 검사의 진짜 이름이 오지훈이라는 뜻인가요?"

최영재의 목소리가 떨린다.

"아니면... 다른 가능성입니다."

박민준이 말을 잇는다.

"같은 사람이 두 개의 신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시간대에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한 명은 현재의 이준호. 한 명은 과거의 오지훈. 하지만 그들은 같은 존재다. 시간이 겹쳐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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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15분. 심문실 복도.

서연희가 문 앞에 서 있다. 심상치 않은 표정이다. 손에는 진료 기록이 들려있다. 의료 데이터. 뇌파 측정 결과. 수치들이 가득하다.

최영재가 다가온다.

"서 상담사님."

서연희가 돌아본다.

"검사님을 봐도 될까요?"

최영재가 고개를 저는다.

"현재 피의자 신분이라..."

"그래도 몇 분만. 의료 상담입니다."

최영재가 심문실 안을 본다. 이준호가 보인다. 테이블에 앉아있다. 손을 본다. 마치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최영재가 문을 열어준다.

서연희가 들어간다. 문이 닫힌다.

이준호는 서연희를 본다. 인식하지 못하는 눈으로.

"안녕하세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낯설다.

"당신이... 나를 아세요?"

서연희가 앉는다. 이준호 앞에.

"네. 저는... 서연희예요."

이준호가 그 이름을 되뇐다.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서... 연희... 왜 자꾸 낯설어요?"

서연희의 손이 떨린다. 이준호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멈춘다. 반지 때문에. 그 반지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당신은... 기억을 잃고 있어요."

이준호가 고개를 들어 본다.

"기억을... 잃고?"

"네. 점점 더."

서연희가 진료 기록을 펼친다.

"당신의 뇌파 검사 결과입니다. 정상적인 뇌 활동 패턴이 아니에요. 뇌파 수치가 비정상입니다. 알파파는 3.2 헤르츠. 정상은 8~12 헤르츠입니다. 베타파는 거의 측정되지 않습니다. 마치 시간이 역으로 흐르는 것처럼. 뉴런이 역순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신경 신호가 역행하고 있어요."

이준호가 손을 내려놓는다. 테이블 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서연희가 대답하지 못한다. 모른다.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쫓고 있었어요. 살인마를. 그 과정에서..."

서연희가 말을 잇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뭐가 되었어요?"

이준호의 질문이 떨어진다.

"저주에... 걸렸어요."

이준호가 웃는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경련처럼 보인다. 신체 통제 불능 상태로.

"저주? 그런 게... 있어요?"

"네."

서연희가 답한다.

"그리고 당신은... 그 저주의 중심에 있어요. 당신이 살인마를 쫓을수록... 당신이 그 살인마가 되어가고 있어요. 시간이 역행할 때마다.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당신은 점점 오지훈이 되어가고 있어요."

이준호가 손을 들어올린다. 검은 반지가 걸린 손. 그것을 본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을 보는 것처럼. 혐오감이 담긴 눈으로. 손가락이 떨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구부러진다. 펴진다. 구부러진다. 조르는 동작. 자동으로.

"그럼... 내가... 살인을 했어요?"

서연희가 대답할 수 없다. 세 사람이 죽었다. 모두 이준호의 손으로. 또는 이준호가 될 사람의 손으로. 둘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죽이고 있어요. 매일 밤. 역행하는 기억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죽인 사람이기도 하고, 죽일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이준호가 입을 벌린다. 목이 잠긴다. 다시. 또 다시. 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움직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마치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자신의 팔을 조종하는 것처럼. 손가락이 목에 닿는다. 누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내 이름이... 뭐죠?"

서연희가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저 울 뿐이다. 이준호는 그 눈물을 본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반복한다.

"서연희... 서연희... 서연희..."

마치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려는 듯.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 무감각한 손으로.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점점 더 강해지는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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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47분. 심문실 밖.

서연희가 나온다. 최영재가 그녀의 얼굴을 본다. 창백함. 절망. 무력감.

"상태가?"

서연희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밖으로 나간다. 계단을 내려간다. 손에는 여전히 진료 기록이 들려있다. 무의미한 수치들.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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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7분. 지하 유치장.

이준호가 감옥방에 앉아있다. 혼자. 침대 위에. 손을 본다. 계속 본다. 마치 손이 언제든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역행한다.

이번엔 다르다. 이전처럼 천천하지 않다. 빠르다. 너무 빠르다. 마치 필름이 빨리 감기는 것처럼. 현실이 와해되는 것처럼.

기억들이 쏟아진다. 무질서하게. 파편처럼.

오후 5시. 심문실에서 서연희를 본다. 손가락이 자신의 목을 조른다.

오전 10시. 회의실에서 박민준을 본다. 두 DNA. 혼합 혈액.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증거.

새벽 5시. 건물 앞에서 미래의 자신을 본다. 같은 얼굴. 다른 감정. 하나로 수렴해가는 두 시간.

밤 11시 47분. 편의점에서 점원을 죽인다. 검은 장갑. 왼손. 반지. 목 압흔.

오후 7시 33분. 동대문 주택가에서 여성을 죽인다. 시간 데이터. 행동 패턴. 모두 일치.

오전 3시 22분. 강남 아파트에서 박지수를 죽인다. 시계를 부순다. 증거를 지운다. 아무도 모르게.

3년 전. 강남대로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기억이 흐릿하다. 하지만 손은 기억한다. 조르는 동작.

10년 전. 서울역 근처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더 이상 누구인지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얼굴도 모른다. 오직 손만 기억한다.

15년 전. 어린 자신이 누군가를 본다. 그 누군가의 손에는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다. 반지. 오지훈. 그것이 자신의 미래다. 그것이 자신이 될 것이다.

기억이 끝난다. 아니다. 기억이 시작된다. 다시. 반복되어.

이준호는 경련을 일으킨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바닥에 몸을 내팽친다. 입에서 거품이 난다. 목소리가 나온다. 비명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

그리고... 눈을 뜬다.

새벽 5시. 또 다시.

하지만 이번엔 다른 곳이다. 경찰청 건물이 아니라. 서울역 근처의 골목길이다. 낡은 건물들. 어둠. 아무도 없는 거리.

이준호가 일어난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마치 로봇처럼. 자동으로. 누군가의 조종을 받듯이.

골목 벽에는 CCTV가 없다. 어둠이 깔려있다. 증거가 남지 않는 장소. 완벽한 장소.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난다.

같은 얼굴. 같은 옷. 같은 손. 같은 반지.

미래의 이준호다. 아니다. 오지훈이다. 아니다. 둘 다다. 그리고 둘 다 아니다. 이미 구분할 수 없다.

이번엔 이준호는 도망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만났다."

미래의 이준호가 말한다. 목소리는 이준호 자신과 같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 기계음처럼.

"이제 끝내자."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다시 내려온다. 이번엔 이준호는 피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는다. 이미 포기했기 때문이다.

손이 목에 닿는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다.

정확히는. 시간이 역행을 멈춘다.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가 정지한다. 미래도 정지한다. 모든 것이 정지한다.

오직 한 순간만 남는다.

검은 장갑을 낀 손. 목을 조르는 손.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는 순간. 피추적자의 목과 추적자의 손이 만나는 순간. 자신을 죽이는 자신의 손이 되는 순간.

호흡이 멈춘다. 심장이 멈춘다. 의식이 끝으로 향한다. 마지막 기억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정지 상태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난다.

기억도 아니고. 인식도 아닌. 그저 감각. 순수한 감각.

한 번의 비명. 한 번의 외침. 한 번의 질문.

"내 이름이... 뭐지?"

목소리가 반복된다. 계속 반복된다. 무한 반복된다.

"내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이... 뭐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이준호의 눈이 뜨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눈으로.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눈으로.

자신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눈으로.

오직 한 가지만 아는 눈으로.

자신의 손이...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만.

그리고 그 손이... 이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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