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도둑 4화
오전 9시 47분. 특수수사팀 회의실.
박민준 팀장이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화면에 CCTV 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어제 오전 3시 22분. 강남 아파트 현관. 이준호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리고 4분 후 나오는 모습. 얼굴을 가리지 않고.
"검사님은 어제 오전 3시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펼쳤다. 왼손 약지에 검은 반지가 있었다. 오른손 약지에도 같은 반지가 있었다. 두 개.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CCTV는 다른 것을 보여주는데요."
박민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가장 위험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 절차를 따르는 목소리. 이준호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용의자를 몰아붙일 때 사용하는 목소리.
"버그입니다. 시스템의 버그."
"그렇다면 당신의 휴대폰 위치 데이터는? 신용카드 거래 기록은? 모두 현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회의실 창밖으로 서울의 아침이 보였다. 맑은 하늘. 무죄한 햇빛.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약지의 반지가 햇빛에 반사되었다. 반지 안쪽에 뭔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였다.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글씨가 계속 흔들렸다.
"당신의 신체 상태도 의심스럽습니다."
박민준이 다른 태블릿을 켰다. 법의학 보고서였다. 혈액 샘플 분석 결과. 이준호의 이름 옆에 '비정상 수치'라는 표기가 여섯 군데나 붙어 있었다.
"의사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설명해주시죠. 당신이 두 곳에 동시에 있었던 이유를."
침묵.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민준은 일어섰다.
"격리 심의를 신청하겠습니다. 정신 상태 평가를 위해 일주일간 경찰청 심사 부서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박민준이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벗으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아예 벗어지지 않는 것처럼. 마치 손가락 자체가 금속이 된 것처럼. 이준호는 힘을 줬다. 반지가 손가락을 물었다. 피가 흘렀다.
"이상하죠?"
목소리가 들렸다. 김태식이었다.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그는 한 폴더를 들고 있었다. 파일. 오래된 파일. 종이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 전 사건 기록입니다."
김태식이 폴더를 펼쳤다. 첫 번째 페이지. 피해자 명단. 김순철. 직업: 변호사. 나이: 43세. 거주지: 강남구 논현동. 사망 시각: 오후 11시 47분.
"박수진 사건과 비교해보셨어요?"
이준호가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 피해자 사진. 목에 압흔이 있는 시체. 손목 시계가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연입니까?"
"3년 전 용의자는?"
"결국 잡지 못했습니다. 증거가 부족했어요."
김태식이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용의자 프로필. 얼굴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이름 칸을 봤다.
오지훈.
이준호의 숨이 멈췄다. 그 이름. 자신의 노트에 쓰여 있던 그 이름. 어제 새벽 사무실에서 자신이 쓴 이름.
"이 이름이 왜..."
"당신이 그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김태식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선배의 목소리에서 수사관의 목소리로. 이준호를 마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마치 용의자를 대하듯.
"그때 당신의 행동 데이터도 남아있습니다. 범죄 현장 근처. 범죄 시각 근처."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 증거에 대한 반박을 시도했다.
"그건 불완전한 추론입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낮았다. 자신감이 흔들리는 소리.
"수사 담당자가 현장 근처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만으로는 범행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상황 증거만으로는—"
"당신이 그 사건을 수사했던 당시 증거들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김태식이 이준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의 신체에서 채취된 섬유질이 현장에서 발견되었고, 당신의 지문이 피해자의 목에 있었습니다."
김태식이 파일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파일을 건네려 했다가 멈췄다. 이준호의 눈과 마주쳤다. 뭔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파일을 다시 내려놨다.
"당신은 그 증거들을 기록에서 삭제했습니다."
침묵.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리기 시작했다. 반지가 손가락을 조였다.
"내가 그럴 리 없습니다."
목소리가 약해졌다. 이미 반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김태식이 파일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건넸다. 이준호가 받으려 하자 손을 거두었다. 파일을 품에 안았다. 눈을 돌렸다. 이준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범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증거가 없습니다."
김태식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수사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의심하면서도 믿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당신의 신체와 정신 상태는 명백히 이상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믿고 싶지만..."
김태식이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위에 손을 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정상입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손을 봤다. 왼손. 오른손. 두 손의 약지 모두에 검은 반지가 있었다. 반지 안쪽의 글씨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글씨가 선명해졌다.
오지훈.
손가락에서 반지를 벗으려 했다. 반지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호는 반지를 돌렸다. 팔을 비틀었다. 반지가 손가락을 깎았다. 피가 더 흘렀다.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당신이 그 이름입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
오후 2시. 경찰청 지하 심사 부서.
서연희가 심리 평가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하얀 벽. 하나의 책상. 마주보는 의자 두 개. 이준호는 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반지가 여전히 빛났다.
"당신이 그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서연희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상담사의 질문이 아니라 검사의 질문이었다. 이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모른다는 것은 당신이 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기억을 신뢰하십니까?"
이준호가 침묵했다. 서연희는 계속했다.
"당신은 증거만 믿는다고 했어요. 감정이나 직감이 아니라. 그렇다면 증거를 봅시다. 당신의 휴대폰 위치는 모든 범죄 현장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신용카드는 범죄 시각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신의 CCTV 기록은 당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버그입니다."
"버그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까?"
이준호가 자신의 손을 들었다. 테이블에서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천천히 손을 돌려 손등을 바라봤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손가락을 하나씩 펼쳤다. 움직임이 어색했다. 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그렇게 손을 펼친 채 한동안 그것을 바라만 봤다.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약지가 먼저 펼쳐졌다. 반지가 노출되었다. 그 다음 중지. 검지. 마지막으로 엄지. 모든 손가락이 펼쳐진 상태에서 손은 계속 떨렸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십니까?"
"..."
"당신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습니까?"
침묵. 이준호의 눈이 움직였다. 좌우로. 상하로.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서연희는 그의 눈을 쫓아갔다. 이준호의 시선이 멈췄다. 벽의 한 지점에. 아무것도 없는 벽. 하지만 이준호는 그곳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누가 있습니까?"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
오후 5시. 이준호의 사무실.
박민준이 떠난 후 이준호가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다. 최영재도 없었다. 팀원들이 모두 다른 곳에 있었다. 이준호는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 앞에 앉았다. 화면을 켰다.
세 사건의 시각.
박수진: 오후 11시 47분. 여성 피해자(동대문): 오후 7시 33분. 박지수: 오전 3시 22분.
이준호는 손가락으로 계산했다. 11시 47분에서 7시 33분을 빼면 4시간 14분. 7시 33분에서 3시 22분을 빼면 4시간 11분.
거의 동일한 간격.
그 다음은 언제인가. 다음 피해자의 사망 시각은 언제인가.
이준호가 계산했다. 3시 22분에서 4시간을 더하면. 오전 7시 22분쯤.
그리고 그 다음. 오전 11시 22분쯤.
그리고 그 다음. 오후 3시 22분쯤.
그리고 그 다음. 오후 7시 22분쯤.
그리고 그 다음. 오후 11시 22분쯤.
패턴. 완벽한 패턴. 마치 누군가 시간을 계획한 것처럼. 마치 누군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이준호가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5시 12분.
다음 피해자는 오전 7시 22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4시간 10분 후.
손가락이 떨렸다. 시간이 임박했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집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누구에게 전화를 할 것인가. 박민준은 자신을 용의자로 보고 있다. 김태식은 증거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서연희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막아야 한다.
이준호는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오전 7시 22분 주변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검색했다. 패턴에서 나타나는 지역. 강남에서 동대문, 동대문에서 강남으로. 그 다음은 어디인가.
화면에 지도가 떴다. 강남. 동대문. 그리고 강북.
강북의 어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알고 있다. 오전 7시 22분.
이준호는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갔다.
---
밤 11시. 경찰청 유치장.
격리 심의 결과가 나왔다. 불합격. 정신 상태 이상으로 판정. 일주일간 경찰청 유치장에서 대기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준호는 유치장 침대 위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회색 천장. 형광등.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없었다. 창도 없었다. 시계도 없었다. 오직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밤 10시 59분. 밤 10시 58분. 밤 10시 57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흘렀다.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밤 10시. 밤 9시. 밤 8시.
이준호의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제의 기억부터. 서연희와의 상담. 박민준의 고발. 김태식의 파일. 그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입술이 움직였다. 기억을 붙잡으려 했다. 헛수고였다.
밤 7시. 밤 6시. 밤 5시.
3일 전의 기억이 사라졌다. 두 번째 피해자. 동대문의 시체. 그 시체의 냄새. 썩은 고기 냄새와 피의 냄새가 섞인 그 냄새. 손가락이 움직이는 감각. 목을 조르는 손. 손가락에 전해지는 맥박. 그것이 멈추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밤 2시. 오전 1시. 자정.
일주일 전의 기억이 사라졌다. 박수진 사건. 첫 번째 역행. 악몽 속에서 본 자신의 손.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공포. 그 모든 것이 흑암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준호의 입술이 움직였다.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입은 열렸으나 목에서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다른 이름이 나왔다.
"오...지...훈..."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은 음성. 더 거친 음성. 더 오래된 음성.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 마치 다른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것처럼.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자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공포.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는 공포.
오전 3시.
유치장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손은 보였다. 왼손. 검은 장갑. 절뚝거리는 보행.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마치 과거에 다친 흔적처럼. 손가락에는 반지가 있었다.
이준호와 같은 반지.
"깨어났군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 낮은 음성. 하지만 익숙한 음성.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거울에 비친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인데 자신의 것이 아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준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떨렸다.
"당신입니다."
그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이제 형광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이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 나이 많은 얼굴. 더 창백한 피부. 광대뼈가 더 두드러졌다. 눈에는 광기가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의 눈. 아니, 무언가를 계속 잃고 있는 자의 눈. 왼쪽 눈 아래에는 흉터가 있었다. 길고 깊은 흉터. 마치 칼에 베인 자국처럼. 입가에는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당신이 내가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손을 들었다. 왼손. 장갑을 낀 손. 손가락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파란 잉크. 빨간 혈액. 섞여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 남자가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 개의 손가락. 모두 반지를 하고 있었다. 각각의 반지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오지훈. 오지훈. 오지훈. 오지훈. 오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