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두 번째 피해자

동대문 주택가의 골목은 시체 냄새로 가득했다.

새벽 6시 45분. 이준호는 현장 테이프를 밟고 들어갔다. 피해자는 30대 중반 여성. 목에 압흔. 손목 시계는 2시 15분에서 멈춰있었다.

그 냄새가 자신의 냄새 같았다.

이준호가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어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사무실에 있었던 건가? 아니면 어디 다른 곳? 자신이 지금 그 냄새를 풍기고 있는 건 아닌가?

"박수진 사건과 같은 패턴입니다."

최영재가 중얼거렸다. 음성이 불안정했다. 이준호는 피해자의 손을 들었다. 손목에 시계 흔적이 깊게 패여있었다. 범인이 시계를 강제로 제거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남기고 간 것이다.

"CCTV?"

"모두 확인했습니다. 침입, 탈출 기록 없습니다."

이준호의 눈이 좁혀졌다. 현장을 한 바퀴 돌았다. 거실 창문. 부엌 칼집. 침실 옷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범인은 피해자의 일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오직 시간만.

밤 11시 정각.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역행하는 기억이 밀려왔다.

피해자가 침대에 누워있다. 목에 손이 감겨있다. 검은 장갑이 보인다. 왼손이다. 손가락 마디가 튀어나와 있다. 손톱이 깎이지 않아 날카롭다. 손이 피해자의 목을 조인다. 시간은 역순으로 흐른다. 범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손과 팔뚝만 담는다.

손가락 하나가 피해자의 입안으로 들어간다. 시계를 빼내고 있다. 시계 바늘은 2시 15분을 가리킨다. 정확하다. 범인은 시간을 조작했다. 피해자의 실제 사망 시각을 지웠다.

기억이 더 거슬러 올라간다. 범인이 현관을 통해 들어온다. 신발을 벗지 않는다. 거실을 통과한다. 침실로 향한다. 침실 문을 연다. 어둠 속에서 피해자는 자고 있다. 범인은 침대에 다가간다.

손이 올라간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자신의 손가락처럼 정확했다. 손톱 모양도, 관절의 굽음도, 손등의 혈관 위치도.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사무실 천장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제부터 누워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9시 32분.

"검사님, 깼습니까?"

최영재가 문을 밀어 열었다. 파일을 들고 있었다.

"현장 사진입니다. 박수진 사건과 정확히 같은 패턴입니다. 목 압흔, 시계 제거, CCTV 조작 흔적. 모두 일치합니다."

이준호는 일어났다.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두 번째 피해자 신원은?"

"이혜진. 33세. 프리랜서 디자이너. 독신입니다. 어제 저녁 친구와 저녁을 먹었고, 밤 9시경 귀가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망 시각?"

"의학적으로는 밤 11시 30분경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현장의 시계는 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파일을 집어 들었다. 현장 사진들이 펼쳐졌다. 거실. 침실. 피해자의 얼굴. 목의 압흔. 손목의 시계 흔적. 모든 것이 정확했다.

사진 속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 시계 흔적이 깊었다. 시계를 강제로 제거했다. 그리고 시간을 남겼다. 2시 15분. 박수진 사건의 11시 47분과는 다르지만, 패턴은 동일했다. 범인은 피해자의 시간을 훔쳤다.

"검사님?"

최영재가 다시 말했다.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가동할까요?"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바로."

특수수사팀 사무실은 오전 10시 30분이 되자 긴장으로 가득 찼다. 이준호는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 앞에 앉았다. 화면에 서울 지도가 떠올랐다. 빨간 점들이 흩어져있었다. 각 점은 휴대폰 기지국, CCTV 카메라, 신용카드 거래 기록을 의미했다.

"어제 밤 9시부터 자정까지, 이혜진의 행동 경로를 입력합니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 위에 초록색 선이 그려졌다. 동대문 쇼핑몰에서 친구와 만난 위치. 식당 위치. 신용카드 결제 기록. 모든 것이 시간 순서대로 표시되었다. 밤 9시 5분 귀가. 휴대폰 신호가 자택 기지국에 고정되었다.

"이제 범인의 이동 경로를 역추적합니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날렸다. 역행하는 기억 속에서 본 범인의 동선을 입력했다. 침실 진입. 거실 통과. 현관 진입. 그 이전.

화면에 주황색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범인의 경로다. 동대문 주택가에서 출발해 테헤란로로 향한다. 강남대로와 교차한다. 한강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최영재가 숨을 삼켰다.

"3년 전 김순철 사건의 범인 경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준호의 입이 벌어졌다. 소리 없이.

박민준이 들어왔다. 뒤에 김태식이 따라왔다. 박민준의 얼굴은 경직되어있었다.

"이준호 검사. 혹시 피로 상태는 아닙니까?"

이준호가 돌아봤다.

"저는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역행하는 기억이라니. 범인이 시간을 훔친다니. 이건 과학이 아닙니다. 이건 환상입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박민준 팀장님. 현장 증거를 보십시오. 박수진 사건과 이혜진 사건. 모두 시계가 제거되었습니다. 시간 데이터가 조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범인의 능력입니다. 범인은 피해자의 시간을 훔쳐 범죄 시각을 지웁니다."

"그리고 어떻게 당신은 그것을 알았습니까?"

"역행하는 기억을 통해."

침묵이 흘렀다. 박민준의 눈이 좁혀졌다.

"역행하는 기억. 검사님,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범인의 저주입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자에게 같은 저주가 전이됩니다. 저는 밤마다 역행하는 기억을 봅니다.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과정을 역순으로. 그것을 통해 동선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김태식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이준호. 혹시 병원에 가본 적은?"

"저는 멀쩡합니다."

"당신은 요즘 수척해 보입니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민준이 박수진 사건 파일을 집어 들었다. "이준호 검사. 당신은 이 사건 발생 당시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무실에서 야근을 했습니다."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박민준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의 기록이 떠올랐다. 어제 오후 11시 47분. 두 개의 빨간 점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깜빡였다. 하나는 특수수사팀 사무실. 또 하나는 강남 오피스텔.

"같은 시각에 당신은 두 곳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준호의 시선이 태블릿에 고정되었다. 버그다. 시스템 오류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의 기억이 공백이었다. 사무실에 있었나? 아니면 강남에 있었나?

"CCTV 영상을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당신이 직접 검토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박민준이 옆으로 물러섰다. 눈은 의심으로 가득 찼다.

"최영재 부팀장. 이 건은 당신이 진행하십시오. 이준호 검사는 당분간 다른 사건에서 물러나십시오."

"박민준 팀장님—"

김태식이 나섰다.

"이것은 시스템 오류입니다. 이준호의 알리바이는 충분합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간 데이터 시스템은 오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이준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박민준의 말이 맞았다. 시간 데이터 시스템은 오류가 없다. 자신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정말 두 곳에 있었다는 뜻인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당분간 휴가를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박민준이 말했다.

"신체와 정신을 회복하십시오."

특수수사팀 사무실을 나간 이준호는 복도에서 서연희를 만났다.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왜?"

"당신이 아프다고 들었어요."

"나는 괜찮습니다."

이준호가 지나가려 했다. 서연희가 팔을 잡았다.

"당신 기억이 자꾸 끊긴다고 했잖아. 병원에 가자. 제가 좋은 의사를 알아요."

"나는 멀쩡합니다."

목소리는 차가웠다. 서연희의 손이 떨렸다.

"당신 이전과 달라졌어요. 얼굴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뭔가 계속 사라지고 있어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습니다."

이준호가 팔을 빼냈다. 서연희는 복도에 남겨졌다.

화장실에서 이준호는 거울을 봤다. 얼굴이 낯설었다. 어제는 이렇게 창백하지 않았나? 주름이 이렇게 많았나? 눈 밑의 검은 자국은 언제부터 생겼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갤러리를 열었다. 비어있었다. 모든 사진이 사라졌다. 어제 찍은 현장 사진도. 지난주 촬영한 자신의 얼굴도. 모두 없었다.

최근 사진을 찾아보려 했다. 폴더가 없었다.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동기화되지 않았다. 휴대폰 설정을 확인했다. 모든 백업이 비활성화되어있었다.

누가 이렇게 했나?

아니면 자신이 했나?

밤 11시.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이번엔 다르게 시작됐다. 역행하는 기억이 사흘치가 한 번에 쏟아졌다. 박수진 사건. 이혜진 사건. 그리고 또 다른 사건. 강남 아파트에서 여성이 죽어있다. 목에 압흔. 손목 시계가 제거되었다. 시각은 오전 3시 22분. 범인의 손이 보인다. 검은 장갑. 왼손.

손가락이 움직인다. 손톱이 피해자의 피부를 긁는다. 손등의 상처가 드러난다. 반지 자국이 손목에 깊게 패여있다. 철로 만든 반지. 신체에 박힐 정도로 단단한.

그 손이 자신의 손이다.

이준호가 비명을 질렀다.

새벽. 이준호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침대 밑.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경찰청 긴급 호출.

세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었다.

강남 아파트. 오전 3시 22분경 발견. 피해자 이름 박지수. 30세. 목에 압흔. 시계 제거. 시간 조작.

위치는 이준호가 지난밤 역행 기억에서 본 곳과 정확히 같았다.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온 이준호는 벽에 기대앉았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화면의 글자들이 떨려 보였다. 오전 3시 22분. 강남 아파트. 박지수.

자신이 본 장면과 일치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미끄러졌다. 차가운 땀이 손가락 사이를 흘렀다. 화면을 켜니 긴급 호출 알림이 5개 쌓여있었다. 김태식. 박민준. 최영재. 서연희. 그리고 알 수 없는 번호 3개.

이준호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일어섰다. 욕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부어있었다. 눈이 충혈되어있었다. 턱선이 예각으로 변했다. 닷새 만에 10년을 먹은 것처럼 변해있었다.

"이준호입니다."

전화를 받은 순간 김태식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디야? 지금 강남서로 와야 해. 세 번째 사건이 터졌어."

"알고 있습니다."

"뭘 알고 있어? 지금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어. 박민준이 전체 인력을 풀었어. 이건 단순한 연쇄살인 사건이 아니야."

이준호는 옷을 입고 있었다. 셔츠 단추를 채우는 손이 멈췄다.

"뭐라고 했습니까?"

"박지수. 30세. 강남 아파트 1506호. 목 압흔. 시계 제거. 시간 조작. 박수진 사건과 이혜진 사건과 똑같은 패턴이야. 그런데 여긴 CCTV도 있고, 이웃 주민들도 있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범인이 시간 데이터를 완벽하게 조작했다는 뜻이지."

이준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언제 발견됐습니까?"

"오전 3시 22분. 경비원이 순찰하다가 발견했어. 시간대 분석을 하려고 하는데 박민준이 당신이 참여하지 말라고 했어. 상황이 복잡해졌어."

"그렇군요."

"이준호. 너 괜찮아?"

목소리에 균열이 있었다. 김태식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또는 의심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준호가 끊었다.

강남서 현장 근처에 도착한 건 오전 5시 47분. 아파트 주변에는 경찰차 4대와 초록색 봉쇄 테이프가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있었다. 이준호는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15층 현관 앞에는 최영재가 서있었다. 이준호를 보고 놀랐다.

"검사님. 들어오면 안 됩니다. 팀장님 지시입니다."

"내가 봐야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준호가 한 발 더 다가갔다. 최영재는 몸으로 막지 않았다. 대신 시선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현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박지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목에는 압흔이 있었다. 손목은 시계 흔적만 남아있었다. 피부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망 시각은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었다.

이준호는 시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뭘 하는 거야?"

박민준이 문간에서 나타났다.

"현장 관찰입니다."

"당신은 이 사건에서 물러나있기로 했지 않습니까?"

"피해자를 봐야 합니다."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피해자의 목을 살폈다. 압흔의 깊이. 너비. 손가락의 위치. 모든 것이 앞의 두 사건과 일치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왼쪽 손목에 작은 흠집이 있었다.

이준호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졌다.

"건드리지 마세요!"

수사관이 나타나 이준호의 팔을 잡았다. 이준호는 손을 빼지 않았다. 흠집을 더 자세히 보려 했다. 그 위에는 반지 자국이 있었다. 신체에 박힌 반지의 흔적.

"당신이 현장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나가세요."

박민준이 밀어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이건 반지 자국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범인이 반지를 낀 손으로 피해자를 만졌습니다. 그 반지는 신체에 박혔을 정도로 단단합니다.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아마도 철이거나 텅스텐일 겁니다."

"당신은 이 사건에서 물러나있어야 합니다."

"범인은 왼손으로 피해자의 목을 조였습니다. 그 왼손에 반지가 있습니다. 검은 장갑을 낀 왼손입니다."

이준호가 계속했다.

"그리고 범인은 피해자의 시계를 의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정확히 오전 3시 22분을 표시하기 위해. 박수진 사건에서 시계는 11시 47분을 가리켰습니다. 이혜진 사건에서는 오후 7시 33분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오전 3시 22분입니다."

박민준이 입을 열었다.

"패턴이 있다는 뜻입니까?"

"시간입니다. 범인은 시간을 남기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시계를 제거하고 특정 시각을 기록하는 것. 이것은 범인의 서명입니다."

이준호의 눈이 빛났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명확하게 보였다.

"범인은 시간을 조종합니다. CCTV 영상도, 신용카드 기록도, 휴대폰 데이터도 모두 조작합니다. 하지만 시계는 조작할 수 없습니다. 시계는 물리적 증거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시계를 제거하고, 대신 다른 곳에 시각을 남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최영재가 물었다.

"범인의 진정한 범죄 시각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스템 상의 시각이 아닌, 현실의 시각을 말입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이 세 사건의 시각을 연결하면 범인의 패턴이 보입니다. 11시 47분. 오후 7시 33분. 오전 3시 22분. 이 세 시각의 공통점은—"

이준호가 멈췄다.

자신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번호가 떠있었다. 하지만 그 번호를 보는 순간 이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번호 끝자리가 자신의 번호와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번호 앞에 한 자리가 더 붙어있었다.

이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잠갔다.

"검사님?"

최영재가 물었다.

"문제 없습니다."

이준호가 현장을 나가고 있었다. 박민준이 막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표정은 심각했다.

복도에서 김태식을 만났다. 이준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너 정신 차려. 지금 넌 용의자야."

"알고 있습니다."

"박민준이 너한테서 도망치고 있어. 시간 데이터 시스템에서 너의 행동 기록을 다시 봤어. 그리고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어."

"뭡니까?"

"너의 휴대폰 위치 데이터가 세 피해자 모두와 매칭돼. 박수진 사건 때 넌 강남에 있었어. 이혜진 사건 때 넌 동대문에 있었어. 그리고 이번 사건 때도 넌 강남에 있었어. 정확히 범인이 있던 장소에."

이준호의 손이 주머니로 들어갔다.

"내 휴대폰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미 확인했어. 넌 그 장소들에 있었어. 시스템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

"그렇다면 누군가 내 위치 데이터를 조작했습니다."

"누가? 넌 시스템의 최고 전문가야. 넌 그 시스템을 설계했어. 누가 그걸 조작할 수 있어?"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박민준이 너를 감시하려고 생각 중이야.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시간 문제야. 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야 해."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그걸 증명해야 해."

이준호가 아파트를 나갔다. 밖은 이미 밝았다. 아침 햇빛이 강했다. 하지만 그 햇빛도 이준호의 그림자를 제대로 드리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에 탔다. 엔진을 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누군가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검은 장갑을 낀 손. 왼손. 손톱이 길게 자란 손가락. 철로 만든 반지. 신체에 박힐 정도로 단단한.

그 손이 자신의 손처럼 움직였다.

왼손을 봤다. 반지가 없었다. 하지만 손목 안쪽에는 작은 자국이 있었다. 반지를 낀 흔적.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손목 안쪽의 자국이 더 선명해졌다. 깊은 흠집. 반지가 파고든 자국.

자동차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장소가 아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장소로.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 이번엔 받아야 했다.

이준호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화면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숨소리처럼 정확한.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준호."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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