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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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사무실의 불은 모두 꺼졌다. 이준호는 책상 앞에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현장이 보였다. 박수진 변호사의 오피스텔 침실. 11시 47분. 손목 시계가 멈춘 정확한 시각. 그 시각부터 모든 것이 거꾸로 흐른다.

목 위의 손. 검은색 장갑을 낀 손. 손가락이 천천히 놓인다. 압흔이 사라진다. 시신이 숨을 내쉰다. 눈이 감긴다. 피해자는 산다.

시간이 더 역행한다.

침실의 조명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의 불빛이 사라진다. 범인의 손이 보인다. 왼손. 손목에 검은색 팔찌 같은 것이 감겨 있다.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다. 손가락 관절이 굵다. 손등의 혈관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피해자의 입 주변에서 시계를 꺼낸다. 시계가 역순으로 입 안으로 들어간다.

침대 옆 탁자 위. 시계가 놓여 있다가 손에 집힌다. 손이 탁자에서 떨어진다.

복도. 범인이 침실에서 나온다. 뒷모습. 검은 운동화. 신발 창이 회색 타일 위에 남긴 물자국이 사라진다. 범인의 몸이 뒤로 이동한다. 거실로.

거실. 창문이 닫힌다. 창문의 빗장이 채워진다. 유리창의 흠집이 사라진다. 범인의 손이 유리를 만진다. 오른손. 검은 장갑. 손목에도 무언가가 감겨 있다. 같은 검은색.

출입문. 범인이 문을 닫는다. 잠금장치가 채워진다. 문이 열린다. 복도로 나간다. 엘리베이터. 11층. 9층. 5층. 1층.

로비. 범인의 신발이 대리석 바닥을 밟는다. CCTV 사각지대. 범인의 몸이 그림자로만 보인다. 하지만 움직임은 명확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속도.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뚝거린다. 신발 창 안쪽이 더 닳아 있다. 10년 이상 이 보행 습관을 유지했다.

건물 밖. 거리. 남쪽으로. 계속 남쪽으로. 한 발 한 발이 역순으로 찍힌다. 신발의 밑창 패턴이 아스팔트에 남는다. 같은 크기의 발걸음. 같은 간격. 같은 속도.

이준호는 눈을 떴다.

새벽 5시 47분. 정확한 시각.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다. 책상 위의 노트에는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향하는 선. 역순의 동선.

손이 떨렸다. 손을 멈추지 못했다. 펜을 들었다. 다시 그렸다. 오피스텔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강남대로. 테헤란로. 계속 남쪽. 경계를 넘어 강남구 끝. 삼성동. 한강 방향.

이준호는 노트를 내팽쳤다. 아니다. 다시 들었다. 손가락으로 각 지점을 짚었다. 거리. 시간. 이동 속도. 1분마다 약 1.5킬로미터. 평균 보행 속도의 3배. 차량이다. 범인은 차량을 타고 도망쳤다.

손이 또 떨렸다. 이준호는 손을 봤다. 손등이 이상했다.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관절이 굵어 보였다. 어제는 이렇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 자신의 손은 이렇지 않았다.

거울을 찾았다. 사무실 벽에 붙은 작은 거울. 얼굴을 비췄다.

낯설었다. 얼굴이 낯설었다. 이틀 전과 다르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다. 얼굴이 수척해졌다. 피부가 회색이다. 마치 사흘을 자지 않은 모습이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손가락이 거울 위에서 멈췄다. 그 손도 낯설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점심을 뭘 먹었는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제 오후 3시에 뭘 했는가. 모호했다. 3시부터 5시까지의 시간이 공백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 시간을 도려내 버린 것처럼.

이준호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컴퓨터를 켰다. 자신의 일정을 확인했다. 어제 오후 일정. 3시: 박민준 부장과 회의. 5시: 현장 재검증. 일정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휴대폰을 들었다. 어제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카메라 롤을 열었다. 어제 사진이 없었다. 그저께 사진만 있다. 어제는 비어 있다.

창밖을 봤다. 아직 어둡다. 새벽 6시. 동쪽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준호."

서연희였다. 심리 상담사. 이준호의 전 부인. 손에 종이 컵이 들려 있었다.

"넌 왜 여기 있어?"

"일이 있었다."

"밤새?"

이준호는 답하지 않았다. 커피를 받아 마셨다. 따뜻했다. 서연희가 사무실에 들어오며 이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 표정이 변했다.

"당신 얼굴이..."

"뭐?"

"계속 변한다."

서연희가 다가왔다. 거리 50센티미터. 이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눈빛이 흔들렸다. 공포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이게 뭐야. 어제는 이렇지 않았잖아."

"과로다."

"과로? 이준호, 이건 과로 때문이 아니야. 이건..."

서연희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호의 눈을 봤다. 그 눈에서 뭔가를 읽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물었다.

"너 혼자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어?"

"업무 중이었다."

"이 시간에?"

"시간대 증거 분석은 24시간이다."

거짓이 아니었다. 반은 참이었다. 나머지 반은 거짓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그 반을 말해 줄 수 없었다.

서연희가 비추는 휴대폰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뭐 하는 거야?"

"기록. 이 변화를."

이준호가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서연희가 피했다. 휴대폰 화면에 이준호의 얼굴이 떴다. 그리고 그 화면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사진 속 이준호의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여러 개의 얼굴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이거."

"카메라 오류인가?"

서연희가 다시 찍었다. 같은 결과. 화면에 여러 개의 얼굴이 겹쳐 있었다. 마치 시간이 중복되어 있는 것처럼.

"당신 괜찮아? 정말로."

이준호는 휴대폰을 돌려받고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 자신의 책상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노트를 펼쳤다. 범인의 동선. 그려진 지도. 강남대로에서 한강 방향으로.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에 접속했다. 강남대로 신호등 카메라. 어제 밤 11시 47분부터 12시 15분까지. 영상을 재생했다.

차량이 지나간다. 11시 52분. 검은색 승용차. 번호판이 보인다. 분석 중. 번호판 인식 실패. 묻혀 있다. 고의적인 위장이다.

이준호가 동선의 다음 지점을 입력했다. 테헤란로. 11시 58분. 교통량 측정 카메라. 영상을 재생했다.

차량이 지난다. 같은 검은색 승용차. 번호판이 여전히 묻혀 있다. 하지만 운전대 위의 손이 보인다. 검은 장갑. 왼손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오른손은 창문 밖으로 나와 있다. 손목에 검은색 팔찌 같은 것. 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준호가 손을 봤다. 자신의 손. 자신의 손에는 반지가 있었다. 왼손 약지. 이혼했을 때도 빼지 않은 반지.

이준호가 다시 시스템에 접속했다. 3년 전의 데이터를 불러왔다. 미해결 사건. 한강 변의 피살 사건. 피해자 김순철. 45세. 시간 데이터 모순으로 사건이 미해결된 사건.

파일을 열었다. 범인의 이동 경로. 그려진 지도. 그 지도가 이준호의 손에서 떨렸다.

같다. 거의 같다. 강남대로를 지나 테헤란로로. 계속 남쪽으로. 한강 방향으로. 범인의 도주 경로가 3년 전과 일치한다.

더 정확히는 시간대가 일치한다. 3년 전 사건의 범인도 11시 47분에서 12시 15분 사이에 같은 경로로 도주했다. 이동 속도도 같다. 1분마다 1.5킬로미터. 정확히 같다.

수치를 겹쳤다. 두 사건의 범인 동선을 시스템에 중첩시켰다.

화면에 두 선이 나타났다. 파란색과 빨간색. 3년 전과 현재. 그리고 두 선이...

겹쳤다. 완벽하게 일치했다. 같은 차량. 같은 경로. 같은 속도. 같은 시간.

이준호는 서 있었다. 이제 범인을 잡을 수 있다. 이제 증거가 명확하다. 3년 전 미해결 사건과 현재 사건을 연결하는 범인. 연쇄살인마. 시간대 증거로 완벽하게 추적된 범인.

손이 떨렸다. 이번엔 흥분으로 떨렸다. 아니었다. 이준호는 느꼈다. 떨림이 흥분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파일을 다시 열었다. 3년 전 사건의 수사 기록. 시간 데이터 분석. 메모란에 쓰인 글씨. 자신의 필체다.

"피해자 입실 11시 23분. 용의자 탈출 11시 47분. 차이 24분. 밀실 내에서 24분간의 범죄. 하지만 CCTV에는 용의자 입실 기록이 없다. 불가능한 시간차. 시간 데이터 모순. 사건 미해결."

이제는 그 모순이 이해가 간다. 범인이 피해자의 시간을 훔쳤다. 입실 시각을 지웠다. CCTV 기록을 조작했다. 시간 데이터 자체를 조작했다.

그리고 지금. 박수진 변호사 사건. 같은 패턴. 같은 범인. 같은 시간대 증거. 같은 동선.

이준호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또 변해 있었다. 어느새 더 수척해져 있었다.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져 있었다.

마치 3년 전의 자신처럼.

아니다. 이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3년 전 미해결 사건 때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자신은 그 사건을 수사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범인이 아니다.

이준호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3년 전 사건의 용의자 사진. 파일 속 얼굴. 흐릿했다. CCTV 영상이 저해상도여서인지, 아니면 시간 데이터 조작으로 인한 손상인지. 얼굴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준호가 사진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용의자의 얼굴을 짚었다.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마치 사진이 아니라 안개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밤 11시 정각이었다.

시간이 역행했다. 이번엔 더 강했다.

어제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전날의 기억이 역순으로 흘렀다. 사흘 전. 닷새 전. 일주일 전. 기억들이 역순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무실의 불이 꺼진다. 어제의 자신. 책상에 쓰러져 있다. 어제의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 펜과 노트. 하지만 노트에 그려진 것은 동선이 아니라 글자다. 손가락으로 쓴 글자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이게 뭐야."

그 전날. 자신이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다. 얼굴이 계속 변하고 있다.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전날 전날. 자신이 무언가를 죽인다. 손이 목을 조른다. 검은 장갑을 낀 손. 반대쪽 손에는 반지가 없다. 그 반대쪽 손이 시계를 집고 있다. 피해자의 시계. 아니, 자신의 시계. 손목에 남겨진 흔적. 검은색. 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팔찌 같은 것.

이준호는 비명을 지르며 책상을 내팽쳤다.

책상이 쓰러진다. 서류가 흩어진다.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진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김태식이었다. 선배. 멘토. 얼굴이 창백했다.

"이준호, 넌 뭐하는 거야?"

이준호는 일어섰다. 숨이 찬다. 가슴이 철렁했다. 손이 떨린다.

"기억이..."

"뭐?"

"기억이 사라진다."

김태식이 다가왔다. 이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려. 이준호."

이준호가 김태식의 얼굴을 봤다. 김태식의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아니, 이준호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흐려진다. 세상이 안개 속으로 빠져든다.

"저... 저기 누구?"

이준호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책상 위. 노트 위에 쓰인 글씨. 자신이 그려 놓은 범인의 동선 지도. 그 지도 아래 쓰인 이름.

"오지훈."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몸이 움찔했다. 마치 누군가 가슴팍을 꿰뚫은 것처럼. 호흡이 멈췄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뇌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억압된 기억의 편린. 무언가를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름이 낯설지도, 친숙하지도 않다. 그 이름이 단지 이상할 뿐이다.

"그 이름이 뭐야?"

"오지훈. 3년 전 미해결 사건의 용의자야."

김태식이 말했다.

"너... 그 사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이준호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사건을 기억하는지, 아니면 단지 기록을 읽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기억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시간이 역행하면서 자신의 기억도 역순으로 소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멸의 끝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 도둑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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