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훔친 살인마
강남 오피스텔 2401호. 시신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여성. 30대 초반. 목에 깊은 압흔.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제 밤 11시부터 자정 사이. 법의학 소견은 명확했다.
이준호는 현장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눈은 멈춰있었다. 시신의 손목. 그곳에 시계가 있었다. 초침이 정확히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해자 신원은?" 이준호가 물었다.
최영재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박수진. 29세. 로펌 변호사. 혼자 사는 거주자. 어제 저녁 회사 동료와 마지막 연락은 오후 9시 12분."
"CCTV는?"
"오피스텔 1층 현관과 엘리베이터 3대. 어제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출입 기록 없음. 현관 카드키 사용 기록도 없습니다."
이준호가 눈을 들었다. "신용카드는?"
"마지막 사용이 어제 오후 7시 42분. 강남역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구매. 그 이후 기록 전무."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다시 시신을 바라봤다. 법의학 소견. CCTV 기록. 신용카드 거래 데이터. 휴대폰 위치 정보. 모든 증거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망 시각은 11시부터 자정 사이.
범인의 침입 증거는 없음.
범인의 탈출 증거도 없음.
완벽했다. 너무 완벽했다.
"범인이 현장에 없다고?" 최영재가 중얼거렸다.
"아니다." 이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범인은 여기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이?"
이준호는 피해자의 손목을 다시 들었다. 시계를 들어 눈 높이까지 올렸다. 초침. 분침. 시침. 세 개의 바늘이 모두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가 멈춰있다. 정확히 말하면 의도적으로 멈춰있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법의학 소견은 사망 시각을 11시부터 자정 사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계는 11시 47분을 가리킨다. CCTV 기록이 말하는 침입과 탈출 시각은 없다. 신용카드는 오후 7시 42분 이후 반응이 없다."
최영재가 노트북을 다시 들었다. "혹시 범인이 시계를 일부러 멈춘 건가요?"
"그것도 아니다."
이준호는 시계를 더 자세히 들었다. 케이스를 살폈다. 유리 면에 금이 갔다. 하지만 무리하게 깨진 흔적은 아니었다. 마치 오랜 세월 사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금처럼 보였다.
"시간이 거짓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준호가 손을 내렸다. "모든 시간 데이터가 사라졌다. CCTV 기록. 신용카드 거래. 휴대폰 위치. 범인이 지워버렸다."
"지워버렸다고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체를 다시 바라봤다. 법의학 소견대로라면 사망 시각은 11시부터 자정 사이. 하지만 그것도 추정일 뿐이었다. 시신의 체온. 경직도. 혈액 응고 상태. 모두 추정의 영역이었다.
만약 범인이 이 모든 추정을 계산해서 시간을 조작했다면?
만약 실제 사망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면?
그렇다면 범인의 알리바이는 완벽해진다.
"CCTV 영상을 다시 분석해야 한다." 이준호가 말했다. "1분 단위로. 혹은 1초 단위로. 범인은 어디선가 이 시간대 시스템에 접근했을 것이다. 데이터 조작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최영재가 노트북을 들었다. "지금 바로요?"
"지금 바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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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수사팀 사무실. 밤 9시 30분.
이준호는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CCTV 영상이 프레임 단위로 재생되고 있었다. 10배속. 100배속. 1000배속. 영상이 빠르게 흘러갔다.
김태식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종이컵을 책상에 놨다.
"이준호. 밤을 샐 생각인가?"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우스를 클릭했다. 영상이 멈췄다. 그는 다시 재생을 눌렀다.
"이 사건은 다르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의 범죄와는 다르다."
김태식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휴식이 필요해 보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분석한 거 아닌가? 법의학과 현장 증거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같은 방향이 아니다. 거짓 방향이다."
"거짓이라고?"
이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이 사건의 모든 시간 데이터가 조작되었다. 범인이 시간을 조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범죄 중 이런 사례는 없다."
김태식이 모니터를 바라봤다. CCTV 영상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 현관. 빈 복도. 빈 엘리베이터.
"증거가 있나?" 김태식이 물었다.
"아직 없다. 하지만 있을 것이다."
"어디에?"
이준호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시간이 맞지 않는 곳에. 범인은 시간을 조작했지만 완벽하게 조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딘가에 오차가 있을 것이다. 1초라도. 1프레임이라도."
"그걸 찾는데 얼마나 걸릴 건가?"
"모른다. 하지만 찾을 때까지 계속한다."
김태식은 한동안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 그의 눈. 무언가 변해있었다. 보통의 이준호라면 이 정도면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신선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준호는 다르게 보였다. 집착하는 모습. 광기에 가까운 표정.
"휴식을 권한다." 김태식이 다시 말했다. "명령이 아니라 권고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우스를 다시 클릭했다. 영상이 다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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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이준호는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는 비워진 커피 컵 3개가 쌓여있었다. 눈 아래로 검은 자국이 생겼다.
최영재가 지나가다 멈췄다. "검사님. 시간 되셨습니다. 귀가하세요."
"조금만 더."
"벌써 2시간을 더했습니다."
이준호는 손을 들어 영상을 일시정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1시간 36분 47초.
프레임이 깜빡였다. 정확히는 깜빡인 것처럼 보였다. 1프레임. 0.03초.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오차.
"여기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1시간 36분 47초. 엘리베이터 3번 카메라의 1프레임이 손상되었다. 아니다. 손상된 게 아니라 편집되었다."
이준호는 영상을 다시 돌렸다. 1시간 36분 47초부터 1시간 36분 50초 사이. 0.1초의 시간.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림자. 아주 미세한 그림자.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데이터에서 지워졌다.
"범인이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범인이 여기를 통과했다."
최영재가 화면에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림자만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체형도 알 수 없었다. 오직 어두운 윤곽만 있었다.
"시간대가 어떻게 되나요?" 최영재가 물었다.
이준호가 계산했다. "어제 밤 11시 47분. 정확히 피해자의 시계가 멈춘 시각이다."
"그럼 범인은 정말 시간을 조작한 건가요?"
"그렇다. 범인은 시간 자체를 무기로 쓴다."
이준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 속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손목이 저렸다.
이준호가 손목을 들었다. 시계. 손목 시계.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초침이 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11시 47분. 47분. 47분.
아니다. 그것도 환상이었다. 초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호의 눈 앞이 흐릿해졌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저림이 시작되어 팔뚝까지 퍼져나갔다.
"검사님?" 최영재가 손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이준호는 손목을 놨다. 시계의 초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1시 48분.
"괜찮다." 이준호가 말했다. "과로다. 그냥 과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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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5분.
이준호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어두운 집. 침묵. 그 사이로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를 다시 들었다.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1시 47분. 48분. 49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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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주변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다. 주변이 역재생되듯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천장. 벽.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준호가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바라봤다.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11시 47분. 46분. 45분. 44분.
분침도. 시침도. 모두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준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기억이 시작되었다.
역순으로.
밤 11시 45분부터 역행이 시작되었다.
밤 11시 30분. 차를 타는 순간. 거꾸로.
밤 11시. 사무실에서 나가는 순간. 거꾸로.
밤 10시. 현장에서 돌아가는 순간. 거꾸로.
오후 2시. 강남 오피스텔에 도착한 순간. 거꾸로.
아침 8시.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거꾸로.
모든 기억이 역순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역순의 기억 속에서 이준호는 본다.
자신의 손.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자신의 손.
반지를 낀 손가락. 은색 반지.
손가락이 조인다. 더 조인다.
목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박수진. 피해자의 얼굴.
눈이 풀려있다. 혀가 튀어나와 있다.
손가락의 감각이 생생하다. 따뜻한 피부. 저항하는 몸.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저항.
이준호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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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12분.
눈이 떨어졌다. 정신이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이 천장이었다. 시계는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준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을 펼쳤다. 반지가 있었다. 은색 반지. 자신의 것. 항상 차고 있던 그 반지.
꿈이었나?
아니다.
기억이 다르다. 일반적인 꿈이 아니다. 꿈처럼 희미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명확했다. 손가락의 감각까지 생생했다.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감각. 따뜻한 피부. 저항하는 몸.
이준호는 손을 떨었다.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면대에 얼굴을 물에 담갔다. 차가운 물. 숨을 쉬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눈이 이상했다.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다. 마치 공포에 빠진 것처럼.
목을 들어 거울에 비췄다.
붉은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목을 조른 흔적처럼.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화면을 켰다. 새벽 4시 12분. 목요일.
오늘의 기억이 맞나?
침대에서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사무실로 갔고. 강남 오피스텔 현장으로 갔다.
맞다. 맞다.
그런데 왜 역순으로 기억이 흐르는 환상을 봤나?
그리고 왜 자신의 손으로 박수진을 죽이는 장면이 보였나?
이준호는 화장실의 조명을 껐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목을 다시 봤다. 자국이 여전했다.
거실로 나갔다. 침대로 돌아갔다.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를 들었다. 새벽 4시 14분.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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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최영재의 전화.
"검사님, 깼어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쉬었다. "왜 이 시간에?"
"강남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강남 오피스텔 사건 관련해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대요."
이준호가 일어났다. "뭔데?"
"피해자의 시계예요. 어제는 못 찾았는데 오늘 아침 수사팀이 발견했어요. 위치가 이상하대요."
"어디에?"
"피해자의 손목이 아니라 입 안에 있었어요. 피해자가 물어뜯었던 것 같아요. 초침이 특정 시각에서 멈춰있고, 그 시각이..."
"그 시각이?"
"어제 밤 11시 47분이에요. 정확히 당신이 지목한 시각과 일치한다고요."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검사님? 있어요?"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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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30분.
강남서 특수수사팀 사무실.
최영재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호가 들어섰다. 얼굴이 창백했다.
"밤을 새웠어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모니터에 피해자의 시계가 확대되어 있었다. 디지털 시계. LCD 화면에 11:47로 고정되어 있었다.
"입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고?" 이준호가 물었다.
"네. 법의관 말로는 피해자가 범인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물어뜯었을 가능성이 높대요. 시계 줄이 끊어져 있었어요."
이준호는 화면을 자세히 봤다. 11:47. 정확히 그 시각이다.
"범인의 시간대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뭔 말씀이세요?"
"범인이 피해자의 손목에서 시계를 빼냈다. 그리고 그 시각을 기록했다. 11시 47분. 피해자가 죽은 시간. 범인은 자신이 그 정확한 시각에 피해자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영재가 말했다. "그래서 시간대 조작을 했던 거군요."
"시간이 사라졌다. 피해자의 움직임. 신용카드 거래. 휴대폰 신호. 모든 시간 데이터에서 11시 47분을 지웠다."
이준호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뭐냐?"
최영재가 기다렸다.
"시계가 입 안에 있었다면, 범인은 왜 회수하지 않았나?"
"아마도 피해자의 저항이 심했을 거예요. 범인이 서둘렀을 수도 있고."
"아니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범인은 의도적으로 남겼다. 우리가 정확한 시각을 알도록. 11시 47분. 이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게 무슨..."
사무실 문이 열렸다. 박민준이 들어섰다. 얼굴이 굳어있었다.
"이준호."
이준호가 돌아봤다.
"너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인다. 어제 밤을 새웠나?"
"네, 팀장."
박민준이 이준호를 자세히 봤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었다. 눈동자가 불안정해 보였다.
"휴식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
"이 사건을 풀 때까지는 못 쉽니다."
"이 사건만 해결되는 게 아니야. 너 상태가..."
박민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준호가 말했다.
"이 사건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본 어떤 범죄보다 정교합니다. 범인이 시간 자체를 무기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풀어야 합니다."
박민준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하지만 무리하지 마. 알겠나?"
"알겠습니다."
이준호는 다시 화면을 봤다. 11:47. 그 시각이 계속 떠올랐다.
밤 11시 47분.
어제 밤 11시 47분. 그 시각에 자신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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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특수수사팀의 핵심 장비. 서울 전역의 CCTV, 신용카드 거래 기록, 휴대폰 위치 데이터, 차량 이동 기록 등을 통합해 특정 시간대의 범인 동선을 추적하는 시스템.
이준호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간: 11:47 장소: 강남구 일대 범주: 모든 데이터
엔터.
시스템이 작동했다. 맵 위에 초록색 점들이 떠올랐다. 어제 밤 11시 47분에 강남 지역에서 활동한 모든 사람들의 흔적이다. 신용카드를 사용한 사람. 휴대폰 신호를 송신한 사람. CCTV에 찍힌 사람들.
"범인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최영재가 옆에서 봤다. 초록색 점들이 수백 개. 수천 개.
"이 중에서 어떻게 찾죠?"
"패턴이다."
이준호가 다시 입력했다.
시간: 11:45 ~ 11:50 장소: 강남구 강남대로부터 반경 2km 이내 범주: 이동 기록만
엔터.
점의 수가 확 줄었다. 이제 백 개 정도.
"이 점들이 그 시간대에 움직인 사람들이다. 그중 범인은..."
이준호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여기다."
강남 오피스텔 위의 한 점. 그 점이 움직였다. 오피스텔에서 나와 강남대로로 나갔다. 그 다음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갑자기 신호가 끊겼다.
"11시 47분 정확히 신호가 사라진다."
"신호를 차단했다는 거죠?"
"그렇다. 범인은 그 시각에 휴대폰을 꺼거나 차단 장치를 사용했다. 우리가 추적할 수 없도록."
이준호의 손가락이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범인은 11시 47분에 여기를 떠났다. 강남 오피스텔에서. 정확히 피해자가 죽은 시간에."
최영재가 말했다. "그럼 이 신호는?"
"범인의 흔적이다."
이준호가 일어났다. 얼굴이 창백했다.
"범인은 시간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시각을. 그리고 그 시각에 맞춰 움직였다."
"시간을 어떻게 알았죠?"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계를 들었다.
오후 1시 23분.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준호의 눈 앞이 흐릿해졌다. 목에 조임감이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검사님?"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최영재가 받았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현기증이 좀."
"의무실에 가보시죠."
"아니다. 괜찮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최영재가 팔을 잡고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놨다. 화면을 다시 봤다. 범인의 이동 경로가 떠있었다.
그리고 그 경로 위에서 이준호는 본다.
자신의 손. 누군가를 조르는 자신의 손.
"검사님?"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계속 추적하자. 범인을 찾아야 한다."
---
오후 3시.
특수수사팀 회의실.
박민준 팀장이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이준호와 최영재, 그리고 다른 팀원들이 모였다.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를 말해주게."
이준호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어제 밤 11시 47분에 살해되었습니다. 범인은 시간 데이터를 조작해 자신의 흔적을 지웠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준호가 자료를 보였다. 피해자의 시계. 11:47.
"피해자가 범인과 투쟁하면서 시계를 물어뜯었고, 그 안에는 정확한 사망 시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이를 의도적으로 남겼습니다."
박민준이 물었다. "왜 의도적으로 남겼나?"
"범인의 목표는 완벽한 범죄입니다. 시간을 조작해 증거를 완전히 지우는 것. 우리가 그 시각을 알게 되면, 우리는 시간대 역추적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범인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범인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는 능력을. 그것이 범인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증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박민준이 말했다. "이건 신종 범죄네. 시간대 조작 범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네. 그래서 이 사건은 중요합니다."
이준호가 계속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시간 데이터의 공백을 찾아야 합니다. 범인이 신호를 차단한 시각. 11시 47분부터 11시 52분까지 5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시간대에 범인의 행동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이 5분의 공백입니다."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속 추적하게. 하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 언론에서 난리가 날 거야. 조용히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이준호는 자리로 돌아갔다.
최영재가 속삭였다. "검사님 정말 괜찮으세요? 얼굴이 안 좋은데."
"괜찮다."
이준호는 화면을 봤다. 범인의 이동 경로. 11시 47분. 그 시각.
그 시각에 자신은 어디에 있었나?
박민준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 팀원들의 눈이 이준호에게 쏠렸다. 누군가 속삭였다.
"검사님 상태가 이상한데."
"밤을 새운 것 같아."
"아니야.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박민준은 이준호를 더 자세히 봤다. 목. 목에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조른 자국처럼 보이는 붉은 자국.
박민준의 눈이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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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이준호가 자신의 행동 기록을 확인했다. 어제 밤 11시 47분.
휴대폰 위치 데이터: 강남역 근처 신용카드 거래 기록: 없음 차량 이동 기록: 없음
강남역 근처에 있었다. 그 시각에.
맞다. 맞다. 강남역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왜 기억이 불분명한가?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어제 밤 11시 47분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이 흐릿했다.
강남역. 편의점.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 있었나?
누군가를 만났나?
아니다.
누군가를 죽였나?
이준호가 눈을 떴다.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다. 자신의 반지. 은색. 변하지 않는 모양.
하지만 손가락에는 자국이 있었다. 피의 자국처럼 보이는 붉은 색.
이준호가 손을 씻었다. 붉은 색이 사라졌다. 단순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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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30분.
사무실을 나갔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초저녁의 하늘이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준호가 걸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멈췄다.
앞에 여자가 서있었다. 서연희. 전 부인.
"안녕."
서연희가 말했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바빴다."
"바쁜 정도가 아니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얼굴을 봐."
이준호가 돌아서려 했다. 서연희가 팔을 잡았다.
"당신 눈이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가?"
"동공이 풀려있어. 마치 공포에 빠진 사람처럼. 당신은 항상 차분했는데."
이준호가 팔을 빼냈다. "괜찮다."
"괜찮지 않아. 당신 손도 떨리고 있어. 뭔가 일어났나?"
"아무것도 아니다."
이준호는 돌아섰다. 서연희가 따라왔다.
"이준호. 나를 봐. 내 눈을 봐."
이준호가 멈췄다. 서연희의 얼굴을 봤다.
"당신은 감정을 너무 오래 버렸다. 그래서 지금 감정이 터져 나가는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당신이 말하기만 하면."
이준호가 말했다. "나는 감정이 없다."
"거짓말이다."
서연희가 이준호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공포야.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뭔가 당신을 무섭게 만들고 있어. 뭔가를 말해. 제발."
이준호가 손을 빼냈다. "헤어진 지 오래됐다. 신경 쓰지 마."
"나는 여전히 심리 상담사야. 그리고..."
서연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서서 걸었다. 서연희가 따라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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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이준호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어두운 집. 침묵.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를 들었다. 밤 9시 12분.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밤 11시 47분. 그 시각이 계속 떠올랐다.
어제 밤 11시 47분. 자신은 정말 강남역에 있었나?
기억이 불분명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손가락의 감각.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감각. 따뜻한 피부. 저항하는 몸.
그것은 꿈이었나? 아니면 현실이었나?
이준호는 손을 펼쳤다. 반지가 있었다. 은색 반지.
손가락에는 여전히 때가 남아있었다. 붉은 색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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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이준호가 사무실로 돌아갔다. 밤샘 분석을 하기로 결심했다.
특수수사팀 사무실은 조용했다. 조명만 환하게 켜져있었다.
이준호는 시간 데이터 분석 시스템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제 밤 11시 47분의 모든 데이터를 다시 살펴봤다.
피해자의 신용카드 거래: 없음 피해자의 휴대폰 신호: 없음 피해자의 차량 기록: 없음
범인의 신호는 11시 47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각부터 5분간 공백이 있었다.
11시 47분부터 11시 52분까지.
그 5분 동안 범인은 어디에 있었나?
이준호가 계산했다. 범인이 이동한 거리. 속도. 가능한 모든 위치.
그리고 갑자기 멈췄다.
화면에 떠있는 것은 자신의 휴대폰 위치 데이터였다.
어제 밤 11시 47분.
자신의 위치: 강남역 근처.
범인의 예상 위치: 강남역에서 반경 1km 이내.
겹친다.
범인의 이동 경로와 자신의 위치가 겹친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이건..."
마우스를 움직였다. 범인의 동선을 더 자세히 분석했다.
범인은 강남 오피스텔에서 나와 강남대로로 나갔다. 그리고 강남역 방향으로 이동했다.
강남역.
자신이 있던 장소.
범인의 동선이 자신의 위치와 일치한다.
이준호가 화면을 자세히 봤다. 범인의 이동 경로. 강남역 부근. 편의점 위치.
편의점.
자신이 커피를 마신 편의점.
범인이 그곳을 지나갔다.
아니다.
범인이 그곳에 있었다.
11시 47분.
그 시각에.
이준호의 눈 앞이 흐릿해졌다.
"아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건 우연이다.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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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5분.
이준호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를 들었다.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1시 47분. 48분. 49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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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주변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다. 주변이 역재생되듯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천장. 벽.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준호가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바라봤다.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었다.
11시 47분. 46분. 45분. 44분.
분침도. 시침도. 모두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준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기억이 시작되었다.
역순으로.
밤 11시 45분부터 역행이 시작되었다.
밤 11시 30분. 차를 타는 순간. 거꾸로.
밤 11시. 사무실에서 나가는 순간. 거꾸로.
밤 10시. 현장에서 돌아가는 순간. 거꾸로.
오후 2시. 강남 오피스텔에 도착한 순간. 거꾸로.
아침 8시.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거꾸로.
그리고 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어제. 그제. 그 전날.
모든 기억이 역순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역순의 기억 속에서 이준호는 본다.
자신의 손.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자신의 손.
반지를 낀 손가락. 은색 반지.
손가락이 조인다. 더 조인다.
목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박수진. 피해자의 얼굴.
눈이 풀려있다. 혀가 튀어나와 있다.
손가락의 감각이 생생하다. 따뜻한 피부. 저항하는 몸.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저항.
이준호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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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이준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장이 천장이었다. 벽이 벽이었다.
시계는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반지가 있었다.
이준호는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톱이 파고든 흔적처럼.
아니다.
이건 환상이다. 모두 환상이다.
이준호는 손을 씻었다. 붉은 자국이 사라졌다.
거울을 봤다. 눈이 이상했다.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다.
그리고 목. 목에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목을 조른 자국처럼.
이준호는 손을 목에 가져갔다. 그 자국을 만졌다.
현실이었나? 꿈이었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새벽 4시 정각.
강남 오피스텔 사건. 피해자 박수진. 사망 시각 11시 47분.
어제 밤 11시 47분.
그 시각에 자신은 어디에 있었나?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자신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왜 기억이 불분명한가?
왜 자신의 손으로 박수진을 죽이는 환상을 봤나?
왜 목에 자국이 있나?
이준호는 침대로 돌아갔다.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시계를 들었다. 새벽 4시 3분.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손가락 끝에서부터 저림이 시작되었다.
마치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이준호는 손을 떨었다.
"이건 환상이다."
그가 중얼거렸다.
"모두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목의 자국은 여전했다.
회의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 데이터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어제 밤 11시 47분에 자신이 정말 어디에 있었는지.
하지만 그 데이터가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이준호는 시계를 다시 들었다.
새벽 4시 7분.
초침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11시 47분. 47분. 47분.
그 시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이 범인일 가능성.
그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다른 역순의 기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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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회의실.
박민준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목의 자국이 더 선명해 보였다.
"이준호. 너 정말 괜찮나?"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박민준이 일어섰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다. 너는 퇴근해. 명령이다."
"팀장..."
"퇴근해."
이준호는 자리를 떠났다. 최영재가 따라왔다.
"검사님. 정말 의무실에 가보시죠. 상태가..."
"괜찮다."
이준호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최영재가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순간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준호가 화면을 켰다.
미지의 발신자로부터 온 메시지.
"11:47을 기억하나?"
이준호의 손이 얼어붙었다.
최영재가 옆에서 봤다. "검사님? 뭐가..."
이준호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조용히 하게."
이준호의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떨어졌다.
최영재가 물러섰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이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11:47을 기억하나?"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너도 우리 중 하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