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강남 대극장 지하 3층 대기실. 밝은 조명 아래 배우들이 긴장 속에 앉아 있었다. 지훈의 차례가 다가왔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펼쳐질 2차 실연. 10년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선역 장면이 손에 들려 있었다.
"한지훈, 입장하세요."
발을 옮기는 순간, 지훈의 심장이 요동쳤다. 지정된 장면은 <봄날의 편지>라는 드라마의 1막. 아버지를 잃고 절망에 빠진 아들이 어머니를 감싸 안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었다. 착한 역할. 선역. 지훈이 10년간 피해온 영역이었다.
심사위원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 최영미가 없었다. 대신 골든 에이지 총 프로듀서 박성철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눈은 냉담했다.
"장면을 시작하세요."
조명이 어두워졌다. 지훈은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역할을 하는 배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엄마... 왜 자꾸 남겨두고 가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연기가 아니라 진정한 떨림이었다. 10년 동안 악역만 해오며 쌓인 것들—업계의 낙인, 캐스팅 디렉터의 거절, "너는 악역만 가능해"라는 말들이 목에서 나왔다. 어머니 배우의 손을 잡으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가짜 눈물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 없이 어떻게..."
장면은 45초 만에 끝났다. 침묵.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박성철의 입가가 움직였다. 미세한 미소.
"고맙습니다. 다음은 악역 장면을 부탁드립니다."
지훈의 눈이 떨어졌다.
"악역?"
"2차는 지정 장면만 있습니다. 합격입니다."
합격.
지훈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 전 심사장에서 본 박성철의 눈빛은 놀라움이었다. 그가 놀랐다는 것은 지훈의 악역 외의 연기를 처음 봤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대 이상이었다는 뜻이었다.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SNS 알림이 폭주했다.
[#한지훈은배우다 3시간 만에 트렌드 1위] [골든 에이지 2차 실연 합격, 최종 심사 확정] [팬덤: "이제 주연 시대 시작"]
어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지훈아! 합격했대! 다들 축하하는데 언제 전화 안 해?"
"응, 엄마. 근데..."
"뭐가 근데야? 이제 마지막이야. 최종 심사만 남았어."
지훈은 대기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다. 눈가에 남은 눈물이 아직도 젖어 있었다. 선역을 하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나?
휴대폰을 켜 팬덤 채팅방에 들어갔다.
[@anti_jh_fan 공식 채팅방 - 3만 2천 명]
[우와아아아!! 합격이다!! 한지훈은 배우다!!]
[최종 심사에서 주연 역할 받겠지?? 우리가 만든 배우 한지훈!!!!]
[이제 10년의 악역 낙인은 끝. 진짜 배우 시대 시작한다!]
[신태호 따위 비교도 안 되는 연기력. 이제 업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드림팩토리? 최영미? 다 무너진다. 우리 한지훈이 최고야.]
메시지가 계속 올라왔다. 지훈은 화면을 내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당신이 보여줄 진정한 연기, 우리가 기다리고 있어요 ♡]
이서은의 메시지였다. 그 아래에는 수십 개의 응원 댓글이 붙어 있었다. 하트, 박수, 응원 이모티콘.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배우가 주연 시대를 열기를 원하고 있었다.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숨이 차올랐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 밤, 강남역 근처 소형 스튜디오를 빌렸다. 2차 실연에서 받은 선역 대본과 자신이 예전에 연기했던 악역 장면의 대사를 모두 가져갔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팬덤도 없고, 심사위원도 없고, 업계의 평가도 없는 공간에서.
스튜디오의 조명을 직접 맞춰 켰다. 조명사나 조감독 없이 혼자 손으로 각도를 조정했다. 그리고 대본을 집어 들었다. 먼저 선역 장면을 읽었다.
"엄마... 왜 자꾸 남겨두고 가는 거야?"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술일 뿐이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읽었다. 같은 말, 다른 톤. 눈물을 흘리는 척 했다. 완벽했다. 심사위원들을 만족시킬 만큼 완벽했다.
이제 악역 장면을 집어 들었다. 영화 <검은 해>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조직 보스, 강민의 죽음 장면이었다.
"...끝이군. 결국 나 혼자네."
조명 없이도 손가락 하나가 움직였다. 목소리가 깊어졌다. 어깨가 무너졌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숨을 쉬는 강민의 표정. 절망과 체념이 섞인 표정. 지훈의 얼굴이 변했다.
"누군가 날 기억해 줄까? 누군가..."
목소리가 끊겼다. 진짜 끊겼다. 눈물이 흘렀다. 진짜 눈물이었다.
지훈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강민처럼.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선역도 잘 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게. 하지만 자신의 몸이 원하는 것, 자신의 숨이 나가는 방식, 자신의 눈물이 나오는 순간은 모두 여기였다. 악역에서만. 절망하는 캐릭터에서만. 타락한 인간에서만.
그것이 지훈의 진정한 연기였다.
그것이 지훈의 자유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은이었다.
"지훈, 축하해. 2차 합격했어. 우리 모두 알았어. 너는... 정말 잘했어."
"응."
"최종 심사는 자유 장면 선택이야.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게 우리가 응원하는 방식이야."
침묵이 흘렀다.
"지훈?"
"... 내가 원하는 게 뭘까?"
"그건 너만 알 수 있어. 우리는... 너를 따라갈 뿐이야."
전화가 끝났다. 지훈은 여전히 강남역 근처 스튜디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천장의 조명이 밝았다. 그 밝은 조명 아래서 자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순간, SNS 알림이 울렸다. 김도준 평론가의 기사였다.
[골든 에이지 공정성 논란 확산 - 팬덤 투표 의혹 제기]
[연예계 비평가 김도준: "개인의 연기력이 아닌 집단의 여론이 심사 결과를 좌우한다면, 그것은 오디션이 아닌 인기도 투표다"]
지훈은 기사를 읽었다. 댓글은 이미 3천 개를 넘었다.
[김도준 말이 맞다. 한지훈이 실력이 있다고 해도 팬덤의 도움이 없었으면 탈락했을 거다]
[공정성 무시하고 팬덤 힘으로 올라온 배우를 주연으로 주나?]
[드림팩토리 최영미 대표가 반발하는 이유가 있다. 시스템 붕괴다.]
[한지훈? 악역 배우 맞다. 선역하면 부자연스럽지.]
팬덤 채팅방이 폭발했다.
[이 기사 뭐야?? 명백한 폄훼다!!]
[김도준 저 기자 진짜 악질. 지훈이 실력으로 합격했잖아!]
[우리가 뭐 잘못했어? 지훈을 응원하는 게 죄야?]
[최영미 저 할머니 왜 자꾸 지훈 괴롭혀?]
[최종 심사에서 명확히 보여줄 거야. 우리 한지훈의 실력을!]
[하지만 심사위원이 공정할까? 업계가 지훈을 막으려고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 우리가 더 응원해야 하나?]
[지훈이가 팬덤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면 어떻게 해? 우리가 짐이 되면?]
[그래도 상관없다. 지훈을 응원하는 게 우리의 선택이고, 그게 힘이 되면 좋은 거지.]
[근데 정말 그럴까? 지훈이는 팬덤 없이도 올라왔을까?]
지훈은 채팅창을 닫았다. 손이 떨렸다. 이번에는 분노 때문이었다.
그날 밤 11시, 박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훈, 뉴스 봤지?"
"응."
"상황이 복잡해졌다. 최영미가 골든 에이지 조직위에 압력을 넣고 있어. 신태호 쪽에서도 움직이고 있고. 말이야, 너는 2차 실연에서 정말 잘했어.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좋아. 하지만 최종 심사 심사위원 구성이 조정될 수 있다는 거야."
"뭘 어떻게 조정한다는 건데?"
"최영미가 심사위원 추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 그렇게 되면 너한테 불리한 심사위원들이 들어올 수 있다. 너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돼. 최종 심사에서는 팬덤의 도움 없이 너 자신만으로 심사위원들을 설득해야 해."
"내 자신만으로..."
지훈은 반복했다.
"맞아. 너 자신만으로. 지훈, 넌 이미 합격했어. 이제 필요한 건 승리가 아니라 증명이야."
박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절실했다.
전화를 끊고 지훈은 다시 한 번 스튜디오 바닥에 누웠다. 천장의 조명이 여전히 밝았다. 그 밝은 조명 아래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10년간 악역만 해온 배우. 팬덤의 응원으로 올라온 배우. 업계의 견제를 받는 배우.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자신의 목에서 강민의 목소리가 나왔다.
"누군가 날 기억해 줄까? 누군가..."
그것이 지훈의 진정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자신이 남기고 싶은 것이었다.
다음 날, SNS에는 새로운 기사가 떠올랐다.
[신태호, 한지훈 선역 연기 분석 영상 공개 — "부정적 감정 연기에만 특화"]
[유튜브 댓글 3만 개 돌파 — 팬덤 vs 안티팬 전쟁]
[드림팩토리 최영미, 골든 에이지 심사위원 추천 — "공정성 강화"]
지훈은 기사들을 읽었다.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신태호의 분석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은 지훈의 2차 실연 장면을 프레임별로 나누고 있었다. 신태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세요. 한지훈의 선역은 기술적으로는 완벽합니다. 하지만 눈빛을 보세요. 여기, 절망이 남아 있어요. 착한 아들이 아니라, 절망하는 인간이 연기하는 착한 아들처럼 보입니다."
영상은 계속됐다. 신태호는 자신의 선역 장면과 지훈의 선역 장면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저는 진정한 따뜻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지훈은 따뜻함을 연기합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지훈은 영상을 끝까지 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신태호 말이 맞다. 한지훈은 악역만 해야 한다.]
[한지훈의 눈빛이 진짜 이상하네. 절망이 묻어난다.]
[신태호가 정석적 배우다. 한지훈은 비정상적이다.]
[그래도 한지훈이 2차 합격한 이유는 뭐야? 심사위원들이 뭘 본 거야?]
[팬덤의 힘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신태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눈빛에는 절망이 남아 있다. 아무리 선역을 해도, 그 절망은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10년간의 악역이 자신의 몸에 새겨놓은 낙인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다시 영상을 봤다. 신태호의 선역 장면. 정석적이고, 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훌륭한 연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신태호의 연기였다. 신태호의 삶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훈의 눈빛에 남은 절망은? 그것은 지훈의 삶이었다.
지훈은 휴대폰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신태호, 고마워. 덕분에 깨달았어.]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은 지훈의 마음속에 남았다.
팬덤 채팅방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태호 저 놈 진짜 악질이다. 지훈이를 깎아내리려고.]
[근데 말이 맞기도 해. 지훈이 눈빛이 진짜 이상했어. 절망이 묻어나.]
[그게 뭐가 문제야? 그게 지훈이의 진정한 연기 아닌가?]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따뜻함을 원하는 거 아닌가? 주연은 따뜻한 배우가 필요한 거 아닌가?]
[그럼 지훈이가 주연을 못 받는다는 거야?]
[최종 심사에서 다시 보여주면 된다. 우리가 응원하면 된다.]
[근데 우리 응원이 지훈이한테 도움이 될까? 아니면 짐이 될까?]
[지훈이는 우리를 필요로 할까?]
지훈은 채팅을 닫았다. 팬덤의 불안이 전해져 왔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훈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훈이 자신들의 응원 속에서 질식하고 있다는 것을.
지훈은 이서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최종 심사까지 연락 없이 준비하고 싶어. 괜찮을까?]
이서은의 답장은 빨랐다.
[괜찮아. 하지만 한 가지만. 최종 심사에서 너는 너를 보여줘. 팬덤의 기대가 아니라, 너 자신을. 그게 우리가 진짜 응원하는 거야.]
지훈은 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서은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팬덤을 위해 악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악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최종 심사까지 6일이 남았다.
그 6일 동안 지훈은 스튜디오에서만 살았다. 악역 장면을 반복했다. 1000번, 아니 1만 번을 했다. 선역 장면도 했다. 하지만 매번 악역으로 돌아갔다.
최종 심사 전날 밤, 지훈의 휴대폰에는 100개 이상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팬덤의 응원.
업계 인사들의 경고.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
지훈은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만 전화했다.
"엄마, 내일 봐."
"응, 지훈아. 화이팅."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대로였다.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
"응?"
"난..."
지훈은 말을 멈췄다. 천장을 봤다. 그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난 뭐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어머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봐, 엄마."
"응. 우리 지훈."
전화가 끝났다. 지훈은 처음으로 8시간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