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팬덤 채팅방 '@anti_jh_fan'의 화면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훈의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다 말고 떨렸다. 채팅창의 글자들이 눈에 박혔다.

**@지훈_영원**: 최종 심사는 무조건 선역이어야 한다!!! 심사위원들이 선역 연기를 원하는 게 분명해. 2차에서 증명했잖아. 이번엔 킹 역할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심사위원들의 표를 확보할 수 있어. 지훈이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전략을 짜야 한다!!!

**@지훈_팬심**: +1 심사위원 중에 신태호 찍어주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그 새끼들을 이기려면 '깨끗한 이미지'가 필수다. 악역 같은 건 최종에 절대 금지!!!

**@지훈_응원단**: 어?? 뭔 소리야? 지훈이는 악역이 진짜 잘하는데??? 선역만 고집하면 또 다른 낙인에 빠지는 거 아니야??

**@비판적_지지자_01**: 정확하게 지적했다. 우리가 처음 지훈이를 사랑했던 이유가 뭐였어? 그 완벽한 악역 연기 때문이잖아. 지금 우리가 하는 짓이 그걸 버리라고 강요하는 건 아닌가?

**@절대_지훈파_리더**: 그건 낭만주의야. 현실은 '합격'이다. 합격해야 기회가 생기고, 기회가 생겨야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당장 악역 고집했다가 떨어지면 끝이야.

**@어머니_팬**: 아이들, 싸우지 말자. 지훈이가 고민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시끄러운 건 아닐까?

채팅창이 멈췄다. 한 줄, 두 줄, 그리고 다시 폭주했다.

**@지훈_영원**: 어머니 팬님 정확해요. 그런데 우리가 지훈이를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게 시끄러운 걸까요?

**@비판적_지지자_01**: 네, 시끄럽습니다. 아니, 위협적입니다.

지훈은 화면을 내려놨다.

강남역 지하 카페. 오전 11시인데도 낮은 조명이 실내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노트북 화면을 다시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준호였다.

"지금 어디야?"

"강남역 지하. 너도 왔어?"

"5분이면 내려간다."

박준호는 정확히 4분 48초 후 지훈의 테이블에 앉았다. 얼굴이 다크서클로 뒤덮여 있었다.

"봤어? 채팅방."

지훈이 물었다.

"다 봤다."

박준호가 테이블 위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말았다. 식어 있었다.

"너는 뭐하고 싶어?"

지훈의 입이 떨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박준호는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더 천천히.

"지훈. 정직하게 답해봐. 최종 심사에서 넌 뭘 하고 싶어? 선역? 악역? 아니면 합격?"

침묵이 흘렀다. 지훈은 테이블 위의 식은 커피잔을 집었다. 손가락이 컵 테두리에 하얀 자국을 남겼다.

"나도 모르겠어."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속에서.

박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비난의 한숨이 아니었다. 안쓰러움의 한숨이었다.

"팬덤이 너한테 뭘 준다고 생각해?"

"뭐?"

"기회? 응원? 아니야. 팬덤은 너한테 책임을 주는 거야. '우리가 너를 여기까지 올렸으니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는 책임 말이야."

박준호가 테이블을 향해 몸을 구부렸다. 지훈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네. 누구 손이야? 팬덤의 손? 업계의 손? 아니면 너 자신의 손?"

박준호가 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3화 때 내가 뭐라고 했어? '팬덤은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고 했잖아. 그게 지금 현실이 되고 있어. 채팅방 봤지? 이미 갈라지고 있어."

지훈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곳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럼 내가 어떡해."

박준호의 눈이 지훈을 바라봤다.

"악역이 좋아? 선역이 좋아?"

"……악역이 좋다."

"그럼 그거 하면 되지."

"합격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래. 안 될 수도 있지."

박준호가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근데 합격한다고 해서 행복할까? 팬덤을 위해서, 팬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연기가?"

지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박준호가 일어났다.

"너한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최종 심사까지 하루 남았으니까. 그 하루 동안 팬덤 채팅은 보지 마. 어머니한테도 연락하지 마. 혼자 있어. 그리고 생각해. 넌 누구고 싶은 거냐."

박준호가 떠났다. 그가 앉았던 의자는 여전히 따뜻했다.

지훈은 혼자 남겨졌다.

카페의 배경음악은 재즈였다. 색소폰의 슬픈 음색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지훈은 박준호의 말을 씹으며 노트북 화면을 다시 켜 팬덤 채팅방을 확인했다.

**@절대_지훈파**: 악역은 위험해. 우리가 지훈이를 여기까지 올렸는데 그 믿음을 배신할 거야??

**@비판적_지지자_02**: 위험? 아니야. 지훈이 자신을 배신하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지훈_영원**: 둘 다 우리 지훈이를 위하는 거 아닐까? 그냥 지훈이가 결정하게 놔두자.

**@절대_지훈파_리더**: 결정? 너 뭔 소리야? 우리가 여기까지 올린 거면 우리도 책임이 있는 거지. 그냥 결정하게 놔둘 수 없어.

지훈이 화면을 껐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호가 아니었다.

신태호였다.

"안녕, 지훈."

목소리는 친근했다. 너무 친근해서 더 무서웠다.

"뭐 하는 거야?"

"너를 만나고 싶었어. 최종 심사 전에."

강남역 근처의 한 카페. 신태호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어?"

지훈이 앉으며 물었다.

"항상 가깝지 않았나? 같은 세대 배우니까."

신태호가 웃었다. 그 웃음은 참새 울음처럼 날카로웠다.

"10년을 거의 만나지도 않았잖아."

"그건 너 때문이야. 넌 항상 자기 혼자만 불행한 척했으니까."

신태호가 커피를 마셨다. 마시고 한 번에 말했다.

"팬덤 덕분에 뜬 거 맞지? 솔직해. 넌 팬덤의 손 안에 있어."

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넌 뭐가 불만이야?"

"불만? 난 너 때문에 불안한 거야. 정석적으로 왔던 배우들이 갑자기 뒤로 밀리고 있잖아. 팬덤 같은 비공식 채널이 업계의 평가를 씹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신태호가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지훈의 눈을 직시했다.

"넌 배우가 아니야. 넌 콘텐츠야. 팬덤의 콘텐츠.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알아? 팬덤이 지겨워지면 넌 끝이야. 그건 내가 아니라 넌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해."

신태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더 위협적으로.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으면 팬덤을 버려.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내가 그랬고, 최영미도 그랬고, 모든 진정한 배우가 그래."

신태호가 일어났다.

"최종 심사에서 봐. 넌 떨어질 거야. 그리고 그때 넌 깨달을 거야. 팬덤이 넌 배우가 아니라 '놀잇감'이었다는 걸."

신태호가 떠났다.

지훈은 테이블에 혼자 남겨졌다. 두 개의 커피 잔. 신태호가 마신 잔과 지훈이 마신 잔. 그리고 신태호가 마시지 않은 잔.

그는 신태호가 마신 잔을 들었다. 입술이 닿은 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혐오도, 공감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저 공허함이었다. 신태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몰려오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공허함. 지훈은 잔을 내려놨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은이었다.

"지훈님. 시간 있으세요?"

"……."

"카페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혼자인 것 같아서."

30분 후, 지훈과 이서은은 다른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더 조용했다. 손님도 적었다.

"채팅방 봤어요?"

이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봤어. 그리고 신태호도 만났어."

"뭐라고 했어요?"

"팬덤을 버리라고. 그래야 진정한 배우가 된다고."

이서은이 한숨을 쉬었다. 긴 한숨이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뭐?"

"지훈님, 제가 지훈님을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서은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엔 순수했어요. 진짜 그랬어요. 당신의 연기가 좋아서, 당신이 불공평하게 대우받는 게 싫어서.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뭐?"

"제가 당신을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봤어요. 팬덤이 원하는 방향으로. 최종 심사에서 선역을 해야 한다, 합격해야 한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 모든 게 제 생각이었어요.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이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당신을 조종했어요. 팬덤이라는 이름으로."

지훈은 처음으로 이서은을 진정한 인간으로 봤다. 팬덤의 리더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고민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그럼 넌?"

"저도 몰라요. 뭐가 맞는지. 지훈님이 뭘 해야 하는지."

이서은이 말했다.

"저한테는 답이 없어요. 팬덤에도 답이 없을 것 같아요. 신태호가 맞을 수도 있고, 박준호가 맞을 수도 있고. 아무도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지훈이 커피를 집었다. 이번엔 따뜻했다.

"그럼 어떡해."

"당신이 결정해야 해요. 팬덤 없이. 업계 없이. 그냥 당신만으로."

이서은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지훈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냥 내밀었다.

"그게 가장 어려운 거라는 건 알아요. 근데 그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지훈은 그 손을 바라봤다. 이서은의 손. 팬덤을 움직이는 손. 그 손이 이제 자신을 놓아주고 있었다.

지훈이 손을 잡았다.

"고마워."

"아뇨. 죄송해요."

그들은 손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경음악은 재즈였다. 같은 곡이었다.

지훈은 카페를 나왔다. 시간은 오후 6시였다.

강남역 지하는 출근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목적지는 강남역 스튜디오였다. 박준호가 말했던 그곳.

거울 앞에 섰다.

지훈은 자신의 얼굴을 봤다. 10년 동안 악역을 해온 얼굴. 업계에서 낙인 찍힌 얼굴. 팬덤에게 사랑받은 얼굴.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아들, 넌 뭘 하고 싶니? 엄마한테 말해봐."

목소리는 따뜻했다. 팬덤의 응원도, 업계의 평가도, 신태호의 경고도 없었다. 그냥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들?"

"……엄마."

"응?"

"내일……내가 뭘 할지 모르겠어."

전화 너머로 어머니의 숨이 들렸다.

"그럼 내일 알면 되지. 오늘은 자고. 내일 일어나서 생각해. 괜찮아."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가 있잖아."

지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울고 있었다.

그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지훈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은 후 지훈은 거울 앞에서 한 시간을 더 섰다. 움직이지 않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강남역 스튜디오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위아래로 깎아내렸다. 밤 9시가 되자 청소 아주머니가 들어왔고, 지훈은 스튜디오를 나왔다.

휴대폰 화면엔 메시지가 141개였다.

절대 지훈파의 메시지들:

— 지훈님 화이팅!!!! 내일 무조건 선역해주세요!!!!

— 악역은 이미 증명했잖아요. 이제 주연으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 우리가 있습니다.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비판적 지지자들의 메시지:

— 근데 지훈님이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요? 팬덤의 기대가 아니라 지훈님 자신이요.

— 내일 무대에서 팬덤 없이 서세요. 그게 가장 솔직한 선택입니다.

— 지훈님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팬덤 견제파:

— 이미 팬덤에 의존한 배우로 낙인 찍혔어. 내일 뭘 해도 평가는 같을 거야.

— 차라리 팬덤 없이 떨어지는 게 낫지 않나? 최소한 깨끗하게.

절대 지훈파의 일부가 더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채팅방 밖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신태호를 향한 비난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공유를 반복했다. 반면 비판적 지지자들은 지훈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팬덤의 기대를 버리세요'라는 말로. 팬덤 견제파는 더 조용했지만, 그들의 의심은 깊었다. 기사들을 찾고, 과거 영상을 분석하고, 심사위원들의 이전 평가를 검토했다.

팬덤이 세 진영으로 나뉘었고, 각각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훈을 압박하고 있었다.

지훈은 메시지를 읽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남역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집.

어머니는 이미 자고 있었다. 지훈은 거실의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밤 2시가 되었을 때, 지훈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자신의 악역 영상들을 찾았다. 드라마 '검은 그림자'에서 여주를 괴롭히던 장면. 영화 '도시의 악령'에서 죽는 장면. 광고 '타락한 천사'에서의 그 섬뜩한 웃음.

화면을 켜고 껐다. 켜고 껐다.

화면 속의 자신은 누구였는가.

그때, 카톡이 울렸다. 박준호였다.

— 자고 있나?

지훈이 답했다.

— 아니.

한 줄의 대기가 있었다.

— 내일 스튜디오에서 봐. 오디션 시작 2시간 전. 혼자 연기해. 팬덤 없이. 너 자신과 싸워.

지훈은 답하지 않았다. 박준호의 메시지는 계속 왔다.

— 그게 최종 심사의 진짜 심사다.

— 심사위원들이 보는 건 배우가 아니라 인간이야.

— 넌 어떤 인간이고 싶은데?

지훈이 답했다.

— 모르겠어.

박준호의 답은 즉각적이었다.

— 그래. 모르는 게 정상이야. 그럼 내일 알아. 무대에서.

휴대폰은 꺼졌다.

지훈은 다시 천장을 봤다.

시간은 흘렀다. 밤 5시. 새벽 6시. 아침 7시. 어머니가 일어났다. 지훈은 일어나는 척했다. 어머니는 밥을 차렸다. 계란말이와 된장국. 10년 전과 같은 밥이었다. 지훈은 먹지 않았다.

"먹어야지."

어머니가 말했다.

지훈이 숟가락을 들었다. 첫 수저를 떴을 때,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뭘 하고 싶니?"

"……모르겠어."

"그래도 돼. 엄마도 모르거든."

어머니가 웃었다.

"엄마는 너를 낳고도 넌 뭘 하고 싶은 아이인지 몰랐어. 지금도 몰라. 근데 하나는 알아."

"뭐?"

"넌 거짓말을 못 하는 아이라는 거.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거짓 감정은 표현 못 해. 그게 넌 강점이야."

지훈은 어머니를 봤다.

"엄마가?"

"응. 내가 낳은 아들 알지."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이서은의 손과는 달랐다. 따뜻했다. 지훈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시간은 9시가 되었다. 지훈은 집을 나갔다. 목적지는 강남역 스튜디오. 오디션 시작 2시간 전.

박준호는 이미 거기 있었다.

"왔네."

박준호가 말했다.

"자고 왔어?"

"아니."

"좋아. 그럼 정신이 맑겠네."

박준호가 스튜디오 거울 앞을 가리켰다.

"너 자신과 싸워. 2시간 동안. 팬덤도, 업계도, 신태호도 없어. 그냥 너."

지훈이 거울 앞에 섰다.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뭘 연기해야 하는데?"

"뭘 하고 싶은데?"

박준호가 묻자, 지훈은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럼 모르면서 연기해. 그 혼란을 표현해. 넌 그걸 잘 하잖아."

박준호가 나갔다.

지훈은 혼자 남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10년 동안 악역만 해온 얼굴. 그 얼굴이 울었다. 웃었다. 분노했다. 절망했다. 모든 감정을 한 번에. 순서 없이. 거짓 없이.

처음엔 몸이 경직되었다. 팬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역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를 밀어냈다. 다음으로 업계의 목소리가 들렸다. 팬덤 의존 배우라는 낙인. 그것도 밀어냈다. 신태호의 목소리. 넌 배우가 아니라 콘텐츠라는 말. 그것도.

남은 것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렸다. 무릎을 구부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거짓이 아닌, 진정한 울음으로.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과 싸웠다. 10년 동안 쌓인 모든 것과. 팬덤의 기대와. 업계의 낙인과. 자신의 약함과.

2시간이 흘렀다.

거울 앞에 남은 것은 한지훈이었다. 더 이상 악역 배우도, 주연급 배우도 아닌. 그냥 한 명의 배우. 혼란스럽고, 불완전하고, 하지만 거짓이 없는 배우.

박준호가 들어왔다.

"됐어?"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럼 가자. 오디션장으로."

두 사람은 스튜디오를 나갔다. 밖은 낮이었다. 햇빛이 강했다. 강남역 광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팬덤이었다.

— 지훈님 화이팅!!!!

— 선역 해주세요!!!!

— 그냥 당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목소리가 섞였다. 응원과 기대가 뒤섞였다. 절대 지훈파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비판적 지지자들은 조용히 박수를 쳤다. 팬덤 견제파는 카메라를 들었다. 지훈은 그들을 봤지만,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갔다.

오디션장은 대극장이었다. 객석은 심사위원 5명으로 가득했다. 최영미, 김도준, 그리고 알 수 없는 3명의 심사위원.

지훈의 차례가 되었다.

무대 위로 올라갔다.

조명이 내려왔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10년 동안 악역만 해온 배우.

그것이 내 정체성인가.

아니다.

나는 거짓이 없는 배우다.

그럼 무대에 올라와서 거짓을 해야 하나.

아니다.

그럼 뭘 해야 하나.

내 진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뭔데.

모른다.

그럼 모르면서 시작해.

지훈이 눈을 떴다.

무대 위에서 그는 시작했다. 지정된 장면이 아닌, 자신만의 장면으로. 자신이 10년 동안 해온 악역의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 선 악당의 표정.

그 표정 속에는 후회도, 분노도, 절망도 없었다.

그냥 있었다.

침묵.

최영미의 펜이 메모장 위에서 멈췄다. 그녀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펜을 다시 들었다. 빠르게 기록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김도준이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그의 눈이 무대에 고정되었다. 메모장을 집어 들었다. 펜을 움직였다. 지훈의 무대를 보며 계속 기록했다.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다른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비판이 아니었다.

또 다른 심사위원이 호흡을 고르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그의 눈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더 자주.

마지막 심사위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무대를 응시했다. 그의 펜은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굴러갔다.

지훈은 무릎을 꿇었다. 무대 위에서. 조명 아래에서. 그리고 울었다.

거짓 눈물이 아니라, 진정한 눈물로.

그 눈물이 무대를 적셨다.

최영미의 펜이 종이를 긁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메모가 길어졌다. 그녀의 눈은 무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도준이 펜을 멈췄다. 메모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무대를 봤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비판적인 표정에서 뭔가 다른 것으로. 메모를 다시 집어 들었다. 추가 기록을 시작했다.

호흡을 고르던 심사위원의 눈이 더 크게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엔 더 명확하게.

펜을 굴리던 심사위원이 손을 멈췄다. 펜이 손가락 사이에서 떨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무대 위의 침묵이 5분을 넘었다.

지훈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배우 한지훈. 악역 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서.

대기실에서 박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

"모르겠어."

"좋은 대답이야."

박준호가 웃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서은이었다.

— 지훈님 봤어요. 유튜브 라이브.

— 뭐 했어요?

— 대단했어요.

— 근데 뭐?

— 그게 당신이에요?

지훈이 답했다.

— 모르겠어.

— 좋아요. 그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에요.

— 근데……이서은.

— 네?

— 고마워. 날 놨어줘서.

전화가 끊어졌다.

지훈은 대기실의 창문을 봤다. 밖은 여전히 낮이었다. 팬덤은 여전히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심사위원실 문이 열렸다.

최영미가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한지훈."

"네."

"넌 이제 뭘 할 거냐."

지훈이 대답했다.

"배우 한지훈으로 살겠습니다."

최영미가 웃었다. 처음으로.

"좋아. 그럼 당신은 합격이야."

지훈의 얼굴이 변했다.

"뭐?"

"최종 심사 합격. 축하해."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아들, 뉴스 봤어. 넌 합격했대?"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응, 엄마."

"뭐해? 왜 안 와?"

"지금 가."

지훈은 달렸다. 대기실을 빠져나가서, 복도를 달려서, 계단을 내려가서, 로비를 빠져나가서.

밖으로 나갔을 때, 휴대폰은 이미 울리고 있었다.

메시지 알림이 폭주했다.

절대 지훈파:

— 지훈님 축하합니다!!!!

— 우리가 이겼어!!!!

— 드디어!!!!

비판적 지지자:

— 축하해요. 당신의 선택이 옳았어요.

— 진짜 배우가 되었어요.

— 앞으로 응원할게요.

팬덤 견제파:

— 진짜 합격한 거야? 공정했나?

— 팬덤 표 때문이 아니야?

— 이상하다.

그 사이, 신태호 진영도 움직이고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심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심사 과정의 투명성', '팬덤의 부정행위 가능성', '정석적 배우의 기회 박탈' 같은 제목들. 기사도 나왔다. 연예계 전문 언론에서. "팬덤 기반 배우의 최종 심사 합격, 공정성 논란 제기".

실시간 검색어가 변했다.

#한지훈 합격

#최종 심사 합격자

#팬덤 역전

#신태호 vs 한지훈

#팬덤의 힘

#배우 한지훈

#심사 공정성 논란

여론이 뒤섞였다. 축하와 의심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팬덤 내 갈라진 의견들이 실시간 검색어에 반영되었다.

광장의 팬덤들도 반응이 엇갈렸다.

절대 지훈파는 환호했다. 비판적 지지자들은 박수를 쳤다. 팬덤 견제파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신태호 진영의 일부는 카메라를 들고 기사를 작성했다.

지훈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해 달렸다.

어머니는 팬덤 뒤에 서 있었다. 익명의 팬이 아닌, 어머니로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울고 있었다.

지훈이 어머니를 안았다.

"엄마."

"응, 우리 아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어머니가 쓸어주었다. 지훈의 얼굴을.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팬덤의 환호도, 카메라의 플래시도, 업계의 평가도.

그곳에는 오직 어머니와 아들만 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주연이 아니라, 팬덤의 사랑도 아니라, 업계의 인정도 아니라.

그냥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자유.

그것이 가장 큰 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도 길지 않았다.

박준호가 다가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지훈, 문제가 생겼어."

"뭐?"

"신태호가 심사위원들과 만났대. 합격 무효화를 요청하고 있어."

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왜?"

"팬덤의 부정행위 의혹. 그리고……."

박준호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뭐?"

"최종 심사 전, 너 혼자 스튜디오에서 연기했던 거. 그게 대외비였어. 근데 신태호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너한테 '팬덤을 버리라'고 한 말. 그게 협박이었어."

지훈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럼……."

"아직 모르겠어. 심사위원들이 재검토 중이야. 최종 결정은 내일 나온대."

지훈은 어머니의 손을 놨다.

팬덤의 환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환호 속에서, 지훈은 뭔가를 느꼈다.

절대 지훈파의 기쁨. 비판적 지지자의 안도. 팬덤 견제파의 의심. 그리고 신태호의 역공격.

그것이 축하인지, 아니면 함정인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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