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을지로의 선택

을지로의 골목은 지훈을 좁혀들고 있었다. 밤 11시 47분. 핸드폰의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그 끝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창가에는 책들이 쌓여 있고, 따뜻한 노란 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음의 자국'. 간판이 흐릿했다.

지훈의 손가락이 떨렸다.

정태호의 퇴사 통보를 받은 지 2시간. 회사를 나온 지 47분. 박현준의 전화를 받고 여기까지 온 지 23분.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혹은 너무 느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으면 끝이다.

지훈은 문고리를 잡았다.

---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천장은 낮지만, 책장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바닥은 헌 나무판이고, 곳곳에 쿠션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고, 한 노인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50분. 폐점 시간인데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그 여자를 본다.

10년 전의 이수진은 32층 회의실에서 회의록을 정리하던 사람이었다. 항상 처음 들어오고 마지막에 나가던 사람. 소송 준비서면을 밤새 만드는 동안 조용히 커피를 건네던 사람. 지훈은 그 여자와 거의 말한 적이 없었다. 이수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같은 층에서 살아가면서도, 시스템이 정해준 위계 속에서는 인사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선 여자는 달랐다.

머리는 길었고, 어깨는 편했다. 옷은 남색 카디건이었고, 손에는 얼룩이 있었다. 책 얼룩. 잉크 얼룩. 살아온 흔적이 손가락에 묻어 있었다. 얼굴은 부드러웠다. 32층의 긴장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찬 얼굴. 피로도 있었지만, 그 피로 뒤에는 선택이 있었다.

이수진은 책장에서 몸을 돌렸다. 지훈을 봤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밤 11시 50분에 도서관에 들어온 낯선 남자. 그런데 이수진의 눈이 바뀌었다. 지훈의 손에 들린 것을 봤을 때.

낡은 일기장.

2014년의 가죽 표지. 지금은 헐어버린 모서리. 그 위에 이수진 자신의 손글씨가 있었다. '내 기록.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를.'

이수진의 입이 떨렸다. 손에 들린 책이 떨어질 뻔했다.

"이거..."

"당신 일기장이죠."

지훈의 목소리는 낮았다. 6년 동안 감정을 죽인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다르게 울렸다. 무언가가 목을 빠져나갔다.

이수진은 지훈에게 한 발 다가섰다. 책장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 도서관 한구석, 창가의 작은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거기에는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둘은 앉았다.

"누가 이걸 가져갔어?"

"저예요."

"언제?"

"6년 전. 32층 청소 중에."

이수진은 일기장을 들었다. 손가락이 표지를 쓸었다. 마치 자기 손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페이지를 넘겼다. 2014년의 필체가 나타났다. 첫 페이지. '오늘도 견뎠다.'

이수진은 웃음을 흘렸다. 울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이 일기가 도움이 됐어?"

지훈은 대답했다.

"내 생명이 됐어요."

침묵이 흘렀다. 도서관의 시계가 자정을 향해 움직였다. 11시 53분. 창밖의 을지로 거리는 조용했다. 바람이 간판을 흔들었다.

이수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떨어지지 않은 채, 그곳에 맺혀 있었다.

"나는 이걸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내 기록이 어딘가에 남겨지길 원했어. 누군가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이수진은 손을 펼쳤다. 테이블 위에.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지훈은 그 손을 잡았다.

말 없이.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10년을 건넌 두 인간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이수진의 손가락 온기가 지훈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살아있는 온기.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 지훈은 그 온기를 놓지 않았다.

이수진도 지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래. 정말 오래.

테이블 위의 손들이 서로를 확인했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만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감쌌다. 10년의 시간이 그 접촉 속에서 흘러갔다. 지훈은 이수진의 손에서 모든 밤을 느낄 수 있었다. 회의실의 커피 냄새. 야근 중 흘린 눈물. 마지막 날 남겨진 일기장. 그 모든 것이 손의 온기로 전해졌다.

이수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훈의 손에서 6년의 기다림을 느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확인.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다는 증거. 그것이 지훈의 손에 담겨 있었다.

그 다음 이수진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뭘요?"

"회사. 너는 거기서 나갈 거야?"

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천히. 확신을 담아.

"아니요. 나는 거기 있을 거예요."

"그럼 다시 같은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아니에요."

지훈은 이수진의 눈을 봤다. 그 눈 안에는 10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노력. 그리고 결국 놓아야 했던 선택. 그 모든 게 거기 있었다.

"나는 거기서 누군가의 흔적이 될 거예요. 당신처럼. 당신은 여기서 한 것처럼."

이수진이 물었다.

"어떻게?"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기. 최소은의 눈빛. 박현준의 두려움. 후배들이 흘리는 말 한마디. 그런 것들을 당신처럼 기록할 거예요. 당신이 일기장에 한 것처럼."

지훈은 일기장을 열었다. 마지막 페이지로. 그곳에는 이수진의 글씨가 있었다. 지훈이 처음 본 그 글씨. '내일 밤 여기서 기다릴게.'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새로운 글씨가 있었다. 지훈 자신의 글씨. 오늘 오후에 쓴 글씨.

'당신을 만났다. 드디어.'

이수진이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럼 너는 남겨질 거야. 32층에. 당신이 본 사람들 안에."

"네. 그게 제 방식일 것 같아요."

지훈은 펜을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아래 부분에. 아직도 비어 있는 공간에. 천천히 썼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다르게 살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이수진은 지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더 강하게.

둘은 도서관의 테이블에 앉아, 밤 11시 59분을 함께 보냈다. 자정으로 향하는 그 시간을 놓지 않은 채.

---

지훈은 도서관을 나왔을 때 밤 12시 23분이었다.

을지로의 거리는 고요했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가로등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지훈은 차를 타고 강남역 방향으로 향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박현준이었다.

"지훈, 넌 어디야?"

"강남역 가는 중이야."

"너 정태호한테 뭐 했어? 난리야. 김영미는 계속 전화하고... 너 진짜 나갔어? 퇴사 통보 받은 거 맞아?"

박현준의 목소리는 빨랐다. 불안했다. 지훈은 차를 세웠다.

"응. 정태호가 나한테 퇴사를 통보했어."

"왜? 뭐 했는데?"

"최소은이 정태호한테 압박을 받고 있었어. 나는 그 후배를 지키려고 했는데, 정태호는 내가 손을 떼라고 했어."

지훈은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회의실의 형광등. 정태호의 얼굴.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

---

*회의실에서 정태호는 최소은의 실적 부진을 지적했다. 분기별 목표 미달. 클라이언트 만족도 저하. 개선 기한 2주. 달성 불가능하면 팀 이동.*

*지훈은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소은은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법무팀은 시간을 살 여유가 없어."*

*"그렇다면 제가 그 시간을 만들겠습니다."*

*정태호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훈, 자리에 앉아."*

*"아닙니다. 저는 최소은을 지킬 겁니다."*

*"그게 무슨..."*

*"최소은이 아니라 누군가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팀에서 누군가 힘들어하면, 저는 그 사람을 지킬 겁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정태호가 일어섰다. 책상을 내려쳤다.*

*"너 지금 나한테 대항하는 거냐?"*

*"네. 대항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회의실의 불이 지훈과 정태호를 비추고 있었다.*

*"그럼 나가. 지금 당장 나가."*

*"알겠습니다."*

*지훈은 회의실을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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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했고... 그게 정태호의 역린을 건드렸나 봐. 그 자리에서 나가라고 했어."

침묵이 흘렀다.

"그럼 넌 어디 가?"

"강남역 지하 커피숍. 누군가를 만날 거야."

"혼자?"

"아니. 누군가를 만날 거야."

침묵이 또 흘렀다. 박현준의 호흡이 들렸다. 빠르고 불규칙했다.

"지훈... 나 뭔가 달라지고 싶어. 너처럼. 이 방식으로는... 못 견딜 것 같아."

박현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두려움이 아닌, 갈증이 있었다. 지훈은 그것을 느꼈다.

"넌 지금 뭘 봤어?"

"너. 너가 회사를 나가는 모습. 그리고 생각했어. 저건...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구나. 그 차이가 뭔지 알고 싶어."

지훈은 대답했다.

"응. 함께 시작하자."

"지금?"

"내일. 내일 밤 강남역 지하 커피숍에서. 그 노인이 항상 앉아 있는 자리에서."

박현준은 울음을 삼켰다.

"알겠어. 내일 밤."

전화가 끝났다.

지훈은 차에서 내렸다. 강남역 지하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익숙한 길. 10년 전 이수진이 기록했던 길. 그 길의 끝에는 작은 커피숍이 있었고, 그곳에는 항상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손이 떨리는 노인. 이수진이 10년을 기록했던 그 손.

오늘도 그 노인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훈은 카운터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노인의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말 없이.

노인이 지훈을 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일기장을 꺼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제 세 개의 필체가 있었다. 이수진. 자신. 그리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누군가의 글씨들.

지훈은 펜을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 아래에, 남은 공간에 천천히 썼다.

'내일 밤, 누군가가 또 앉을 거다. 이 자리에. 이 테이블에. 그리고 우리는 함께 시간을 견딜 것이다. 혼자가 아닌.'

펜을 놨다. 지훈은 일기장을 덮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페이지가 보이도록.

밤 1시 5분.

강남역 지하 커피숍은 조용했다. 노인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훈은 그 노인을 봤다. 10년 전 이수진이 본 그 손. 그 표정. 그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는 것. 말 없이 같은 공간에서 밤을 맞이한다는 것. 이수진이 10년을 기록했던 그것. 지훈이 이제 시작하려던 그것.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 앉아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노인과 함께. 일기장과 함께. 내일 밤 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밤 1시 5분. 지훈은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커피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지훈은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이수진이 10년 동안 관찰했던 그 손. 얼마나 많은 밤을 그 손은 이렇게 떨리며 보냈을까.

지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자세요?"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먼 곳을 보는 눈. 지훈은 그 눈 속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 노인은 다시 창밖을 봤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10년이 담겨 있었다. 지훈은 알 수 있었다. 이수진이 남긴 기록 속에서. 그 한마디 속에는 포기가 아닌, 견딤이 있었다.

"저도 혼자예요."

지훈이 말했다. 노인이 다시 지훈을 봤다. 오래 봤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그럼 여기 앉아요."

노인이 손짓했다. 자신의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를 가리켰다. 지훈은 자리를 옮겼다. 노인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이제 같은 방향을 봤다. 강남역 지하의 창밖. 밤거리.

"이 시간이 제일 편해요."

노인이 말했다.

"왜요?"

"사람이 없어서."

노인의 손이 또 떨렸다. 커피잔으로 향했다. 잔을 들었다. 입술에 닿았다.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그냥 그 자세로 멈췄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훈은 침묵 속에서 그 떨림을 바라봤다. 그 떨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친 손. 하지만 여전히 잔을 놓지 못하는 손. 마치 누군가가 그 옆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나요?"

지훈의 질문에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미소. 하지만 진정한 미소였다. 그 미소 속에는 슬픔도 있었고, 무언가 다른 것도 있었다.

"기다린 지 오래됐어요."

노인이 창밖을 봤다. 밤거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누군가 나를 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노인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거의 중얼거리는 수준이었다. 노인은 커피잔을 내려놨다. 손이 여전히 떨렸다. 이번엔 테이블 위에 놓았다. 손이 자꾸 움직이려 했다. 노인은 그 손을 다른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지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손의 움직임 자체가 말하고 있었다. 이수진이 10년 동안 기록했던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그것이 그 떨리는 손 안에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손을 펼쳤다. 테이블 위에. 노인의 손 옆에. 말 없이.

노인이 지훈의 손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옮겼다. 지훈의 손 위에. 두 손이 만났다. 노인의 손은 여전히 떨렸지만, 따뜻했다. 10년을 견딘 손. 그 손과 지훈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만났다.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이수진의 글씨를 가리켰다. 노인이 읽었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한 글자씩.

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 글씨... 누구?"

"이수진. 10년 전에 이 커피숍에 자주 왔던 사람이에요. 당신을 봤대요. 여기 앉아서 밤을 지나는 당신을."

노인이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눈물을 닦았다. 손이 더 떨렸다.

"나를... 봐줬단 말이야?"

"네. 10년을."

"그리고 당신은?"

"저는 그 기록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따라왔어요."

노인은 일기장을 다시 봤다. 이수진의 글씨를 따라가며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노인의 얼굴을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고통이 스쳐갔다. 그 다음 위로가 왔다. 마지막으로 무언가가 깨어났다. 노인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혼자가 아니었네요."

노인이 중얼거렸다.

"네. 우리 모두 혼자가 아니었어요."

지훈이 말했다. 노인은 지훈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손이 떨렸지만, 따뜻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지훈은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함께 밤을 지나는 것. 말 없이. 그것으로 충분했다.

밤 2시 30분경, 노인이 일어났다.

"저 가봐야겠어요. 새벽이 오고 있네요."

"내일도 여기 오세요?"

"네. 매일 와요. 이 시간에."

노인이 지훈을 봤다. 그리고 일기장을 가리켰다.

"이거, 나한테 줄 수 있어요?"

"아니에요. 이건... 계속 이어져야 해요. 누군가의 손에서 또 누군가의 손으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노인은 일어났다. 천천히 일어났다. 손을 짚으며. 지훈은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내일 밤 또 누군가 올 거예요. 이 자리에."

"그렇군요. 그럼 기다려봐야겠네요."

노인은 커피숍을 나갔다. 강남역 지하 에스컬레이터로. 밤거리로. 지훈은 노인의 뒷모습을 봤다. 그 뒷모습이 작아졌다. 사라졌다.

지훈은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를. 거기에는 이제 네 개의 필체가 있었다. 이수진. 자신. 그리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누군가. 박현준. 최소은. 그리고 또 누군가. 또 누군가.

지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밤 2시 47분.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최소은이었다.

'지훈 선배, 안녕하세요. 저 요즘... 뭔가 달라지고 싶어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시간을 견디고 싶어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지훈은 메시지를 읽었다. 타임스탐프는 밤 1시 42분. 지훈이 노인과 대화하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정태호가 자신을 내쫓은 그 순간부터. 최소은은 박현준의 변화를 목격했을 것이다. 박현준이 갑자기 전화를 끊고 어딘가로 나간 것. 그 모습 속에서 최소은은 뭔가를 느꼈다. 두려움이 아닌, 가능성을. 누군가가 선택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보고 자신도 선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면을 터치했다. 답장을 입력했다.

'강남역 지하 커피숍. 내일 밤 1시. 혼자 와.'

메시지를 보냈다. 지훈은 커피숍을 나갔다. 밤거리로. 강남역 지하를 빠져나갔다.

새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과 낮 사이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지훈은 걸었다.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걸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박현준이었다.

"지훈, 지금 뭐 해?"

"새벽거리를 걷고 있어."

"혼자?"

"네."

박현준의 호흡이 들렸다. 불규칙했다.

"그럼... 나도 가도 되니? 혼자 있기 싫어."

"어디?"

"을지로. 그곳으로 가자."

지훈은 대답했다.

"응. 와. 을지로로."

지훈은 방향을 바꿨다. 을지로로. 이수진의 도서관으로. 마음의 자국으로.

새벽 4시 15분. 지훈과 박현준은 도서관 앞에 섰다.

창문은 어두웠다. 이수진은 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지훈이 문을 열었다. 안에는 책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 구석에, 누군가를 위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박현준이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흔적의 집이야."

지훈이 대답했다.

"누구의 흔적?"

"우리들의. 그리고 또 누군가의. 그리고 또 누군가의."

박현준은 의자에 앉았다. 지훈도 앉았다. 새벽 도서관에서. 말 없이. 함께.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새고 있었다. 창밖의 을지로 거리가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 순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천천히 내려오는 발걸음. 지훈과 박현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수진이 나타났다. 잠에서 깬 눈으로. 그리고 그 눈이 지훈과 박현준을 발견했다.

낯선 두 남자가 자신의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새벽 4시 15분. 이수진의 눈이 흔들렸다. 경계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한 명은 낯설지 않았다. 지훈. 몇 시간 전 일기장을 들고 나타난 그 남자. 하지만 다른 한 명은? 누구지?

"어... 넌?"

이수진이 박현준을 봤다. 그리고 지훈을 봤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이수진의 얼굴을 지나갔다.

지훈은 천천히 말했다.

"내일 밤 또 누군가 올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 밤에도."

이수진은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10년 동안 기다려온 웃음이었다. 그 웃음 속에는 모든 밤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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