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지훈은 손에 들린 2014년 인사 기록 폴더를 내려놨다. 밤 11시 45분. 대기업 기록실은 이 시간에 누구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폴더를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수진. 이름을 찾는 데 3초가 걸렸다. 6년 선배. 2014년 1월 입사. 2014년 10월 31일 퇴사. 사유: 본인 사정상 자진 퇴사.
10월 31일.
지훈은 즉시 주머니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일기 전 페이지. 2014년 10월 30일. 글씨가 흔들렸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나는 이곳을 떠난다.*
*32층을 떠난다.*
*이 고통을 떠난다.*
손이 멈췄다. 지훈은 그다음 줄을 읽지 못했다. 눈이 흐려졌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이 기록을 남긴다. 혹시 나 같은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는다면, 이 기록이 그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것뿐이다.*
기록실의 불이 깜박였다. 그리고 지훈은 울었다.
10년 전 여자가 남긴 이 문장이. 자신을 구했다.
기록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한지훈은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흔들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폴더가 무릎에서 떨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6년간 죽여온 감정이 모두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이수진은 자신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었다.
10년의 시간을 초월해서. 다른 시대의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자신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고 있던 자신이. 이 기록을 읽었다.
지훈은 손을 내렸다. 얼굴이 젖었다.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비어있는 흰 종이. 이제 그 공백의 의미가 보였다.
이수진은 그 이후의 삶을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다. 책상에 손을 짚었다. 기록 폴더를 다시 집었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뭔가 단단해졌다. 결정되었다.
기록실을 나왔다. 32층 사무실은 깊은 밤이었다. 불이 꺼진 책상들. 텅 빈 회의실. 모니터 스탠드의 불빛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지훈은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노트북, 펜,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 자신이 6년간 앉아있던 자리.
의자에 앉았다.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비어있는 흰 종이가 지훈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듯한.
펜을 집었다.
*안녕, 이수진.*
*나는 한지훈이야.*
*너의 기록을 받았어.*
지훈은 멈췄다. 펜을 내려놨다. 가슴이 떨렸다. 이제 쓸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쓸 수 없었다. 이 말은 종이에 담아낼 수 없었다.
직접 전해야 했다.
지훈은 일기장을 닫았다. 책상에 있던 외투를 입었다. 밤 11시 58분. 휴대폰을 켰다. 검색창에 입력했다.
'흔적의 집 도서관 서울'
결과가 떴다. 서울 서대문구. 을지로 3길 24. 영업시간: 오후 2시 ~ 오후 10시 (월요일 휴무). 평가: 4.8/5.0.
지훈은 주소를 누르고 길 찾기를 켰다. 지금부터 22분.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일기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책상 위의 서류들을 바라봤다. 소송 서면. 계약서. 회의록. 6년의 시간이 쌓인 종이들.
지훈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32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지훈은 안으로 들어갔다.
*ding*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그 순간,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이름이 떠 있었다. 박현준. 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현준이."
음성은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지훈 선배. 내가... 내가 뭔가 놓쳤어. 왜 이제 깨닫는 거야. 그 일기장이... 그게 내 기록이었다는 걸."
박현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훈 선배, 나 혼자고 싶어. 이 자리에서."
지훈은 대답했다.
"혼자가 아니야, 현준이. 절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지훈은 나왔다. 로비는 텅 비어있었다. 밤 중의 강남역 지하 같은 회사 로비. 지훈은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선배, 너는 어디야?"
"을지로 가는 중이야."
"...이수진을 만나러?"
"응."
"알겠어. 그리고 선배."
"응?"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지훈은 웃었다. 아주 작은 웃음. 6년 만의 진짜 웃음.
"너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할 거 없어. 같은 자리에 있어줘서."
전화가 끊겼다.
지훈은 길을 나섰다. 밤 11시 59분. 서울 강남역 인근. 차들이 지나갔다. 신호등이 깜박였다. 지훈은 걸었다. 지하철 입구로. 을지로 방향으로.
지훈의 주머니 안에서 일기장이 가만히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공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22분이 지나고.
밤 12시 21분.
서울 서대문구 을지로 3길 24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 앞에 지훈이 서 있었다.
창문 안에는 불이 켜져있었다.
그리고 그 불 아래에서, 한 여자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수진은 웃음을 지었다. 10년의 시간이 담긴 그 웃음. 마치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의 웃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한지훈."
지훈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쓰는 거야. 너는 이 기록을 받을 거고, 너는 여기에 올 거야. 그리고 우리는 마주칠 거야.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끼리.*
*내일 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 이수진, 2014년 10월 30일 밤 11시 59분*
지훈은 펜을 들었다. 그 글씨 아래에 자신의 글씨를 더했다.
*안녕, 이수진. 나는 한지훈이야. 너의 기록을 받았어. 그리고 나는 너처럼 살아가기로 결심했어. 오늘 밤, 너를 만났어. 그리고 이제 알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 한지훈, 지금 이 순간*
펜을 내려놨다.
이수진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10년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처음 느꼈다.
누군가의 기록이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일이라는 것을.
도서관의 불은 밝았다. 밤 12시 22분. 을지로의 작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차 마실래요?"
"좋아."
"그럼 앉아요."
지훈은 이수진이 내민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일기장을 펼쳤다. 첫 번째 페이지부터.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르게.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 8화
기록실의 철문이 닫혔다. 밤 11시 47분.
지훈은 어두운 복도를 빠져나왔다. 손에는 2014년 인사 기록이 들려있었다. 그 종이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이수진. 퇴사일: 2014년 10월 31일.
지훈은 계단을 내려갔다. 32층에서 31층으로. 회의실 불이 꺼져있었다. 누군가의 책상에 커피잔이 남겨져있었다. 그것도 차가워진 지 오래. 지훈은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일기장을 꺼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2014년 10월 30일. 날짜 옆에 작은 글씨로 "32층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라고 적혀있었다. 지훈은 그 문장을 읽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숫자가 말을 걸어왔다.
10월 30일.
10월 31일.
정확히 하루의 차이. 그리고 그 하루 뒤, 이수진은 회사를 떠났다.
지훈은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문장으로.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나는 이곳을 떠난다. 32층을 떠난다. 이 고통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이 기록을 남긴다. 혹시 나 같은 누군가가 이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는다면, 이 기록이 그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것뿐이다.*
손가락이 떨렸다.
10년 전 이수진이 자신을 위해 남긴 글. 아니,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남긴 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을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지금 여기 있었다.
지훈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봤다. 비어있었다. 완벽하게 비어있었다. 이전엔 그 공백이 불완전함처럼 느껴졌다. 마치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하지만 지금 지훈은 알았다.
그 공백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수진은 마지막 페이지를 비운 채로 회사를 떠났다. 자신의 이후의 삶을 기록하지 않기로, 그리고 누군가가 올 때까지 그곳을 비워두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 공백 속에 누군가가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지훈은 울음을 터뜨렸다.
목이 메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눈물만 흘렀다. 32층 사무실의 어두운 불빛 아래서. 자신의 책상 앞에서. 혼자서.
10년 전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남긴 이 기록이, 지금 자신의 삶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벅찼다.
시간을 초월한 연결. 낯선 두 사람 사이의 기적 같은 만남.
지훈은 손을 닦았다.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서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퇴사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기록되어있었다. 이름, 퇴사 사유, 현재 연락처.
이수진. 연락처 부분에는 "을지로 3길 24, 마음의 자국 도서관"이라고 적혀있었다.
지훈은 그 주소를 손가락으로 따라 읽었다. 마치 그곳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실제로 그곳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밤 11시 59분. 지훈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일기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외투를 입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32층 사무실의 불을 끄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책상, 회의실, 복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자신은 변했다. 완전히.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로비는 텅 비어있었다. 밤의 강남역 같은 회사 로비. 지훈은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서울의 밤은 항상 차갑다. 지훈은 길을 나섰다. 지하철 입구로. 을지로 방향으로. 주머니 속 일기장이 가만히 있었다.
지하철이 떠났다. 강남역에서 출발해 을지로 방향으로. 22분이 지나갔다.
밤 12시 21분.
을지로 3길 24.
작은 도서관이 보였다. 창문 안에는 불이 켜져있었다. 그리고 그 불 아래에서, 한 여자가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책들. 낡은 책등. 하지만 정성스럽게 정렬된 책들.
지훈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지훈은 알았다. 이 사람이 10년 전 일기의 주인이라는 것을. 일기 속 문장들이 이 사람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수진은 웃음을 지었다. 10년의 시간이 담긴 그 웃음. 마치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의 웃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한지훈."
지훈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자신이 쓴 글이 아닌 다른 글씨.
*혹시 모르니까 쓰는 거야. 너는 이 기록을 받을 거고, 너는 여기에 올 거야. 그리고 우리는 마주칠 거야.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끼리. 내일 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 이수진, 2014년 10월 30일 밤 11시 59분*
지훈의 손이 떨렸다.
"언제... 언제 이걸 썼어요?"
"10년 전 밤. 회사를 떠나기 전 밤. 이 도서관을 연 날."
이수진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일을 말하는 것처럼.
"내가 떠난 다음 날, 누군가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이 기록을 찾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 기다렸어. 10년을."
지훈은 펜을 들었다. 그 글씨 아래에 자신의 글씨를 더했다.
*안녕, 이수진. 나는 한지훈이야. 너의 기록을 받았어. 그리고 나는 너처럼 살아가기로 결심했어. 오늘 밤, 너를 만났어. 그리고 이제 알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 한지훈, 지금 이 순간*
펜을 내려놨다.
이수진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는 10년의 시간과 희망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처음 느꼈다.
누군가의 기록이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것.
"차 마실래요?"
"좋아."
"그럼 앉아요."
지훈은 이수진이 내민 의자에 앉았다. 도서관의 한쪽 구석 테이블. 창밖으로 을지로의 밤이 보였다. 닫혀있는 상점들, 거리의 가로등, 지나가는 택시들.
"너는... 정말 행복해?"
지훈이 물었다.
이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행복이 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게 맞다는 생각은 들어. 매일."
"32층에 있을 때는?"
"그때는... 매일이 틀렸다는 생각뿐이었어."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일기 속 문장들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의 노력을.
"내가 왜 너를 찾았는지 알아?"
"모르겠는데."
"일기를 읽으면서, 너의 삶이 내 삶을 바꾸고 있었거든. 너는 이미 떠났는데, 넌 나를 여전히 구하고 있었어. 10년의 시간을 건너서."
이수진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뭔가 확인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이제?"
"모르겠어. 하지만 너처럼 살고 싶어. 아무것도 아닌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회사는?"
지훈은 웃음을 지었다. 작은 웃음. 하지만 진짜 웃음.
"떠났어. 오늘."
이수진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 넌 떠나야 했어. 그 자리에선 못 살아."
"너처럼?"
"아니. 너는 다를 거야."
이수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도서관 한쪽 책장으로 향했다. 오래된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사이에서 한 권을 꺼냈다.
"이거 봐."
펼친 페이지에는 손글씨가 가득했다. 마진에 쓴 메모들. 밑줄, 동그라미, 작은 그림들.
"이 책은... 회사 다닐 때 내가 읽던 책이야. 이 메모들은 다 그때 쓴 거."
지훈은 책을 받아들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각 페이지마다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넌 떠나도 남겨진 것들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잖아. 너의 흔적도 그렇게 누군가를 구할 거야."
지훈은 책장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수진을 봤다.
"정태호는?"
"정태호가 뭐?"
"회장. 그 사람이... 날 퇴사하게 했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었어. 넌 다만 너의 선택을 했을 뿐이야."
이수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내가 떠날 때, 정태호는 나를 약하다고 했어. 감정을 버릴 수 없는 약한 인간이라고. 그런데 넌 어떻게 생각해? 감정을 버리는 게 강한 거라고?"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생각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게 강한 거라고. 그것을 견디면서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게 진짜 강한 거라고."
밤 12시 37분.
도서관의 불은 여전히 밝았다. 을지로의 작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차와 작은 과자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일기장.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첫 번째 페이지부터.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그 누군가가 옆에 앉아, 때론 웃고 때론 말을 건네면서.
"이 날, 나 진짜 힘들었어. 회의실에서 정태호한테 혼났거든."
"그 부분 읽어줄래?"
지훈이 페이지를 찾았다. 읽기 시작했다.
*오늘 회의실에서 소송 전략을 놓쳤다. 정태호는 나를 20분간 몰아붙였다. 다른 변호사들은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았다. 나가 죽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퇴근길 버스에서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계속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는 거야. 마치 자기도 어딘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 아,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다들 뭔가를 견디고 있구나.*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 할아버지. 나 그 후로 매번 그 버스를 탔어. 할아버지를 보려고. 그리고 매번 같은 생각을 했어. 우리 다들 뭔가를 견디고 있구나."
"지금도 버스 탈 때 그 생각을 해?"
"응. 지금도.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는 게 그거야. 버스 안의 낯선 사람들처럼.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그게 따뜻해."
지훈은 그 말을 곱씹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다는 것. 그것이 이 일기를 관통하는 모든 문장의 중심에 있었다.
밤은 계속 깊어갔다. 밤 1시. 밤 2시.
을지로의 작은 도서관에서, 두 사람은 앉아있었다. 일기장의 페이지가 계속 넘어갔다. 10년 전의 기억들이. 지훈의 가슴을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찾던 것이 뭔지.
극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이제 뭐 할 거야?"
이수진이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곳에 자주 올 것 같아."
"여기?"
"응. 너를 보러."
이수진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넌 이 도서관의 단골손님이 되는 거네."
"그래도 괜찮아?"
"물론이지. 넌 이미 여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어."
밖은 여전히 밤이었다. 을지로는 조용했다. 가로등 아래 빈 거리. 그리고 그 거리 위로 떨어지는 밤별들.
지훈은 창밖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10년의 시간을 건넌 이 기록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봤다.
자신의 글씨와 이수진의 글씨가 함께 적혀있었다. 10년의 시간을 건넌 두 사람의 기록.
그리고 지훈은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기록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법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