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조직의 압박

회의실 문이 닫혔다. 정태호의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32층의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회색 벽, 같은 형광등, 같은 침묵. 하지만 지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제 오후부터 느낀 불안감이 이제 확실한 형태를 갖춘 것 같았다.

정태호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는 지훈이 들어오자 펜을 놨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앉으세요."

지훈은 앉았다.

"당신을 관찰했습니다."

정태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로펌에서 가장 위험한 목소리는 높지 않다. 지훈은 그것을 안다. 높은 목소리는 감정이 들어간 것이고, 낮은 목소리는 확신이 들어간 것이다.

"최근 6개월간 당신의 행동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업무 능력 저하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당신은 업무 외 시간에 어딘가를 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직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던 사람이 말입니다."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태호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이것은 조직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의 변화는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당신처럼 위치가 있는 사람의 변화는요."

정태호는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가 서울을 내려다봤다. 32층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작았다. 모두가 작아 보였다.

"지난주 대산 건 알고 있죠? 당신이 맡은 소송. 1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졌어요.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당신의 준비 부족 때문이었어요. 이전의 당신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입니다."

정태호는 책상으로 돌아와 서류를 펼쳤다. 판결문이었다.

"아까 회의에서 본 거 같은데, 박현준 같은 후배들이 당신을 따라 감정 표현을 시작했어요. 최소은이는 요즘 딴짓을 자주 한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입니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김영미가 들어왔다. 그녀는 일반적인 인사를 하지 않았다. 지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훈, 너 때문에 후배들까지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이건 조직 전체에 악영향을 미쳐. 우리가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감정 없이 일하기 때문이야. 그걸 모르니?"

그녀의 말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말처럼.

"당신이 소송을 이기고, 서면을 잘 작성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당신은 조직의 일원이어야 합니다. 이 조직의 문화를 이해하고, 내재화하고, 재생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반대를 하고 있어요."

정태호는 책상 옆에 기대서 지훈을 봤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 있었다. 아니면 동정. 지훈은 구분할 수 없었다.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조직의 규칙을 받아들이거나, 나가거나. 그 일기장 같은 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세요. 이건 직장이지, 자기 발견의 장소가 아닙니다."

정태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정렬했다. 그 움직임은 신호였다. 면담이 끝났다는 신호.

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깨닫고 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박현준이 자신을 따라 뭔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최소은이가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다른 후배들이 자신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는 것.

죄책감과 희망이 동시에 밀려왔다.

지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정태호와 김영미는 그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알겠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훈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로 나오는 길은 길었다. 형광등 아래서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펜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6년간 버텨온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박현준이를 봤을 때의 죄책감. 최소은이의 눈을 외면했던 순간들. 정태호 앞에서 자신의 변화를 감추려 했던 모든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도 누군가를 바꾸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 그것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소은을 만났다. 그녀는 지훈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뭔가를 알아챈 듯한 표정을 했다.

"선배, 괜찮아요?"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요즘... 저 뭔가 달라지고 싶어요. 선배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배처럼 뭔가 느끼고 싶은데,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고..."

그녀의 눈에는 질문이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강했다. 누군가가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눈빛.

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최소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로비를 빠져나온 지훈은 강남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대폰 화면에 정태호의 음성 메시지가 떠 있었다. 오전 9시. 최종 결정 통보.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지우려다 멈췄다.

강남역의 밤거리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회사 사람들, 이 도시의 수백만 명. 모두가 각자의 32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감정을 죽이고, 성과를 쌓고, 다음 날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지훈은 그 무리 속에 섞여 걸었다.

박현준의 전화가 울렸을 때, 지훈은 이미 강남역을 떠나 한강 공원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선배, 정태호가 김영미와 뭔가 얘기하는 거 봤어. 표정이 심각했어. 설마... 선배한테 뭐라고 했어?"

"선택하라고 했어. 조직에 맞추거나, 나가거나."

박현준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럼... 선배는?"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강 공원의 벤치에 앉으며 일기장을 꺼냈다. 2014년 7월. 이수진의 글씨가 또렷했다.

*"혹시 내가 다르게 살 수 있다면, 누군가는 나를 보고 다르게 살 수도 있을까?"*

10년 전, 이수진도 같은 자리에 앉아 이 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10년 뒤, 지훈은 그 말을 읽고 있었다.

"선배?"

박현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미안해, 현준이. 잠깐만..."

지훈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벤치에 기대었다. 한강 위로 반사된 야경의 불빛들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 순간, 지훈은 이수진의 선택을 다시 생각했다. 2014년 8월, 그녀는 32층을 떠났다. 왜? 단순히 견디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선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휴대폰이 울렸다. 최소은이었다.

"선배, 저... 혹시 지금 괜찮으세요?"

지훈은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괜찮아. 뭔데?"

"저 오늘 정태호 회장 사무실 앞을 지나갔어요. 선배 이름이 계속 나왔어요. 그리고 김영미 이사가... 뭔가 말했어요. 선배가 요즘 좀 이상하다고. 그런데 선배, 정말 괜찮으세요?"

지훈은 대답하기 전에 숨을 쉬었다. 최소은의 목소리에는 진정한 걱정이 있었다. 32층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최소은, 넌 이 회사에서 잘하고 있어. 정말 잘하고 있어. 그런데..."

"선배?"

"혹시 누군가가 너한테 다르게 살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럼 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최소은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두려움, 희망, 그리고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

"선배, 제가... 최근에 자꾸 생각이 들어요. 이게 전부일까, 하면서. 근데 그 생각이 자꾸 두려워요."

"그래. 그 두려움이 맞아. 그 두려움 속에만 변화가 있어."

전화를 끊고, 지훈은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 공백을 보며 지훈은 펜을 꺼냈다. 손가락은 떨렸다. 펜의 무게가 유난히 무거웠다.

그는 첫 글자를 썼다.

*"2024년 11월 16일"*

펜을 멈추고, 지훈은 한강 위의 별을 봤다. 별들도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지훈은 다시 펜을 들었다.

*"정태호에게서 최종 결정 통보 메시지를 받았다. 내일 아침 9시. 그때가 되면 나는 선택해야 한다. 32층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펜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수진이 10년 전에 쓴 말을 정확히 옮길 필요는 없었다. 대신 자신이 느낀 것들을 써야 했다.

*"오늘 정태호는 내가 조직을 위협한다고 했다. 박현준이 나를 따르고, 최소은이가 의문을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건가? 누군가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잘못된 건가?"*

글을 이어나갔다.

*"6년 동안 나는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감정, 관계, 선택의 자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상이라고, 그게 유일한 길이라고. 하지만 이수진은 달랐다. 10년 전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지훈의 손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내일 아침, 나는 정태호를 만난다. 그리고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박현준이 나를 찾아왔고, 최소은이가 나를 걱정했고, 이수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손길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마지막 문장을 썼다.

*"10년 전 이수진이 비워둔 이 페이지는 내 선택을 기록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기록이 또 누군가의 손에 닿을 때, 그 누군가도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일기장을 덮으며,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이수진이었다.

"지훈, 괜찮아요?"

지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6년 동안 버텨온 모든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작은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응. 이제 괜찮아. 정말로."

"내일 아침 결정이 있다고 들었어요. 박현준이가 말했어요."

"응."

"지훈, 혹시 알아요? 내가 10년 전에 마지막으로 쓴 말이 뭔지?"

지훈은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자신이 쓴 글을 바라봤다.

"아니. 뭔데?"

"그때는 쓸 수 없었어요. 쓸 말이 없었거든.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페이지에 쓸 말은..."

이수진의 목소리가 잠깐 끊겼다.

"누군가가 나중에 그 자리에 앉아서 쓸 말이었어. 그것뿐이었어."

지훈은 말하지 못했다. 대신 손에 들린 펜과 일기장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이 10년 뒤 누군가를 위해 비어 있던 공간을 채웠다는 것을.

"지훈, 을지로로 올 수 있어요?"

"응. 지금 가."

한강 공원을 떠나며, 지훈은 일기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뒤에는 32층의 불빛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지훈을 불렀다.

"지훈!"

지훈이 돌아보니 박현준이 서 있었다. 회사에서 지훈을 찾아다니다 한강까지 온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창백했다. 그의 옷은 흐트러져 있었고, 눈빛은 다급했다.

"왜 여기 있어? 회사에서..."

박현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지훈의 손을 봤다. 손 위에 들린 일기장을.

"선배, 정말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박현준은 지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것이 있었다. 더 이상 죽어 있지 않았다. 대신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을.

"선배, 나도... 나도 같이 가도 돼?"

지훈은 박현준의 손을 잡았다.

"응. 같이 가자."

두 사람은 한강 공원을 떠나 을지로로 향했다. 뒤에는 32층의 불빛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의 마음은 더 이상 그 높이에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밤 한 점 깊어가는 서울에서, 지훈은 처음으로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을지로로 향하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정태호였다.

"내일 오전 9시는 취소하겠습니다."

음성 메시지가 이어졌다.

"대신 오늘 밤 11시에 만납시다. 내 사무실에서."

메시지가 끝났다.

지훈과 박현준은 서로를 바라봤다.

"뭐... 뭐라고 한 거야?"

박현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어."

지훈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11시. 지금은 10시 15분. 45분이 남아 있었다. 을지로까지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이수진을 만날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태호가 시간을 앞당긴 이유는 불명확했다. 지훈의 변화가 조직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확인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더 구체적인 압박이 있을까. 선택의 시간이 단축됐다는 것 자체가 위협이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권을 빼앗는 것처럼.

을지로에 가야 했다. 이수진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32층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단 을지로로 가자."

박현준은 지훈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마치 놓칠까봐.

두 사람은 밤거리를 걸었다. 뒤에는 정태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을지로에 가는 것이었다. 이수진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함께 밤을 견디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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