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강남역 지하의 노인

지훈은 강남역 지하 1층 커피숍 입구에서 멈췄다. 2014년 8월 15일 일기장의 한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늘도 강남역 지하. 같은 자리의 노인. 손이 자꾸 떨린다. 누군가는 그 손을 보고 약함이라 판단할 테지만, 나는 그 손이 견디고 있는 무언가를 본다.'*

10년이 지났다. 그 노인이 여전히 이곳에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훈은 들어갔다.

가는 길에 정태호의 전화는 다섯 번 울렸다. 회의실에 나와야 한다는 메시지도 왔다. 무시했다. 이것이 처음이었다. 6년간 처음이었다.

커피숍은 오후 2시의 한산한 시간이었다. 조명이 낮고, 벽은 회색이었다. 지훈은 일기장이 묘사한 그 자리를 찾았다. 창가 테이블. 창밖으로는 지하철 통로가 보였다.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멈추고,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때였다.

같은 테이블 옆 의자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지훈은 숨을 죽였다. 일기에 묘사된 그 노인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일기 속 그대로였다. 오른손이 커피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그 손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것처럼.

지훈은 천천히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노인은 지훈을 봤다. 눈이 만났다. 말은 없었다. 노인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그 주름 사이에는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일기장에서 본 그 감정.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

"혹시... 혼자세요?"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 하나에도 무게가 있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한 번에 인정하는 것처럼.

"저도요."

지훈이 덧붙였다.

둘 사이에는 다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피아노 곡이 흘렀다. 누군가의 신발이 바닥을 스쳤다. 계산대에서 종이 울렸다. 세상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이 커피를 마셨다. 지훈도 그렇게 했다. 입술만 닿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자신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혹은 처음부터 떨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20분이 지났을 때,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지훈의 팔 위에 놓았다. 그리고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말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고마워요."

지훈이 속삭였다.

노인은 손을 떼었다. 천천히 일어섰다. 의자를 민 소리가 났다. 지훈은 노인을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마지막 계단에서 노인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인은 사라졌다.

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의자를 바라봤다. 노인이 앉던 그 자리. 테이블 위에는 흔적이 없었다. 커피잔도 가져갔다. 하지만 지훈의 팔에는 뭔가가 남아있었다. 그 손의 감촉. 그 따뜻함.

지훈은 천천히 일어났다. 계단을 올라가 강남역 지하 1층으로 나왔다. 혹시 노인이 아직 근처에 있을까 싶어 사방을 둘러봤다. 지하철 역사의 승강장. 승객들의 흐름. 하지만 그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팔 위에 남은 그 따뜻함이 실재한다는 것만 확실했다. 10년 전 일기에 나온 그 사람이 정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했는지, 아니면 지훈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손이 남긴 것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처음에는 자신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뺨이 젖어있었다. 한두 줄이 아니었다. 흐르는 것이었다. 지훈은 손으로 얼굴을 덮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공개적으로. 강남역 지하에서.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자가 휴지 박스를 내밀었다. 남자는 외면했다. 한 명은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했다. 지훈은 알았다. 이것이 약함이라고. 이것이 실패라고. 이것이 로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울음을 터뜨렸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순간, 기억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이 자신의 등을 치는 느낌. "약해 빠졌다"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가 되었다. 지훈의 손가락이 가슴을 찌르는 느낌. 자신이 자신을 치고 있었다. 6년간 계속.

로펌 첫날. 선배가 자신의 보고서를 던졌다. "이 정도 수준으로 여기 왔어?" 웃음이 터졌다. 모두의 웃음. 지훈은 웃음으로 응했다. 감정은 숨겼다. 그 이후로 계속 숨겼다.

박현준의 얼굴. 박준호의 눈물. 이수진의 빈 의자. 최소은의 불안한 표정. 그리고 수천, 수만 개의 다른 순간들. 자신이 외면했던 모든 얼굴들이 한 번에 떠올랐다.

어디서부터 이 감정이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흐르는 것이 눈물이 아니라 누적된 6년의 무언가라는 것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 고통. 형태를 알 수 없는 외로움. 그 모든 것이 한 번에 빠져나가고 있었다.

15분이 지났을 때, 지훈은 일어났다.

손으로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강남역 지하를 빠져나갔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를 봤다. 하늘이 보였다. 햇빛이 얼굴을 스쳤다.

강남역 대로 한가운데. 차들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스쳐갔다. 아무도 지훈을 보지 않았다. 지훈도 아무도 보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일기장 속 이수진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김영미였다.

"한지훈, 지금 어디야? 회의 시간이 지났어. 정태호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어."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을 내렸다. 다시 울렸다. 내렸다. 다시 울렸다.

강남역 대로에 서 있는 지훈. 차들의 경적음. 사람들의 발걸음. 그 모든 것이 자신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6년간 자신도 그 속도에 맞춰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속도는 달랐다. 느렸다. 혹은 처음으로 자신의 속도를 찾고 있었다.

지훈은 걸었다. 롯데빌딩 방향으로. 발걸음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6년간의 습관이 몸을 이끌고 있었다. 32층으로. 회의실로.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눈이 부어있었다. 눈물의 자국이 선명했다. 셔츠에는 얼룩이 있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32층에 도착했다.

회의실 앞. 창을 통해 안이 보였다. 정태호가 앉아있었다. 옆에 김영미. 그 옆에 다른 파트너들.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지훈을 기다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열렸다를 반복하는 사이, 지훈은 자신의 선택을 명확히 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자신은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이다. 강남역 지하의 노인처럼. 누군가와 함께 이 시간을 견디겠다는 선택을.

문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지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정태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정태호의 눈에는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지훈을 재단하는 눈빛. 정확하게 약점을 찾아내는 눈빛. 그 아래, 두려움이 있었다.

"한지훈. 최근 당신의 업무 성과가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정태호가 말했다. 그 음성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뭔가 개인적인 문제가 있나요?"

모든 눈이 지훈을 향했다. 김영미의 눈. 파트너들의 눈. 그들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확한 답을. 합리적인 설명을.

지훈은 입을 열었다.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있었다.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건강상의 문제입니다. 곧 회복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정상화하겠습니다." 6년간 해온 것처럼. 거짓으로. 완벽하게.

하지만 지훈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일기장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누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나를 이해하면 된다. 이 자리에서 계속 죽을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다. 둘 다 선택이다. 다만 선택할 때 내 감정을 함께 가져가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저는..."

지훈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정태호가 눈을 좁혔다.

"감정?"

"네. 강남역 지하에서 한 노인을 만났어요. 그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었어요. 10년 전 일기에 나온 그 손처럼. 저는 그 손을 봤을 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지훈이 말하는 동안, 정태호의 얼굴이 변했다. 눈빛이 흔들렸다. 지훈을 향한 판단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질문이 떠오른 것 같았다.

김영미가 일어섰다.

"한지훈,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것은 환상입니다."

김영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이 회사에서는 그런 감정이 생존을 방해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훈은 김영미를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가 있었다. 지훈이 변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이 다른 누군가도 변하게 할 수도 있다는 공포.

"알고 있습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환상이, 저를 살리고 있습니다."

정태호가 책상을 쳤다. 탁.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훈은 그것을 봤다. 정태호도 본인의 손을 본 것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이.

정태호는 눈을 감았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입니다."

정태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이전의 냉정함과는 달랐다. 피로함이 섞여있었다.

"당신의 최근 성과 저하, 무단 결근, 그리고 지금의 태도. 이것들을 종합하면 당신은 더 이상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늘 밤 당신의 모든 업무를 정리하고, 내일 오전 9시에 인사팀에 보고하세요. 그때까지 32층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지훈의 몸이 굳었다.

퇴사. 그것이 정태호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정태호는 지훈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 떨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일기장을 제출하세요."

정태호가 추가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개인 기록이라 하더라도, 회사 내에서 발견된 물건은 규정에 따라 회사에 보관되어야 합니다."

지훈은 일기장을 만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손이 저절로 그것을 누르고 있었다.

"거부하겠습니다."

지훈이 말했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기록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과 감정이 담긴 것입니다. 회사 자산이 될 수 없습니다."

정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가세요."

정태호가 마침내 말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릴 듯 말 듯했다.

지훈은 일어섰다.

회의실을 나갔다. 32층의 복도. 자신의 책상. 6년간 앉아있던 그 자리. 컴퓨터를 끄고, 서랍을 비웠다.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대학 시절 자신. 웃고 있었다. 지훈은 그 사진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3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지훈은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전 페이지.

*'강남역 지하에서 만난 노인. 그의 손이 떨린다. 나도 이제 안다. 그 떨림이 무엇인지.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떨림. 두려움과 희망이 섞인 그 떨림. 언젠가 누군가가 이 기록을 읽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도 견딜 수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당신을 본다고.'*

지훈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1층 로비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갔다. 강남의 밤. 차들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갔다.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박현준이었다.

지훈은 받았다.

"현준이..."

"지훈이, 나... 김영미가 일기장을 박스에 담고 있는 거 봤어. 그 일기장이 뭔지 몰랐는데, 너한테 물어보려다가..."

박현준이 말을 멈췄다.

"내가 그 일기장을 펼쳤어."

박현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훈은 수화기를 꼭 쥐었다.

"김영미가 일기장을 박스에 담으려고 할 때, 나도 몰래 그걸 봤어. 그리고... 펼쳤어.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펼쳤어."

박현준의 목소리에 결연함이 섞여있었다.

"내 부분이 있었어. 누군가 나를 봤다고 썼어.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내 불안함도, 내 눈물도 누군가는 봤다고."

박현준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말이... 내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몰랐어. 지훈아, 나도 누군가와 시간을 견디고 싶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면서."

지훈은 박현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기장을 읽으면서 박현준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 순간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상상했다. 페이지를 넘기며 자신의 이름을 찾는 손가락의 떨림. 그 글귀를 읽을 때의 눈물. 그 모든 것이 박현준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현준아, 지금 어디야?"

"을지로야. 마음의 자국 도서관 근처에 있어. 지훈이, 너는?"

밤 11시 15분. 을지로의 마음의 자국 도서관 앞.

지훈은 멈췄다.

그리고 이해했다.

이것이 이수진의 선택이었다. 10년 전 일기를 남긴 이유. 을지로의 작은 도서관에 자신을 남긴 이유. 완벽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계속 기록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는 계속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

지훈이 그 누군가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도.

"현준아, 거기 있어. 내가 지금 가."

지훈은 택시를 탔다.

도서관의 문이 열려있었다. 이수진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박현준은 입구 계단에 앉아 있었다. 지훈이 들어가려는 순간, 이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수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알아챔의 미소. 지훈이 왔다는 것을, 그리고 박현준도 왔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필연이었다는 것을 아는 미소.

"왔네."

이수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다.

"일기장을 읽었어?"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현준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그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 전까지 읽었다.

이수진이 책상 위에 일기장을 놓았다. 마지막 페이지가 아직 비어있었다.

"이제 너희 차례야."

이수진이 펜을 건넸다.

"누군가는 계속 기록해야 해. 누군가는 계속 느껴야 해. 그리고 그것이 다음 누군가를 살린다는 걸 알면서."

박현준이 천천히 펜을 받아들였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희망이 섞인 그 떨림.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떨림.

지훈은 박현준의 옆에 앉았다. 강남역 지하의 노인처럼, 그들은 침묵 속에서 함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박현준이 펜을 들었다.

첫 글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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